♠조팝나무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흰 꽃이 꼭 튀겨 놓은 좁쌀 같은 조팝나무.
부잣집 울타리 밑보다는 밭 두렁, 외진 경사면,
나대지를 자기 땅으로 알고 자라지만, 그 사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무 본연의 모습은 참 화려하고 아름답다.
색 중에 흰색이 가장 화려하다고 했던가.
온갖 천연색의 꽃들이 만발하는 오월, 조팝나무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오히려 그 꽃이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백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창 꽃이 만발할 때의 조팝나무를 보면 가지에 붙은 하얀 꽃잎이 마치
한겨울의 눈꽃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원예가들 사이에서는 설류화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모든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봄 한가운데서 눈꽃을 피우고 있는 조팝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지나 버린 과거라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눈꽃의 처연한 느낌 때문일까.
조팝나무 아래서 내 눈을 스쳐 가는 그 과거는 달콤하고 아름답기 보다
대부분 아프고 슬픈 모습들이다.
젊은 시절의 방황했던 모습과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인생 일부와 바꾸고서라도 물리고 싶은 기억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랴.
어느 누구라도 웬만큼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아픈 기억들은 남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과거 속 기억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몸에 난 상처는 없어져도 마음에 난 상처는 아무리 작아도 없어지지 않는 법.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쓰고, 스스로 버렸다고 자위해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되어 끝까지 살아 남는 것이 과거가 아닐까 싶다.
그와 마찬가지. 내게 있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조팝나무 역시
참 얄궂은 생명력을 지녔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어찌나 질기게 살아 남는지,
옛날에 밭 두렁에 잘못 자리잡은 조팝나무를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자리를 잡아 골칫거리였단다.
밭 주인이 조팝나무를 잡고 씨름을 하는 모양새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밭 주인 닮아 저렇게 끈질기다"고 농을 걸기도 했다나.
아무리 뽑아도 없어지지 않는 끈질긴 조팝나무처럼,
지우려고 할수록 더 선명하게 떠올라 현재의 나를 옭아매는 과거의 기억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조팝나무를 볼 때면 예의 그 아름답고 화사한 모습을
즐기지 못하고 왠지 모를 씁쓸함에 시선을 돌리곤 했다…
과거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러나 그 짐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남은 삶이 너무나 고달프다고.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사이,
기억 속의 과거는 부메랑이 되어 어떤 형태로든 지금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왜 아니겠는가.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 현실은 과거라는 덫에 갇혀 버리는 것을.
과거의 삶이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아파하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보듬어 안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천덕꾸러기 취급할 기억조차 우리들 각자가 만든 삶의 흔적이 아니던가.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안에 미련이 남을수록 현실의 내가 망가져 간다는 것이다.
아니 앞으로의 남은 삶까지 망치는 독이 될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애써 떨쳐 내려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오히려 평안함을 되찾고 풀리지 않던 생의
매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 우종영>
Phil Coulter - Mary From Dungl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