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이러한 한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1911년 신해혁명 및 1912년 중화민국의 성립,
1921년의 공산당 창당과 국민당 정부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중국에 계속되는 정치
적 불안, 대홍수, 기근, 재난 등으로 인해 계속 증가하였으며, 중국 내에서 만주로
이동한 인구수는 만주의 3성인 봉천성(奉天省), 길림성(吉林省), 흑룡성(黑龍省)의
경우 1907년에 1천 6백 70만 명이었던 인구가 10년 후인 1917년에는 2천 1백만 명으
로 팽창하여 26%라는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였다(고승제 1972: 139).
조선족과 중국인이 이주한 이후,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만주족 및 한족)과 조선인
사이에 경제적 분업이 이루어졌다. 즉 조선인의 경우 대부분이 소작인으로서 농업
에 종사하였고, 중국인은 이주해 온 한족이라고 하더라도 청국의 정책적인 혜택으
로 지주, 산주(山主)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외국인인 조선인 집단보다 경제적 안정
을 누렸다. 그 결과 중국인 대 조선인이라는 종족 집단에 따른 계층의 구분이 조성
되었다(고승제 1972: 140). 또한 1930년대 이후로는 한족과 이주 조선인의 급증으
로 토지를 둘러싼 소작인간의 소작지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일부 자작농의 몰락
으로 말미암아 농민층의 분화가 가속화되었다(이형찬 1988: 32~33). 중국인과 조선
인 사이의 종족 집단 구분이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한 가지는, 조선인이 처음부터 조선인 부락의 형태로 이주되었고,
그에 따라 중국인과는 지속적으로 구별되는 생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 다른 한 가지는, 일제는 중국인과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방책으로
서, 처음부터 일본인을 1등 국민, 조선인을 2등 국민, 중국인을 3등 국민으로 각기
다른 종족 집단으로서 분류했다는 것이다.
만주국 당시,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사이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았
다. 피지배계층이었던 조선인 및 중국인 소작농들은 대부분 중국인 지주의 토지를
얻어 소작하였지만, 7 : 3 비율의 엄청난 세금은 사실상 거의 일본군에게 납부되었
으며, 조세를 독촉하러 오는 일본군의 앞잡이는 대개 '2등 국민'인 조선인이었다.
더욱이 일제가 조선인에게만 보다 수확량이 높은 수전(水田)의 기회를 차별적으로
부여했기 때문에, 같은 소작농으로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드러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45년 2차 대전이 종료되고 15년 간 통치했던 일제가
마을에서 떠남과 동시에 조선인들이 맞이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인들에 의
한 보복이었다. 일제 지배 당시 3등 국민으로서 조선 농민들의 멸시를 받았던 중국
농민들의 분노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였으며, 무정부적인 혼란이 벌어졌
다. 더욱이 한전(旱田)과 뒤떨어진 생산력으로 인해 조선 농민들보다 생활 수준이
뒤떨어졌던 중국 농민들은 조선인 가구를 대상으로 약탈과 방화, 살인을 행하였다.
이러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결국 조선인들은 더욱더 밀집해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
성하게 되었는데, 외지에 살던 가구들은 큰길가에 위치한 한 두 개의 마을로 집중하
기 시작하였다.
"되놈들이 조선족들 벼들 다 베어가고 그랬다우. 그래서 와 이리 베냐 하면 우리
야다 그러는데 뭐. 그래 놔뚸 삐지. 그래가지고 되놈들이 다 베어가고, 그 다음에
이제 도둑놈들이 이제 또 오니까, 다 몽둥이 들고 화포 들고, 삽 들고 다 뚜들겨
패 버리고 다 가져가지 뭐. 도둑놈들이 차 가지고 와 가지고는 사람들 다 천지 다
난장해 가지고 모아 가지고는 모조리 집안에 있는 거 다 가져가고, 이불, 그릇, 조
선 사람들은 꽃 이불도 다 좋은 거 있지 않아, 차에 다 싣고 가고, 좋은 그릇 다 가
져가고, 꼼짝하면 총 들고 죽인다고 그러는데 뭐. 움직이면 총을 쏴 버리는데." (김
씨: 남, 60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중국 공산당은 1953년에 제1차 전국인민대표회
의에 참석할 각 민족대표를 선거하기 위하여 민족식별사업을 벌였다. 당시 중국에
는 단독적인 민족단위로 제출된 것이 무려 400여 종이나 되었으며 운남성(雲南省)
만 하더라도 240여 종이 넘었다. 국가에서는 대규모적인 민족식별․고찰 사업을 조
직하고 수백 개에 달하는 혈연공동체에 대하여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였다. 국가에서
는 공통의 지역, 공통의 언어와 문자, 공통의 경제생활, 공통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의 심리소질 등 네 가지 특성을 기본 표준으로 하고 또 그들의 역사적 발전 등
의 실정도 고려하며 상술한 조건에 부합되면 인구의 다소와 거주지역의 다소, 발전
상의 정도를 불문하고 일률적으로 한 개 민족으로 확정하였다(김병호 1993: 15). 그
리고 그 결과 총 55개의 민족이 확정되었다(현재는 56개).
이러한 민족식별작업은 두 가지의 민족구성작업과 병행되었다. 첫째, 1951년 정무원
은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는 문자를 만들어주고 문자를 완비하지 못한 민족에게는
점차 문자를 충실히 하도록 도와준다」고 결정함으로써, 각 민족에게 고유의 언어
를 부여하였다. 1956년부터 따이, 징퍼, 라후족을 도와 문자를 만들어 주었고 위글
족과 까자흐족의 문자를 개혁하였으며, 쫭, 부이, 이, 묘, 리, 나시, 리수, 하니,
와, 뚱 등 10개 민족에게 14개의 라틴화 문자를 만들어주었다(김병호 1993: 27). 둘
째, 1952년 중앙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 실시강요」를 제정․반
포하고 민족구역자치제를 전국에다 전면적으로 일반화함으로써 각 민족에게 그들만
의 지역적 경계를 부여하였다. 당시부터 1993년까지 중국에 설치된 민족구역 자치지
방은 총 159개에 이르는데, 그 중 자치구가 5개, 자치주가 30개, 자치현이 124개이
며(앞의 책: 20), 이로써 각 민족은 스스로를 구별짓는 근거로서 지역성을 갖게 되
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시계추처럼 좌파와 우파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중국 공산
당의 정책 변화 속에서, 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로서 조선족은 '민족'에 관한 국가
의 담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왔다. 1950년대 초와 같이 중국 공산당이 비교적
소수 민족에 대해 호의적인 시기 동안에는, 공산당은 조선족의 자치와 권익을 적극
존중해주었다. 예컨대 조선어의 통용이 권장되었는가 하면 조선족들을 위한 민족 학
교가 증설되었고, 조선어로 된 잡지 발간이 이루어졌다(Lee 1986: 69~73). 그러나
1957년 이후 중국 공산당은 반우파운동, 인민공사운동, 나아가 1966년에는 문화대혁
명을 전개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해서 이전의 공존과 융합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동
화를 강요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중국 인민 전체의 통합과 결속이 강조되었으
며, 소수 민족의 자율성은 중국 전체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으로서 부정되었고, 각
학교에서 조선어의 학습 시간은 축소되었으며 조선족 출신의 고위 간부들은 비판되
거나 제거되었다.
중국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혹은 중국 56개 중 하나의 '민족'으로 그들만의 독특
한 종족성을 조선족이 부여받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담론 속
에서였다. 즉 일본 정부는 가난한 소작농으로서 단지 생계를 보장받기 위해 멀리 떠
나온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편으로는 이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독려하고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자국의 경제적․문화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주변 집단과 '다르다'는 규정을 법적․정치적으로 마련함으로써 조선인들
을 고립시켰다. 또한 중국 정부는 조선족이 공산주의 혁명 당시 높은 참여를 보였다
는 것을 이유로 이들에게 여타 소수 민족에 비해 우수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이후
극심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사실상 조선족에게 일관되지 않은 정책을 펴 왔으며,
그러한 정책들은 반복적으로 한족과의 분리를 강화시킴으로써 조선족을 중국 중심으
로부터 주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국가의 공식적 담론은 강력한 '힘'으로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 형성에 개입
했다. 그러나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국가의 '구획하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기화하는 과정,
즉 '인정'과 '동의'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일제가 일본인을 1등 국
민, 조선인을 2등 국민, 중국인을 3등 국민으로 분류하여 차등적으로 대우했던 것
을 마을 주민들은 현재까지 타민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을 드러내주는 '증거'로
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중국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조선족의 혁명적 자
질을 높이 쳐주었던 것 또한 여타 민족과 다른 조선족만의 우수성으로 인식하고 있
다. 더욱이 중국 정부의 민족 정책에 의해 유지 혹은 강조되었던 언어, 가무(歌
舞), 체육 등의 특질들은 이들에게 조선족만의 고유성으로 강화되었다. 마을 주민들
에게 이러한 것들은, 중국 조선족이 왜 여타 민족과 구별되는 독특한 집단인가 하
는 종족 정체성의 중심을 형성한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이란 결코 국가의 종
족 정치학과 분리되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종족 정
체성은 국가가 부여한 종족성의 경계 내에서, 그러나 그 중에서 주민들이 선택
한 '증류된'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여기서 '증류된' 경험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다
양한 과거 경험들 속에서 특정의 '유리(有利)한' 것만이 조선족 종족 정체성의 재료
로서 선별된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선별된 사실조차도 당시의 특정 사회구
조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여기
에 당파적인 국가 정책이 중립적이고 투명한 객관적 사실로서, 다시 말해 종족 정체
성의 '원초성'으로 전치되는 과정이 개입된다. 정책이 주민들의 삶 속으로 침투하
고 일상화됨에 따라, 국가가 규정한 내용은 주민들의 '증류된' 경험으로서 순수성
을 획득하게 되고, 일단 종족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진 이후부터는 세대에 걸쳐 반
복․전수됨으로써 점점 더 객관적인 사실로서 고정된다. 출신지의 차이 및 지역적
조건에 따른 생활 양식의 차이가 조선족과 여타 중국 민족들 간에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지만, 중국 내에서 조선족이 타 집단과 경계짓도록 만든 '특정' 내용의 선별
및 그와 관련된 종족 정체성의 문제는 국가 권력에 의해 규정되고 객관화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이며, 일단 객관성을 획득한 이후에는 세대에 걸쳐 재생산됨
에 따라 '원초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종족 정체성이 원초적인 객관적 실
체의 투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사회의 맥락에서 형성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구체적으로 중국에
서의 이들의 삶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다음 장에서는, 중국 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에 급속하게 등장하고 있는 한국 취업 현상을 중심으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이 중국 사회 내 이들의 삶의 선택에 어떠한 '힘'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달리 다음 장의 논의
는, 1990년대 후반 중국의 한 농촌 마을이라는 한정적인 시공간 내에서 특히 주변
한족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조선족 종족 정체성에 대한 일
종의 사례 연구로서 제시될 수 있다.
3.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과 '한국 바람'
1990년대 들어와서 중국 조선족이 점차 농사일을 기피하고 있으며 농사를 짓더라도
대부분 외부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이른
바 '한국 바람'의 영향 때문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즉 중국 개방 이후, 친척 방문
의 형태로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마을 내에서 가족 노동력만으로 농사
를 짓기란 어려운 실정이며, 또한 일년 내내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국가의 저곡가
(低穀價) 정책으로 인해 농사로는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농사일은 점
차 마을 주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한편, 개방 이후 개인 사업이 가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은 개인 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릴 만한 초기 투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개인 사업을 굳이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주민들은 한국 취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자녀의 교육비
및 결혼 비용 마련을 들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출산율의 감소로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조선족 학교는 기존 학급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기 때문
에,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도시로 유학을 내보낼 수밖
에 없다. 또한 개방 이후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속속 들어오면서 농촌 처녀들이 도
시로 취업해감에 따라 농촌 총각들은 결혼할 대상을 구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미혼의 아들을 가진 부모들은 처녀들을 데리고 올만큼의 충분한 결혼 자금이 필요하
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 방문 이후 갑작스럽게 부유해진 일부 사람들은 남아있
는 마을 주민들에게 상대적인 빈곤감을 유발하였고, 빈부 격차를 극복하려는 노력
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 취업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슷한 농촌 경제 조건 속에서도 한족 농민들은 마을 안에서 나름의 대안을
찾고 있다. 같은 농민으로서 한족 주민들도 낮은 쌀값으로 인해 생계 벌이에 어려움
을 겪고 있다. 더군다나 한족은 대부분 수전(水田)이 아니라 한전(旱田)을 경작하
기 때문에 토지 단위 당 수입은 조선족보다 더 낮다. 그렇지만 한족들은 조선족이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임대하여 더 많은 농사를 짓거나, 조선족 농가에 품을 팔면
서 농사 수입을 높이고자 한다. 또한 한족은 농사일 외에도, 나이 든 사람들은 마당
에 심은 채소를 가져다가 길 가 좌판을 벌이고, 젊은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소규모
회사와 상점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푼돈을 모은다. 이렇게 해도 한 가구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한족들은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개인 사업
의 꿈을 부풀려간다. 농촌 마을에 사는 한족들은 이렇게 돈을 모아 궁극적으로 마
을 안에 자기 소유의 가게를 열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조선족 농민은 한족 농민
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 것일까? 그 해답은 먼저 소수 민족으로서 낮은 조선족의 사
회적 지위로부터 찾을 수 있다. 한족이 전체 인구 중 92%를 차지하는 중국 사회에
서 당연히 한족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모든 민족은 민족어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
도 한어(漢語)를 사용해야 하며, 국민의 대다수가 한족인 데다가 사회 각 분야의 책
임자들 대부분이 한족인 만큼 국가 정책도 한족 중심일 수밖에 없다. 개인 역시 어
느 정도 사회적․경제적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족 문화에 적응하고 한족
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가능하다. 인맥은 개방 이후 개인 사업이 자유로와 지면
서 더욱 중요해졌다. 한족 조선족 할 것 없이, 친척․동창․민족 관계는 이들이 성
공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숫자
상․권력상의 열세로 인해 한족만큼 풍부한 인맥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따라
서 이들에게 개인 사업을 시도하는 것은 한족에 비해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예컨대, 조선족은 음식점을 열거나 장사를 하더라도 한족만큼 고객을
확보하기가 어려우며, 행정 기관 간부들의 보살핌에 의존하기도 힘들다. 요컨대, 조
선족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에 비해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개인 사업을 선택
하기가 어렵다.
한편, 소수 민족으로서 갖는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과 함께, 조선족이 굳이 한족이
택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 스스로를 한
족과 구별짓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조선족이 갖고 있는 종족 정체성과 깊
이 연관되어 있다.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은 우선 한족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데 대한 자부심을 바탕
으로 하고 있다. 우월성은 그들 스스로가 교육수준에 의해 증명된다고 하는 두뇌의
우수성, 농업 및 기타 경제생활의 상대적 윤택으로 뒷받침되는 능력과 기술의 우수
성, 그리고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서 근면성, 청결성, 교육열 등에 있어서의
그들 자신이 중국인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자부심 등으로 표현된다. 또한 고유한 문
화내용과 의식주 생활에서의 습관의 차원에서 현저한 차이를 발견한다. 이러한 차이
는 단순히 서로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중국인의 것들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고 주
장한다(김광억 1984: 52~53)
조선족이 한족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과 태도 등은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에 대
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즉 자신들이 한족보다 우수한 민족
이라고 믿고 싶어하면서도, 중국 사회의 지배민족은 한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체념
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태도는 조선족 사람들로 하여금, 중국이라
는 나라 전체의 정치와 경제를 운용하는 권한을 놓고서 한족과 경쟁할 수는 없는 처
지인 대신, 개인적 수준이나 촌락 공동체의 수준에서는 한족들과의 경쟁에서 이김으
로써 자신들이 한족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민족임을 강조해 보려는 경향을 배태시키
고 있는 듯하다(황익주 1999: 275)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한족에 대해 스스로를 구별짓는 태도 및 감정, 혹
은 이들의 종족 정체성은 일종의 '우월감'의 형태로 드러난다. 조선족 주민들은 모
두 한족과 그들이 확연히 구분되는 서로 다른 '종족 집단'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데, 이때 한족은 집단 내부의 차이들이 완전히 제거된, 조선족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대립물이다. 따라서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정체성의 내용을
살펴보면, 추상화된 몇 개의 이항 대립으로 간단하게 요약되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단순한 이항 대립의 근저에는 언제나 주민들에 의해 선별된 구체적이
고도 물질적인 경험이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첫째, 한족은 '더럽다'고 규정되며 반대로 조선족은 '깨끗하다'고 이야기된다. 마
을 주민들은 일상적으로 한족의 더러움에 대해 언급한다. 조선족이 바라보는 한족
은 집안을 걸레로 닦는 사람이 없고, 행주는 사용하지 않으며, 방은 온통 기름과 먼
지로 뒤덮여 있는 '더러운 민족'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조선족은 한족 며느
리를 얻기를 매우 꺼리며, 한족을 집안에 초대하고자 하지 않고, 집을 세 주더라도
한족에게 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한족의 옷차림과 육체는 '더럽기' 때문
에 경멸되고, 조선족 중에서 '더러운' 사람은 '되놈 같다'고 일컬어진다.
둘째, 한족이 '무식한' 존재인 반면, 조선족은 '교양 있다'고 규정된다. 마을 주민
들에게 한족은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어리석으며 분별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에 비해 조선족은 예절바르고 사리 분별
이 뛰어나며, 누구보다 자식 교육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인식
에 기반하여, 조선족 주민들은 '만일 조선족이라면'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고 자식
교육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연장자에 대해 예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규
범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셋째, 한족은 '게으른' 반면 조선족은 '부지런하다'고 규정된다. 이것은 집체 시
절, 한족 대대(大隊)에 비해 조선족 대대가 더 많은 수확량을 내었다는 경험에 근거
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농사에 필요한 일꾼을 구할 때나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고용할 때면 한족이 상대적으로 덜 선호되며, 거꾸로 조선족은 같은 일에
대해 더 높은 임금을 받고자 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넷째, 한족은 돈을 '아끼는' 사람인 반면, 조선족은 '베푸는' 사람이라고 여겨진
다. 한족은 이웃과 나누어 먹을 줄도 모르는 구두쇠이며, 돈을 더 모으기 위해서는
거짓으로 구걸까지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다. 반면 조선족은 설령 집안에 돈이 많지
않더라도 친구를 위해서는 아까울 것이 없으며, 빈곤해도 나누어 먹는 즐거움을 안
다. 따라서 주민들은 만일 조선족 중 누군가가 마당에 있는 채소를 시장에 나가 파
는 모습을 보면 '쩨쩨하다'고 평가하며, 외지에서 큰돈을 벌어왔는데도 술자리를 만
들지 않거나 환갑이나 생일 등의 가족 행사에 음식을 푸짐하게 내지 않는 사람들
은 '되놈같이 지독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조선족이 한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인식은 마을 주민들이 한족과 같은 대안
을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즉 한족은 '어리석고 더러우며 쩨
쩨한' 종족이기 때문에, 단지 몇 푼을 더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도와주
거나 음식점에서 일하며, 길거리에서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족
은 '깨끗하고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차
라리 빚을 지고 살지언정 푼돈벌이 장사를 하거나 구질구질한 종업원 일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집에 여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웃과 놀고 나누어 먹는 일에서 빠질 수
가 없으며, 자식 교육에 대해서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이 이와 같은 종족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이들이 중국 사회의 맥락
속에서 부여받은 낮은 사회적 지위 및 이를 수행한 국가의 종족 정치학 속에서 파악
되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은 성립 직후부터 대외적으로 소수 민족에게 차별을 행하
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구축해왔다고 주장해왔다. 그 예로서 중국의 엄격한 산아 제
한 정책 속에서도 소수 민족에게는 2명 이상의 자식을 낳을 수 있게 해 준다든지,
학교에서 민족어를 가르칠 수 있게 한다든지, 혹은 대학 입학 시에 소수 민족의 할
당을 따로 배분해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강조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민족 평등 정책
에 관해서는 조선족 주민들 역시 매우 높은 정도로 동의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
은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 차별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차별 없어. 중국이 민
족 정책은 정말 잘 하지. 로씨야(러시아)에 갔으면 우리는 이만큼 살지도 못해. 중
국 공산당이 소수 민족은 숫자가 적으니까 하나라도 더 줘야 한다고 해서 이만큼이
라도 사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과연 주민들의 말처럼, 중국의 조선족은 소
수 민족으로서 차별을 경험하지 않는 것일까? 다음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한 사례이
다.
어느 추수철 밤, 정씨(남, 30대)는 마을 논 어귀를 지키고 있었다. 해마다 추수철
이면 마을에서는 볏단 도둑을 막기 위해 청년들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는데, 그 날
은 정씨 차례였던 것이다. 망을 보던 중 정씨는 한족 한 사람이 차에 볏단을 가득
싣고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고, 그 볏단이 조선족의 볏단인지 살펴보기 위해 잠깐 멈
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운전하고 있던 한족은 차를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차를 막
고 선 정씨를 치고 달아났다. 정씨는 이 일로 인해 다리를 심하게 다쳐 한동안 병원
에 입원하였고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다.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고 또 달아난 한족
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씨의 가족들은 그 한족으로부터 배상을 받고자
하였다. 정씨 가족은 대대 간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간부들은 지역 파출소에 사
건의 자초지종을 전하며 처리를 요구하였다. 결국 가해자인 한족이 불려나왔지만,
그는 정씨가 술에 취해있었다면서 절대로 배상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출
소에서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라며 손을 떼었다. 억울한 가족들은 결국 상급
에 고소를 할까 생각을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두 "상급 간부 중에 조선족이 하
나도 없는데 해봤자 괜히 돈만 든다"면서 말렸고, 결국 아무런 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하고 끝났다.
이 하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족 주민들은 일상 생활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의 '불이익'을 받고 있다. 의견을 제출할 다른 통로가 없는 농촌 주민들에게 간부
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인데, 대부분의 간부가 한족인 상황 속에서 한족과 조선족
이 공적인 공간에서 맞부딪치게 되면 언제나 조선족은 차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선족 농민이 한족 농민의 대안을 똑같이 선택할 수 없
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 공식적 담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주민들은 중
국 '국가 정책' 수준에서의 평등이 '일상 영역' 수준에서는 관철되지 않는 이와 같
은 상황을 '모순'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별개(別個)'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차별의 구조가 감추어지면서 동시에 재생산되는―맥락 속에, 조선족
종족 정체성의 역할이 놓여져 있다. 즉 조선족은 한편으로 '한족'에 대한 우월함의
형태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중성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한족과 조선족이 위계에 따라 배열될 수 없는 '원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쟁으로부터 벗어난다. 결국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주민들이 한족과의 경쟁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
며, 동시에 '민족 평등 정책'으로 드러나는 국가의 종족 정치학을 지지해주는 역할
을 수행한다.
결론적으로, 조선족 주민들은 소수 민족으로 갖는 객관적 조건 뿐 아니라 스스로를
한족과 구별하여 만든 종족 정체성으로 인해, 비슷한 농촌 조건 속에서도 한족과 같
은 방식의 대안을 선택하기가 매우 어렵다. 마을 주민 중에는 분명히 한족처럼 품삯
을 위한 노동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들은 마을 주
민 대다수에게 '잘한 일'로 보여지기보다는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저런 일을 하
나. 나 같으면 더러워서 못한다"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가 일쑤다. 이러한 경
향은 개방 이후 한국 취업이 가능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한국 취업은 한족과의 직
접적인 맞대결을 피하면서 한족을 앞설 수 있는 천혜(天惠)의 기회로 조선족에게 나
타난다. 이들은 한국에서 맡게 될 역할이 중국보다 낫지 않은 '최하층 지위'임을 알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것이 일상 생활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경
험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족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그들만의 독
점적 자원이라는 점에서 한국 취업을 가장 선호하게 된다. 더군다나 한국 취업은,
절차의 까다로움과 초기에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른 어떠한 것보다도 가장 빨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이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 조선족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자신과 '동일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문
화적으로 편안한 공간이다. 따라서 조선족 마을마다 '한국 바람'이 거세게 밀어닥치
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한국으로 입국한 이후 과연 자신의 경제적․문화적 기대를 충족
시키게 되는가? 다음 장에서는 1990년대 한국 사회로 시선을 돌려, 한국의 정치경
제 맥락 속에서 조선족이 놓여있는 위치를 점검해보고, 이것이 한국 국가의 종족 정
치학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으며, 또한 조선족의 일상 생활 및 종족 정체성에는 어떠
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4. 한국에서의 조선족: 정치경제, 국가, 종족성 간의 상호 관계
조선족이 한국에 올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일로, 중국과 한국의 정
치 경제적 상황 및 전지구적인 노동 재편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1978년 12월 제11
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기점으로 개혁 개방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에 문호
를 열었고, 한국 또한 대외 시장 확보의 차원에서 중국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
였다. 1980년대 후반, 문호 개방의 상징적인 절차로서 중국 및 한국 정부는 조선족
의 친척 방문을 기획하였는데, 처음 의도는 한국에 친척이 남아있는 60세 이상 노인
들에게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지만, 이들의 방문이 이
후 한약재 판매 및 불법 취업과 연결되면서 한국 방문은 점차 농촌 생활의 빈궁함
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조선족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992년 중
국과 한국 사이에 수교가 이루어지고 조선족이 법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은 조선족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꿈의 나라'로 등장하였다. 이
와 같은 조선족의 한국 유입은 1990년대 한국 상황에도 잘 부합되었다. 한국은 1980
년대 후반부터 중소기업체의 인력난을 맞아 1990년대부터는 정부의 주도 아래 동남
아를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추진해왔지만 각종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함
에 따라 '같은 민족'인 조선족의 유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던 것이
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민족적 동일성이 외국인 노동자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일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적어도 매스컴에서 보도된 사실들에 근거해보면, 조선
족의 유입이 그러한 예상을 만족시켰던 것 같지는 않다. 즉 선상 반란에서부터 작업
장 이탈, 폭력, 사기 결혼에 이르기까지 조선족과 관련된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끊
임없이 발생하였고, 심지어 중국에서 발생한 조선족 범죄 행위로부터 조선족은 한국
인에 대해 근본적인 적대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죄를 양산해내는 '원초
적'인 존재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조선족의 경우에도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
고' 주어지는 차별적 임금과 처우 조건, 매스컴의 부정적 보도 등을 통해 너나할 것
없이 한국인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으며, 한국에 대한 친밀감보다는 도리어 가난한
중국 농촌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였다. 현재까지도 한국인과 조선족은 서로에 대
한 불신과 실망을 점차 높여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곳곳에서 '민족주의' 내
지 '한민족 공동체'라는 담론이 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한국인과 조선족
이 하나의 공동체로 합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왜 조선족과 한국인은 이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서로에게 가지게 된 것일
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조선족을 어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조선족에게 어떠한 종족성을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
다. 한국인과 조선족은 서로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한국 정치 경제 맥
락 속에서 조선족은 한국인과는 다른 종족 집단으로서 규정되는데, 이때 조선족에
게 부여되는 종족성은 다음 두 가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첫째, 출입국 관
리 체계에 의해 국적 상 중국인이라는 것. 둘째, 한국의 자본임노동 관계 내에서 저
임금․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최하층의 노동자 집단이라는 것.
조선족 한 개인이 한국으로의 입국을 결정하는 순간 그는 출입국 관리 체계의 장벽
을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조선족이 한
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자격 중에 하나를 자신이 만족시킬 수 있는
가를 확인해야 한다. 첫째는 친척 방문의 자격으로, 한국에 배우자 또는 8촌 이내
의 혈족 혹은 4촌 이내의 인척이 있으며 만 50세 이상의 나이여야 한다(이상은 1999
년 12월 3일에 개정된 사항으로, 그 이전에는 배우자 또는 6촌 이내의 혈족 혹은 4
촌 이내의 인척이 있으며 만 55세 이상이어야 했다). 둘째는 산업연수생의 자격으
로,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추천한 기업에서 제시하는 '적당한'
나이 및 기능 조건 외에도, 중국과 한국 정부 사이에 체결한 기본 절차 비용 및 비
자 비용 및 알선 업체가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을 마련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자격 중 한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일단 그는 합법적으로 한국으
로 입국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취업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조
선족은 한국 법에 의해 '외국인'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친척 방문의 경우에도
순수한 고국 방문 목적이 아니라 취업을 할 경우에는 불법으로 낙인찍히며, 산업연
수생일 경우에는 지정된 기업에서 한국인이 받는 임금의 1/2 내지 1/3(보통 25만원
~50만원)을 감내하며 머물다가 계약 조건에 따라 2년 안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이용하여 중국에서의 빈궁한 삶을 개선시킬 만큼의 '목돈'을 마련하고자 한국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결론 모두 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더욱이 산업연수
생으로 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중국 농촌에서 10년 동안 모아도 갚기 힘든 금액을 알
선업체에 내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에게 계약 조건을 파기하고 불법체
류자로서 보다 높은 임금의 취업 자리를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으로 나타난
다.
조선족의 '외국인' 규정은 1999년 8월 12일에 제정된「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
위에 관한 법률」(이하「재외동포법」)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법
은 재외동포의 대한민국 안에서의 법적 지위를 보장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법률에 따라 재외동포에 해당되는 사람은 대한민국 안에서 취업 및 기타 경제활동
과 부동산의 취득, 의료보험 등을 대한민국 국민과 차등 없이 보장받게 된다. 재외
동포는 2년 상한 기간의 체류 자격을 부여받지만, 만일 이 기간을 초과하여 국내에
계속 체류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연장허가를 신청할 수 있으며, 체류 기간 동안 출국
하였다가 재입국하는 경우에도 따로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이상 제1조, 제10조,
제11조, 제14조). 그러나 이 법률에 따르면(제2조 제2호 관련), 재외동포에 해당하
는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에 국외로 이주한 자 중 대한
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자와 그 직계비속' 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자 중 외국국적 취득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은 자와
그 직계비속'으로서, 실제로 조선족 및 러시아의 고려인을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족이 만일 국내에서 입국 이전에 계약한 업체 외의 다른 곳에 취업을 할 경우,
이들은 불법체류자로서 간주되고 언제든지 한국 정부의 추방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재외동포법」을 통해 한국 정부가 목적하는 바는 자국의 경제적 이득이다. 즉 조
선족을 '동포'가 아닌 '외국인'의 영역에 배치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끊임없이 불법
체류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조성하는데, 이를 통해 한국은 필요시에는 저
임금 노동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불필요시에는 언제든지 방출할 수 있는 자국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마련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조선족을 '외국인'으로 간주
함으로써 교육 및 양육의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료 보험 및 노
후 생활비용 또한 절약할 수 있다.
한국 법이 조선족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결국 이들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함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의 종족성은 저임금․단순 노동에 종사
하는 최하층의 노동자 집단으로 나타난다. 작업장 내에서 조선족은 한국인 고용주에
게 여타 외국인 노동자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조선족은 순수한 '인력'일
뿐이고, '민족'으로서 조선족은 감추어진다(한현숙 1997: 35). 한국인과 조선족 사
이의 구별은 이러한 종족성 규정 내에서, 단순한 문화적인 차이를 넘어 '고용주' 한
국인과 '피고용자' 조선족이라는 계급적 구별로서 나타나게 되며, 여기에는 '멸
시'의 내용이 덧붙여진다. 즉 조선족이란 첫째로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가난한 중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둘째로 열악한 농촌 출신이며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하층 노동자라는 점에서, 셋째로 사회주의 국가의 성원이라
는 점에서, 한국인과 구별된 집단으로 고정되며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처음 조선족이 한국 취업을 선택할 때만해도, 한국은 이들에게 동경과 기대의 대상
이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이후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나
라로 인식되면서,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는 것만으로 중국 내에서 다
수 민족인 한족에 대해 억압받았던 자존심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중국보다
더 우수한 문화와 경제 발전을 누리고 있는 한국은 조선족의 우수성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취업을 경험하게 되면서, 조선족은 그 동안 막연하게
동경해왔던 '고국' 한국이 그들을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국
의 이익을 위해 차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족은 한국에서 그저 저임금 노동
자로서 경제 발전을 위한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였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호의적
인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조선족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첫 번째 계기는 한국인 친척들의
경멸과 무시이다. '친척'이란 상호 부조와 애정의 책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인간 관
계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비록 이전에 만나 본 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국 친척들에
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이 경제적으로 앞서고 있는 만큼 가난
한 조선족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친척들은 조
선족에게 친척으로서 보여줘야 할 마땅한 대우를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앞서 말한
세 가지 이유(중국, 농민, 사회주의)를 근거로 경멸을 일삼고 하루 빨리 돌아가라
고 재촉하였다. 한국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노동 경험의 계기를 통해 다시 한번 무
너졌다. 비록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같은 민족'이고 신체적․문화적
으로 별 차이 없는 이들에게 한국인과 다른 차별적인 노동 대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조선족은 한국에서 조선족을 고용하는 것이 저임금 때문이며 농
민 출신인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작업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임금 차별 및 '불법체류자' 단속은 '같은 민족'에게 행하기에
너무나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보고 불법취업자다 뭐다 하면서 자꾸만 잡아 가둔다 하는데,
그게 한국인하고 똑같이 해 주면 우리가 달아나나. 우리는 중국서 빚을 산더미같이
지고 왔다 말이야. 말만 같은 민족이지, 같은 일을 해도 우리한테는 돈을 쪼금만 준
다 말이야. 그러니까 누군들 안 달아나고 배겨내나? 우리가 못 사니까 돈도 쪼금만
줘도 되는 줄 아는지. 기실(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국 사람들 그 돈 주고 일
하라면 누구도 와서 안 하니까 우리보고 와서 하라는 거 아니야" (천씨: 여, 50대)
조선족은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한국인과 구별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된다. 즉 한국 방문 이전, '같은 민족'을 근거로 한국인과 동일한 종족 정체성을 가
정하고 있었던 조선족은 「재외동포법」과 같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 담론 및 작업장
에서의 직접적인 차별 대우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이 한국인과 다른 종족 집단임을
인식하게 되고 조선족만의 구별된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더욱이 이들 조선
족은 한국인과의 문화적인 동질성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한국인의 음식․
언어․예절 습관 등이 조선족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한국인과 구별짓
는 물질적인 근거를 획득한다. 한국 취업을 겪으면서 조선족에게 한국인은 오로지
돈만 알고 인간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드러나는 반
면 조선족은 상대적으로 너그럽고 순진하며 인간적인 사람들로 인식되는데, 이러한
종족 정체성의 내용은 국가에 의해 부여된 저임금 노동자로서의 조선족의 사회적 지
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조선족으로서의 종족 정체성은 다른 조선족과의 관
계를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즉 한국 내 조선족은 비슷한 고향 출신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전화 통화와 틈틈이 갖는 회합을 통해 공통된 감정을 교환하며,
일자리에 대한 정보, 고향 소식 및 다른 동료의 소식을 접하고, 한국 생활에서 어려
움이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맥 관계를 형성한다.
5. 나오며
지금까지 조선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이래, 조선족의 종족성이 어떠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한 조선족에게 종족 정체성으로 각인되었는지, 중국과 한국 국가의
종족 정치학 및 각 사회의 정치 경제 맥락 속에서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조선족의
종족성 논의를 함에 있어 기존의 조선족 연구와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는
데, 즉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조선족과 한국인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왔
다면, 본 논문에서는 두 집단이 상당 기간동안 다른 생활 공간에서 다른 문화적 과
정을 겪어왔던 것에 주목하면서 두 집단을 서로 다른 '종족 집단'이라고 간주하였
다. 따라서 조선족의 종족성은 중국 이주 이후에 형성되어 온 것으로 바라보고 논의
를 전개하였다. 본문에서 논의된 바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족의 종족성 형성은 일제의 이주 정책 및 중국 공산당의 민족 정책과 밀
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경제적 목적을 위해 가난한 소작농인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켰으며, 식민지 지배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중국
인과 구별된 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였고, 이로써 조선족을 여타 집단과는 구별되
는 고유한 종족 집단으로 강화하였다. 또한 중국 정부는 56개의 민족을 구획짓는 과
정에서 조선족을 하나의 소수 민족으로 규정하였으며,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및 그
에 따르는 정책의 변화 속에서 조선족을 국가의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주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국가의 종족 정치학은 조선족이 그들만의 구별된 종족 정체성을 형성
하는데 영향을 주었는데, 즉 조선족은 일본 및 중국 국가에 의해 부여된 종족성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특정의 경험을 선별하고 의미를 전환시킴으로써 조선족
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국가의 권위에 기댐
으로써 '객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세대에 거쳐 반복적으로 강조됨으로써 '원초
성'을 획득하였다.
중국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특히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과
의 관계에서 보다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무엇보다 한
족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은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
이 소수 민족으로서 불이익과 차별을 경험해왔던 것과 연관된다. 즉 '민족 평등'을
주장하는 중국 국가의 공식적 담론의 강력한 영향 속에 조선족은 한족에 대한 차별
을 '차별'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한족에 대한 우월함의 형태로 그들만의 종
족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한족에 대한 열등감을 중성화시키고 동시에 한족과의 불
평등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조선족의 종족 정체성은, 중국 개방
이후 왜 조선족이 굳이 '한국 취업'을 선택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이유이다.
즉 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갖는 객관적인 열등한 지위 뿐 아니라 스스로를 한족과
구별해 왔던 자신들의 종족 정체성으로 인해 한족과 동일한 방식을 선택하려고 하
지 않으며,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에게 가장 유리하며 독점적인 자원으로 나타나는
한국 취업을 선호한다. 그리고 한국 취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은 '잘 사는
나라' 한국에 대해 경제적 기대 및 '같은 민족'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실제 한국 취업 경험은 조선족의 두 가지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한
국 정부는 조선족에게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한국 문화에 보다 순응
적인 노동자로 봉사하기를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법적으로 이들을 '외국인'으로 분
류함으로써 한국인이 하지 않는 저임금의 하층 노동에만 종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
로 규정한다. '외국인' 규정은 결국 조선족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를 양산하는데, 이것은 자국 시장의 필요에 따라 양적 조절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저임금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해 주며,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에
게 '멸시되는' 집단으로서의 종족성을 부과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차별의 경
험 속에, 한국의 조선족은 기존에 가졌던 '같은 민족'에 대한 기대 내지 동일시를
부인하게 되며 한국인과 구별된 조선족만의 종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와 같
은 공유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선족간의 유대를 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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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 아퍼라..문장 띄어쓰기 한후에 다시 읽어 볼란다...
이글은 마땅히 자료실에 있어야.... 근데 분량이 많고 넘 무겁당...
좋은 논문 잘 찾아 내서 올리셨군요.수학이님 수고..... 중국에 진출해있는 한국인 들이라면 한번씩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읍니다.. 다만 조선족 들의 새로운 이주지인 청도를 포함한 연해지역에로의 새로운 정착 모습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어 아쉽지만,,,,,,
조선족 문제를 기피하거나 배척하려고만 하지말고, 중국을 경영해보겠다며 진출한 이상, 우리말이 통하는 200만 중국인 집단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앞세워 그들과 함께 서부내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것은 아직 시기 상조 일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