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흥사단 50주년을 맞으며
박병전(고A 초대회장)
1964년 9월, 고등학생대구아카데미 창립으로 시작된 대구흥사단은 어리고 연약한 고등학생 11명의 대구흥사단 어린 새싹들이 불모지의 험난함에도 뿌리를 내리고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꿋꿋하게 자라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구지역의 시민사회단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대구흥사단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시간 속에 초창기의 어려움에서 새싹을 보살펴주시고 키워주신 권영식, 김정주, 도형수, 김진홍, 최용호, 손중욱 선배단우님과 오갈 곳 없는 새싹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오늘을 있게 하신 대구흥사단의 어머님 *고 강정애 명예단우님께 감사의 말씀 올리며 옛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고등학생 아카데미의 태동
60년대 초중반은 전쟁의 생채기가 남겨진 가난하고 헐벗은 시절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등 격변기였으나 고등학생들은 지금과 같은 대학입시에만 몰입하지 않고, 특별활동에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며, 가을이면 각 학교에서 개최하는 예술제, 문학제, 합창발표회 등으로 분주하였고, 써클활동(동아리활동)도 활발하여 4H, 청소년적십자, 도덕재무장, 보이스카웃 등 전국적인 것도 있었고,
뜻이 맞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가람동우회, 수양동우회, 죽순회 등등의 모임과, 취미활동모임, 합창단, 문학동인회(시,수필,소설)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KBS대구공개홀,(지금대구시민회관자리,KG공개홀) KBS공개홀1층의 경북문화관, 시내 각 예식장 등에서 시화전, 시낭송회, 수필낭송회, 합창발표회 등으로 가을을 장식하는, 써클 활동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며,
저도 중학교 선배의 권유로 청소년적십자 활동과 대구시고교연합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64년 신학기초 우연히 주요한 선생과 안병욱 교수의 강연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 흥사단과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활동하던 고교연합합창단 연습장이 KBS대구공개홀 소강당이라, 합창연습을 갔다가 지휘자 선생님이 오시지 않아 연습을 못하고 되돌아 나오던 중 대강당의 강연회에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고, 강연내용은 ‘민족주체사상확립’과 ‘도산의 생애와 사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몇 달 뒤, 이만근 선배의 소개로 수양동우회에 참여했을 때 이 강연회가 수양동우회가 개최한 것을 알았습니다.
*고 강정애 명예단우님:
당시 부산분회장 고 운여 김광업 단우님의 부탁으로 아카데미모임장소를 제공하여 주셨음. (대구육아원 소강당: 65년10월~67년1월. 봉산탕2층 대구흥사단 단소: 67년02월~78년2월)
그 후, 7월 초순 경으로 기억되는데 청소년 적십자활동을 권유한 경북중학교 1년 선배인 박근식 학생회장의 소개로 이만근 선배와의 흥사단아카데미 참여하게 되었고, 수양동우회에 참여하여 흥사단 정신을 습득하고 수양동우회를 아카데미로 전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불가능함을 느꼈고, 같이 활동하기를 꺼리는 수양동우회 회원들의 분위기 등으로 아카데미를 결성하기로 했습니다.
9월중 창립을 목표로 창립회원 대상자를 포섭하기로 하였으나 방학중이라 힘이 들었고, 또한 이미 다른 써클에 가입하고 있어서(대체로 1학년 때 써클에 가입함) 2학년 중간이라 더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써클 활동을 하지않는 친한 친구로 대상을 바꾸어 설득하여 초등, 중학 동창 4명을 포섭하였고 이만근 선배가 5명을 포섭하여 9월5일 재건국민운동 대구시 중구 사무실에서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준비위원장이 발기인 대표로 하고 9월13일 11명의 발기인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발기인 대표 이만근(대구공고3)
(이만근 추천) (박병전 추천)
허 균(사대부고2) 박병전(대구공고2)
정재익(대구농고2) 한용외(대구고2)
윤성규(대구농고2) 김윤규(대구상고2)
이은자(남산여고2) 문선덕(신명여고2)
허옥주(남산여고2) 황진숙(대구여상2)
고등학생 아카데미의 창립과 활동
1964년 9월13일(일요일) 오후3시 재건국민운동 대구시 중부 사무실에서 흥사단본부에서 오신 김용경 교수(충남대), 홍선표(연세대4아카데미지도위원), 발기인 11명 등이 참석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박병전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하고 임원을 임명하여 정식 출범을 하였습니다.
이날 당시에는 잘 먹지 못하던 귀한 음식인 소고기육개장을 본부에서 오신 김용경 교수님이 사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창립이후, 최대의 난관은 학교에서 아카데미 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5.16군사정변 시 흥사단이 정치단체로 오인되어 활동정지를 당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찰이나 정보기관의 사찰대상이어서 회원신상이 학교에 알려져 활동을 못하게 하였고, 어느 학교에서는 퇴학까지 징계 하겠다 하여 발기인 중 정재익, 윤성규, 문선덕, 황진숙 등 절반 이상이 탈퇴하게 되어 조직유지가 힘들었습니다. 다른 회원들도 몰래 마음 졸이며 활동하면서 1학년 회원 포섭에 정성을 들여 단속이 느슨한 학교의 학생을 다소 확보하기도 하였습니다.
(대구고: 문선출, 정병호, 고 안형수, 대구공고:황인태, 정상범, 이창호)
학교단속이 심하면 탈퇴시키고, 또 포섭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탈퇴한 만큼 열성적으로 또 다른 회원을 영입하곤 하였으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고3 전반기까지 회장을 맡고 활동하기도 하였지요. 2대회장 정덕환(대구고 3)은 저의 중학교 동기인데 3학년 전반기까지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정말 열정히 대단하였습니다.
또한 일정한 집회장소가 없어서 매주 토요일 집회를 할 때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회원 집을 돌아가며 집회를 하다 보니 이번 주는 대구 동쪽 끝, 다음 주는 남쪽 끝, 이런 식으로 동가식서가숙 하였고, 지금의 주택은 방이 크고 거실도 있고 하지만 그 당시 주택은 방도 작고 거실도 없고 대청마루가 있긴 하지만 작아서 15~20명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포개어 앉기도 하고 서서 하기도 하였으며, 어떨 때는 쌀가마니 위에 앉기도 하였습니다.
집회내용은 독서토론이 많았으며 초창기라서 도산의 사상과 생애, 흥사단 4대정신, 5대공약 등 조직에 필수적인 독서토론이 많았습니다.
매주 정기집회는 물론 동맹독서, 동맹수련, 동맹저축, 회보 “아카데미” 발간, 일요일 새벽 조기청소 봉사, 양로원 위문, 농촌봉사활동 등으로 활동공간이 없어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나 도산사상과 흥사단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던 중,
아카데미의 적극적 홍보로 학교의 활동규제 완화와 회원 확장을 위한 창립1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로 하고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없어진 반월당네거리 현대예식장에서 시내 각 써클회원과 고교생 7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도산의 밤”을 개최하였으며 행사 준비 중 권영식단우 자택에서 저녁에 합창연습 중 시끄럽다는 이웃주민의 항의로 연습이 중단되는 애로들도 있었지만,
홍보효과로 예상보다 더 큰 성과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학교의 활동규제도 약간 완화 되었고 회원가입도 많이 늘어났지만 가장 큰 것은 고정적인 집회장소를 확보 한 것입니다. 행사 격려차 오셨던 부산분회장의 주선으로 행사직후 부터 대구육아원 소강당을 사용하게 되어 매주 토요일 안정적인 정기집회로 아카데미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대구흥사단의 고향 봉산탕2층 대구단소
67년2월, 꿈에서나 그려보던 독립된 사무실을 봉산당 2층의 독서실로 사용하던 교실크기의 공간을갖게 된 기쁨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지만 곧 바로 걱정으로 바뀌었지요. 육아원 소강당은 마루바닥이라 의자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새 보금자리는 시멘트 바닥이라 의자가 꼭 필요 하였고 또한 큰 공간을 채울 비품들도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갖고 있는 것이 없었지만 용기와 열정은 있었습니다.
의자 및 비품 구입비용을 고민하던 중 누군가의 제안으로 정월대보름날 “행운의 복조리” 판매가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에 뜻을 같이하고, 복조리와 리본 등을 구입하여 “소원성취” “만사형통” 등 덕담과 흥사단대구아카데미를 직접 쓴 리본을 복조리에 붙여서 “행운의 복조리”를 만들고 회원들이 거주하는 동네별로 조를 편성하여 회원, 친구, 친척, 은사님 집에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던져 넣은 후 오후에 찾아 뵙고 복조리 값을 받는 행사를 실시하여 약간의 비용을 마련하였지만
구입비용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의자를 우리가 손수 제작하기로 하고 제가 설계도를 그리고 한용외가 친구집목공소 에서 전문 목공공구를 빌려오고 각 회원 집에서 망치, 톱 등을 갖고 와서 봄 방학중 새보금자리에서 5명이 앉을 수 있는 긴의자(벤치) 10개를 손수제작 하였습니다.
의자 제작 준비로 저와 한용외가 전문 목공 공구의 사용법(대패, 끌, 목공통)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마련된 비용으로는 정품 목재구입이 불가능하여 제제소 등외품 야적장을 뒤져서 쓸만한 목재를 찾는 작업도 정말 힘들었지만, 제작기간 중 흘린 땀과 노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고 남학생은 망치를 들고 여학생은 새참, 점심 등을 준비하는 등 한마음으로 뭉친 의지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의 원동력이 되어 아카데미의 비약적인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치면서
어쩌다 우연하게 도산사상과 흥사단을 알게 되었고 또한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65년 학교별 단위 아카데미 창설, 66년 대학생 아카데미 창설, 66년 흥사단 대구연합회 창설, 67년 대구분회를 창설, 군 전역 후 71년~73년까지 대구분회 상임간사로 청춘의 열정을 흥사단과 함께 한 것이 저의 인생에 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때는 이만근 선배가 저에게 모든 짐을 지우고 창립 두 달 뒤 떠나갔을 때가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저에게 주어진 책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 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와 함께 지금까지 고락을 같이한 단우님들, 그 동안 흥사단을 떠난 여러 동지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립 때 부터 초창기 어려울 때 묵묵히 뒷받침해 주고 50년 한결같이 힘이 되어주고 지켜준 친구이자 동지인 한용외단우, 대구흥사단의 초석이며, 1등공신인 고A 66동지, 67동지, 68동지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그 동안 같이한 선후배 단우님, 아카데미 후배님, 대구흥사단을 위하여 희생과 혼신을 다한 이창기, 최현복 단우 정말 고맙습니다.
첫댓글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50년을 활동하셨네요.
살아있는 역사 이시네요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 뭉클 했습니다. 진한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프린트해서 단우 및 아카데미 선후배들께 초청장과 함께 송달 해보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용기와 열정을 배우겠습니다.
1971년 고등학생아카데미에 입회할 때, 박단우님은 무서운 담임선생님 같았죠.
대구경북흥사단의 씨앗을 뿌린 형님, 존경합니다.
형님 고맙습니다.오래 오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