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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8일 일요일, 경상북도 청도의 화악산을 찾아 나섰다. 모처럼 영남지방으로 나선 산행이다. 미처 가보지 못한 첩첩산중의 산이라서 그러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러쎌산악회의 단골 회원들이 총출동하였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길도 붐비지 않아 산행하기 좋은 까닭이리라. 겨우 겨우 예약이 최소 된 뒷자리를 차고 앉았다.
추풍령 휴게소에 이르렀다. 화장실을 가는 길에 색다른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읽을 만한 책을 파는 책 자판기였다. ‘백만불짜리 경청의 힘’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 ‘자신감 이렇게 키워라’ ‘자신의 장점을 파악하라’ ‘좌절 앞에서 두려워 하지마라’ ‘자기 관리의 다섯가지 비밀’ ‘말 잘하는 비결’ ‘즉시 행동하라’ ‘능력은 졸업장보다 중요하다’ 등의 생활의 지혜가 담긴 교양서적이다.
그런데 책값이 재미있다. 2만원, 3만원이어야 할 책값이 2천원, 3천원이다. 책의 크기도 알뜰하다. 손안에 쏙 들어올 18.2cm×12.2cm 크기이다. 문고판보다 조금 큰 문고본이다. 표지의 디자인도 단정하고 간결하다.
그런데 더욱 기발한 것은 홍보 스타일이다. 책의 내용을 알리는 차례가 10초 간격으로 펼쳐 보인다는 것이다. 제목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는 차례를 보여주어 책의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2·3천원의 책값도, 문고본의 크기도, 자판기의 홍보도 기발하다. 책 자판기에 머물러 한참을 바라보다가 ‘백만 불짜리 경청의 힘’ 한 권을 샀다. 책을 샀다기보다 아이디어를 샀다.
10시 30분경, 리무진 버스는 청도 IC를 돌아 나왔다. 청도읍에 들어서니 소싸움 우투(牛鬪)의 거대한 광고판이 먼저 눈에 띈다. 언제 소싸움 구경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산행을 먼저 하게 되었다.
농경시대에 있어 소는 언제나 자산 목록 1호였다. 농업 생산이 삶의 수단이던 시대에 소는 농가의 보물이었다. 그러기에 농가에서는 소를 식구(食口)의 하나인 생구(生口)로 불렸다.
소는 이른 바, 다섯 가지의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농사일을 돕는 것이 그 하나요, 우유를 주는 것이 그 둘이요, 고기를 주는 것이 그 셋이요, 거름을 주는 것이 그 넷이요, 가죽을 주는 것이 그 다섯이다.
10시 50분경, 산악회 버스는 청도읍 음지리의 한재를 지나 평양리의 밤재에 올랐다. 일행은 산행 출발점인 밤재에 내려 다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은 러쎌산악회의 단골 산꾼들이 총출동하였기에 반가운 얼굴을 한 장에 담아 두고 싶었다.
11시 40분경, 북돌 무덤봉을 지나 화악산 정상에 이르렀다. 해발 930m의 화악산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청도가 해발이 높은 산간 지방에 위치한 까닭이다.
북돌 무덤봉에서 화악산을 지나 남돌 무덤봉에 이르는 산 능선은 편안하다. 활처럼 휜 능선은 마치 성벽을 따라 걷는 길과 흡사하다. 산1946님이 청도 화악산이 씰버(Silver) 산행지로 최적지라고 귀뜸한다.
12시경, 윗화악산에 올라 점심을 들었다. 대들보님, 아미르님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아미르님은 산행 준비에 완벽한 살림꾼이어서 먹을 것도 넉넉히 준비하였다. 김밥, 라면, 찐밤, 귤, 바나나에 따끈한 커피까지 끓여 내놓으신다. 평소 입만 가지고 다니는 나의 게으른 산행과는 많이 다르다.
오후 1시경, 일행은 아래화악산에 이르렀다. 아래화악산에 이르는 능선에 10여 미터의 높은 암벽이 가로막혀 발길을 주춤거렸다. 그러나 앞에서 잡아끌고 뒤에서 밀어주는 우정이 있기에 산길은 훈훈하다.
오후 2시경, 독짐이 고개를 지나 철마산 정상에 올랐다. 해발 627m의 철마산에는 철마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삼국시대의 산성이라고 하니 신라시대의 산성일 것이다. 철마산(鐵馬山) 봉우리는 전투를 앞둔 장수와 병사가 산신께 고유제를 지내던 장소로 보인다. 철마산의 이름이 그러하고 높은 봉우리를 둘러쌓은 석성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철마산성 정상 부근 땅속에는 제례용으로 사용 되었을 말 수십 개의 철마가 묻혀 있을 성 싶다.
삼국시대에는 큰 싸움을 앞두고 제례 의식을 가졌다. 말의 목을 베어 말의 피를 검에 뿌려 하늘이나 산천에 출전을 고유하였다. 어떤 때는 말의 피 대신 쇠로 만든 철마 모형을 제물로 쓰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 난 성터의 정상에서는 목이 잘린 철마 모형이 숱하게 발견되기도 한다.
오후 3시경, 너덜지대를 따라 음지리 마을로 하산하였다. 음지리 마을은 밤나무와 감나무로 이루어진 골짜기였다. 떨어진 내린 낙엽 속에는 미처 줍지 못한 밤송이가 널려 있고 앙상한 가지를 들어낸 감나무에는 아직 따내지 못한 검붉은 홍시가 까치밥으로 매달려 있다.
홍시 하나를 따서 맛을 보니 달콤하고 시원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홍시에 씨가 없다. 감에 씨가 없는 것이 청도 감의 특징이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씨 있는 감나무를 캐다 심으면 3년 후에는 씨 없는 감이 달린다고 한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달고 맛있는 감이기에 서너 개를 챙겨 배낭에 넣었다.
평양리와 음지리 마을은 비닐하우스 천지였다. 평양리와 음지리 뿐만 아니라 청도읍 전체가 하얀 비닐하우스로 덮여 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비닐하우스를 살펴보니 한 자 이상 자란 미나리가 파랗다. 청도 농가에서는 지금 청정 미나리 수확이 한창이다. 청도의 상징으로 떠오른 미나리 청채는 쌈으로 먹기에 좋다. 논이 아닌 밭에서 미나리를 기른다. 그러기에 거머리가 없고 깨끗하며 향기가 좋다.
방풍 겸 가판을 목적으로 세운 비닐하우스에서는 미나리를 다듬어 판다. 한 단에 7천원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헐값이 아니다. 제법 짭짤한 돈이 되는 채소 사업이다.
청도에서 재배하는 무공해 청정 미나리는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 수출하는 특산물이 되었다. 맑을 청(淸), 길 도(道)의 이미지에 맞는 파란 미나리 수출길이 열렸다고 한다. 청도 소싸움에 한일 소싸움 전도 겸한다 하니 청도는 산골이지만 해외로 열린 산골이다.
일행은 미나리를 다듬어 파는 작업장에 들어가 새참을 먹었다. 겨울 산행에 시장한 산꾼들은 두부김치에 미나리를 안주하여 수제비 한 그릇을 게눈 감추 듯 해치운다.
산길에 부지런한 모대장님은 옥단춘굴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이런 산골에 웬 옥단춘굴인가 하였더니 마을 이름이 평양리다. 고대소설의 주인공 평양 기생 옥단춘이 등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을 어른에게 물어 볼 것이었지만 그만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평양리에 청도 김씨 영헌공묘가 있는 것을 보니 짚이는 것이 있다. 어쩌면 옥단춘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도 김씨의 일과 연관된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것일 수도 있다. 옥단춘전의 모티브는 이곳 청도 김씨의 일에서 비롯된 일로 보인다. 그러기에 마을 이름이 평양리요, 굴의 이름이 옥단춘굴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숙종 때 김우항(金宇杭)이라는 사람이 겪은 일과 유사하다. 등과하기 전에 불우하게 살던 김우항은 강계부사로 있던 이종 사촌에게 도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종 사촌이 오히려 그를 감금하려고 하자 김우항이 도망쳐 나와 기생 홍도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후 평안감사가 되어 이종사촌의 죄를 벌한 일이 있었다 한다. 옥단춘전은 김우항의 일을 소설화한 것일 수 있다. 다음은 옥단춘전의 줄거리다.
황성(皇城)에 김정(楨), 이정(楨)이란 두 재상이 있었다. 그들은 지기(知己)의 벗으로 남다른 우정을 가지고 지냈다. 김재상은 진희, 이재상은 혈룡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동갑으로 같이 자라 같이 공부하였다. 부모들의 세의(世誼)를 생각하여 이들은 금석 같은 약속을 하기를, 진희와 혈룡이 누구든지 먼저 출세하는 자가 천거해 주기로 하였다.
그 후 김진희는 과거에 급제하여 평양감사가 되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혈룡은 과거도 못 보고, 곤궁한 처지에서 노모와 처자의 호구지책도 없이 빈궁하게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혈룡은 옛 언약을 상기하며, 이미 출세하여 평양감사가 된 진희를 찾아간다. 넉넉지 못한 노자로 고생을 하며 평양에 당도하여 감영에 가서 관속 호장에게 감사를 만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만나게 해주기는커녕 천대가 막심했다. 노자도 떨어져 입었던 옷마저 팔아 연명(延命)하며 감사를 만나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연광정에서 감사의 잔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걸인행색 그대로 감사 앞에 나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평양감사 김진희는 이혈룡을 아는 체하기는커녕 미친놈이라 하여 뱃사공을 시켜 대동강 물에 던져 죽이라고 한다. 잔치에 참석하여 감사를 모시고 있던 기생 옥단춘은 감사의 친구라고 찾아온 걸인 혈룡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칭병하고 물러 나와 사공을 매수하여 그를 구한다. 그리고 그와 가연을 맺은 다음 전적으로 그를 돕는다. 옥단춘은 혈룡을 실의와 곤경에서 구한 다음, 의식(衣食)에 대한 걱정 없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주선하여 혈룡이 암행어사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혈룡은 옥단춘의 권고로 과거도 보고, 모친과 처자도 만날 겸 옥단춘과는 후일을 기약하고 평양을 떠나 황성으로 돌아왔다. 황성에 도착한 혈룡은 옥단춘이 시킨대로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 노모와 처자가 좋은 집에서 시비를 거느리며 살고 있었다. 이 모두가 옥단춘의 배려임을 알고, 노모와 아내에게 평양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니, 노모는 아들이 고생한 것을 애닮아 하면서 기생 옥단춘의 의거를 못내 칭찬하였다. 마침내 혈룡은 과거에 급제하고 평안도 암행어사를 제수 받았다. 혈룡은 거지 복색을 하고 평양으로 가서 역졸을 뿔뿔이 흩어 놓고 먼저 옥단춘의 집을 밤에 찾아갔다.
이혈룡을 만난 옥단춘은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몰랐다. 몸도 씻겨주고, 머리도 빗겨주고, 새 옷도 내어 입히며 변함없이 후대하는 것이었다. 혈룡은 거짓말로 과거에 떨어지고 가산도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다고 했다. 옥단춘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것이었다. 혈룡은 이튿날 감사연이 연광정에서 열린다는 말을 듣고 거지 행색을 한 채로 찾아가서 소리내어 불렀다. '아모개의 자식 김진희야! 이혈룡을 모르느냐?' 이 소리에 감사는 혈룡을 죽이라는 분부를 내렸던 사공을 잡아 고문하여 혈룡이 살아나게 된 경위를 알아낸 다음, 겆 행색의 이혈룡과 죄 없는 옥단춘을 한 배에 태우고,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물에 던져 넣게 하였다. 두 사람을 물에 빠뜨리라는 북소리를 울리는 것과 동시에 혈룡이 연광정을 향해 천지가 진동할 듯 큰 소리로 역졸을 부르니, 어사 출도를 외치며 역졸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이에 혈룡은 연광정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김진희를 잡아들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유배 정도로 처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천벌을 받아 평양감사 김진희는 죽고 말았다. 혈룡이 선정을 베풀고 벼슬이 올라 장차 우의정이 되었으며, 옥단춘은 천기(賤技)였지만 혈룡의 부실이 되고, 정덕부인의 가자(賀資)까지 받고 평생동실(平生同室)하며 일세의 부귀를 누렸다.
첫댓글 좋은 사진 에 옥단춘전 이야기까지 잘 읽고 갑니다.
아는만큼 보인다 했던가요... ... 나는 본 다음에 꿰어 맞추는군요 아무려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