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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저 산문
장원 금장초등 2학년 3반 최지은
-칭찬-
나에게는 말괄량이 5살 여동생 효원이가 있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만 같았다.
내 그림에 검정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고 내가 아끼는 스티커를 창문에다 다 붙혀 버렸다.
“야! 최효원 너 혼난다.”
“이거 언니 거잖아. 하지 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부르셨다.
“지은아, 넌 언제가 가장 행복하니?”
라고 물으셨다.
선생님이나 엄마, 친구들이 대단하다. 잘한다고 칭찬 해 줄 때라고 했다.
엄마가 칭찬은 누구나 기분 좋게 하고 더 잘해야 겠다는 다짐이 생기는 신기한 약이라고 하셨다.
효원이가 또 내 동화책에 낙서를 했다. 난 엄마의 말씀을 떠올리며
“와 효원이 그림 잘 그렸네.”
라며 웃으며 말했더니 효원이가 쑥스러워 하며 방긋 웃었다.
난 그날부터 효원이에게 칭찬을 해 주었다.
“언니, 이거 해도 돼?”
“언니, 너무 좋아! 사랑해”
효원이가 변했다.
정말 칭찬이란 약은 말썽쟁이 효원이를 사랑스런 하나 뿐인 내 동생 효원이로 바꾸어 놓았다.
그 동안 나의 행동도 반성하게 되었다.
“효원아! 언니가 많이많이 칭찬해 줄게.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사랑해 효원아!”
우수 나원초등학교 2학년1반 임현정
-칭찬-
나는 요즘 구구단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학교에서도 구구단! 집에서도 구구단! 하필 오늘 선생님께서 예고도 없이 구구단 시험을 친다고 한다. 가슴은 쿵쾅쿵쾅 손은 덜덜덜덜 ‘오늘은 기어코 백점을 맞고 말겠어!’ 드디어 채점이다. 야호! 드디어 백점이다. 학교를 마치고 다다다다 뛰어갔다. 엄마에게 시험지를 척 내밀었다. 엄마께서 칭찬 해 주셨다.
이제는 그동안 나를 구박했던 얄미운 언니에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언니가 웬일로 칭찬을 해 주었다. 오늘은 내가 칭찬의 여왕이 되었다.
우수 유림초등학교 3학년2반 김민혁
-칭찬-
우와! 진짜 잘 그렸다.
우와! 정말 대단하다. 나는 우쭐해졌다. 하얀 도화지에 멋진 곤충을 그리고 공룡을 그린다. 학교 쉬는 시간 마다 친구들은 내 자리로 모인다.
“민혁아 펄기아 그릴 수 있어?”
“야 내 차례야! 민혁아 기라티나 먼저 그려 줘!”
나는 수서대로 종합장에 포켓몬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선물 해 주었다.
나는 다섯 살 때 별명이 꼬마 화가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수풍뎅이와 왕사슴벌레와 사마귀를 그리면 그림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 종일 고충 그림과 이야기하고 나는 어느새 숲속에서 놀고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나 학교 선생님, 친구들의 칭찬이 너무너무 기분 좋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칭찬이 가장 기분이 좋다. 그러데 요즘 엄마는 칭찬을 잘 안 해 주신다. 내 동생에게만 받아쓰기를 하면서 우리 아기 진짜 잘했다고 칭찬해 주셔서 속상하고 동생에게 샘이 난다. 나도 엄마 칭찬이 그립다.
우수 금장초등학교 1학년 4반 심소윤
-칭찬-
아파트 친구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데 나는 자전거를 못 타서 뛰어서 따라갔다.
“너, 자전거 못 타?”
친구들이 놀이터에 나만 두고 자전거를 타고 가 버렸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나도 자전거를 배울 거다.’
엄마랑 아파트 뒷 도로에 나가서 자전거 연습을 했다. 다리에 멍만 들고 손바닥도 까지고 잘 안됐다.
‘내일은 예지랑 자전거 타고 놀기로 했는데…….’
속도 상하고 힘만 들었다.
“오빠보다 훨씬 잘 하네”
엄마가 칭찬을 해 주셨다. 희한하게 다리에 힘이 생기고 손바닥도 안 아픈 거 같았다.
“와! 하니까 되지? 친구들 금방 따라 잡겠다.”
엄마가 박수를 치며 웃어주신다.
아직 비틀비틀 자전거를 타지만 마음은 쌩쌩 달리는 것 같다. 엄마가 칭찬해 주시니 아픈 다리도 속상한 마음도 잊어버리고 더 열심히 자전거를 탔다.
가작 황성초등학교 3학년5반 김영성
-칭찬-
두 자리 수 X 두 자리 수 곱셈은 나를 힘들게 해요. 틀린 시험지를 보면 마음에 구멍이 뻥 뚫려요. 구멍이 난 마음이 나에게 말해요.
“너 정말 못하는 구나! 하지 마! 어차피 틀릴 건데 공부를 왜 해! 시간 낭비야! 포기해!”
그 때 서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영성아, 어제보다 두 개나 더 맞추었구나! 아주 잘했어!”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뻥 뚫린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거예요. 구멍이 메워진 내 마음은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찼어요. 칭찬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가장 좋은 약이에요. 나는 다시 곱셈 문제에 도전할거에요. 나는 분명 더욱 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처럼 칭찬으로 가르치는 멋진 선생님이 될 거에요.
가작 용강초등 3학년1반 박유정
-칭찬-
잘 하면 잘 할수록 많이 받는 칭찬. 나는 칭찬 듣기를 좋아한다.
내가 동생에게 장난감을 양보했을 때 ‘아이고 우리 유정이는 착한 언니네’ 내가 스스로 공부하거나 어머니 말씀을 잘 들을 때 ‘우리 유정이 최고야!’ 라고 칭찬을 해 주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정말로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춤을 추게 한다.
그런데 칭찬을 받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잘 안 된다.
기분이 좋아지는 칭찬을 받도록 표기하지 않고 노력 할 것이다.
가작 황성초등 1학년5반 송수진
-칭찬-
나는 유치원 5세 때 7세 형님이 영어를 잘해서 칭찬 받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엄마께 영어 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 어리다고 내가 7세가 되면 영어 학원을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유치원 최고형님 7세가 되었을 때 엄마는 저를 영어 학원에 보내 주었습니다.
한글이 아니어서 많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도 칭찬받는 멋진 형님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했습니다.
칭찬받고 싶어 열심히 하다 보니 영어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어 졌습니다.
지금 영어 수업은 4,5학년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영어시험을 준비하는 건 힘들지만 틀린 문제없이 백점을 받으면 기분이 킹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짜릿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짜릿한 영어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가작 계림초등 3학년1반 한소혜
-칭찬-
난 오늘 아란 이와 함께 간시도 먹고 놀고 있었다. 사촌 동생 아란 이는 2층 침대를 좋아해서 사람이 없을 때마다 올라간다. 요즘에는 사람이 있어도 2층 침대에 올라간다. 2층 침대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란이 옆에 있어야 한다. 내가 공부할 때는 아란이가 옆에 우리 언니자리에 앉아서 같이 공부를 한다. 아란이가 배고플 때는 언니를 부른다. 아란이가 놀고 싶어서 언니를 부른다. 아란이가 다시 2층 침대에 올라간다. 아란이도 올라갈 때는 힘을 주기 때문에 넘어질 것 같기 때문에 옆에 있어야 한다. 아란이가 갑자기 떨어졌다. 아란이가 “응애, 응애”하며 운다. 나는 아란 이를 안아서 달래 주었다. 그 때 이모가 와서 아란 이를 안아주었다. 아란이도 이제 진정이 됐다. 그래서 이모가 나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나는 칭찬을 받으니 너무나 좋았다.
사랑하는 아란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음에도 아란 이를 잘 돌봐서 칭찬 받아야지.
칭찬이 이렇게 기분을 좋게 하는 구나!
장려 포항 지곡초등 2학년 4반 박민용
-칭찬-
나는 칭찬을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칭찬을 받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나서 엄마에게 자랑을 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때 나는 너무 슬프다. 열심히 해서 칭찬을 받아도 엄마가 칭찬을 안 해주니까 화가 나기도 한다.
친구들은 매일 칭찬을 받는다. 나는 친구들이 부럽다. 유치원 때 쌀과 양파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칭찬을 많이 받은 쪽이 안 썩고 칭찬을 안 하고 나쁜 말을 많이 한 것은 썩었다. 나는 깨달았다. 칭찬을 많이 하면 친구들의 기분이 좋아지고 칭찬을 받기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려 포항 효자초등 1학년4반 유은비
-칭찬-
“우와, 우리 은비 최고야. 엄마,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 말은 내가 아기 때부터 매일 들었던 말이다.
일곱 살 때 한자 공인급수 3급을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뻤다. 자격증도 받고 상장도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장난감 선물까지 모두 받았다.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것은 ‘수고했어, 우리 딸’하시며 꼭 안아주실 때였다.
며칠 전, 독감예방접종 주사를 맞을 때, 엄마가 안 울었다고 칭찬해 주셨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여우같은 눈썹을 했던 간호사도 웃으며 잘 했다고 막대사탕을 한 개 주셨다. 내년에도 용기를 내어서 주사를 맞아야겠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나에게 예쁜 말로 칭찬을 하시면 내 마음은 분홍빛 솜사탕처럼 하늘을 날아갈 듯 행복해진다. 나도 친구들에게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칭찬을 많이 해야지.
초등고학년 산문 수상작
장원 용황초등 4학년3반 박채윤
-의자-
어릴 적 내가 타던 유모차를 지금은 우리 할머니께서 사용하신다. 아빠가 의료기 유모차를 사다드린다고 해도 “아직 멀쩡한데 뭐 한다고 헛돈을 쓰노? 나는 이게 편타”시는 할머니. 허리가 불편하신 할머니께서는 유모차에 의지해 끌면서 텃밭에도 가시고 마을 회관에도 가신다. 그렇게 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준 유모차다. 숨이 차 쉬어 갈 땐 유모차가 할머니의 편안한 의자가 되어 준다. 내가 아기 때 타던 유모차여서 더 좋으시다는 할머니. 솔직히 나는 할머니께서 앉을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엄마가 좀 더 편안하게 앉아 쉬실 수 있도록 방석도 쿠션도 끼웠다. 작은 우산까지 끼우니 멋지게 변신을 했다. 할머니께서는 유모차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의자라고 하신다. 결을 땐 지팡이보다 더 자주 사용하시는데 “동태가 고장 날까 봐 걱정이다.”고 하신다. 동태라니……. 바퀴를 말하는 거란다. 그 만큼 편하고 익숙해지신 듯하다. 유모차에 앉아 쉴 때면 아들 생각, 손주생각 절로 난다시며 흐뭇한 미소를 띄우시는 할머니. 그렇게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떠올리신다. 내가 타던 유모차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의자인 이유를 알 것 같다.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세월과 함께 묻어 온 추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거란다. 가끔 할머니께서 그 의자에 앉아 쉬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수 유림초등 6학년 5반 김은서
-의자-
큰 도로에서 빠져나와 좁은 시골길을 한참을 달리면 얼마 전 새로 단장한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마을회관이 보인다. 회관입구에 낡은 나무의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외갓집에 갈 때마다 그 의자는 나를 슬프게 한다. 작년 봄에 돌아가신 엄마의 외할머니 숨결이 묻어 있는 의자이다. 할머니는 머리카락이 백발이고 머리숱도 많이 없으셨는데 얼굴은 까만 편이셨다. 이마에 하얀 얼룩처럼 반점이 생겨서 그게 보기 싫어 시다고 하얀 모자를 꼭 쓰시고 그 낡고 작은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 구경을 하시곤 했다. 엄마와 내가 차 창문을 내리고 ‘할머니!’하고 부르면 희미한 옅은 미소를 지으시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 차에 올라타셨다. 아직도 그 의자를 볼 때마다 누가 오나, 보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 거린다. 이번 추석에 외갓집에 가면서 k는 그 의자가 늘 있던 동백나무 옆이 아닌 멀리 떨어진 백일홍 나무 밑에 무심히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울컥 코끝이 찡해졌다. 돌아가신 외증조할머니의 얼굴이 잘 생각이 안 나고, 어렴풋이 형상만 보이는 것이 먹먹하다. 제자리에 온전히 돌려놓고 싶은 내 마음을 꺼내기도 전에 어느새 차는 외갓집 마당이었다. 오늘 낡고 칠이 벗겨진 적은 나무의자를 내 마음속에 잘 세워둔다.
우수 용황초등 4학년7반 신승민
-의자-
할머니 댁에는 거실 창 앞에 발받침이 있는 연두색의 커다란 의자가 하나 있다. 그 의자는 앉아 있다가 누우면 뒤로 눕혀지는 그런 의자이다.
할머니 댁에 가면 우리 할아버지는 그 곳에 앉아 계실 때가 많이 있었다.
그 의자에서 TV도 보시고 책도 읽으시고 과일도 드셨다. 가끔은 의자가 너무 편해서인지 주무실 때도 있었다.
나는 종종 의자 발받침에 앉아 장난을 치곤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께 매번 혼이 나고했다.
그 의자는 할아버지만의 의자였다.
영원히 할아버지만의 의자일 것 같았던 의자는 지난해에 주인을 잃었다.
이젠 할머니 댁에 가면 의자에 할머니가 앉아 있을 때도 아버지가 계실 때나 어머니가 앉아 계시기도 한다.
지난 여름방학 때 할머니 댁에 가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꽃들이 활짝 피어있어서 할머니께 무슨 꽃이냐고 여쭤보니 수국 꽃인데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신 꽃이며 할머니와 함께 심으신 꽃이라 하셨다.
그래서 그 의자에 앉아 수국 꽃을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를 보며 그냥 웃어주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그립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의자에 앉아있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꼭 나와 함께 계시는 것만 같아 행복하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수 안강제일초등학교 4학년1반 남서윤
-의자-
양손 가득히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엄마를 도와 분리수거를 하러 쓰레기장으로 걸어갔다. 쓰레기장 앞에 다 왔을 때 쯤, 내 눈에 들어 온 한 물건이 있었다. 누군가 내다버린 한 나무의자였다.
“엄마, 저 의자 가져가면 안 돼요?”
나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집엔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지만 의자는 단 1개다. 그래서 난 동생과 항상 바닥에 작은 책상을 놓고 공부하거나 책을 읽었는데, 늘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언니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누가 내다버린 걸 왜 주워 가노? 나중에 사 줄게!”
예상했던 엄마의 말이지만 나중에 라는 말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기에 금세 튀어나온 내 입이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저 의자 아직 튼튼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데 닦아서 쓰면 안 돼요?”
3층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기까지 내 어리광은 계속 되었다. 계속 된 나의 어리광에 엄마는 귀찮으셨는지
“그럼, 어두워지면 가지고 오자꾸나!”
엄마는 누가 쓰다가 내다버린 물건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부끄러우셨는지 밤에 가지러 가자고 하셨다. 나도 약간은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내 의자 생각에 기뻤다. 곧 어두워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지 없는 지, 망을 살피던 엄마와 나는 꼭 다른 사람 물건을 훔치듯 재빠르게 의자를 집어 왔다. 콩닥콩닥 뛰는 내 가슴 앞에 놓인 의자는 낮에 보았던 모습과 달리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여기저기 스티커가 붙어 볼품없었다. 의자라는 생각에 자세히 보지 않고 엄마한테 가져오자고 졸랐던 것이다.
“아이고! 이런 걸 가지고 오자고 했나?”
엄마는 잔소리를 하고, 의자는 다시 우리 집 뒤 베란다로 쫓겨났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언니의 길다란 책상 앞에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엄마가 내가 학교 간 사이, 어제 주워 온 의자에 예쁜 연한 보라색깔 페인트로 칠하셔서 완전 새 의자 같았다. 드디어 나도 책상에 앉아 편하게 공부 할 수 있게 되었다. 언니는 책상이 좁아졌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너무 행복했다. 의자야,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가작 금장초등 5학년 2반 김동휘
-의자-
의자는 서서 있으면 힘들고 불편해서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가구다.
나는 이번 3월 1일에 금장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처음 전학 와서 힘들었다. 그래서 나처럼 전학을 와서 힘들어 하는 친구들에게 의자처럼 편안하게 마음을 놓고 대화하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전학 와서 아는 친구1명 없고 낯선 학교에서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정말 그 누구보다 힘이 되고, 고맙고, 반갑다는 것을 전학 와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실망하지 않고, 우울해 하지 않게 친구에게 힘이 되어 전학 온 친구가 되어 슬픈 일은 함께 나누고, 행복은 2배로 불어나는 큰 힘이 되는 친구가 되고 싶다,
가작 부산 가야초등 5학년6반 이정빈
-의자-
우리는 태어나면서 많은 의자를 접한다. 나는 오늘 여기에 내가 접해 본 많은 의자들 중에 하나의 의자를 말하여 한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매일 앉는 의자 5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식탁의자이다. 우리 가족은 총 다섯 명,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나까지.
우리 가족은 각각 자기전용 식탁의자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밥 먹자! 아버님도 식사하세요!”
하면 우리 다섯 명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전용의자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할아버지는 가끔씩 우리를 훈계하시기도 하고, 어머니는 반찬이 넘쳐나는 데도 반찬 먹을 게 없다하는 것은 약과에, 맛있는 음식을 싱겁다고 하시며, 아버지는 언니랑 나의 개그코드를 맞춰주신다고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를 하고 계신다.
그럴 때면 우리 가족 모두 웃음꽃이 피어서 집안은 금세 환해진다. 식탁의자가 우리가족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족들 모두가 할 일도 많고 바빠 서로 얼굴을 잘 못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밥 먹을 때에도 몇 자리가 빈다. 그 비는 자리가 채워 질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 샌가 그 자리는 채워져 있다. 어떻게? 우리는 가족이니까.
수많은 자리들. 그 중에 우리 집 식탁 의자는 우리 가족을 묶어 준다.
‘식탁 의자야, 고마워’
가작 안강제일초등 4학년 1반 정유진
-의자-
의자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참 힘들다’이다. 앉을 수 있고 묘기도 부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물건이지만 난 의자가 싫다. 작년에 강당에서 학부모 설명회가 있었는데 우리 반 선생님이 설명회 담당이라서 강당 지하에서 우리가 의자를 몇 개 갖다 놓고 정리해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몇 개를 갖다 놓고 할 때는 친구들이랑 얘기도 하고 하면서 하니까 재미있었는데, 그게 계속하다 보니까 팔도 아프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니 숨이 찼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말해보지만 선생님은 빨리하고 끝내자만 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셨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의자를 나르기 시작했는데 남자 아이들은 장난만 치고 열심히 하지 않아 한마디 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결국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은 싸우기 시작했다. 여자 애들은 똑바로 하라하고 남자 애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싸우다가 결국 선생님이 오셔서 끝낼 수 있었다. 다 같이 열심히 해서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남자 애들은 장난만 치니까 너무 얄미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의자 나르는 것 때문에 친구들끼리 싸우게 돼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날 이후로 의자를 보면 그 날 일이 떠오른다. 그래서 의자는 내 머릿속에 안 좋은 단어로 기억되고 있따. 사람들은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뺄 때 도움을 주는 우리 삶에 친숙한 의자. 언제쯤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이 글을 쓴다.
가작 포항제철초등 5학년6반 이영은
-의자-
우리는 다리가 아프면 이자에 앉는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아파올 때 의자에 앉는 다. 하지만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의자가 편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한 물건 같다.
오징어와 의자는 비슷하다. 오징어도 처음 먹을 때는 짭쪼름 하고 맛있지만 계속 먹으면 치아 사이에 끼고 몹시 아프다. 그래서 오징어와 의자는 비슷하다
아까도 그랬지만 의자는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삭신이 쑤신다. 그렇기에 나는 의자가 충고라고 생각한다. 충고는 처음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자꾸 들으면 살짝 기분이 나쁘다. 내가 그렇게 모자랐던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충고는 나를 사랑해서 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속상하다. 고쳐나가야 하는데, 자꾸 심술이 난다.
의자와 충고의 공통점. 처음에는 좋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져 웃음이 지어진다. 하지만 계속 있을수록 아프다.
의자와 충고의 차이점. 의자는 내가 원할 때 가져다가 앉을 수도 있고, 그냥 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충고는 내가 원할 때와 원하지 않을 때와 상관없이 들려온다. 어떨 때는 울음이 나온다.
5학년 2학기 수학은 여름장학 떼 미리 배웠다. 12년 인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계산식들이 나에게 혼돈을 가져다주었다. 배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렵고 헷갈리는 수학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다. 정말 열심히. 그런데 채점 할수록 비가 온다. 화살이 온다. 빨간 화살비가 내린다. 틀린 걸 다시 풀 때 충고를 듣는다. 하지만 꾸중처럼 느껴지는 엄마의 축고.
‘나는 열심히 했는데.’
섭섭한 마음이 적지 않게 들었다.
충고는 섭섭하다고 느껴진다. 충고가 꾸중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엄마, 아빠 선생님 등등 모든 분들이 내게 하는 충고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분들의 충고를 사랑으로 느끼고 나도 사랑으로 보답 할 것이다.
이 의자에 앉아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그 사랑을 느끼고 싶다.
가작 안강제일초등 4학년 3반 김조은
-의자-
갑자기 얼마 전에 의자에 대한 일이 생각난다. 나는 공부를 내 방 책상에서 잘 하지 않고 늘 거실에 엎드려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존다. 그래서 부모님께 야단을 맞아 속상한 적이 있다. 나는 방에 들어가면 답답해 방이 좁지도 않는데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거실 바닥에서 하게 되었다.
엄마는 집중도 안 되고 허리 아파진다고 의자에 앉아서 하라고 계속 이야기 하는데 나는 잔소리처럼 들렸다. 나만 편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얼마 전 큰 이모부가 우리 집에 오셨는데 내가 엎드려 하는 걸 보고 한마디 하셨다.
큰 이모부는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가르치는 교수님이시다.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 늘 허리 펴서 똑바로 앉으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의자에 앉을 때도 엉덩이 깊숙이 집어넣고 등을 곧게 펴고 앉으면 집중력도 좋아지고 척추가 정렬되어 키도 1-2CM 정도 더 커진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 날 우리 엄마는 책상을 거실로 옮기고 동생과 나의 의자를 내 놓고 공부를 여기서 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동생과 나는 공부가 더 잘되고 책도 한권이라도 더 읽게 되었다. 솔직히 엎드려 안 해서 편했다. 오늘 이 자리도 불편하게 앉아 쓰고 있는데 의자가 있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의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 같다,
장려 유림초등 6학년1반 정혜영
-의자-
저는 신라문화제 한글 백일장을 맞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치원, 초등학생, 꿈을 이루는 성장의자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유치원 때의 의자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유치원에서 쓰는 의자는 작고 가벼우며 제가 쓸 땐 나무의자였습니다. 유치원 때 유치원 의자에 앉았을 땐 비록 의자가 나무의자였지만 포근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또한, 그 의자에 앉을 땐 공부, 힘든 일을 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놀이의 수단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 의자에 앉은 시절엔 걱정, 근심이 없었습니다.
둘째, 초등학생 의자에 앉을 때는 유치원 의자처럼 나무로 되어있긴 하지만 포근하거나 놀이의 수단으로 쓰이진 않습니다. 공부를 할 때만 쓰이죠. 그 의자에 앉을 때는 어릴 때보단 근심 걱정이 어느 정도 있었던 때 같습니다. 저학년 땐 조금 덜 하였지만 고학년이 되니 공부 걱정, 등수 등 많은 걱정이 생깁니다. 그리고 앉을 때 유치원은 편안하고 행복하지만, 초등학생은 공부 걱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5, 6학년은 공부를 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6학년인데 초등학생 때 의자에 앉은 경우의 90%가 공부, 시험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의 의자는 어느 정도의 걱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셋째, 나중의 꿈을 이루고 나서의 의자에 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 꿈은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의자는 굉장히 크고 무겁습니다. 선생님들은 유치부, 초등학생, 중 고등학생들보다도 더 많은 걱정이 있습니다. 선생님 의자에 앉으면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법,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을 어떻게 타이를지 등의 근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단한 걱정을 하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앞으로 저도 이런 걱정을 하는 선생님의 의자에 앉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난 느낀 점은 이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들을 존경하며 선생님을 닮을 것입니다.
중등 산문
장원 안강여중 1학년3반 정아영
-강물-
사람들은 힘든 일이나 인생의 고비가 있을 때
“괜찮아, 힘든 시간도 강물 흐르듯이 스쳐 지나갈 거야.”
라는 말로 위로 하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냥 우리의 삶이 강물 같다. 남들이 하는 대로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엄마가 보내준 학원을 다니며 살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강물 흐르듯 지나, 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남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그저 흐르는 강물이지만 그 속에는 내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고 걱정거리가 있으며 하고 싶은 꿈이 있다.
무던하게 강물 흐르듯 사는 인생.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살다보니 정말, 말 그대로 나는 아무런 의미 없는 흘러가는 강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빨리빨리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을 따라가라고 하지만 나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구경도 하고 싶고 커다란 바위에도 용기 있게 부딪혀 보고 싶으며 모래에 머물며 잠깐의 휴식도 하고 싶다. 엄마가 가라는 대로 가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길로. 어차피 목표는 모두가 바다이지만 남들이 가기 때문에가 아닌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바다였으면 한다.
지금 우리 시기에 해야 하는 게 공부이긴 하지만 나는 남들이 다 하기 때문이 아닌 내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의미 있게 공부를 해 바다로 가고 싶다.
우수 경산 삼성현중학교 3학년2반 김수지
-강물-
굵은 빗줄기가 창을 때린다. 시험 끝나고 처음 쉬는 주말인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잡아놓은 약속은 모두 취소하고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강물의 온도가 그날처럼 차갑다. 갑자기 어디서 그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날도 그랬다. 찾아 온 아침, 이제 정말 떠나 보내야하는 발인이라는 생각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툭툭, 거친 상복치마 위로 젖어 들어갔다. 아빠가 자주 다니던 길을 따라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내 무릎 위에는 팔자주름 지으며 웃고 있는 아빠사진이 있고, 창밖으로는 아빠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형산강을 따라 아빠 작업실로 가는 길, 가끔 차가 흔들리는 틈에 보이는 아빠 얼굴은 나에게 그만 울라고 다독이는 것 같아. 그럴 때마다 마를 만 하던 눈가는 다시 젖고, 또 마르기를 반복했다. 눈물로 가득 찬 탓에 뿌옇게 핀 시야는 차 창밖의 강물을 응시 했다. 창에 맺혀 빠르게 멀어지는 빗방울이 자꾸 아빠 눈물 같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부딪힌 차창에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떼어냈다. 흰 천으로 몸을 감싸던 아빠의 몸 같아서 한참 동안 손을 부여잡고 강물만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손을 뻗어 창가에 손바닥을 올리고 내릴 때까지 형산강에 떨어지는 눈물들을 바라보았다,
납골당에 도착하니 아빠가 우리를 배려한 건지 눈물이 그쳐다. 내 머리 위로 잔뜩 몰린 먹구름에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나를 삼킬 듯 부는 바람에 옷을 여미고 퉁퉁 부은 눈으로 아빠를 보냈다. 아빠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돌을 덮으면서 나도 내 가슴 속에 아빠를 묻었다.
슬며시 눈을 떴다. 그 날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비가 내렸다. 조용히 흐르는 내 눈물과 우수수 떨어지는 아빠의 눈물을 모아 내 가슴 속, 아빠를 묻은 자리 앞에 두었다. 지금 창 밖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를 내 가슴 속에 넣었다. 짙은 하늘을 바라보며 창문을 닫았다. 보고 싶은 아빠 잘 지내고 있겠지.
그 날부터 비가 내리면 아빠 생각을 하며 아빠의 눈물 한 방울, 내 눈물 한 방울 모아 아빠와 나, 둘만의 강물이 되었다. 평온히 흐르는 강물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항상 보고 싶어요. 아빠.’
우수 무산중 3학년1반 김희진
-강물-
저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히 흘러간다. 사람들은 힘든 일, 슬픈 일을 겼을 때면 탁 트인 강을 찾는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그런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히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 해주는 것 같다. 무심하게 나를 감싸 안아주는 바람과 평온한 강물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진다는 듯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친구랑 싸우고 울면서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엄마는 애가 우는 것을 보시고는 차에 타라고 하셨다. 차를 타고 강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 때는 “저 강물이 내 기분에 무슨 위로가 된다고 맨날 여기 와서 이래!”라고 말할 때면 엄마는 “저기 강물이 흘러가지?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다 괜찮아 질 거야”라고 이야기 하시며 “너 조금만 크면 혼자 강 보러 올걸?” 이라며 이야기 해주셨지만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모한 나는 ‘강물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엄마의 말처럼 힘든 일, 슬픈 일이 생길 때 강을 찾아 마음을 정리하곤 한다. 이제는 엄마 같은 강이 나를 위로해 준다.
우수 서라벌여중 2학년6반 이나영
-강물-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올해 가을비가 안 오는 날을 탐타 오랜만에 강변길을 걷고 싶어 일주일 전 보문단지를 찾았었다.
시간이 오후였기에 좀 더 일찍 올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금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 위로 물이 일렁일 때마다 햇볕이 반짝 거렸다.
바람이 고요해 지면 내 모습이 강물에 비친다.
물이 좀 더 맑았으면 물고기까지 보이지 않았을까. 아쉽다.
강물이 깊어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을 보았지만 그래도 좀 더 가까이 내려가 보았다.
얕은 물은 가을바람을 받아 차가웠다. 바닷물을 만졌을 때처럼 말이다.
고개를 드니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어 갈 채비를 하는데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 또 강변에 올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난 강물이 좋다. 비탈길 잔디를 의자 삼아 앉아 있으면 강물이 보이는데 강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길에 내 근심 걱정도 다 담아 가 줬으면, 하는 생각은 오늘날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모두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가을이라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으나 여름엔 상황이 달라진다. 보문단지 강이 아닌 다른 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다슬기를 잡을 것이다. 그 때는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온갖 근신 걱정을 버리고 오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강물이 우리의 근심 걱정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강물은 가끔 마음을 달래 준다. 어떨 땐 학교 심리 상담사 선생님 보다 났다. 비록 말을 할 순 없어도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생각 할 수 있게 하는 것에서 큰 위로를 얻고 간다.
강물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 대가 있다. 매일 하루를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 누가 알았을까?
오늘 날 마음이 지치고 몸이 무거운 사람들에게 병원도 좋지만 종종 강가를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도 한시름 덜 수 있을 것이다.
가작 경주여중 1학년3반 이채미
-강물-
어릴 때, 강물을 보면서 늘 시기해 했다. 맑고 깨끗한 강물에 가까이 다가가면 내 모습이 그대로 비추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신비로움에 잠시나마 녹아들 곤 했다.
하지만 요즈음 강물이 변했다. 계속되는 무더위와 가뭄으로 메말라 버린 강물. 신나게 흐르던 그 모습, 맑게 나를 비춰주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신비로움은 어디를 가고 황량한 땅만이 남아 있다.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요즘 강물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 사람들은 다 또 같은 것 같다. 뭐든지 하나를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물 만큼은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조금만 배출해야 한다. 그리고 물을 아껴 쓸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보는 순간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 예전 강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바뀌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짐, 그리고 노력이여야 한다.
가작 월성중 2학년 2반 김규현
-강물-
며칠 전 지진으로 인해 불안감에 휩싸였던 우리들에게 또 다른 위험이 닥쳐왔다. 태풍‘차바’가 우리나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그 크기는 어마어마하고 피해가 클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그래도 나는 ‘지진’이라는 큰 재난을 겪었기 때문에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난 수요일 오후, 학교 버스를 타고 서천둔지를 지나고 있었다. 담담했던 나는 순간 겁이 났다. 평소보다 많이 불어있는 탁한 강물들이 휘몰아치면서 빠르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장 턱 밑까지 차 올랐었다. 그 강물들은 먹이를 쫓는 사나운 맹수들 같았다. 원래 강물은 맑으면서도 잔잔하게 흘렀다. 주변에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터미널 근처다 때로는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붐벼 시끌벅적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수요일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강물만 세차게 흐르니 조금 무서웠다. 강물이 나에게 화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무서웠다. 만약에 강물이 조금이라도 더 불었으면 주차장에 있던 자동차들은 물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막힘없이 흐르는 강무에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빨리 복구되었음 한다. 강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 와 그 풍경을 보는 우리들에게 안심과 위로를 해 주면 좋겠다.
가작 화랑중 1학년2반 임 경우
-강물-
지금 가을은 축제의 날이다. 지진과 태풍 같은 시험이 끝나서 몇 주 후면 축제가 강물처럼 밀려온다. 강물처럼 밀려 온 축제들은 즐거움을 가지고 온다. 강물이 우릴 쓸고 가면 시험 스트레스는 들고 가고 즐거움을 남긴다. 난 중학교 1학년 이여서 시험 스트레스는 없지만 학원 스트레스가 많다. 하지만 축제가 그것을 쓸고 갈 것이다, 학교에서 빨리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동생은 이 시험 같은 시를 쓰고 알밤 축제에 간다. 그리고 나는 강물처럼 밀려 올 축제 계획을 짤 것이다. 형, 누나들의 시험이 끝나고 학교 축제 때문에 학교가 요란하다.
하지만 그 강물이 휩쓸고 간 뒤 우리는 여진과 같이 슬픔이 계속 온다. 학원 시험결과 학교시험 성적 등 힘듦과 슬픔이 밀려온다. 난 그걸 이겨내고 강물처럼 될 것이다.
가작 경주여자중학교 1학년3반 신혜영
-강물-
강물은 바람을 따라서 흘러간다. 둥실둥실 나뭇잎과 함께 바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곳에 와 길을 잃고 방황한다. 나도 강물처럼 다른 지역에 와서 방황 한 적이 많다. 초등학교 3학년과 올해, 타지로 옮길 때마다 나는 항상 ‘이번에도 잘 적응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항상 잘 적응 했던 것 같다. 나도 어느새 강물이 된 건가. 바람을 따라 타지에 와서 새로운 물에 함께 스며드는 강물처럼.
나쁜 폐수와 쓰레기에 내 물이 탁해지지 않고 투명하게 비치는 강물이 되어 남들을 도와주는 강물이 되어야 겠다.
가작 안강여중 1학년3반 정다예
-강물-
외할아버지 집에 갔을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상주보 구경을 갔다. 차를 몇 분 타고 가다보니 상주보애 도착했다. 상주 보를 구경하다가 멀리서 강 하나가 보였다. 이모한테 물어보니 강이라고 했다. 나는 아름답게 흐르는 낙동강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천 대를 가기로 했다. 낙동강을 보고 싶은 마음에 난 들떠 있었다. 경천 대에 도착했다. 나는 내리자마자 낙동강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이모가 “다예야, 낙동강을 보려면 산을 타야 된다. 나는 산은 타기 싫었지만 낙동강을 보려고 있는 힘을 다해 산을 탔다. 나는 산을 오르는 중에 신기한 것을 보았다. 오른쪽 길에 황토색 돌이 있었다.
“엄마 여기에 왜 돌이 있어?” “아 이거는 황토 길이야. 발 지압 해주는 거야 신발을 벗고 걸아 가 봐.” 나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바로 신발을 벗어서 지압 판을 걸어갔다. 발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낙동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서 올라갔다. 경천데 전망대에 도착했다. 반짝이는 낙동강이 한눈에 다 보였다. 강물이 졸졸졸 흐르는 것이 보기 좋았다. 햇빛 때문인지 더욱 반짝반짝 거리고 예뻤다. 힘들게 올라 와서 보니 더욱 보람 있고 알참 경험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을 본 것은 처음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풍
<장원>
선덕여자고등학교 1학년 5반 임지윤
그가 지나간 자리엔 이웃을 챙기는 배려 심과 따뜻함, 자신의 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참 예뻤다. 혼란스러운 시간은 계속 흘러갔지만, 빗물로 인해 대지의 따스함은 식었지만 아직 우린 식지 않았다. 우리 마음속 태풍이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해보고자 우산 속으로, 정류장 속으로 이 큰 두려움을 자꾸 욱여넣었지만 하늘은 비를 더 뿌릴 뿐 이었다. 무서웠다. 지진이 발생한 지 며칠도 안됐는데 이 사나운 손길을 견뎌야 한다니 하지만 나는 믿었다. 우리 모두 힘 합쳐 이겨낼 수 있다고.
물이 가득 찬 반지하 이웃을 위해 서슴없이 팔 다리를 걷어붙였고 쉴 새 없이 물을 퍼냈다. 비를 맞는 친구에게 우산을 건넸고 추위에 떠는 친구와 담요를 나눠 덮었다.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만큼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져갔다.
기계처럼 차갑고 내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삭막한 사회를 하늘은 다 보고 있었나 보다. 부모님의 사랑의 매처럼 하늘은 따뜻한 사회를 위해 그리 모질게 매질을 해댄 것 같다. 계속되는 지진의 불안함, 이웃에 대한 무관심함, 물질이 최고라는 삭막한 정신 그 모든 걸 그가 안고 떠났다.
어제 신라문화제 개막식을 지켜봤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모두 한마음으로 맞아가며 희망을 상징하는 흰색의 풍선을 손에 쥐었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들이 다 함께 날아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태풍이 우리에게 준 메시지 이웃의 소중함, 내 고향의 소중함 같은 사랑,
비를 맞으면서도 행복했다. 이렇게 모든 이들의 행복을 빌 수 있어서 이런 마음을 갖게 해준 태풍이 고마워서.
하늘이 천 년 동안 내리 사랑한 경주를 또 한 번 하늘이 사랑을 베풀었다.
더욱 사랑 넘치고 예쁜 경주가 되리라.
<우수상>
경주고등학교 1학년 8반 이정훈
태풍이 왔다. 태풍 ‘차바’ 태풍은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경주에 크나큰 2차 피해를 줄 것이라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경주보다 울산, 그리고 부산 지역에 대홍수가 나는 등 언론에서 얘기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국 기상청의 기상 예보의 정확도는 약 90%에 육박하는, 매우 정확한 편이다. 하지만 왜 그 10% 남짓의 확률로 엇나가는 걸까? 자연에게는 그 자체로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고 확신한다. 자연은 그 자체로 38억 년 동안 변화하고, 진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길어 봐야 450만년, 그것도 현생 인류와는 다른, 원숭이나 유인원에 가까운 형태였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도 약 8500배정도의 차이이다. 하지만 그 수치와는 또 다른, 자연만이 성스러움과 위대함이 존재한다. 아무리 크나큰 재해가 들이닥쳐도 시간이 자나면 그 흔적조차 자연의 경이로움이 되어 버리는, 그런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매력을 지닌 것이 자연이다. 이번 태풍은 내게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한 고마운 존재이다. 태풍으로 피해를 본 수많은 사람들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피해를 완전히 복구해 낼 수 없고, 그런 피해를 다시 자신의 특징으로 승화시킬 수 없다면 , 그 또한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함이 아닐까.
자연은 인간이 멸종한다 해도 그 모습을 간직하겠지만,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요즘 자연을 개발할 대상으로 보고 자연을 파괴하는 공사들이 많다. 대자연은 영어로 ‘Mother Nature' 라고 한다. 자연은 어머니이고 인간은 자식이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자연은 어머니와 같아 아무리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고 속을 썩여도 묵묵히 인간을 보듬고 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다면 언젠가 자연재해로 인간을 벌할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듯이…….
<우수상>
부산중앙여자고등학교 1학년 10반 박정후
씻지 않은 몸보다 더러운 것은, 씻지 않은 심장이라 생각했다. 심장이 더럽지 않아야만 온 몸에 따뜻한 피와 건강한 사상을 보내 줄 터이니. 그래서 늘 티끌하나 없고 청결한, 올곧은 심장을 원했다. 따뜻하고 참된 가슴을 원했다.
그 험난한 과거 속에서 어느 시인이 그랬듯, 나도 늘 자신을 닦고 닦으며 내 거울 속 녹을 닦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의지들은 생각뿐인 껍데기였을까.
막 가을에 접어들던 주말 오전이었다. 나는 집에서 공부할 교과서를 가지고 오기 위해 학교로 향했다.
새파란 하늘은 날 기분 좋게 했다. 교과서를 챙겨들고 학교를 나섰다. 조금 걸으니 허기가 졌고, 오늘 아침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근처 편의점에 들러 초코우유 하나를 샀다.
초코우유를 손에 꼭 쥐고, 집에 오기 위해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였다. 횡단보도 앞에는 각가지 물건들도 노점상을 펼쳐 놓으신 할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그 할아버지를 알았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시는 분이었다. 언제 횡단보도를 지나든 늘 그 할아버지가 계셨다. 새벽에 가까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식사는 언제 하시는지, 노점상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드시진 않은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옷은 늘 같았다. 허름하고 곳곳이 찢어진 얇은 점퍼에 다 헤진 등산복 바지, 마치 할아버지께는 그 노점상의 물건들과 늘 앉는 손바닥만 한 의자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
문득, 노점상의 할아버지께서도 나처럼 배가 고프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 사람의 허기를 달래 줄 수 있는 것, 설령 배고픈 상태가 아니라 해도 달콤함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것.
마음속에 태풍이 몰아쳤다.
‘이 우유 하나가 더 값지기 쓰일 곳을 찾았어.’
심장이 뛰었다. 태풍은 더욱 거세졌다. 비와 바람이 번갈아가며 나를 갈등 속에 가두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순간, 그 모습 그대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말았다. 먼지가 가득히 덮인 심장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스스로를 닦아내고 있다며 내게 거짓말을 해 왔다.
우유를 꼭 쥔 내 손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무도 날 혼내거나 면박주지 않았지만 왜 그렇게나 부끄러웠을까.
며칠이 지났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해가 자취를 감춘 거리. 원래라면 버스에 몸을 실었을 테지만, 그날따라 버스가 내키지 않았다. 거리 상가는 모두 문을 닫고 큰 길의 차들만이 반짝이며 신나게 달렸다. 나는 길을 건너기 위해 육교를 건너고 있었다.
육교 위 중심에서, 나는 멈춰 섰다. 흔들림이 느껴졌다. 무섭다기 보다는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난간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차들이 그린 빛들이 예뻤다. 며칠 전의 오전이 생각났다. 그 때도 똑같이 길을 건넜는데…….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나는 뒤로 사람이 오가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육교 밑의 한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어둠 탓에 형체만 희미했다.
그 사람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걸음 걷고 날 쳐다보고, 또 한 걸음 걷고 날 쳐다보았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야심한 밤, 육교 밑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불안해 보였나 보다.
그 사람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듯 초조해보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내심 미안해져 얼른 육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걸으며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이런 먼지 쌓인 나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과연 그 정도의 가치 있는 사람일까.
그리고 다시, 또 다시 다짐했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먼지를 걷어내어, 심장의 먼지를 걷어내어 다신 폭풍 속에 두지 않으리라.
<우수상>
진해세화여자고등학교 2학년 7반 김미희
얼마 전 제18호 태풍 차바가 우리나라를 덮쳤다. 경주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불과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났고 그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있었고 그런 나에게 엄마는 늘 다 인과응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자연이 주는 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해주실 때 마다 완벽하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엄마에게 그러면 자연은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벌이 아니겠냐고 되묻곤 했다. 그런 내 질문에 엄마는 그런 분들께는 힘든 고비 정도가 될 것이라고, 그런 분들도 이렇게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연을 지키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부모 마음일 것이라고도 덧붙이셨다. 그제서야 나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오빠가 태어났을 때, 자라면서 이리저리 다쳤을 때, 처음 상장을 받아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커버린 우리를 봤을 때마다 말씀해주신 엄마의 희노애락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렇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엄마 주변에는 늘 자식들이라는 큰 태풍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 커다란 태풍을 홀로 감당하며, 우리에겐 언제나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 이상 큰 태풍이 아닌 당신과 같은 연꽃처럼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나는 또다시 느끼게 되었다.
<가작>
경주고등학교 2학년 1반 김중권
“아, 몰라! 이럴 거면 그냥 우리 헤어져!”
“그래- 나도 좋다 이거야.”
진짜 사람마음은 하나도 몰라주고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만데……. 흥이다.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다시 연락하나 봐라.
일부러 발소리를 쿵쿵 대며, 현관문을 크게 열어젖히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적막함만이 감도는 집안이었지만 지유와 싸우고 난 뒤라 그런지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쯧”
지유를 생각하니 괜히 다시 짜증이 난다. 이럴 땐 그냥 모든 걸 잊고 자는 게 최고다. 시계를 보니 아직 8시 3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몰라 지금은 그냥자고 싶다.
흠, 내일은 피시방이나 갈까.
삐비비빅, 삐비비빅.
매우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진짜 알람소리 좀 바꾸던가 해야지.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이제 옷을 입은 채로 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흠……. 어제 뭔일이 있었더라……. 아!
조금씩 어제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지유와 데이트를 갔다가 저녁 먹는 중 감정이 격해졌고? 말다툼을 하다가…….
‘우리 헤어져!’
‘그래, 나도 좋다 이거야.’
큰일 났다!! 좋긴 개뿔. 어제의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거냐.
아, 이제 어떡하지. 일단 전화라도 해볼까.
난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번호를 입력했고 조심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망했다. 이거 무조건 화난 거겠지? 이제 어떡하지.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그래, 서로 홧김에 한 말인데 설마 이대로 끝이겠어? 분명 휴대폰이 꺼져있는 것도 오늘 늦잠 잔다고 꺼놓은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일단 좀 씻으면서 머리를 식히자
쏴아아-
찬물로 머리부터 씻으며 끈적함과 땀 냄새를 씻겨갔다. 분명 머리도 몸도 상쾌하고 비누향이 나기 시작했지만 가슴 한켠이 계속 불안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45분. 이제는 일어났을 것이다. 난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하하, 큰일이다. 차라리 직접 찾아갈까? 거리는 좀되지만 여기서 휴대폰 켜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단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할 꺼 같은데, 그래, 가자, 까짓것 가서 몇 대 맞아주고 제대로 사과하자.
난 그렇게 다짐하고 옷을 차려 입었다. 돈도 두둑이 챙기고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밖으로 나와 보니…….
우우웅- , 우당탕탕, 덜거럭 덜거럭,
날씨가 심상치 않다.
난 급히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틀었다.
“기록적인 크기와 힘을 자랑하는 이번 태풍은 한반도를 직격으로 통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태풍의 영향권에 속하는 주민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마시…….”
큰일 났다. 어떡하지. 사과는 해야 하는데 휴대폰은 꺼져있고, 밖엔 태풍이 불고, 그냥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릴까? 아무리 오래가더라도 모레쯤엔 좀 약해지겠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유야 잘 모르겠지만 왠지 오늘이 지나면 안될 것 같았다. 난 마음을 다잡고 우산을 챙겨 다시 집을 나섰다.
“으아아악!”
:으오오오!“
그곳엔 자신 있게 나오자마자 우산은 망가지고 온갖 쓰레기에 얼굴과 몸을 가격당하여 강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불쌍한 소년이 있었지만, 그건 나였다. 아직 지유 집까진 멀었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다시 생각해보자 집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과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하지만 지금 지유를 찾아가 사과하는 것, 넌 어느 쪽을 선택할거냐!
극한 상황에 드디어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도 재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우문을 하다니.
“그런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어떻게 든 지유에게 가서! 제대로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며 사과한다. 끝! 더 이상 생각금지!”
이봐 한지유, 어제는 진심이 아니었다고, 다시 한 번 너의 그 웃는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꼭 기다리라고-.
그렇게 힘겹게 다가가는 내 눈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카락과 옷가지를 이리저리 휘날리며 이런 날씨에도 우산을 쓰지는 않고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 즉시 달려가 양팔로 끌어안았다.
“한지유! 너 이게 뭐하는 거야! 위험하게 우산은 또 왜 안 쓰는 건데?”
“참내, 너도 마찬가지면서, 자, 이 우산 같이 쓰고 가자, 오늘은 특별히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가작>
경주여자고등학교 1학년 1반 윤정현
태풍은 열일곱이다. 바람은 감람색의 나뭇잎을 뒤흔드는 것이 고작이고 떨어지는 빗방울은 정수리를 젖게 할 뿐이나, 태풍은 죽어가는 모든 것을 쓸어간다.
그건 차라리 생명의 원동력에 가깝고 어찌 보면 신념의 고찰에 가까워서, 그 요동치는 움직임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창 밖에 비바람이...
비틀즈의 음악을 틀고 머그에 우유를 담아 마시며, 태풍이 치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비가. 비가 내린다. 발목을 축축하게 적셔 흙 구정물이 들, 허나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로되 차라리 나는 그 비바람을 태풍을 사랑하련다.
흙이 뒤엎어지고 물이 섞이고, 천지가 미친 듯 날뛴다. 이 난동이 오래지 않음을 안다. 그 가운데는 차가울 정도로 평온한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태풍을 사랑한다. 열일곱을 닮은 태풍이 바깥에 쟁쟁할 때, 나는 외로움을 기꺼이 입고 빗물을 맞으러 나가고픈 충동을 느끼곤 한다.
<가작>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2학년 1반 김효민
“할머니, 할머니!!”
119 구급대원이 갑작스럽게 엄마께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119입니다. 지금 어머니께서 응급상황이라 응급실입니다.”
수화기 넘어로 들리는 할머니의 소식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서둘러 엄마와 병원으로 달려가 수술대 앞에 홀로 누워있을 할머니를 기다렸다.
“제발, 별일 없게 해 주세요”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는 중 수술실 밖을 나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그만 엄마의 눈에서 태풍처럼 세찬 빗방울들이 쏟아졌다. 손주에게 용돈 한 푼 더 주고 싶은 마음에 나물을 팔다가 태풍으로 부는 바람에 넘어져 허리를 크게 다치신 것이었다. 병실 안에서까지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고 할머니께서는 거칠거칠한 손으로 나와 엄마의 손을 쓰다듬어 주시며
“나는 괜찮데이, 걱정하지 말그라 그만 울어 뭐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하시며 농담을 던져 애써 괜찮으시단듯이 빙긋 미소를 지으셨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야윈 할머니의 팔에 커다란 주사바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모든 게 다 나때문일꺼란 생각에 병실밖 모퉁이에 앉아 펑펑 눈물을 쏟아 부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는지 회복되지도 않은 아픈 몸을 이끌며 휠체어를 타고 나의 옆에서 말없이 토닥여 주셨다.
“와이리 우울하노 뚝해라 뚝!”
“죄송해요 할머니……. 다 저 때문인 거 같아요”
“니때문 아니다 우리 똥강아지 다컸네 할미 걱정도 해주고 엄마 기다리겠다 어여 눈물 닦고 들어가자”
병실에 들어가는 동안 할머니께선 엄마걱정을 하시며 많이 여린 엄마라 상처주지 말라고 아픈 와중에도 막둥이인 엄마를 챙기셨다.
병실에선 엄마가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우리가족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던 엄마라 강한 줄로만 알았는데 엄마도 나처럼 엄마의 품 안에선 한 없이 여윈딸이였단걸 이제야 깨달았다.
몸은 한없이 악해져 귀저기까지 차고 계셨던 할머니가 딸과 손녀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약기운 때문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드시는 할머니의 모습 을보고 야윈 할머니의 팔에 꽂혀 들어가는 수액방울처럼 눈물이 뚝뚝 계속 흘렀다. 우리가족, 무엇보다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커다란 나무가 거센 태풍으로 이렇게 한없이 작게 무너지는 모습에 엄마의 눈에서 내려오는 빗방울들이 태풍으로 내리는 빗줄기보다 더 세차고 아파보였다. 우리가족의 마음은 불어오는 태풍보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보다 더 공허하고 아파왔다. 할머니께서 이렇게 크게 다치신 일이 ‘태풍’이란 자연재해보다 더 힘든 우리가족에게 불어온 쓰라린 마음의 태풍이었다.
<가작>
경주고등학교 2학년 2반 임호경
몇 주간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히던 지진의 강렬한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무렵, 우리에게 태풍이 찾아왔어. 이름은 차바라고 여기서 비행기 타고 몇 시간 가면 있는 태국이라는 먼 이국에 핀 꽃의 이름이라더군. 꽃의 연약한 그 이름과는 다르게 차바는 강력했고 잔인했지. 어제 뉴스에서 본 빗물이 가득 차오르던 모습은 곧 우리를 공포로 빠뜨렸어.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듯 창문을 두드리던 비와 세차게 부는 바람은 굳게 서있던 가로수를 괴롭혔고 농구 골대를 넘어트렸고 아직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한 소방관을 집어 삼켰어. 그래도 촉촉하게 젖은 땀과 요 며칠간 목말라하던 잎들을 두드리던 빗방울들은 그긴 쿵쿵거리던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줬어. 어느덧 비가 그치고 적당히 습기 찬 날씨에 취해 있을 무렵, 당신으로부터 온 다급한 전화를 받은 나는 먼저 당신의 안전을 묻지 않은 나를 자책했지. 당신과의 소중한 대화를 마치고서 나는 또 다른 당신들에게 전화를 했어. 또, 또 다른 당신들에게도 전화를 받을 수 있었어. 서로의 상태를 묻고 답하던 나는 차바에 대해 다시금 생각 할 수 있었어. 나 꽤나 좋은 과거를 살았구나. 라고. 꼭 태풍이 나쁜 것은 아닌가봐. 태풍이 가로수뿐 아니라, 농구 골대뿐 아니라 나와 당신의 벽을 허물었으니까.
<가작>
경주고등학교 1학년 5반 장건웅
태풍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수많은 양의 비를 끌어안고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달라는 듯이 몸을 부풀려 다가온다. 짜증난다. 우리의 짜증을 좀먹고 음흉하게 다가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 뒷 담벼락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수많은 흙과 태풍이 욕심을 부리며 가져온 비가 섞여서 우리 엄마는 밖에 나갈 때마다 장화를 신어야 할 판이다. 우리 아버지는 출근 할 때마다 눈코입이 허리케인이 만들어진 것처럼 찡그려진다. 지긋지긋한 태풍이 요즘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간은 예로부터 자연에 적응을 하며 살아온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적응만 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 즉, 인간에게 위협이 가해질 만한 것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어깨를 빌려주고는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협동심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경주는 앞서 지진이 일어난 바 있다. 개들은 목이 터져라 짖었고 어린아이들은 울고불고 하고는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답을 내놓아야할까. 경주시민으로서가 아닌 사회 속의 인간으로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자. 정치라는 것은 돈과 군사와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다. 가장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신뢰이기에, 그것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윗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응원을 보내야하며 다스리는 입장에서는 그 부담스러울 정도의 수많은 신뢰를 개인적인 역량을 뽐내며 이겨내는 것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자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엄마가 장화를 신고 현관문에 나설 때에 “곧 있으면 괜찮아진데요.” 하고 웃으며 우산을 건네주는 내가 되기를.
아버지가 힘든 몸을 이끌고 출근하실 때 가볍게 안마를 해주는 당신이, 경주에 대한 우려로 가득한 사회 속을 희망의 메시지로 채우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려상>
경주고등학교 1학년 6반 이상민
태풍이 올려면, 태풍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손을 넣어 보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수온 27℃ 그 온도를 엄청난 양의 문이 흐르는 곳 바다, 그곳에서 숨죽이며 강한 비바람을 꿋꿋이 따뜻한 바람으로 천천히 불러주며 기다려야한다.
이것이 태풍이 되기에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태풍이 씨앗들을 오로지 언젠가 거대한 구름을 이루면 나의 눈을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흔적조차 남겨질 않을 한 일념으로 숨죽이며 언젠가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세상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고 반복된 껌껌한 해류속 아무도 자산을 알아주지 않는 그곳 모두가 자신의 힘을 알아보는 날을 기다리며 꿋꿋이 오늘도 이를 갈고 분노하며 기다릴 것이다.
다들 태풍의 존재는 어떠한가. 필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동무들아 태풍의 씨앗을 삼켜 기다려라.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지 말고 청소년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분노하고 분노해라!
지나간 것에 미련을 갖지 말고 오늘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 자신에 분개하라.
언젠가, 그 태풍의 씨앗이 발화되는 날이 오면 거대한 구름을 이끌고 모두를 두려움에 덜덜 떨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니 동무들이여 태풍이 되라 태풍이 되어 모두를 휩쓸 그 달을 기다리며 이를 갈고 갈며 분노해라 강한 태풍이 되라.
<장려상>
경주여자고등학교 1학년 2반 박채연
수마가 할퀴고 간 뒤, 변해버린 모습이 그저 허망한데 무순일이 있었냐는 듯 하늘은 무심하게도 청렴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지진에 태풍이라니 그저 하늘이 원망스럽다 신다. 새빠지게 지은 농사는 추수만 남았는데 물에 잠기고 넘어지고 떨어져서 지금은 섞어 빠지고 있단다. 먹고 살아야 하기에 밥줄이자 자식 같은 것들인데……. 태풍의 상처는 너무도 잔인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거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현실이 되어버린 게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전해졌다. 없는 이들이겐 살고자 하는 희망마저 송두리째 빼앗았다. 봉사를 하면서 지켜보는 것조차 미안했다. 따뜻한 손길마저 외면한 채 모든 걸 포기한 듯 돌아서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 것 같았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 올 때마다 겁이 난다는 어르신, 손주 같은 녀석들에게 애써 웃어 보이신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라지만 나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밥이 돌 갔다고 하시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자 거칠고 딱딱한 그 손을 꼭 잡고 싶었다.
<장려상>
경주고등학교 2학년 1반 조현호
먹구름으로 메워진 하늘이 굵은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그칠 줄 모르고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속에서, 좀은은 흠뻑 젖은 몸을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도로를 달려가는 차들을 본다.
좀은은 문득 손을 든다. 바람에 손이 흔들리자, 그는 반대쪽 손도 들어 흔들리는 손을 받친다. 이내 노란택시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앞에 멈춰선다.
“어디로 갈거니?” 좀은이 문을 열고 차에 타자 기사가 묻는다.
“…….”
좀은은 어쩔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기사를 바라본다. 기사는 좀은의 얼굴을 지긋이 보더니, 말없이 엑셀을 밟는다.
“이 시간에 학생이 어디 가려고. PC방? 노래방?” 좀은의 눈치를 보더니 계속 말한다. “어디든지 말만 해. 아저씨는 엄마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야. 옛날에 선생일을 하긴 했지만.”
택시는 태풍속의 거리를 헤맨다. 좀은은 밖을 내다본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세상과 함께 내리 녹고 있었다.
기사는 좀은의 멍한 얼굴을 본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처졌고, 작은 얼굴에 허공만 응시하는 눈은 축음을 앞둔 노인의 것이다.
“얘야, 이름이 뭐냐,” 기사가 묻는다.
“.........이좀은이요.” 좀은이 대답한다
"좀은아, 어디 가고 싶니.“
“…….” 좀은은 대답도 없이 고개를 틀어 버린다.
“괜찮아. 아저씨도 그럴 때 있어. 나는 어릴 때 찢어지게 가난한 촌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었거든. 아버지는 큰형이 벌어오는 돈으로 술만 마셨고, 하루는 내가 술심부름을 가다가 돈을 잃어버렸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 혼 나셨겠네요"
"나무에 매달려서 하루 종일 맞았어. 징글징글하지? 그런데 신기한 게, 그런 아버지였어도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슬프더라. “
택시는 이제 시내를 벗어나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태풍이 그친 바다는 끝없이 푸르렀다. 기사는 말을 계속했다.
“막막한 인생이었지. 그래서 죽자 살자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돈 많은 마누라 만나서 살고 있더라.”
“그럼 택시일은 왜 하세요.” 좀은이 묻는다.
“사람 만나고 싶어서.”
나는 사람 만나기 싫어서 택시에 탔다고 말하려 했으나 좀은은 참았다.
태풍
그들에게 찾아온 건 태풍이었다.
한 소년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서로를 알았을 뿐이다. 둘은 그래서 친해졌다.
규원의 인생에서 두 가지를 뽑자면 그림과 좀은이었다. 소년의 삶은 그 둘로 인해 빛이 났으나 불타지 않았다.
욕심 많은 부모가 있었을 뿐이다. 규원은 그래서 재가 돼버렸다.
좀은이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서로의 산소호흡기로 살아왔던 인생을, 규원이 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규원을 태워버린 불이 번져나가, 자신도 태워 버릴까봐.
택시는 계속 달렸다. 그곳은 들판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초록은 바다만큼 끝이 없었다.
“넓지?” 기사가 묻는다.
좀은은 고개만 끄덕인다.
“도망칠 곳은 세상에 널렸어. 달려갈 곳도 많고, 사람들 싫으면 얼마든지 혼자 있어도 돼,”
기사는 택시를 세웠다. 좀은은 지갑에서 이만 원을 꺼내 기사에게 주고, 택시를 나와 버린다.
좀은은 걷는다. 맑은 하늘, 넓은 들판, 어느 곳에도 불길은 없다. 따뜻한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리며 살을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규원이 재가 돼 버린 그곳에서, 좀은은 그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의 건조한 눈을 보자 저도 모르게 좀은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 때의 눈물이 그의 몸을 적셨던 것이다. 햇살 아래 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좀은은 제법 나른해 짐을 느꼈다. 사방에는 아무도, 아무 소리도 없고, 살아지는 평온함을 이기지 못해 그는 풀썩 쓰러져 따스한 몸을 뉘었다.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던 중원은, 검정의 경계선이 하늘 한 쪽에 드리움을 본다. 구름은 순식간에 태양을 집어 삼키고, 굵은 빗방울과 세찬 바람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좀은의 몸은 다시 젖는다. 그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비바람 속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사방에는 아무도 없다. 몸에서 열이 나온다. 몸이 식을 때 까지, 열은 빠져나와 이 몸을 영영 떠나버릴 것이다.
좀은은 몸을 마구 쓰다듬는다. 떠나가는 열을 붙잡기라도 하듯 온몸을 감싸 안고 쭈그려 앉는다.
쏟아지는 빗줄기속에 주저앉아 그는 하늘을 향해 욕을 던져보려 한다. 그러나 기사에게 이만 원을 건네고 택시에서 당당히 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태풍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태풍의 눈 속에 있었던 것일 뿐.
좀은은 그제야 돌아가고 싶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열기 속에 던지고 싶다.
그는 결심한다. 그러나 불에 타버린 재가 아닌, 영원히 타는 불이 되자고.
좀은은 문득 손을 든다. 바람에 손이 흔들리자, 오히려 손을 번쩍 들어 세운다.
노란택시 한 대가 경적을 울린다.
<장려상>
경주고등학교 2학년 2반 박준한
날씨가 화창하다. 바람이 조금씩 인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비용이 들어오는 날이다.’ 택배가 가득 실린 화물차를 운전하면서도 들어올 돈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 때 추가 근무를 했으니 사장님께서도 밀린 수당과 함께 보너스를 주시겠지’ 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첫 번째 택배를 배달 할 곳 이다. 뒤쪽 창고 문을 열어 택배를 꺼낸 후 눈앞에 보이는 고급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며 생각한다. ‘ 난 언제쯤 이런 집에 살까…….
아니 이런 집에 살 수는 있을까? “띵동 택배 왔습니다.” “네” 라는 목소리와 함께 어린 아이가 나와 택배를 받는다. ‘유복하게 태어나 부럽다.’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택배를 배달하고 하늘은 보니 급격히 흐려져 있었다. ‘맞다 오늘 태풍이 온다고 했었지…….’두 번째 집에서 별 탈 없이 택배 배달을 하고 하늘을 보니 엄청 흐려진 날씨에 바람이 강해졌다. ‘조만간 한 번 쏟아지겠네. 라고 생각하며 차에 타는 순간 천둥소리가 들리며 폭우가 쏟아진다.
세 번째 집으로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전화가 온다. 사장님이셨다. ‘이봐 김 군 ’
“네 사장님” “내가 말이야……네 잘 듣고 있습니다. 사장님“ ”내가 돈이 급해서 그런데 수당좀 밀어 나중에 한꺼번에 지급해 주겠네. 고맙네“ 뚝 내가 말을 하려했지만 사장님이 일방적 통보에 바로 전화를 끊으셨다. 난 속으로 ‘저번에도 그러셨으면서 왜 또…….’속으로 않으면서 부질없이 사장님께 전화해 보지만 역시 연결이 안된다.
바깥엔 태풍이 몰아친다.
대학, 일반
장원 건천읍 내서로 이애자
-인사-
얼마 전 일이다 볼일이 있어 남편과 시내에 가려고 막 대문을 나서는데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가 자전거를 끌고 급하게 도로를 건너오시며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러시지 하고 멈추었는데 할머니는 다짜고짜 화를 내시며
“ 사람이 그러는 것 아니다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면 인사도 안하고 그러능교”
하시는 게 아닌가.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할머니는 분을 이기지 못해 붉으락푸르락 주름진 얼굴이 다 펴질 것 같았다.
예? 누구신지요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닌지요?
“나 모르능교 00사는 00시더”
그제야 남편이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무시해서 인사를 안했다니 무슨 말씀인지요”
남편이 되물었다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농사일을 하는 시숙이 일이 있어 서울에 가 계실 동안 남편이 한 달 동안 매일 논물을 대러 아침마다 갔었는데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인사를 안 해 무시당했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 몇 날 며칠을 참다가 도저히 괘씸해서 그냥 있을 수없어 찾아 왔단다.
서로 아는 사이라 해도 50년 세월을 어찌 건너 뛸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당시 그 아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렸고 지금은 의술 덕분에 멀쩡히 걷고 계셨기 때문에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는 저 논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에 누구의 동생이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50년 전 남편은 꼬마였고 그 분은 말단 읍직원이었다. 어린 아이가 읍사무소에 있는 호두나무 위에 올라가 호두를 따 먹으면, 혹시 떨어질까 모른 척 지나갔던 그 이야기를 50년 된 묶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처럼 줄줄 뽑아내었다. 멀리서 뵈었던 그 분이 아저씨인 줄 꿈에도 몰랐다고 거듭거듭 말했고, 그럼 아저씨는 나를 알아 봤을 텐데 왜 아무 말씀 안하셨는지요. 했다. 내가 아저씨인 줄 알았다면 내가 왜 인사를 안했겠냐고 하니 그제서야 오해였음을 알았는지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고 목소리도 편안해졌다. 속이 뻥 뚫렸다고 웃으며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다음 날 다시 논에서 그 분들을 만났을 때 남편은 먼저 가서 인사를 했고 다시 호두를 따먹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아저씨가 남편을 예뻐해 주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인사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안녕하세요. 라고 상냥하고 밝게 인사 한다면 상대방은 기분이 한 층 좋아질 것이다. 어쩌면 아침에 받은 인사 때문에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사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기도 하며 친근감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6月의 날씨만큼이나 뜨겁고 황당했던 인사로 인해 빚어진 에피소드가 이 가을 통통하게 익어가고 있다.
우수 경주시 현곡면 안현로 최수영
-인사-
내 기억 속에 제일 아픈 인사는 일곱 살에 나의 유일했던 친 오빠에게 했던 인사였다. 정다운 경상도 사투리로
“오빠야! 어디 가노?”라는 인사. 열 살 오빠와 나눈 마지막 인사였다. 사고로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후로는 늘 우울한 집안에서 나도 늘 슬픈 날을 보냈다. 멀쩡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듯 하지만 늘 우울함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마흔이 훌쩍 지난 지금도 늘 마음속에 우울감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날이 많았다. 점점 웃음이 사라지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른다섯에 받게 된 건강악화 진단으로 더욱 우울감이 깊어졌다. 우울증이었지만 나 스스로 우울증인지 몰랐다. 아픈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였던 나…….
나에게는 어여쁜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어떻게든 극복해야 했다. 회사생활도 너무나 버거웠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는데 나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직장이 되어 있었다. 삶의 활력을 잃고 마르고 퍼석해진 내가되어 있었다.
과거와의 인사! 내 삶이 힘든 것은 내가 힘들고 우울하게 느꼈던 과거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서 였다. 오빠와의 이른 박별, 우울 했던 유년기와의 작별 인사를 하고 현재와 인사했다.
현재는 늘 움직이고 힘차다. 과거는 축축하고 흐렸지만 현재는 내가 결정 해 가는 것이므로 늘 희망이 함께 한다.
회사에서 먼저 건넨ㄴ 인사. 어떤 이들에게는 큰 격려가 될 것을 안다. 나도 우울할 때 누군가의 따뜻한 인사로 위로를 받았으니까…….
우수 경산시 경청로 정정미
-인사-
2012년 가을, 어김없이 청마백일장이 열렸다. 매년 열리는 백일장이었지만 우린 그 해 처음 참가한 백일장이었다. 난 경주 시민이었지만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남편은 넓은 거실에 이불만 돌돌 남기고 없었다. 삼일 째 얼굴도 못 봤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공장일이 많은지, 아니면 내가 보기 싫었는지 의문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행사장으로 달렸다. 시제를 확인하고 아이들과 먼 기억을 더듬으며 글쓰기에 집중했다. 가을 햇살은 내 두 눈에 따갑게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연필을 잡았는지 집중이 안됐다. 급기야 적고 있는 이 글자가 맞는지 틀렸는지, 아!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문득 남편이 떠올랐다. 평소 뭐가 잘 안되면 무조건 남편을 찾았다. 남편이 밉다가도 이럴 땐 저절로 생각이 난다.
“여보세요? 자기야? 우리 백일장 왔어. 글자 하나 물어 보려고.”
“그래, 무슨 글자야?”
그렇게 삼일 만에 처음 듣는 남편의 목소리, 뭐 특별한 건 없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우린 쓰던 글을 마무리 지었다. 결과도 좋았다. 큰 아이가 가작을 받았다.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아빠께 자랑 할 거라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지켜보던 나도 절로 행복했다. 저녁 8시쯤 내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밥을 먹던 숟가락을 놓고 받아 보았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낯설은 기계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내 심장은 터질 듯이 숨조차 쉬어지질 않았다. 남편이 쓰러졌다는 소식과 함께 그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저 멀리 우리들을 두고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렸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우리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낮에 전화한 그 짧은 통화가 마지막 일 줄이야.
“여보! 그 때, 미안했어요. 많이 보고 싶네요. 오늘도 우리 세 식구 당신 보러 경주 백일장 왔어요. 그 먼 나라에 전화하면 그 때 못한 마지막 인사 오늘 이 순간 전 할 수 있을까요? 사랑했어요. 그리고 다음에 또 올게요!”
가을비가 촉촉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수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로 이이자
-인사-
지금은 살기 좋은 부족함이 없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하지만 나는 항상 요즈음의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넘쳐나는 물질만능 속에 부족함이 없이 누리고 살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 할까? 보이지 않는 내면은 허허롭기 그지없이 황량하게만 느껴진다.
매일매일 꽉 짜여진 스케줄 속에 학교로 학원으로 독서실로 정신없이 내 몰리다 쫓기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10-12시...
건장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 일 진데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정신과 육체가 모두 찌들고 피폐해져 그 청명한 하늘 한 번 여유 있는 맘으로 제대로 올려다 볼 시간조차 없다.
버스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 할 때면 예의 없이 자리에 앉아 나이 드신 어른들이 와도 그냥 모른 체 눈 감고 앉아 잇는 학생들이 괘씸하게만 느껴졌지만 고1 딸아이를 기르고 있는 지금은 이해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야자 마치고 학원 마치고 집에 오면 11시 반, 간식 하나 먹을 여유조차 없이 잠깐 공부하다 1시는 돼서야 잠자리에 든다. 정녕 학생들은 더 힘들다.
항상 이론 생활의 반복이다 보니 언제나 잠은 모자라고 일상은 지친다.
이런 딸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마음은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딱히 지금의 교육 정책을 떠나 가르칠 대안이 없어 나도 그저 일반적인 보통의 학부모가 되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 애들에게 강조하고 지침으로 가르치는 말은 ‘예의바르고 인사 잘하는 인성 바른 어른으로 성장해야 된다’고 강조 한다. 고1 딸과 중1 아들을 두고 있는 지금, 아는 이웃을 만나거나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 하나는 얘기를 일상으로 한다.
공부가 중요하고 훌륭한 자리에 앉아 있어도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사람은 주위 사람을 업신여기고 갑질하는 세태를 너무 많이 보고 있는 요즈음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아들 딸 들이 보다 나은 미래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길은 우리 어른들이 솔선수범 하여 정의롭고 예의바른 모범을 보이며 학교에서도 매일 예절교육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감성과 지상을 부드럽고 여유 있게 이끌어 비록 공부 속에 내몰린 세상일지라도 “피 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도 있듯이 주어진 환경을 비고나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바쁜 속에서도 가끔은 1권의 책과 벗하며 문학을 즐길 수 있고, 그러한 느긋한 여유가, 고령화 사회로 가는 우리 현실 속의 힘없는 어르신들을 길거리에서 대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대하게 되면 공경하는 마음과 도우려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항상 지니며 보살피며 양보하고 배려하는 기본이 우리 모두의 마음의 인사가 아닐까?
가작 경주시 마동 김미옥
-인사-
뙤약볕 내리쬐던 여름날에도 일 손 못 놓던 우리 엄마 곁으로 뚜벅뚜벅 가을이 인사를 하네.
넘실넘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누렇게 익어 간 나락 알이 재잘재잘 입이 바쁜 참새에게 뺏길까 밀짚모자 내려 쓴 허수아비님이 들녘을 반겨 맞이하는 폼 새에 힘이 쏠려 바쁘기도 하네.
아이구 아지매요 올 해 농사는 어떤기요? 하며 아랫 논 주인의 ㅇ나사에도 지나간 계절의 힘든 노고가 묻은 듯 한 동지애까지 느껴지는 것이 참으로 고생 많으셨다.
뚝, 뚝 보름달처럼 풍성함이 쏟아진다. 넓고 깊은 쌀자루가 입이 터질 새라 앞 다투어 들이대며 누구 배가 더 부를까 자랑 질까지 하네.
우리 엄마가 웃는다. 가을이 웃는다.
자연의 오묘함에 목청껏 소리 질러 보노라 고마웠다고 또한 내년을 부탁하며 토닥토닥 인사를 드리리다.
서물서물 이 가을이 가면 우리 엄마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몸을 뉘우시겠지, 생각만 해도 평온하다.
이 계절 또한 차가운 얼음 땅에서 나직이 숨을 죽이며 스르륵 봄을 꿈꾼다.
가작 포항시 지곡동 황윤복
-인사-
결혼 후 2년 만에 낳은 보석 같은 첫 딸-행복한 시간을 보낸 지도 4년, 우리 부부에게 더 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오랜 노력 끝에 생긴 둘째 딸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친정아버지께서 기뻐하셨다. 그런데 연이어 생긴 셋째 딸- 너무 당황스러웠다. 시어른들 얼굴을 고개 들어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요즘 시대에 딸, 아들 가리냐 하겠지만 장남인 신랑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딸만 많이 낳게 된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셋째 딸을 낳던 날 – 병실에 오신 아버님, 어머님이 내게 인사 하신다
“며늘아! 고생 많았제? 손 귀한 집에 시집 와서 이쁜 손녀들 많이 낳아 줘서 참 고맙다.”
뒤 늦게 오신 친정아버지, 엄마께서 내게 인사 하신다.
“우리 땅! 고생 많았지? 엄마. 아빠한테 네가 복덩이 인 것처럼 너도 셋째 덕분에 행복할 거야. 우리 딸 장하다.”
셋째를 임신한 도안 했었던 많은 걱정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 인사들이었다.
나도 엄마, 아빠, 아버님, 어머님께 이렇게 인사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부족한 며느리 사랑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낳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이 되면 4배쯤 힘들어 지고, 셋이 되면 9배쯤 힘들어 진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셋째 딸이 태어나서 9배쯤 힘들어진 나는 어른들의 멋진 축하 인사 덕분에 백배쯤 행복해졌다. 앞으로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이 순간을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
가작 포항시 남구 지곡동 전현자
-인사-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결혼 전 처음으로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어색하고 낯설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멀리서 인사드리러 온 나에게 점심을 차려주시면서도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계셨던 어머님과의 첫 만남이였다.(어머님은 나와의 결혼을 그리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 온 후 다시 인사를 들러 갔다. 북적대는 집안의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그렇게 나의 새로운 가족들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어색한 어머님과 나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데 어머님께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씀 하신다.
“현자야, 내가 네가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너도 나중에 아들을 낳아 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힘들게 꺼내신 말씀 이였지만 내 마음에 상처는 그대로 였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의 흐름 속에 그 날의 상처도 무디어져만 갔다. 그 이후로 나에게 단 한 번도 실은 소리 하지 않으시는 어머님을 뵈면서 나 역시 어머님께 싫어요. 라는 말씀 한번 드리지 않으면서 우리는 십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엄마께서 당신이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에게 잘 하는 게 참 무던한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나에게는 한 번도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는데……. 십여 년 날 지켜보신 어머님의 특급 칭찬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그 이후에도 어머님은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신다.
뭘 바라지도 않으시고 잔소리도 하지 않으시고.
이제는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의 그 낯설음을, 냉랭했던 그 모습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우려 한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어머님 좋아하시는 잡채 맛있게 해서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가작 경주시 용담로 김창숙
-인사-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수학 숙제를 하는 딸아이 곁에서 책을 몇 장 읽고 있던 참이었어. 작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ㅂ 하면서 ‘의열단’에 호기심을 가지게 됐는데 마침 영화<밀정>이 개봉한다잖아. 영화를 보기 전에 모티브가 됐다는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책을 보려고 틈 날 때마다 붙들고 있던 책이다.
그런데 별안간 서 너 차례 좌우로 땅이 흔들렸어. 진동이 멈춘 후에야 ‘이게 뭐지. 지진인가?’ 싶었지 얼떨결에 일어난 일에 놀란 딸아이를 진정시키느라 다독이고 있던 무렵 앞서 보다 더 큰 진동과 함께 천둥소리가 덮쳤고 와락 두려움이 몰려 왔어.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달래 진동이 멈췄다 싶을 즈음 휴대폰만 손에 쥔 채 반바지 차림으로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지.
아파트 주차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지만 도무지 연결이 안 되더라고. 20여분 남짓, 누구와도 전화가 연결이 안 되던 그 순간이 지진보다 더 무서웠다면 믿겠니?
우여곡절을 거쳐 남편을 만나 집에서 멀지 않는 학교 운동장으로 대피를 하고, 세 식구가 두 시간이 넘도록 초가을 서늘한 밤기운을 느끼고 있는 동안 정말 많은 이들에게서 연락이 왔어. 괜찮아? 그 말 한 마디가 어찌나 큰 위안이 되던지! 그 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낸 이들이야말로 정말 내 사람이구나 싶었다니까.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게 17년 전인가, 요즘 들어 부쩍 네 소식이 궁금해지곤 해. 그리움보다 미안함이 앞서는 걸 보면 내가 참 철없이 못되게 굴었나 보다.
며칠 전에는 안강에 다녀오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왈칵 눈물이 솟지 뭐니! 서른 지난지가 언제인데, 잊혀져 가고 멀어져 가는 게 아직도 싫은 게지.
가을인가 보다. 그래서 네게 이렇게 부치지도 못 할 편지를 한 통 써 볼 용기도 가져 본다.
잘 지내지?
곁에 슬금슬금 다가와 가볍게 어깨를 툭 치곤하던 네 인사가 그립다. 어쩌자 한번은 더 만나지겠지……. 그 땐 미처 못 했던 사과를 해야겠다.
잘 지내.
가작 부산 광역시 진구 당감2동 박지나
-인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올해는 유난히도 견디기 힘든 더위 때문에 여름이 더욱 길게 느껴졌고, 나에게 이 여름이 야속한 이유가 있다. 이모가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시절 더부살이를 했던 엄마 다음 나의 보호자였던 이모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준비 없었던 이별을 맞았다. 유난히도 더웠던 7월, 한 더위에 이모가 돌아가셨다.
나의 여고시절 그 대 이모 나이를 내가 훌쩍 지나고 보니 매일 아침 도시락을 3개씩 준비하시던 이모가 얼마나 고단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속셈 학원을 운영하시던 이모부와 이모는 늘 밤 11시에 퇴근해서 돌아오시곤 했고, 나는 두 동생들을 건사하면서 틈틈이 집안일을 도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생활비 한 푼도 보태 줄 형편이 못 되어 나는 이모 집에 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모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드러낸 적 없었으며 졸업 후에 내가 이모 집을 벗어났을 때에도 우리 가족 곁에서 울타리로 남아계셨다. 이모가 유방암에 걸렸단 소식을 외사촌한테 들은 지 벌써 5년도 넘은 듯하다. 가끔 안부 인사라도 드리는 날엔 이모는 항상 잘 지내고 있다 라는 말로 익숙했으므로 실제 이모의 고통에 대해선 동감 할 수는 없었다. 이모가 병을 얻기까지 내가 이모 마음과 육체의 병 한 구석에 병을 한 덩어리 더 얹어 준 것 같아 거듭 칼에 베인 듯 상처가 아린다. “이모 이제 다 나았다. 이모는 이모부가 있으니 괜찮다. 고마워. 우리 힘내자꾸나! 우리 소통하면서 살자” 7월19일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문자는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데 아직은 내 곁에 계셔 줄 것 같았던 이모는 카톡 동영상애서는 아직도 살아계시고 소통하고 계시는데, 나의 안부 인사는 이제 더 이상 대답이 없다.
나는 후회한다. 사람은 적절한 어느 때에 안부 혹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찌들려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채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니 아쉬움만 남는다.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하고, 살갑게 다가가지 못하고 밍숭맹숭 무미건조한 내 삶에 대한 내 태도가 싫은 것이다.
「 그리운 사람에게 내가 먼저 연락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작은 감사 표현하고 섭섭한 사람에게 한 번 더 이해해주는 이런 마음으로 살면 내가 더 행복합니다.」
가족 대화방에 올라 온 이모부의 메시지가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 동안 이모부께 안부 인사를 선뜻 먼저 그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다.
신인작사상에 당첨 되었다는 이모부의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안부를 전한다.
“이모부 대단 하십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그래, 고마워. 우리 열심히 살자. 아이들 책 많이 읽게 해 줘. 자주 연락해.”
“네”
언제나처럼 우리 아이들 책 많이 읽어 라는 당부 인사를 듣고 드디어 이모부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벗어 놓는다. 인사는 소통이다. 살아가는 일은 소통이다. 소통하고 살자 하시던 이모가 보고 싶어진다.
장려 황성동 청우 오정란
-인사-
며칠 전…….
따르릉 따르릉 집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에 핸드폰으로 연락 하다 보니 집 전화는 가까운 친척들만 연락한다. 이른 새벽이라 왠지 ㅂㄹ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 큰 언니 목소리였다.
“웬일 있나요?”
방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 참을 멍 한 채 서 있었다.
급히 짐을 챙겨 어머니가 계신 광주로 세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가는 차 안에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18살에 시집 와서 8남매를 낳고 종갓집 맏며느리로 60년을 넘게 살아 왔다. 우리 어머니는
“막내야,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 인 줄 아니?”
하고 물으셨다.
“어머니, 장미, 국화, 나팔꽃이 아닐까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우리 아가 꽃이지”
라고 말씀 하셨다. 봐도 봐도 실증이 나지 않지…….
평소에 8남매를 부를 때 큰 아가, 작은 아가, 막내 아가라 부르신다. 난 그 어머니를 만나러 지금 가고 있다. 장례식 입구에 들어서는 조화들로 가득하고 많은 조문객들도 있었따. 세 아들과 함깨 국화로 헌화하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난 그 자리에서 오열 할 t n밖에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어디에 가셨나요?”
왜 한마디 말도 못한 체 혼자서 쓸쓸히 가셨나요? 8남매가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 가셨나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난 그대에게 마지막 인사 밖에 드릴 수 없네요.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한 줌의 재가 되어 내 고향 남쪽 바다 작은 납골당에 그대를 두고 올 수 밖에 없네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빨리 철이 들었다면 그대 맘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당신께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 합니다. 부디 우리와 다른 곳에 계시지만 고통 없는 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장려 경주시 황성로 조임경
-인사-
거무스름한 구름 한 무더기가 낮게 드리우더니 곧장 빗줄기가 쏟아진다. 한 차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모양이다. 창문을 치는 요란한 바람 소리에 행여나 곤히 잠든 아이들이 깰까 조마조마하여 커튼을 드리워본다. 왼 종일 할아버지댁 농장에서 고구마도 캐고 밤도 줍고 냇가를 첨벙첨벙 뛰놀았던 탓인지 이른 잠을 청한 녀석들이다. 덕분에 나는 진한 커피 한잔 내려 마시는 여유를 선물 받았다. 더불어 낮에 보았던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같았던 그것이 환영이라면 다행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농장이 세상의 중심이자 전부였다. 모심기가 시작되는 봄의 들녘부터 가을걷이가 한창인 가을의 황금들판까지 오롯이 몸과 마음으로 내 삶을 느끼곤 했다. 하루하루의 햇살과 달큰한 빗물과 농사꾼 아버지의 땀방울 수백만 개가 녹아든 땅에서 감자알들이 툭툭 불거지고 붉은 대추알들이 익어가고 눈부실 만큼 샛 누런 이싹들이 묵직한 고개를 절로 숙이곤 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어린 내게 신이자 조물주 였나보다. 뚝딱뚝딱 만능이셨던 분이다.
폴짝폴짝 잘도 뛰어재끼는 냥이 꼭 큰 아이 3살 무렵 통통 뛰던 것 같다. 메뚜기 한 쌍이 잡힐 듯 말 듯 나락 사이로 뜀박질하는 것을 작은 아이가 애가 닳아 칭얼거리며 쫓는다.
“엄마 나 저 메뚜기 좀 잡아주세요. 자꾸만 도망을 가서 손에 잡히지가 않아.”
황금물결 치는 금빛 들판 사이로 양 갈래 5살 딸아이의 머리가 솟았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던 그 때였다. 사라진 딸아이 대신 불쑥 솟아오른 것은 3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 날이었다.백발의 노인, 한걸음 한걸음이 위태위태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낡은 지팡이 그것에 전신을 의지하여 힘없이 논둑길을 걷고 있다. 귀를 찢는 듯한 타작 기계 소음에 아버지의 고함소리, 어머니의 새참 나르던 모습이 겹치며 백발노인의 걸음이 멈추었나 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물결 속으로 휩쓸려 간 것인지 지팡이 짚던 힘없는 한 마리 어린양 같았던 노인이 사라졌다. 아직도 모르겠다. 30여년 전, 그날의 모습이 환영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를 , 분명한 것은 가을걷이 한창이던 가을 들판 논둑길에서 나의 친할아버지는 쓰러지셨다. 거동이 불편하여 방 밖으로 잘 나서지 않았던 노인네가 그 날은 웬일로 논까지 직접 걸어오시어 온 논을 살펴보시었다. 그 날의 기억이 사뭇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할아버지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늘그막의 시간을 누워 보내시며 떠나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농부의 평생의 일터에서 당신의 힘으로 일으킨 넓은 황금들판에게 인사를 하고 싶으셨나보다. 온 봄의 힘을 끌어당겨 한걸음 두 걸음 내딛어 닿은 땅, 당신의 논에서 고개 숙인 벼 이삭에게 한 쌍의 메뚜기 날개 짓에게 작별인사를 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아들, 며느리에게 이 논과 밭, 이 땅과 농사일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의 인사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할아버지 당신은 제게 그저 백발의 노인으로 꼿꼿한 농부는 아니셨지만 훌륭한 농사꾼이셨음을 확신합니다. 그 마음을 땅에 대한 그 애절함을 그날의 마지막 소풍 나오신 모습에서 마주 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그 땐 제가 너무 어려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에 응대하지 못했습니다. 두 아이 엄마가 된 지금에야 느낍니다. 아버지께서 왜 매일 새벽마다 논, 밭을 서성이며 아침이슬 머금은 벼 이삭에게 고추넝쿨에게 밤나무, 감나무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는 지를요. 할아버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버지도 자식 같은 농작물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당부 인사를 하셨던 겁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그리 하셨던 것처럼 저도 늘 인사하겠습니다. 두 아이의 건강과 온 가족의 ‘안녕’을 빌며 이 순간에 존재함을 감사하는 인사를 요.
장려 경주시 황성동 조수영
-인사-
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저녁 먹었나. 뭐 먹었나?”
“네, 미역국이랑 굴비 구워 먹었어요.”
전이라면 여기서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꼭 덧붙인다.
“어머님은 저녁 잡수셨어요?”
“어, 입맛이 없어가 물에다 밥 말아 먹고 치웠다. 입맛이 어째 그래 없는지 밥 한 숟갈 먹는데 우째 이래 힘든지 …….”
어머님의 통화는 적어도 30분은 이어진다. 몰랐었다. 어머님의 식사인사는 단순한 식사여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어머님의 안부와 건강상태를 알리는 대화의 물꼬였음을. 시집오고 한 동안은
“네 먹었어요.”
하고 끝나는 며느리에게 한없는 서운함을 느끼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억울하고 황당했었는데……. 요새 밥 굶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자꾸 밥! 밥! 하시나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말 할 상대가 없이 하루 종일 입 닫고 계시다 전화기만 잡으면 오래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에 어머님의 전화가 울리면 바로 가스렌지로 달려간다. 가스 불을 끄고 적어도 30분을 바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전화를 받는다.
“어머님, 오늘은 어떻게 식사는 하셨어요?”
못난 며느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효도가 인사뿐이라 오늘도 죄송한 마음뿐이다.
장려 경주시 용강동 김경호
-인사-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아침에 아내에게 인사를 하고 출근을 한다. 아내는 조심히 다녀오라고 답을 해주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렇게 인사로 아침을 시작하면 하루가 기분 좋고 행복해진다.
인사는 상대방과 나에게 행복을 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 일 년 365일 그러하지는 못했다.
하루는 아내와 사소한 것으로 화를 내고 다툰 적이 있었다. 결국 대화가 없고 다음 날 아침에 인사 없이 인상 쓰며 출근했다.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직장 상사, 부하 직원에게 인사하는 것도 싫어졌고 뭔가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고 힘든 하루를 보냈다. 퇴근길에 빨리 화해를 해야 내일부터 행복해 질 것 같았다.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인사가 사람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에 나는 개는 인사가 싸움이라고 툭 하면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기를 습관처럼 했었다.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상대방과 생각이나 뜻이 안 맞으면 다투기를 했던 거 같다. 그럴수록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는 존재가 기피대상이 되는 것 같았다. 성격을 바꾸거나 다투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속담에 ‘미운 사람에게는 쫓아가 인사한다. 라는 말을 들었다. 미운 사람일수록 잘 해주고 감정을 쌓지 않아야 한다. 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정말 다투는 일이 거의 없어졌고 사람들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인사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행복, 즐거움 등 인사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생각이 든다.
장려 경주시 용강동 박선심
-인사-
바쁜 일상 속에서 생활하녀 안주하던 삶에서 관광도시이자 천년의 신라 도시인 경주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 살기 좋은 곳이라 칭하며 안이하게 살아온 삶에 크나큰 충격이자 대반전이 찾아 온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서는 극한 체험이랄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 온 재난 앞에서 궁지에 몰린 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 어느 때보다 삶에 강한 애착을 느끼고 보였다.
정부에선 재난 시스템이 가동되며 부족한 정을 캐내고 수정하고 이웃나라 일본의 지진 대응에서 배울 점을 찾았다. 인터넷엔 한 때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지만 지진을 대비한 온갖 방법이 올라왔다. 하지만 지진이 일어나고 흐린 날씨도 계속되며 불안의 연속인 나날이 계속되었다. 삼삼오오 지인들과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지진은 그야말로 화젯거리였다.
직장에서도 지진과 불안이 주요 화젯거리였다. 삶이 끝자락에 선 느낌이 마음 한편을 짓누르고 있을 어느 날 맑게 개인 하늘을 마주하며 그럼에도 불고하고 찾아 온 가을 하늘에 밝게 인사하며 삶에 강한 의욕을 다시금 불 태웠다.
멀리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도 안부인사가 온다. 바쁘고 찌든 삶에서 잊혀졌던 반가운 얼굴들이 카톡으로 문자로 전화로 인사를 해 온다. 멀리 캐나다에 살고 있는 선배에게서 걱정이 한 가득 날아온다. 인간은 만나며 정을 나누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인생을 논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자식들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IT기술이 발달하고 SNS, 인터넷, 가상현실이 가능한 지금 사람들과의 대면은 쉬운 듯 멀어져 보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사만큼 간단하고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작은 인사에 즐거움을 얻고 살아야 할 이유와 희망을 줄 것 같다.
매일 아침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안녕! 잘 잤어”
소중한 사람에게
“안녕! 잘 지냈어”
이 한마디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을 일궈나가는 기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관심과 작은 인사가 아이들을 곧고 올바르게 자라게 하고 이것이 대한민국을 밝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