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백봉기
우리 사회에 '남성인권보장위원회'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 인권위원회는 있지만, 남성들을 위한 인권단체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여성들을 위한 인권단체는 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하여 여성인권진흥원, 여성의 전화, 전국여성연대 등 10여 개의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여성들이 남성둘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거나 성차별을 받았던 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KBS에서 방송하는 '개그콘서트'코너 중에 남성인권보장위원회 즉 '남보원'이라는 TV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남자 개그맨 셋이서 시위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띠를 두르고 북을 들고, 남성들이 여성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들을 조목조목 들추면서, 여성들에게 남성들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하는 개그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언제나 "여성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 남성들이여 일어나라!"라는 외침으로 끝난다.
'여성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밥을 사는 사람은 남자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자는 것으로 해석되며, 남자라는 이유로 더 이상 여성들로부터 봉(?)이 되지 말자는 뜻이 아닐까? 개그프로그램으로 웃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지만 어떤 때는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얼마 전에 방송됐던 내용이 재미있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약속시간 6시인데 6시에 머리감냐! 머리감냐 머리감냐 고데는 하지마라! 다 왔다고 거짓말 마라! 한 시간째 그 소리냐! 거짓말마라 거짓말마라! 니네집개소리 다 들린다!
약속시간이 1시간이나 넘었는데도 오지 않는 여성을 기다리며 남성들이 외치는 소리다. 만약에 6시 약속인데 그때야 머리를 감는 남자가 있다면 여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리거나 화를 내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 개그맨들이 외치는 소리는 백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부부모임이 있을 때는 본의 아니게 아내에게 거짓말을 한다. 6시에 모임이 있다면 5시나 5시 반이라고 해야 겨우 약속시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온종일 집에 있었으면서도 아내는 출발해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거나 머리를 감고 있을 때가 잦았다. 늦겠다고 불평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늦게 오는데 먼저 가서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서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문제는 처음부터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어른이 돼서도 시간을 지키지 않는 습관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의 인권을 빼앗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또 이렇게 외친다.
영화표는 내가샀다! 팝콘값은 니가내라! 갔다온건 안면돈데! 돈쓴거는 하와이냐!
남자가 돈 낸다고 먹지도 않을 것까지 시키고, 남으면 싸달라고 한 일은 없는지! 커피 값은 남자가 냈는데 쿠폰도장은 여자가 찍은 일은 없었는지 묻고 싶다.
지난 설 명절 때의 일이다. 아이까지 딸린 두 아들 가족이 집에 왔다. 3박 4일을 같이 지내면서 지금까지 여성들의 일이라고 믿어 왔던 일들이 이젠 여성만의 전담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이 키우는 것은 염마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도,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대소변을 치우는 것도 아들들이 하는 것을 보았다. 시댁에 와서 아내가 혹시 힘들지나 않을까? 하는 배려의 마음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솜씨를 보니 이미 단련된 1급 숙련공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에 갈 때도 아기를 걸쳐 메고 양손에 가방과 짐 보따리를 드는 아들들을 보면서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의 외침이 생각났다.
손이없냐 발이없냐! 가방들고 같이가자! 집에서는 귀한 아들! 너한테는 짐꾼이냐!
남성들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일은 당연하다. 요즘 같은 추세로 간다면 머지않아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성들의 권익과 권리가 높아진 만큼 의무와 역할도 남성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는 음식값을 나누어 낸다는 말도 들었다. 웃고자 하는 개그프로그램이지만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라는 남성들의 외침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아울러 고려시대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더 높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 백봉기 군산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KBS프로듀서. 제작부장. 편성부장 역임 (2008년 정년퇴임) 효원대학교, 백제예술대학 출강. 전북문학포럼 자문위원. 한국 예총 전북연합회사무처장
<한국산문2010. 6월호에서 발췌> |
첫댓글 뼈를 때리는 말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집에서는 귀한 아들, 너한테는 짐꾼이냐 ㅎㅎㅎ
파격적인 글이라 올려 봤어요.
결혼 전 만날 때 남편이 밥 사주곤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그때 받은 것 몇 배의 헌신을 해야 하던 걸요..^^; 세상에 공짜가 없고 받고 나면 결국 받은 이상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갔다온건 안면돈데! 돈쓴거는 하와이냐! 그건 너무했네요. ^^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다 토해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미있는 수필이라서 공유합니다. 이분이 수필의 날 낭송도 하셨네요.
아직 파일을 찾지 못해 읽지는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