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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의 갈보리로 가는 길
Procession to Calvar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4
페테르 브뤼헐의 갈보리 형장으로 가는 길
먼저 작가를 피터 브뤼겔로 말하는 것이 옳은지 페테르 브뤼헐로 부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또 한 이름, 갈보리, 골고다. 예수님이 처형 당한 장소는 해골터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굴골렛 גולגולת 참혹한 처형장 골고다다. 골고다는 어쩐지 음산하고 고통스러운 이름이다. 한국사람들은 해골, 골룸, 골빈놈, 골고다 등 골이 들어가는 말을 무섭고 섬짓하게 생각한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바로 밖에 있는 언덕으로 로마 총독부의 가장 잔인한 정치범 사형장 십자가 처형장이다.
굴골렛은 시리아어로 갈굴타, 그게 코이네 그리스어로 골고타스 Γολγοθᾶς가 되어 지금의 골고다가 되었다.
마가복음 15장 22절에서 마가는 당시 코이네 헬레니케로 기록했을 때 장소의 이름을 해골이라 불리는 곳,
여기서 해골을 다른 단어인 크라니오우 토포스 Κρανίου τόπος라 부른다.
이 해골은 우리가 아는 그 해골, 영어의 skull 과는 다른 해골, 뇌를 덮는 해골, 전문용어로 크라니움 cranium 두개골이란 단어를 썼고,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될 때 마가의 기록 크라니오우 토포스가 채택되어 칼바리아에 로코스Calvariae Locus로 번역이 됐다.
그렇게 영어 성경에서는 Calvery, 우리말로는 찬송가에도 등장하는 십자가 처형장 갈보리다.
28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29 앞으로 사람들이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 하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30 그때 사람들이 높은 산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져라’ 할 것이며 낮은 산을 향해 ‘우리를 덮어라’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와 같은 나도 이런 일을 당하는데 마른 나무와 같은 너희 유대인들이야 무슨 일인들 당하지 않겠느냐?”
신약성경 누가복음 23장 28절~31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인들이 울면서 따라왔다. 요한복음 19장은 28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29 앞으로 사람들이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 하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30 그때 사람들이 높은 산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져라’ 할 것이며 낮은 산을 향해 ‘우리를 덮어라’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와 같은 나도 이런 일을 당하는데 마른 나무와 같은 너희 유대인들이야 무슨 일인들 당하지 않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신약성경 누가복음 23장 28절~31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에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인들이 울면서 따라왔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요한복음 19장은
17 그들의 손에 넘어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터’ 라는 곳으로 가셨다 (히브리 말로 해골터는 ‘골고다’ 이다).
18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의 양쪽에 각각 하나씩 못 박았다.
KLB 현대인의 성경 신약성경 요한복음 19장 17절~18절 골고다 언덕 십자가 처형장에 십자가가 총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모두 합해서 그린 걸작이 있으니 바로! 16세기 페테르 브뤼헐(부뤼겔)의 『갈보리 가는 길』
판넬에 유화(124 × 170 cm), 1564,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높은 산 위에서 아래 장면을 내려다 보이는 구도에 무슨 구경거리하나 생겼냐는듯이 큰 동요없이 여러 사람들이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고 있다.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사건을 조망하듯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멀리서 넓게 바라보게 한다. 그러면 가까이에서 봤을 때 생각하지 못한 모습을 멀찌기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도는 부뤼헐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정작 예수의 모습은 군중에 가려 찾기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의 처형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일상생활을 한다. 작품 우측 하단에서 어머니 마리아 만이 아들에게 닥쳐올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같은 그림을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군중을 추하고 흉악한 모습으로 그려 세상의 무지와 악독함을 표현하려고한 반면에 브뤼헐은 예수가 죽는날에도 나만 잘 살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 수많은 군중과 행렬을 바라보면 역시나 페테르 브뤼헐의 작품답게 현실에 매여 살아가는 군중들이 행열에 따라가거나 바삐 자기 일에 매진하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작품 속에서 사건의 중심 예수는 정작 어디에 있는지 무슨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주인공 예수님을 찾기도 어렵다. 들여다보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은 십자가를 들고가다 쓰러져 몹시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정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하거나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사람들은 갈보리 언덕에 사형장으로 집중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사형은 갈보리 언덕에서 진행 된 것처럼 그 쪽 방향으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사형장에는 이미 두개의 십자가가 꽃여있다. 예수와 같은 날에 처형하기로 한 두명의 도둑, 강도, 반역자란 이름의 낙인찍힌 사람들이다. 두명이 죽을 사형장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수레를 타고 편하게 가는데 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분이 들고가야 한다. 예수님은 너무 힘이 들어 십자가를 들 힘도 없는데 군중 하나는 자신의 발을 십자가에 올려놓으며 조롱의 강도를 높인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향렬에 뿔나발을 부는 얼빠진 사람도 눈에 띤다. 죄 없는 예수님 곁에는 성직자들이 얼씬도 않는데 오히려 강도 옆에는 성직자들이 달라붙어 그들의 유언이나 고해성사, 할말을 하게 하며 듣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뒤을 따르는 구레네사람 시몬은 쓰러진 예수의 십자가를 들고가라고 하는 로마 병정의 강권에 따라 십자가를 들고 갈 처지에 있다. 옆에 있는 시몬의 아내는 그 일이 탐탁치 않은 듯이 남편이 그일을 못하게 못가게 잡아 당긴다. 시모 뒤로 몇몇 마을 사람들은 생명을 앗아가는 누군가의 처형에는 관심 없다는 듯 봇짐과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림 중앙 아래는 소매치기와 봇짐장수가 자신의 일에 매달려 본인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화면전경에 가장 크게 그려진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매, 막달라마리아 세 사람이다.
예수님이 쓰러져서 십자가를 힘겹게 들고 있고 옆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들려 하는데
뒤에 빨간 셔츠를 입은 고약한 놈은 십자가를 발로 밟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앞에 수레에는 두 강도가 포박이 되어 예수님보다 편하게 수레에 탄 채 처형장으로 실려가고 있다.
작품 오른쪽 상단에는 형장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강도들을 못박을 십자가 두 개는 이미 서 있다.
중앙에 예수님이 지고 오는 나무십자가를 못박을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파먹을 까마귀와 독수리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작품 오른쪽 하단에는 십자가 처형장에 함께 있었던 사도 요한의 위로를 받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울고 있다. 그 옆에는 이곳이 골고다 언덕 aka 갈보리 산이라는 의미의 두개골이 그려져 있다. 다수의 군중들에게는 예수의 처형이 수많은 평범한 나날 중 잠깐의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오른쪽에 흰 옷을 입은 도인과 같은 이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듯이 담담하게 이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사람들의 의상을 보면 예수시대 유대의 옷차림이 아니라 부뤼헐이 살았던 동시대의 옥차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개 처형은 16세기 프랑드로에서 흔한 일이었고 일종의 마을 행사였다. 예수를 눈에 띄지 않게 작게 그린 것도 예수의 죽음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이름 모를 독립투사의 처형처럼 다루는 당시 일반적인 군중들의 태도를 표현한다. 부뤼헐처럼 넓은 시야로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역사적 순간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그 중요성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알 수 있으며 이 어두운 사회에 파문을 던질 수 있다. 부뤼헐은 굼ㄴ중들의 인간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후대에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일 지라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군중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순간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광활한 우주의 활동에 한치 앞도 모르는 점과 같은 존재지만 소박하고 단순하게 눈 앞에 순간을 살아간다. 세상은 무지한과 추악함으로 가득하다는 히에로니부스 보스의 생각과는 달리 브뤼헐은 무지하고 힘없는 인간의 인간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관을 이 그림에 담고 있다.
작품, 페테르 브뤼헐의 갈보리로 가는 길은 안트베르펜의 갑부 은행장이자 페테르 브뤼헐의 열혈 팬 니콜라에스 용헨링크 Niclaes Jonghelinck가 의뢰했고, 이후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나폴레옹이 약탈했다가 다시 돌려준 작품이다.
피터 브뤼헐은 당시 프랑드로를 침범하여 사람들을 함부로 학살했던 스페인의 만행을 2천년전 십자가 행렬 앞에서도 십자가 형장에서의 죽음을 감상하듯이 지켜보고 당연시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대중들 앞에 죄없고 인류의 혁명가로 죽어간 한 인물을 표현함으로써 당시 유대민족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순응함으로 죽음에 동참하며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잔인하게 죽어간 것처럼 이 시간 스페인의 공격과 탄압으로 인해 죽어간 프랑드로 민중들의 죽음 앞에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플랑드로의 민중들을 향하여 이 그림으로 고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을 꿈꾸고 깨어나기를 외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힘있는 권력과 위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 선하고 착한 권력 앞에서는 예수님의 무거운 십자가를 짓밟는 군중처럼 짓밟고 모욕하고 죽이려든다.
얼마전 민족이 왜적에 강탈당했을때 을사5적을 비롯한 민족반역자들은 민족이 아닌 자들처럼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여 같은 민족, 독립군을 무차별하게 사살한다. 지금도 민족반역자들과 그 잔재들이 득실거리니 이나라의 운명이 아직도 누란지세이다. 브뤼헐은 스페인의 강탈 앞에 민족의식 없이 평범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군중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국가를 침범한 적국을 향하여 목숨을 바쳐 저항하는 대신 현실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으로 만족하는 비겁한 태세를 지향함을 이 "예수님의 갈보리 행렬"에서 뼈저리게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으로.
브리겔의 "갈보리 행렬" Procession to Calvar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4
2023.1.17. s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