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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고哀苦”는 슬픔과 괴로움 또는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에고Ego”는 이름과 성별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국적과 직업과 소유를 자신으로 여기는 오류에서 생겨난 자신의 이미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입니다. 자아自我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살아온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물론 서로 부딪히며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됩니다. 왜곡歪曲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실제라기보다는 허구虛構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해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불행과 슬픔과 절망의 궁극적 원인입니다.
실제로 에고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인정을 요구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불같은 화를 폭발시킵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병을 상당히 과장해서 설명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일방적으로 쏟아놓습니다.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소란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묻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어떤 영향을 주거나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의 생각을 물 붓듯 쏟아놓습니다.
사람 자체보다도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훨씬 더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에고를 반영하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신의 에고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이용합니다. 소유, 지식, 외모, 지위, 육신체적인 힘 등을 빌려서 자신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려고 몸부림칩니다. 에고를 부풀리기 위해서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겉으로 드러냅니다. 자신과는 하등何等의 관계도 없는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해석합니다. 혼자 감정이 상합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자기 혼자만 압니다. 자기만 알고 있는 그것을 알아채 주기를 바랍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환경, 상황, 조건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폭발시킵니다. 마음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불평을 품습니다. 겉으로 공공연하게 드러냅니다.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주목 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치며 극구 부인하지만, 사실은 매사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합니다. 자신이 결정해야합니다. 누구나 다 자신의 결정을 따라야합니다. 자신처럼 기뻐해야합니다. 자신과 다른 주장은 왜곡을 해서라도 꺾어버립니다.
이제까지 열거한 것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합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퍼합니다. 절망합니다. 그야말로 피곤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지랄 같은 성격을 소유한 누군가가 아닙니다. 지극히 열악한 환경도 아닙니다. 왜곡된 에고입니다. 왜곡된 자아입니다. 한 선승禪僧이 따르는 승려僧侶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 뒤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근처에서 길을 건너려는 젊은 여인과 마주쳤습니다. 선승은 그녀가 입고 있던 비단옷이 더러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걱정했습니다.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등에 업어서 도와주었습니다. 다섯 시간이라는 긴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승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습니다. 왜 처녀를 등에 업어서 길을 건너게 해주었느냐고 강하게 물었습니다. 자신들 같은 수행자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일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선승은 자신은 다섯 시간 전에 이미 처녀를 내려놓았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승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업고 있는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려는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불쾌감이라는 등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에고Ego가 부르는 애고哀苦 곧 괴로움과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Παῦλος는 율법이 정한 대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정통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열방 가운데서 친히 선택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신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소유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성민 이스라엘의 초대 왕Saul을 배출했습니다.
바사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하만의 음모陰謀로 진멸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지도자들Mordecai&Esther을 배출했습니다. 통일 왕국이 분열될 때는, 여전히 남 왕국 유다에 남았습니다. 충성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왔을 때도 성전 재건을 위해서 다른 어떤 지파들보다 헌신했습니다. 이는 베냐민 지파가 순수 유대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롬11:1b)라고 외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아브라함의 씨였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히브리말과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제대로 양육 받았습니다.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관습까지 그대로 간직한 순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과 구전,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 등을 연구하고 엄격하게 따르는 바리새파에 입문했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타락했지만 자칭 가장 거룩하다고 자부하던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 관련 기득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던 가말리엘의 문하門下에 들어갔습니다. 최고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신실했습니다. 그야말로 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할 정도로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서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두렵고 떨리는 존재로 알려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율법의 의義 곧 율법이 요구하는 온갖 명령들과 기준들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의에 비추어 볼 때도 흠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가문과 지파와 지식과 재력과 사회적인 명성과 열정은 물론 다른 면들을 살펴볼 때도 부족한 부분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나같이 대단한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나같이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같이 왜곡된 에고를 만족시키기에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건들이었습니다.
에고로부터 파생되어 나와서 하게 되는 일들 곧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끔찍한 일들을 하면서도 일말一抹의 후회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죽음을 상징하는 지극히 어두운 삶을 살면서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유대교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정도의 희생쯤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너무나도 소중한 삶을 에고Ego가 부르는 애고哀苦로 가득 채웠습니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은혜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지극히 이기적인 에고 앞에 섰습니다. 동시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곤고한ταλαίπωρος”은 전쟁에서 패한 포로가 적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선을 행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삶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비로소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깨달아졌습니다. 삶이 송두리째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따르고 있었던 하나님을 위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음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 안에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고사하고 선의 그림자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죄가 똬리를 틀고 질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당당했던 에고는 너무나도 무기력했습니다.
노예처럼 죄의 부림을 당했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커녕 오히려 영원한 죽음과 저주가 마치 숙명宿命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에고Ego가 부르는 애고哀苦 한 가운데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던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고개를 뻣뻣하게 곧추세우고, 잘난 척이란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살아왔는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너무 비참했습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밀려들었습니다.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탄식이 터졌습니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지만 따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죄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허물과 죄로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은혜로우시고 한없이 너그러우셨습니다. 오늘의 내가 되게 하셨습니다...내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고 애썼지만...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할 일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 곧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고전15:10)라고, 이제까지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면, 앞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흔적도 없이 철저히 지웠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오롯이 드러냈습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21세기의 영적 교사로 불리는 그Eckhart Tolle는 자신의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A New Earth”를 통해서 “에고Ego는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왜곡된) 마음의 방식일 뿐 진정한 내가 아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이제까지 살아온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되어버린 에고와의 결별訣別을 선언하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에고는 오랫동안 왜곡되어 왔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왜곡되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계속 왜곡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또 왜곡된 에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저와 여러분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왜곡된 에고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할 형제를 죽입니다. 자신 역시 죽음으로 몰아붙입니다.
그David는 성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등장했습니다. 여인들은 춤을 추면서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18:7b)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울은 그의 천을...다윗은 그의 만을 죽였도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천과 만이 많음을 상징하는 보편적 숫자라는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이 많고 많은 원수들을 죽였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습니다. 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들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몹시 언짢았습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습니다. 불쑥 시기와 질투가 올라왔습니다. 사실 왕은 골리앗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당시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그야말로 이름 없는 한 목동이 등장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하는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두고 볼 수 없다며 출정했습니다. 순식간에 제거해 버렸습니다. 거기다 왕은 이미 선지자로부터 자신이 폐위되고 새로운 왕이 세워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 소유와 지식과 외모와 신체적인 힘 등을 통해서 유지되는 에고가 왜곡되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와 가치와 용맹과 인기가 떨어졌다고 착각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자리마저도 그에게 돌아가겠다고 확신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물론 자신에게 충성하던 그의 마음을 왜곡했습니다. 왜곡이 왜곡을 불렀습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일이 벌어지도록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첫째 딸을 주겠다며 전쟁터로 보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명성만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거기다 다른 딸Michal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왕은 이번에는 블레셋 군사를 죽이고 표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성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술수術數였습니다. 명령을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면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인 블레셋 군사들의 표피 이백 개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왕은 꼼짝없이 딸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사위가 된 후에도 시기와 질투는 물론 두려움과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커졌습니다. 더욱 더 노골적으로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아들Jonathan이 그를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단칼에 거절하자, 이번에는 직접 창을 들어서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그를 죽이기 위해서 전령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딸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실패했습니다. 이후로도 왕은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숙소로 피한 그를 죽이기 위해서 전령을 보냈습니다. 전령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왕은 똑같은 일을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번이 그의 뜻을 좌절시키셨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선지자들의 숙소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왕에게 임하셨습니다. 왕복을 벗겨버리셨습니다. 선지자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선포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를 죽이고 말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제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상황에서는 포기할 것 같습니다. 저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스스로 자신의 칼에 엎드러져 자결하기 직전까지, 무려 10년 동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이 얼마나 강력한 의지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왜곡된 에고의 능력이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아들과 함께 죽어 가문이 몰락하는 순간까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물불 가리지 못하게 될 정도로, 정신 줄을 내려놓고 날뛰게 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그Absalom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배다른 형이 동생을 범하고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일단 아버지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기다렸지만 어떤 징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밀려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배다른 형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처단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즉시 죽여 버렸습니다. 이후, 자신을 평소처럼 가까이 부르지도 않고,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오히려 멀리하려는 것 같은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에고가 왜곡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며, 잠시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아침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국사를 의논하던 책사策士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은밀하게 반역에 동참할 군사들을 모았습니다. 아버지를 왜곡했습니다. 아버지께로 향하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되자, 자신이 성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아버지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가면서 비운 도성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후처들을 공개적으로 유린했습니다.
반역은 성공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책사Ahithophel는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 도망가는 왕의 배후를 차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전략이었습니다. 당장 정예군을 급파한다면, 겨우 요단강 건너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버지를 죽이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탁월한 전략이었습니다. 군사 회의를 통해서 만장일치로 합의까지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는 웬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은밀하게 남겨 놓았던 또 다른 책사Hushai를 불렀습니다. 먼저 내놓은 전략이 어떤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또 다른 책사는 선하지 않아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전쟁에 능한 용사 중의 용사라고 말했습니다. 따르는 장수들 역시 탁월한 용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지금 군사회의까지 통과한 전략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를 따르는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마음은 왕에게로 돌아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두르지 말라고 제안했습니다. 천천히 전력을 정비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진두지휘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완벽하게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는 나중의 전략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먼저 탁월한 전략을 내놓은 책사는 반역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직감했습니다.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 직접 출정한 그는 평소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머리가 나무에 걸렸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그 순간까지 환경에 의해서 왜곡된 에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왕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성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왜곡된 에고가 얼마나 비참한 결말을 부르게 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왜곡된 에고는 하나의 렌즈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물론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사물을 보고 판단합니다. 정체성까지 결정해버립니다. 왜곡된 에고와 에고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부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에고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 값없이 선물로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은혜 안에서는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왜곡되어 왔고 오늘도 여전히 왜곡되고 있고 이후로도 계속 왜곡될 수밖에 없는 에고를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나라고 확신하고 있는, 너무나 익숙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있는 왜곡된 에고와의 결별을 과감하게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는 허물과 죄로 인해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 안에는 지극히 작은 환난과 실패와 고통과 패배조차 도무지 참지 못하는 왜곡된 에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자신 곧 왜곡된 에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에 매인 옛 사람이 아니라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는 새 사람이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 죽도록 힘들게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값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χάριν” 안에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하나만을 자랑하는 삶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그토록 교만했고, 자존심 강했고. 자신만만했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다 내놓아도 부족함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다고 확신했었던 자신을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 전부를 부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만을 자랑했습니다. 왜곡된 에고Ego가 부르는 애고哀苦 곧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왜곡된 에고를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왜곡된 자아와의 결별을 확실하게 선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복된 삶,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픔보다 기쁨을 선물하는 복된 삶, 필요한 은혜를 쉬지 않고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