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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지’ |
세 쌍의 금가락지. 가장 왼쪽에 있는 금가락지에는 박쥐문양이 새겨져있는데 박쥐문양은 복(福)과 다남(多男)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동양에서는 오복의 상징으로서 경사와 행운을 나타낸다. |
경상남도 진주에 가면 촉석루와 진주성, 그리고 진주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남강의 다리 진주교에 끼어있는 금가락지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진주교에 끼워져 있는 이 금가락지들은 바로 논개가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상징하는 것인데, 논개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왜장과 함께 죽은 인물로 왜장을 껴안은 손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웠다고 전해진다.
경상남도 진주를 가로지르는 남강 위의 진주교. 진주교에 끼워져있는 이 금가락지들은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의 가락지를 상징한다. |
가락지는 안은 판판하고 겉은 통통하게 만든 손가락에 끼는 두 짝의 고리로써, 고리가 하나로 된 것은 ‘반지’라고 하며,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면서, 가락지만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말의 ‘반지(斑指 혹은 半指)’는 본래 두 짝으로 이루진 가락지의 한쪽 ‘반(半)’을 의미한다. 보통 ‘가락지’와 ‘쌍가락지’를 혼돈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락지 자체가 두 짝의 고리를 의미하므로 쌍가락지는 같은 의미를 이중으로 잘못 쓰는 ‘역전 앞’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개 반지는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끼지만, 가락지는 기혼녀가 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재료는 금·은· 구리·옥·비취·호박(琥珀)·마노·밀화(蜜花)·산호·진주 등을 사용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류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기도 했는데, 재료에 따라 겉을 민패로 하기도 하고, 문양을 세공하기도 했다. 가락지는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화되었지만 재료에 있어서 상류층에서는 옥, 비취 등을, 서민층에서는 간결한 박쥐무늬가 새겨진 은이나 백동 등을 많이 썼다. 조선후기에는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계절에 따라 다른 가락지를 착용했는데 제24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쓴 필첩인「사색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資粧要覽)」을 보면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 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 더위 초사 당한삼을 입을 때에는 옥 지환이나 자마노 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 당고의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 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 당고의를 입을 때까지 끼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가락지가 계절과 옷차림에 따라 달리 착용되며 그때 그때 다른 느낌의 장식적인 미를 더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손가락에 끼기에 둔하고 두툼한 가락지는 노리개 대용으로 옷고름에 매어차기도 했는데, 이중 월패(月佩)라고 불리던 옷고름에 단 반지는 아녀자가 남편에게 자신의 생리를 알리는 수단으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가락지는 양반 집에서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친정어머니로부터 딸에게 가보로 전해지며 부를 자랑하는 패물로 간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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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금지환. 반지의 윗부분은 마름모꼴이나 꽃잎모양으로 넓게 만들고, 그 표면에 금판을 붙여 돌기를 만들거나 수십 개의 금알갱이를 촘촘히 붙여 장식하였으며, 남색이나 녹색의 유리구슬을 끼워 넣기도 했다. |
지환(가락지, 반지)의 역사는 선사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패각제의 유물이 출토되어 그 시초가 오래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에,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반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태성리 제4호 토광묘(土壙墓)에서 발견된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로, 지름 2cm, 두께 1.5cm의 은제품이다. 고구려 유적에서는 반지의 출토가 많지 않고, 있더라도 그 형태가 소박하여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역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던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반지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크게 성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삼국 중 반지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던 국가로서, 다양한 형태의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반지는 주로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고, 남녀 모두 사용하였으며 좌우 구분이 없다. 고려시대에도 반지가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남아 있는 예는 많지 않다. 문헌에 따르면 몽고 침입 후 고려의 부녀자들이 원(元)나라로 끌려갈 때,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반지를 정표로 받아 끼고 갔는데, 이것이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반지보다 가락지를 더 애용했는데, 가락지는 조선시대 이전의 것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가부장제도 아래 사치스러운 수식을 할 수 없었고, 궁에서 조차 금의 사용을 금지해서 도금이나 은을 사용한 가락지나 반지를 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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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지의 재료로는 금과 은을 비롯해 칠보, 옥, 마노, 호박, 진주 등이 사용됐는데, 동의보감에서는 금은 신경안정 작용을 도우며 유독성물질 해독작용이 있고, 피부정화 작용에도 유효하다고 하며, 은은 간질 및 경기 등 정신질환과 냉대하와 같은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옥은 왕(王)이 사용하는 귀물이란 뜻으로 옥(玉)이라 하였는데, 본초강목에서 옥은 위의 열을 제거하고 천식 감소와 갈증제거 그리고 심장과 폐를 보양하며 후두를 방조해 소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밝게 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적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칠보가락지. 중앙에 박쥐문양이 있고 칠보장식이 되어있는데, 박쥐는 예로부터 복을 상징한다. |
삼국시대의 금반지에서는 한국 고대 칠보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저화도(400∼500℃)에서 녹인 것으로 파란(波瀾)이라고 하며, 청색 한 가지뿐이었다. 이후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는 빨강·노랑·녹색·청색·보라·흑색 등을 쓰며 반지, 팔찌, 비녀, 노리개 등의 부인용 장신구에 사용됐다.
이처럼 가락지는 시대와 재료에 따라 여러 다른 형태와 쓰임을 가지고 긴 시간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동고동락 해오며, 장식적인 기능과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