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농활 모람들이 왜 농활을 갔던가 하는 스스로 패기로 이 밤을 보내지 않나하는 늙은이 심리로 글들을 뒤적입니다. 읽으신 분은 다시 읽어 보시고 떠날 때의 그 마음과 맞춰 보시길...
어떤 사람들은 농활을 밑천으로 사랑도 만나고 삶도 바뀌었다는데, 모르겄습니다.
입담 걸쭉한 아줌마 한 사람 모십니다.
하기야 그때랑 지금이랑 때가 다르지만...
[젊은날의선택] 구성애- `남에게 보탬되도록 살자`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처럼 살기로 일찍부터 마음 먹었다.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큰 흐름은 정해놓았던 셈이다.
연세대 간호학과 재학 시절, 1년에 두 차례씩 모두 8번 농촌활동을 갔다. 요즘 농활과는 달리 `우국지사적 농활', 지식인들이 민중에게
진 마음의 빚잔치를 하는 식의 한계는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면 농촌으로 들어가리라는 결심하게 됐다.
졸업할 즈음 그냥 농사만 짓자니 조금 막막했다. 땅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대학 4년 동안 배운 전문지식이 아까웠다.
의료인력이 모자란 농촌에서 일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처음 발길을 내디딘 곳은 `부산 일신기독병원'. 삶을 대해 진지한
태도와 철학을 배운 첫 직장이었다.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1주일에 10회 이상의 강연을 강행할 수 있는 부지런함과 `누군가를 위해 보탬이
되도록 산다'는 인생철학을 처음 배운 곳은 그 병원이었다. 연세대 간호학과 졸업생에게 세브란스 등 대형 병원이 `온실'이었다면,
일신기독병원은 산 중턱의 `돌밭' 같은 곳이었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아이를 많이 받는 병원, 혹독한 훈련 과정으로 유명했던 그 병원의 분위기는 독특했다. 일단 `환자중심'인 원칙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까다로운 간호사의 복장이나 여러가지 규정도 `환자를 돌보는 데 짐스럽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바꿀 수 있었다.
또 입원실 응급실 분만실 수술실 등에서 끊임없이 밤낮으로 순환근무를 하다보니 의사 못지 않은 식견과 응급처방을 배울 수 있었다.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남편 송세경을 만난 것도 그 즈음. 농민 속에서 농민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삶의 주인으로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바로 기다리던 <상록수>의 `박동혁'임을 알아챘다.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93년 <내일신문> 창간 과정에도 참여하게 됐다.
내일신문사 부설 내일여성센터 소장으로 있을 때 사회운동단체 일꾼들을 상대로 했던 `성교육' 강연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져
이제 본업이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에 몇차례 출연하면서 어디서나 `아우성 아줌마'를 알아본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 덕분에 나도 젊게 사는 것 같아서 더욱 좋다. 삐뚤어진 성의식을 바로잡고, `성'이란 소재를
가지고 좀더 성숙한 인간에 다가서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운동가'로서의 내 삶은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