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고부터는 세계사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지만, 학창시절 지독하게 '세계사'과목이 취약했던 개인적인 아픈 경험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어졌다. 외우기를 강조했던 학습방식이 전후좌우의 상황을 '이해'하기를 원했던 나의 학습방법가 Gap이 있었던 듯 하다.
요즘 같으면 한장의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들을 장황한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것이다.
세계사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중에 하나가 '르네상스' 시대였던 것 같다. 당췌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의미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최근에 많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해는 복잡하게 얽혀져있는 르네상스시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단순히 시대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몇백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을 전달해 주고 있다.
메디치 가문은 1397~1743년 346년간 유럽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르네상스를 후원하고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을 피렌체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게 하고 레오10세 및 클레멘트 등 교황2명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단순하게 권력을 가진 귀족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여 오페라의 탄생과 서양식 식사 예절, 하이힐 패션 등이 나온 것은 모두 메디치가와 관계가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요 갈릴레이 등을 후원하고, 아메리카대륙의 유래가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후원하여 아메리카 대륙행을 도와주었다.
원래 Mugello 지방의 조그만 농장주 였던 메디치가문은 근처 마을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교리상 은행업을 할 수없었기에 '장부'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용'과 '재량'으로 이자를 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바로 메디치 성장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은행업과 함께 모직사업을 진행하면서 유럽각국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기에 더욱 큰 성장이 이뤄진 것이다.
마치 '광고'로서 전세계를 장악한 구글의 이사회에서 매월 한장의 통계리포트(광고주들의 물량)를 통해서 전세계의 산업성장을 예측하과 비즈니스전략을 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디치가문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이야기이다.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출신해적인데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매입하고 추기경직을 매입했는데 신분상의 문제로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1410년 교황 요한23세로 취임했다. 당시 유럽사회는 가톨릭교회의 대 분열시기(1378-1417)로 교황이 3명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 개입하여 교회통합을 위해 독일 콘스탄트에서 교황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요한 23세가 불법행위로 체포되고 35,000플로린의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투옥하였다.
이 여행길에 코지모 데 메디치가 교황23세를 수행했다. 교황 요한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투옥되고 코지모에게 대출을 요청하였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16억원 정도다. 코지모의 소식을 들은 메디치가는 대출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석방된 요한 23세가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심지어 임종을 하자 성 세례 요한 세례당 안에 교황 영묘를 제작해 주기도 했다. 임종 순간 이 모든 것에 감격한 요한 23세는 성 세례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한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보관). 신뢰를 지킨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절대로 한번 맺은 신의를 버리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다소 어리석은 행동은 교황이나 귀족이 주목하고 있다가 모두 몇 년 뒤 주 거래 은행을 메디치로 변경한다. 막대한 자금이 메디치로 쏟아 들어 오면서 유럽최고의 은행이 된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버리지 않는 메디치 가문의 신용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성공한 비즈니스때문만이 아니다. 인문학을 사랑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예술가 들을 후원해 르네상스가 발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재물뿐만 아니라 심적 성찰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예술을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과 지참금 약속을 통해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서거로 지참금을 줄 수 없었기에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궁전생활을 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웃으며 늘 당당한 모습을 이어갔다.
그리고, 황통을 이어받을 아들을 얻는 방법을 알기 위해 카테리나는 점성술사 노스트라 다무스를 고용하여 마음을 의지하고 비법을 찾으려 했다.
비방은 “신선한 암소의 똥을 먹어라”였는데 카테리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똥을 먹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놀랍게도 아들을 낳게 된다.
이후 왕이 창에 찔려 죽게 되자 카테리나는 사자의 힘을 숨기고 여우의 지혜를 보이면서 그의 아들이 성장하여 황제가 될때까지 참고 견뎌왔던 것이다.
비록, 부와 패션과 권력이 총망라된 메디치 가문도 300년의 영화로 마무리가 되지만 드라마와 같은 메디치가문의 이야기는 르네상스라는 단어와 공존되고 있는 것이다.
1. 신의를 중의시 하고, 2. 내면을 풍족케하면서 3. 미래를 위하여 참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몇 백년이 지만 현재에도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만들어주고 있다.
요즘 같으면 한장의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들을 장황한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것이다.
세계사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중에 하나가 '르네상스' 시대였던 것 같다. 당췌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의미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최근에 많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해는 복잡하게 얽혀져있는 르네상스시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단순히 시대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몇백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을 전달해 주고 있다.
메디치 가문은 1397~1743년 346년간 유럽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르네상스를 후원하고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을 피렌체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게 하고 레오10세 및 클레멘트 등 교황2명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단순하게 권력을 가진 귀족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여 오페라의 탄생과 서양식 식사 예절, 하이힐 패션 등이 나온 것은 모두 메디치가와 관계가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요 갈릴레이 등을 후원하고, 아메리카대륙의 유래가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후원하여 아메리카 대륙행을 도와주었다.
원래 Mugello 지방의 조그만 농장주 였던 메디치가문은 근처 마을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교리상 은행업을 할 수없었기에 '장부'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용'과 '재량'으로 이자를 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바로 메디치 성장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은행업과 함께 모직사업을 진행하면서 유럽각국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기에 더욱 큰 성장이 이뤄진 것이다.
마치 '광고'로서 전세계를 장악한 구글의 이사회에서 매월 한장의 통계리포트(광고주들의 물량)를 통해서 전세계의 산업성장을 예측하과 비즈니스전략을 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디치가문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이야기이다.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출신해적인데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매입하고 추기경직을 매입했는데 신분상의 문제로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1410년 교황 요한23세로 취임했다. 당시 유럽사회는 가톨릭교회의 대 분열시기(1378-1417)로 교황이 3명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 개입하여 교회통합을 위해 독일 콘스탄트에서 교황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요한 23세가 불법행위로 체포되고 35,000플로린의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투옥하였다.
이 여행길에 코지모 데 메디치가 교황23세를 수행했다. 교황 요한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투옥되고 코지모에게 대출을 요청하였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16억원 정도다. 코지모의 소식을 들은 메디치가는 대출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석방된 요한 23세가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심지어 임종을 하자 성 세례 요한 세례당 안에 교황 영묘를 제작해 주기도 했다. 임종 순간 이 모든 것에 감격한 요한 23세는 성 세례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한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보관). 신뢰를 지킨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절대로 한번 맺은 신의를 버리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다소 어리석은 행동은 교황이나 귀족이 주목하고 있다가 모두 몇 년 뒤 주 거래 은행을 메디치로 변경한다. 막대한 자금이 메디치로 쏟아 들어 오면서 유럽최고의 은행이 된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버리지 않는 메디치 가문의 신용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성공한 비즈니스때문만이 아니다. 인문학을 사랑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예술가 들을 후원해 르네상스가 발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재물뿐만 아니라 심적 성찰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예술을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과 지참금 약속을 통해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서거로 지참금을 줄 수 없었기에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궁전생활을 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웃으며 늘 당당한 모습을 이어갔다.
그리고, 황통을 이어받을 아들을 얻는 방법을 알기 위해 카테리나는 점성술사 노스트라 다무스를 고용하여 마음을 의지하고 비법을 찾으려 했다.
비방은 “신선한 암소의 똥을 먹어라”였는데 카테리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똥을 먹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놀랍게도 아들을 낳게 된다.
이후 왕이 창에 찔려 죽게 되자 카테리나는 사자의 힘을 숨기고 여우의 지혜를 보이면서 그의 아들이 성장하여 황제가 될때까지 참고 견뎌왔던 것이다.
비록, 부와 패션과 권력이 총망라된 메디치 가문도 300년의 영화로 마무리가 되지만 드라마와 같은 메디치가문의 이야기는 르네상스라는 단어와 공존되고 있는 것이다.
1. 신의를 중의시 하고, 2. 내면을 풍족케하면서 3. 미래를 위하여 참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몇 백년이 지만 현재에도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