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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명성, 돈, 집중 조명, 권력, 안락, 쾌락으로 올라선다. ‘위’야말로 정녕 크게 되는 방향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만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듯이 인간의 바늘은 위를 가리킨다. 인간 각자의 마음에는 어떻게든 스스로 높아지고 출세하고 자존심을 세우려는 타고난 기제가 있다. 우리의 역할 모델들과 영웅들도 그 주제를 부추긴다. 위로 올라가서 아집의 근육을 뽐내라. 중력을 정복할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말라. 노골적으로 하든지 아니면 겸손의 탈을 쓰든지 어쨌든 위로 올라가라. 왜? 그것이 크게 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이 하는 말이다. 이런 정황에서 빌립보서 2장은 성경에서 문화에 가장 역행하는 장일 수 있고, 특히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빌립보서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정말로 크고자 하거든 당신이 취해야 할 방향은 내려가는 것이다. 당신은 내려가야만 크게 될 수 있다. 이 역설의 핵심에 또 다른 역설이 있다. 크다는 것의 기준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자기 포기다 많이 잃을수록 많이 얻는다.…
내려간다는 개념에 선뜻 찬동하지 않는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하향성의 개념으로 씨름한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탐닉을 위하여 이것저것 바라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혼동하고 있다. 예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최근에 삶을 간소화하거나 뭔가를 줄였거나 희생적으로 베푸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당신은 몇이나 알고 있는가? 질문을 좀더 좁혀서,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목숨을 잃는 것이 곧 목숨을 얻는 길이라고 정말 믿는가?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빌립보서에 분명히 나오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크게 되는 유일한 길은 내려가는 것이다. 하향성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길 중의 최고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크게 되신 길은 전형적인 길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분이 세상 속으로 "내려오셨다"고, 그것도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오셨다고 밝힌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되신"분이었다. 그분은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에서 찬송의 궁극적인 대상이었다. 예수님의 높은 지위를 생각하면, 성육신의 파격과 그분의 하향의 깊이는 자못 더 놀랍다. 그분은 신적인 특권을 자진하여 희생하셨다. 모든 권력의 근원이요 모든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짐승의 지저분한 여물통에서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다.
이 땅에서 삶을 시작하신 후로도 예수님은 내려가기를 멈추신 적이 없다. 전능하신 분이 우셨다. 만물의 주인께서 집이 없으셨다. 만왕의 왕께서 종이 되셨다. 진리의 근원이신 분이 신성모독의 죄를 쓰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셨다. 생명을 주신 분이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시고 숨을 헐떡이셨다. 그분의 하향은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우주에서 찬송의 극점에 계시던 분이 바닥까지 낮아져서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 무죄한 피해자가 되신 것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미련함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는 큰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다 이루셨다. 그분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이루셨다. 빌립보서에 나오듯이, 이런 하향성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것이 반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려가셔서 하나님의 위대함이 되셨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이 명예와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셔서가 아니다. 사실 그분은 그들을 높여 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분이 우려하시는 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상향성이다. 곧 우리가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뜻을 도모하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 때의 최종 목적은, 자신의 주요 목표인 자기 탐닉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돈과 권력과 재물을 갖추어서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크다는 개념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 탐닉이란 본질상 언제나 자멸로 치달음을 그분은 아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에 올라가서 깊은 자아 성취감을 얻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전에서 '위'라는 말은 언제나 내리닫는 길이다.
거꾸로 '아래'는 올라가는 길이다. 야고보서 4:10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이려고 내려가셨고 작아지셨고 줄어드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그분을 지극히 높여 주셨다.
*아래라는 말은 패자들의 말이다. 빌립보서 2장이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잃는 훈련을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내 아들의 본을 따르라. 그는 조금만 잃은 것도 아니고 많이 잃은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잃었다.”
이런 부르심이 그려내는 인간상은 개성과 기운이 빠진, 고갈되고 공허한 모습이 아니다. 그분을 위하여 잃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인간의 정당한 필요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갈망과 열정을 부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감정을 잘 돌보셨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각자의 개성을 수용하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추구하라고 도전하셨다. 그렇지만 잃는다는 것은 어떤 필요가 정당한 것인지 그 결정권을 하나님께 넘긴다는 뜻이다.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갈망과 열정을 그분의 인도에 맡기고, 성격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주시도록 그분께 구하고, 박수 받을 생각 없이 재능을 사용하며, 우리의 꿈이 그분의 뜻에 맞춰질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잃기란 쉽지 않다. 그러려면 초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두어야 하고, 하나님과 그 나라의 진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하며, 영적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겁 많은 사람들은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의 가장 큰 권력은 우리가 자신의 거짓말을 믿을 정도로 기만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솔직히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작은 헤롯들이 우리 각자의 얼굴을 마주보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상황만 된다면, 우리 중에 헤롯의 마술을 조금이라도 부릴 우려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자원과 지능과 매력을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교묘히 또는 무지한 척 속내를 숨긴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장에서의 정치적 전략, 영역 다툼, 부부 간의 권리, 부모의 특권 등 다른 이름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귀착점은 언제나 똑같이 권력 남용이다. 배우자를 슬쩍 조종하거나 승진을 다투는 직장 동료를 약간 함부로 대하거나 악의 없이 한두 번 제 자랑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는가? 서열상 '아랫사람'이 뭔가를 부탁해 올 때 참을성 없이 반응하거나, 생각 없이 자녀에게 “하라면 해!" 하고 되받아치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의 내면 어딘가에 아직도 헤롯이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 조금이라도 위신을 높여 볼 생각에 자신의 가치관을 팔 때가 있지 않은가? '아래'라는 말은 아직도 수시로 두려움과 심지어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가? 우리는 다 헤롯의 얼굴을 할 때가 있다. 그럴싸한 화장으로 잘 가렸을지 모르지만 똑같이 살벌한 곁눈질을 한다.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지배하고,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휘두르고 다른 사람들을 높일 길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높임을 받는 헤롯의 모습을 우리도 공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과 낮은 지위로 일생을 보내신 후에 거기서도 더 내려가셔서 거칠게 깎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의 부르짖음도 헤롯처럼 한밤을 갈랐다. 자신의 권력을 온전히 양도하신 채 그분도 돌아가셨다. 그러나 헤롯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헤롯은 그 모든 권력으로도 자신을 죽음이나 외로움에서 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하실 수 있었으나 일부러 그러지 으셨다. 살아 생전 예수님은 자원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비방, 제자들의 무지와 무심함, 백성의 거부, 집안의 가난, 끝없는 생명의 위협, 친구들의 배반, 구타. 그분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파격적인 사랑을 보이신다는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감내하셨다. 헤롯은 군대를 결성하고 요새를 건축하고 마음대로 살상하며 증오와 자기 보호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예수님은 자유케 하는 사랑의 권력을 휘두르셨다. 그분은 병자와 시각 장애인들을 치유하셨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하셨고, 죄와 죽음의 노예들을 해방시키셨다.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내려가는 길이 만족과 생명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그분을 믿으셨다. 예수님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뢰 때문이었다. 헤롯은 마땅히 당할 만한 죽음의 외로움을 부질없이 피해 보려고 꾀를 부렸으나 예수님은 굳이 당하지 않으셔도 되는 죽음의 고뇌를 잠잠히 받아들이셨다. 헤롯의 시신은 화강암 무덤 속에서 썩었으나 예수님은 놀라운 권능과 영광으로 그리고 진정 기쁨으로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경우에 끝은 끝이 아니었다. 그분은 역사상 가장 저명한 인물이 되셨다.
두 왕의 메시지는 정반대였다. 헤롯은 네 욕망을 따르고, 십자가를 피하고, 얻으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날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베풀라고 하셨다. 결국 기쁨에 이르는 길을 아는 왕은 둘 중 하나뿐으로 밝혀졌다.
*날마다 머독은 인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 나라의 차이에 부딪친다. 그는 이 질문에 부딪친다. 성공이란, 참된 성공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그래서 비행기, 별장, 자동차, 명성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다 내가 죽는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나는 명심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훨씬 많이 일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은 영원하다. 영원은 불가해하다."
자신을 비워 나가는 과정이 있다. 머독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는 재물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필요와 축복과 잉여를 가르는 선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어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을까? 제트기나 고급 주택이나 별장은 괜찮은 것일까? 머독은 충실히 십일조를 드리고 몇몇 재단에 기부하고 교회 구제 부서에 현금을 낸다. 그는 더 많이 하고 싶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양보할 수 있는 '잉여'가 자신의 삶 속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자신이 천천히 가고 있다고 말한다. 선한 일을 하다가 오히려 기어가 후진으로 바뀌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 '행위와 획득'의 사고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감사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서 그분의 점수를 따려고 하는 것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그는 개근상을 타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삶의 모든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간극을 느낀다. 내가 수많은 역량과 자원의 복을 받은 것은 알겠는데 내 삶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이 주어진 자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이다. 내 안에 동경 내지 자책이 느껴진다."
그것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 즉 혼돈과 하나님의 통제 속으로 들어가는 길의 출발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면 뭔가 어엿한 사람이 되려면 뭔가를 획득하거나 성취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나 어울린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이다. 다시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셨다. 의지적인 행동이 암시된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신의 권리와 특권을 고의로 버리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마어마한 간극을 건너셨다.
그 간극의 폭을 한번 상상해 보라. 하늘에서 땅으로의 내려감을 줄자나 주행 기록계나 광속(光達)으로 재 보라. 멀다는 거리도 수천 년의 시간도 영원 속에 퇴색할 것이다. 제2의 아인슈타인을 찾고 새로운 방정식을 풀고, 컴퓨터 검색 엔진을 바삐 윙윙 돌려 보라. 두뇌들과 칩들이 녹아 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거리는 한마디로 측량 불가능이다.
그러나 측정해야 할 내려감은 거리만이 아니다. 본질의 내려감. 존재의 내려감도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이 되셨다 내려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우주의 한복판에 계셨다. 그분은 모든 찬양의 구심점, 만물과 모든 존재의 창조주, 모든 것을 붙드시는 에너지와 능력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수도 아니었고, 영영 공석이 되지 않을 권좌의 영원한 2인자나 계승자도 아니었다. 빌립보서 2:6에 보면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라고 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원 전부터 다스리시는 분, 이사야 6장에 이사야가 본 눈부신 예배의 환상 속에서 천사들이 절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친 대상은 바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그분이 자진하여 신의 권리를 버리시고 내려오셨다. 별안간 그분은 문으로 드나드시고 나귀를 타시고, 음식을 잡수시고, 잠을 주무셔야만 했다. 그분의 근육은 욱신거렸다. 그분은 "예,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그분이 대신 욕을 들으시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어이, 유대인 남자"라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께서 육신의 속박과 제약에 따르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에서 인간으로…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내려감은 그것으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그분은 십자가를 겪으셔야 했다. 하늘에 뚜렷이 대비되는 거칠게 쪼갠 피 묻은 십자가를 말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가지신 것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그나마 그 소유의 연결고리는 못이었다. 외면당하시고 상하시고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채로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무덤에 묻히셨다. 분쟁의 소지가 될 유언장도 없었다. 예수님은 집도 땅도 돈도 없었다. 물려줄 나라도 없었다. 그분께는 소수의 따르는 자들밖에 없었으나 그들마저도 흩어졌다. 그분은 자녀도 없었고 기록된 유산도 남기지 않으셨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한 인간이-하나님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다 내려가셨다.
*그러나 하향성이 하나 더 있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깊은 내려감인데, 곧 죄 없으신 분이 죄로 더럽혀지신 것이다. 모든 거짓의 증오, 모든 불순한 생각의 악, 모든 잔인한 말의 독, 모든 불이행된 선행의 비극이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거룩하신 아버지의 노가 그 아들에게 타오르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희석 될 줄 몰랐고, 예수님은 그 진노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드셨다. 정녕 그분은 더 이상 낮아지실 수 없었다.
이 내려감의 파격을 알고 나면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구절이 사뭇 더 놀라울 뿐이다. 누가 그분을 밀거나 위협하거나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내려감은 우연한 추락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논리에 대한 확고부동하고 의지적인 헌신의 결과였다. 예수님은 만물의 최정상에서 십자까지 한걸음씩 자진하여 일부러 내려가셨다. 하늘을 떠나신 순간부터 그분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그것도 직선 코스로 가셨으니 곧 하향이었다. 그분은 베풀고 섬기고 잃고 죽는 삶을 알고서 능동적으로 끌어안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운 일은 우리도 같은 삶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도 사리사욕에 죽음으로써 예수님을 따라서 한걸음씩 사다리를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향성은 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내려가기로 날마다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논리를 구사해야 한다. 내려가는 일이 때로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만이 크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따르신 길-우리에게 따르라고 하신 그길은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것은 말이 안 되었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기에 그런 자멸 행위를 요구하신단 말인가? 그리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왜 그런 행동 명령을 따른단 말인가? 두 질문 모두 답은 하나다. 사랑이다. 자진하여 강등되시고, 일부러 줄어들어서 잃으시고, 당신과 나의 죄값을 영원히 치르려고 죽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사랑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아들에게 내려가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수혜자이자 그분을 따르는 자들인 우리도 똑같이 하도록 부름받았다. 최고의 두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동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하여 내려가고, 규모를 줄이고, 강등을 받아들이라는 인도하심을 느낀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곤 한다. 내려간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지만, 내가 만나 본 바 그런 인도하심을 따른 사람들은 거의 하나같이 어느 정도 불편을 겪었다. 심히 괴로운 선택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라는 아담의 기도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내려가려면 겸손해야 하고 깨어져야 하고 의존해야 하고 섬겨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우리 모두에게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다 현 상태가 훨씬 편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자신이 신중하게 만들어 낸 그 안전 지대가 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부재인 안락은 풍성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실은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긍정적인 변화, 영적인 성장, 성품의 향상, 관계의 진보는 고통, 갈등, 긴장을 요한다. 그것이 변화의 연료인 셈이다. 운동선수들은 "고통 없이는 소득도 없다"고 말한다. 사업가들도 "끈기 없이는 영광도 없다"고 화답한다. 영적으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10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은 안전 지대를 향한 오르막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전, 힘든 선택, 고통스러운 성장, 순종을 향한 내리막길에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셨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명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나오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나는 너희를 상처와 죽음의 삶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평강이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
요지는 이것이다. 풍성한 삶은 고통을 피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고통 속을 통과할 때에 찾아온다. 내려가는 길은 살과 뼈를 깎는 길이다. 하향성은 단순히 돈을 얼마나 베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고 우리 삶의 죄와 잉여를 얼마나 기꺼이 털어 내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며, 그 태도를 특징짓는 것은 성품의 힘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은 고통 없이는 자랄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의 한복판에 우리를 하나로 묶는 이상하게 낯익은 특징이 하나 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관심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기심이다. 대륙과 정치제도와 경제 상황과 인종을 불문하고 그것은 인류 보편의 어두운 단면이다. 이는 마지막 빵조각을 노리는 욕심이고, 제3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며, 우리 눈빛의 성난 굶주림이다. 그것은 바로 '나 먼저'의 사고 방식이다. 이 뿌리 깊은 인생관은 행복을 자기 탐닉과 동등하게 여긴다. 그것은 권력, 명성, 돈, 스릴이라는 도구로 성공을 측정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타락의 표출인 이러한 이기심을 예찬한다. 인간을 부풀리는 관점이 이처럼 널리 받아들여진 적은 일찍이 근대사에 없었다. '나 세대(Me Generation)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우리 세대다. 탐욕이 급기야 주목할 만한 우상으로 승격된 것은 1960년대였다. 가치, 도덕, 정의감에 기초하여 내려지는 결정은 갈수록 적어졌다. 대신, 대답은 욕구에 싸여 있다. 이것이 나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인가? 나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것인가?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나의 갈증을 씻어 줄 것인가? 나의 권력욕을 채워 줄 것인가? 핵심 단어는 '나'였다. 우리의 역할 모델은 테레사 수녀에서 마돈나로 바뀌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마음껏 쾌락을 탐하고 물리도록 채우고 좋으라는 것이었다. 사리사욕은 용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장려되고 조장되었다. 광고와 글래머 모델업 같은 산업들은 이런 뻔뻔스러운 자기 중심성의 옥토에서 싹이 텄다. 내가 더 많이 가질수록 나한테 더 좋다는 교훈을 우리는 배우고 또 배웠다. 세상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말이다.
정말 세상은 저주를 받았다. '나 먼저'의 사고 방식은 우리 사회를 내부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다. 현실 도피, 성도착, 에이즈, 혼외 임신, 폭력, 정치 스캔들, 가정 붕괴는 모두 우리 현대의 광기(氣)인 나밖에 모르는 병의 증상들이다.
*수년 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 먼저'의 태도는 생명의 길이 아님을 가르치려고 애쓰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나는 섬기러 왔다. 나는 권력의 줄을 조종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대의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주러 왔다." 그분의 전 생애는 섬김과 이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최후의 본보기가 될 것이었고, 그분은 제자들과 특히 그분의 오른팔인 베드로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아직도 자신의 의제에 몰두해 있었다. '나 먼저'의 사고 방식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면, 그도 예수님이 원하신 것을 원했다. 예수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권력, 출세, 특권이라는 세상의 가치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 마음의 고통, 곧 자신의 목적과 친구이신 그분을 일거에 잃는다는 허망함만 느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의 한복판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이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나 먼저'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그것은 단지 관계상의 바이러스나 약간의 심리적인 부적응이나 부모의 불완전한 양육의 대물림이 아니다. 그것은 알약을 먹거나 상담으로 해결하거나 바이오피드백으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지옥에서 온 병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한 그것은 우리 삶에서 만족을 고갈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잃게 할 것이다.
그런데 충분히 근본적이고 유일한 대책은 죽음이다. 즉 자아에 대한 죽음이다. '나 먼저'의 사고 방식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런 죽음은 무엇을 뜻할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우리 삶을 자원하여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 논리의 전환, 하나님의 또 다른 역설이 있다. 이렇게 자아에 대하여 죽을 때-이렇게 베풀고 섬길 때-우리는 자신이 가장 원하던 깊고 개인적인 만족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앤지가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다. 사랑에는 슬픔이 따라다닌다. 그녀는 말한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상한 마음뿐이랍니다. 마음의 아픔을 나눌 수 없다면 내게 사랑이 별로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앤지가 깨달은 바 자신의 삶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뿐이다. 앤지는 말한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큰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에게 축복이 되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하면 내가 그의 종이 되고 있다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죠 그들에게 신경을 써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이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내 말에 귀를 열지요 내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서열을 미워하셨다. 사실 그분은 사역 전체를 들여서 서열의 기초를 허무셨다. 그분은 기회만 있으면 서열을 위아래로 안팎으로 뒤집으셨다. 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종종 말로 질타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위선자, 회칠한 무덤, 뱀이라고 부르셨다. 그분은 그들이 과부들의 재산을 빼앗고, 죽은 자들의 뼈로 가득하며, 말 그대로 자아를 숭배한다고 비난하셨다. 정치적으로 외세 치하에 있고 슈퍼 스타가 없는 나라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세고 존경받는 사람들-VIP들-이었을 것이고, 스스로 높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경멸하셨다. 그분은 서열을 일축하셨다.
*예수님은 문제는 초점이라고 말씀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외적인 것들에, 즉 자기들이 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엄숙한 기도 의식을, 그리고 회당의 최고 상석에 앉는 정기 입장권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최고급 옷과 보통 사람들이 자기네를 바라보는 시선을 좋아했다. 외적인 것들로 산을 쌓아 올림으로써 그들은 분리의 벽을 세웠다. 자신들의 직함과 예복을 '우리'와 '저들'이 전반적으로 다르다는 가시적인 표로 삼았다. '우리'가 '저들'보다 나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들은 삶을 겉치레의 관점에서 보았다.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이 만날 때에 불꽃이 튄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들이 필요 없으셨다. 사실 그분은 창조주와 소유주라는 자신의 직함, 하나님 보좌 오른편의 지위, 우주의 찬송을 받는 영광 등 그 모든 것을 자진하여 비우셨다.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분리의 벽을 허무시고자 예수님은 외적인 것들을 다 벗으셨고, 여물통에 태어난 벌거숭이 아기만큼이나 겸손해지셨다.
*예수님의 시각을 형성한 것은 깊은 겸손이었다. 전혀 겸손이 필요 없으신 분의 겸손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분명히 자신의 직함, 지위, 찬송을 받아 마땅하셨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대신 그분은 인간을 동등한 차원에서 대하기 원하셨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과 '보통 사람들' 사이의 분리를 즐겼으나 예수님은 벽을 허물려고 애쓰셨다. 자신의 신적인 권리 때문에 존재하는 벽까지도 말이다. 그분의 철학 한복판에 겸손이 있었다. 대개 그분은 힘없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사용하셨고, 사랑 없는 자들에게 사랑을 보이셨고, 보답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섬기셨다. 조건적인 반응에 근거한 서열을 그분은 특유의 언행일치의 삶으로 거듭 거부하셨다.
*서열은 그 자체로 잘못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악의 실제적인 정의(定義)라고 예수님은 삶과 말씀과 행동으로 이르셨다. 그분은 겸손을 통하여 타락한 시스템 전체를 비틀고자 하셨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예수님이 문제를 일으킬 기회를 찾고 계신 것을 거의 볼 수 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주변 사람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섬김을 보이면 너희는 내가 보기에 큰 자다. 낮은 자 중에 낮은 자를 섬기고 높이고 존중하면 너희는 내가 보기에 큰 자다.” 그분은 감옥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고 고아와 과부를 잔치에 초대하고, 노인과 시각 장애인과 병자를 보살피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곤 하셨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고쳐 주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여 주시고 요즘 말로 '인간 쓰레기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는 등 자신의 말을 친히 행동으로 뒷받침하셨다. 그분은 최악의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대개 그분의 초점은 서열 8위, 9위, 10위의 닭들에 있었다. 그렇게 하심으로 세상의 가치 체계의 근간을 찢으셨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분은 여태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가장 반(反)문화적인 사람이었다. 그분은 지구에 '질서'를 부여한 바로 그 시스템에 대항하셨다. 죄와 편견에 속속들이 물든 세상에서도 사랑이 정말로 가능한 일임을 수고로이 보이셨다.
정말 충격적인 일은 예수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분처럼 반문화적이고 대항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망가지고 일그러진 세상 속에 우리가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들이 너희가 나를 따르는 자들임을 알 것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책임을 서열상 우리보다 높은 자들에게로 국한하는, 각주나 빠져나갈 틈새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뿐이다. 아무런 한정어도 붙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작은 명령이 아니었다.
*빌립보서 2:3에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다. '겸손한 마음으로'라는 말이 결정적이다. 근간을 떠받치는 철학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바로 거기서부터 성육신을 시작하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겸손의 길을 택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는가? 예수님은 겸손하실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온통 겸손해야 할 이유뿐이다.
겸손이 중요한 절대적인 이유가 또 있다. 서열을 해부해 보면 그 기초는 오만과 편견이다. 우리 중에 일부가 다른 일부보다 낫다는 신념이다. 겸손이란 우리 각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동등함을, 즉 철저히 흠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지혜다. 직함이나 재물과 상관없이 우리 중에 마땅히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중에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구속의 자비는 본래 우리에게 전적으로 과분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것을 모두에게 값없이 베푸신다. 예수님은 제프리 다머(시체를 간음하고 절단하고 인육을 먹은 미국의 연쇄 살인자-역주), 아돌프 히틀러, 테레사 수녀 그리고 나와 당신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이런 개념들이 겸손의 뿌리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 여부를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도록 부름받았다. 바울은 그것을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표현했다. 서열에 이보다 더 대치되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 개념을 현실 생활에 적용할 때 그 함축된 의미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사랑은 변명으로 되지 않는다. 행동이 있어야 영향이
뒤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성급히 현실을 무시하지 말자. 그런 행동은 비록 혁명적인 잠재력이 있지만 대가가 따른다. 서열처럼 막강한 것을 들이받으면 도로 받히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부, 미움, 분노의 아픔을 배우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 특히 체제 내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개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바울도 그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가 방금 본 겸손에 대한 말씀을 집필한 대가를 혹독히 치렀다. 평생에 걸쳐 그는 매 맞고 채찍질당하고 옥에 갇히고 버림받고 배반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순교당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비우시고 겸손하게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분은 호흡마다 말씀마다 행동마다 서열에 대항하셨다. 그분은 무조건 사랑하셨다. 결국 그분은 엘리트 층에게 미움을 받아서 예루살렘 밖의 한 산에 높이 달리셨다. 그분이 멸하러 오신 체제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피범벅이 된 그분의 머리 위에 초라한 패가 붙어 있었다. 언덕의 제왕. 사랑이 그분을 그 자리로 데려갔다.
*마이크 싱글터리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기 아내와 하나님께 자백 했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울었다. 싱글터리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했음을 알았다. 여태껏 고통을 많이 겪은 그였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용서를 받고 비애를 맛보는 동안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비워 가고 있었다. 그의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산(酸)에 용해되고 있었다. 고통이 엄청났지만 수용은 비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남아 있던 구멍을 싱글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채웠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 자존심, 내죄, 세상이 채워 왔던 내 안의 빈자리를 이제 하나님이 채우고 계셨다. 오늘까지도 나는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새사람이 된 것만은 안다."
겸손은 그에게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지혜였다. "내 생각에, 내가 가장 확실히 배운 것은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매일매일이 새 날이며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시도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 아무것도 내 미래를 안전하게 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튿날 깨어나니 가슴에 혹이 생겨서 병원에 갔다가 죽을 수도 있다. 자신이 정말로 얼마나 약한지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수천의 유태인을 소각하는 죄는 범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짓말로 누군가의 마음 한 자락을 찢어 낸 적이 얼마나 많던가? 우리는 누군가-상관, 배우자, 시어머니가 차라리 없어져버리기를 소원하고, 그 소원 때문에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적이 얼마나 많던가? 내면으로 그리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욕망, 악의 불꽃과 연료 다카우의 분노에 휩쓸린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영성 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s)에서, 상황만 제대로 주어지면 우리 각자도 엄청난 악을 저지를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파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악 앞에서 우리가 던지는 '왜?'라는 질문은, 평범한 인간 성품 안에 거주하며 그리하여 인간사의 통상적인 방향을 움직이거나 조건화하는 세력들을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그것은, 만인이 개탄하는 악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사실은 '점잖은 개인들의 단순한 준비성(readiness), 즉 조건만 맞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을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 준비성은 안전, 자존심의 충족, 육체적인 쾌락의 만족 등 우리의 목표들을 실현하는 데 도움만 된다면 언제든지 활동을 개시한다. 평범하고 점잖은 인간의 성품에 팽배한 이 조직적인 준비성이 곧 타락한 인간 본성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신다. 그분은 만물보다 심히 악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신다. 심지어 우리 중에 그 어둠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한 사람들까지도 악의 망령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찌르고 아프게 하기 일쑤다. 우리는 순전하고 겸손한 종이라고 고백하고는 정작 박수가 없으면 불평한다. 우리는 풍성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허무한 방종의 꿈을 좇는다.
*악이라는 병의 뿌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성경은 그 점을 역설하고 있고, 간단한 치료책은 없다. 악의 세력을 정복하기에 족한 것은 오직 무죄한 마음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도 우리를 지금 여기서는-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악은 여전히 세상을 찌르며 휩쓸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악은 혐오감을 주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우리를 매료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케이프 피어" (Cape Fear)나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본다. 우리는 연쇄 살인 뉴스에 주파수를 맞춘다. 우리는 잔인한 농담과 변태 코미디를 듣고 보면서 병적으로 웃는다. 우리 중에 악의 유혹적인 속삭임, 가서는 안 될 곳과 지펴서는 안 될 욕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악의 손짓을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도 바울까지도 이렇게 좌절 중에 악의 유혹에 대해 절규했다. "나는 하고 싶은 선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악은 결국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악한 성향이 그것과 전쟁을 벌인다. 내 안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누가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인가?“
* 누가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인가?"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답은 더 어렵다. 자유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일정한 규율에 순종할 때 찾아온다. 예수님은 그것을 명백히 밝히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그분은 말을 대충 얼버무리지 않으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 그러면 내 명령에 순종하라. 너희가 악에서 해방되고 싶으냐? 그러면 내 말대로 하라.
역설의 책 빌립보서에 그것이 다시 나온다. 자유를 얻는 티켓은 순종이다. 이것은 삼키기 어려운 말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자유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우리는 자신이 해방된 자라고 되뇐다. …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자유란 규율을 피하고 규율을 바꾸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규율을 어갈 때 찾아 온다고 배웠다. 순종 규율을 지키는 일은 우리가 표방하는 모든 것에 위배되며, 결국 속박과 제약과 예속을 낳는다고 확신한다.
이런 사고는 우리의 교회들에도 스며든다. 관계라는 단어가 대유행이다. 관계-하나님과의 관계, 서로 간의 관계가 삶의 열쇠라고 되뇐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느라고 바빠서 우리는 때로 순종의 개념을 간과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보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순종이 사랑의 관계에서 흘하나와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말씀 속에는 분명히 권위의 울림이 있다. 예수님은 지금 순종을 제안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순종을요구하신다.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어조는 가혹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분이 우리보다 진리를 더 명확히 보시기 때문이다. 악의 야수는 우리 각자 안에 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깨끗이 씻을 수 있으나 우리의 더러운 행실은 그것으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죄의 매력, 곧 하나님을 피하여 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삶의 매력은 가볍게 취급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하다. 우리는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내면의 야수를 길들일 수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아신다.
하나님의 규율의 취지는 제약이 아니라 보호다. 우리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우리는 동전 한 닢이나 적어도 지폐 한두 장에도 자신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규율 곧 그분의 계명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온다. 그것들은 그분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은 불필요한 상처와 파별과 폭력에서 우리를 보호하기 원하신다. 내가 믿기로 하나님의 모든 규율은 우리를 자해에서 보호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거나 혹은 인생의 낭비에서 구하려고 마련된 것이다.
우리로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마련된 규율을 몇 가지 생각해 보라. 분노와 원한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라. 빛에 깊이 빠져들지 말라. 중독을 멀리 하라. 이런 규율을 어기면 우리는 자칫 고통과 상처를 자초할 수 있다. 자존감은 저하되고, 우리는 후회와 자기 연민과 우울에 시달리게 된다.
*하나님은 믿음의 모험을 아신다. 인간의 몸은 모세관과 신경으로 얽혀 있어서 고통과 비애와 피로를 쉬 느끼거니와, 예수님은 바로 그런 몸을 입고 이 세상과 믿음의 행위가 서로 친해질 수 없음을 배우셨다. 그분은 박해, 증오, 폭력 그리고 끝내 죽음 등, 자신의 마음을 비탄에 빠뜨리고 자신의 몸을 찢어 놓는 가시적인 현실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하셨다.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 때문에 그분은 겟세마네, 나사로의 무덤, 십자가 등 가고 싶지 않았을 곳들로 가셨다. 예수님은 믿음의 길을 따르신 대가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맛보셨고, 죽음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고통으로 비틀거리셨다. 우리 중에는 그 정도까지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건만, 그분은 믿음이 요구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배우셨다. 그것은 바로, 모든것 그리고 그 이상이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그분은 순종을 배우셨다.
* 우리는 차라리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
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동작을 요구하셨다.
여호수아 3장에 대표적인 예가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십 년간 광야를 유리한 끝에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허락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국경으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가나안 국경은 하필 요단강이고 요단강은 하필 철철 넘치고 있다. 다리도 없고 배도 없고 유람선도 없고 스쿠버 장비도 없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명령은, 백성들을 언약궤 뒤에 줄지어 세워서 넘실대는 물로 직행하여 일직선으로 가나안에 가라는 것이다. 약속은 이것이다. 도중에 어디선가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다. 단 이스라엘이 먼저 믿음의 걸음을 떼야 한다. 맨 앞의 사람들이 실제로 강물 속에 들어가고 나서야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물을 가르셨다.
다른 예들도 많이 있다. 모세와 홍해. 명령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로 떠난 뒤에야 나환자들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 지붕을 뚫고 병든친구를 달아 내린 사람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동했을 때에야 왔다. 능력은 도중에 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역경과 도전 속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순종의 길로 걸음을 떼서 믿음을 보이지 않는 한, 그분은 그리하실 수 없다. 우리는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환멸의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믿음의 첫걸음을 떼야 한다.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무리 수줍고 자신 없고 두려울지라도 우리가 먼저 전화기를 들지 않는 한, 관계는 회복될 수 없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의식적으로 수를 써서 멈추지 않는 한, 성적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적절한 도움을 받기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중독은 정복될 수 없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약속,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행동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인다. 무서워 보인다. 우리 중에 더러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하느니 차라리 넘실대는 강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능력은 도중에 온다.
*기쁨을 말할 때에 어려운 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순전하고 사심없는 섬김에 기쁨을 보상으로 주심을 알지만, 보상을 바라고 섬기면 기쁨을 놓친다는 것 또한 배우게 된다. 일부러 얻으려고 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기쁨의 역설이다. 기쁨이란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 조건을 빈틈없이 갖춘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다. 기쁨을 얻으려면 우리의 계획 이상이 필요하다. 설령 그 의도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기쁨 곧 예수님이 약속하신 깊고 지속적인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불시에 찾아온다. 기쁨이 갑자기 찾아와서 우리를 놀래키기 쉬운 때는 언제일까?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할 때다.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우리의 목숨을 버릴 때,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사심 없이 살아갈 때다. 어려워 보이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동기가 바르지 않다면 그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한다.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동기가 바뀌어야 한다. 기꺼이 내려가려는 마음, 사랑함으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 거기서 동기가 흘러나와야 한다.
*빌립보서 2:6-8에 보면 예수님의 내려감-천국에서 지옥으로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창조주에서 시체로-이 생생히 증언되고 있다. 가장 강한 형태의 기쁨인 높임(exaltation, 찬미나 열렬한 기쁨의 뜻도 있다-역주)은 9절에 가서야 비로소 약속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다. 순전한 내려감사심 없는 사랑과 하나님을 높이려는 갈망이 동기가 된―이 있은 후에만 그 커다란 기쁨은 온전히 실현되었다.
*기쁨의 긍정적인 정의에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풍성한 삶의 체험은 곧 고통과 실패의 체험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기쁨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기쁨은 달랐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채우는 것과는 거의 무관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오직 한가지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는 단호한 의지로 그분은 전부를 요하는 외로운 가시밭길을 택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덤불 속에서 기쁨과 쾌락을 혼동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헌신과 목적과 훈련으로 초지일관 험한 길을 가셨다. 결국 십자가 너머에, 가장 깊은 무덤까지도 뒤흔들 수 있는 기쁨이 있음을 그분은 아셨다. 밤늦도록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분이 보이신 웃음의 질을 우리는 그저 짐작할 따름이다. 그것은 그분의 진한 눈물과 적어도 동급의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치 원재료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기쁨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무슨 일을 하시든, 기쁨이란 오란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아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는 예수님의 헌신은 본질상 위탁의 몸짓이었다.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에 위탁하셨다. 상황, 감정의 깊이, 방해 등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고서 말이다. 그분은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크게 신뢰의 모험을 하셨다. 어떤 역경에도, 심지어 죄의 악한 야수인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이 채우실 것을 믿으셨다. 예수님은 신뢰하셨다. 그러자 기쁨이 선물로 왔다.
역설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의존하심으로써 자유를 얻어서 홀가분하게 섬기셨다. 믿음으로 욕망과 안전의 요구에서 해방되신 그분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자들의 작고 시시한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사랑한다는 혁명적인 꿈을 마음껏 꾸셨다. 그래서 그분은 노예가 된 자들을 자유케 하셨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 혼란 중에 헤매는 자들에게 시력을 주셨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셨고, 상한 마음들을 고쳐 주셨다. 자신의 삶을 잃음으로써ㅡ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진정으로 잃음으로써 그분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삶을 얻으셨다. 그리고 요동치 않는 기쁨과 마주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