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첨성대 ★
↓여기서 부터 6장 호랑이 삼촌님 촬영^^ 산악회장님과 호랑이 삼촌님^^ 회장님 친구분들^^ 일출이님!! 홧팅~!! 회장님!!멋지네요^^ 후리지아님.예쁜토끼님과 함께^^ 호랑이 삼촌님^^ **********여기까지~~ 성산님도 기념으로^^ 수석 여자 부회장님^^ 첨성대^^ 첨성대 정문^^ 경주 동부 사적지대^^ 디지털 첨성대^^ 철쭉꽃과 백일홍 나무들^^ 내 초딩 친구도 기념으로^^ 경주 동부 사적지대^^ 경주 동부 사적지대^^ 여자 수석 부회장님!!~멋져부러용~ㅎ 날아 오르다~~~ 내 초딩 친구랑^^ 대릉원 입구^^ 대릉원^^ 미추왕릉 ←천마총←가는길^^
♧[경주 토함산]불국사.석굴암.첨성대.대릉원(천마총)^^♧
★[경주 토함산]불국사.석굴암.첨성대.대릉원(천마총)^^★
불국사와 석굴암 불교의 나라, 신라
불국사(佛國寺) :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됨.
석굴암(石窟庵) :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으로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됨.
불국사 - 부처님이 머무는 곳
석굴암 - 돌로 빚어낸 환상의 아름다움
김대성 -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사람
★불국사로 떠나볼까요~~★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 가서 공부합시다~ㅎ
불국사에 가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청운교와 백운교야.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아서 다리처럼 안 보이지만, 예전에는 이 다리 아래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해. 지금도 계단 왼쪽을 보면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어.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해. 정말 아름다웠겠지? 이 다리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다리를 지나면 일반인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는 거야.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서른 세 가지의 단계를
의미하기 위해 계단도 33개로 만들었어. 아래에 있는 계단인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을, 위에 있는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을 빗대어 만든 거야.
청운교와 백운교를 딛고 올라서면 자하문을 만나게 돼. 자하(紫霞)는 ‘붉은
노을’이란 뜻이야. 부처를 향한 마음이 가득했던 신라 사람들은 이 문을 지나
부처를 만날 수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출입 금지가 되어 이 문을 지날 수는 없어.
자하문을 열면 대웅전 앞뜰이 보여. 이곳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석가탑과 10원짜리 동전에서 보았던 화려한 다보탑이
있어. 탑 사이로 곧장 올라서면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안에는 주인인 부처님이
인자하신 모습으로 앉아 계셔. 청운교와 백운교의 왼쪽에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어. 연화교에는 연꽃을 새겨 놓았는데 이는 흙탕물 속에서도 티끌 하나 묻지
않고 피는 연꽃처럼 세상의 찌든 때를 벗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라는 의미야.
칠보교 위에 올라서면 안양문이 있어.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극락전 앞뜰에
도달하게 돼. 앞뜰 가운데에는 석등이 하나 있고 석등 앞에 돌이 놓여져 있어.
이 돌은 향로를 얹고 향을 피우던 받침대야. 석등을 지나면 극락전이야. 이
건물은 여러 번 새로 고친 건물이지만 안에 앉아 계신 부처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거야. 그래서 국보 27호이며, 천 년의 세월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앉아
계신 분이지.
안양문과 자하문 사이에는 범영루가 우뚝 솟아있어. 범영루 아래의 돌기둥은
아주 특이한 모양이야. 8개의 각기 다른 돌로 쌓았는데 밑부분은 넓게 하고
중간은 다시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윗부분은 다시 밑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어.
돌의 원래 모양을 그대로 살려 내면서 이처럼 멋지게 쌓아낸 신라 석공1)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정말 대단해. 완성하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린 불국사는 백제의
솜씨, 고구려의 기상, 신라의 정성이 모여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될 수 있었어.
불국사를 통해 예전의 신라가 아니라 통일 이후 달라진 신라의 문화 수준을
볼 수 있어.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다고~?
◎불국사의 구조◎
◎10원짜리 동전과 다보탑◎
1983년 이전에 만들어진 10원짜리 동전과 그 이후에 만들어진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의 그림은 달라. 1983년 이전 동전은 다보탑 계단 위에 돌사자가
없고, 그 이후 동전부터는 돌사자가 있어. 왜 그럴까? 원래 다보탑 계단 위에
4개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3개를 잃어버리고, 1개만 외롭게 남아
다보탑을 지키고 있었어. 1983년 이전 동전은 돌사자가 없는 면의 다보탑을
정면에서 그렸다면, 그 이후의 동전은 돌사자가 있는 면에서 그린 거야.
◎석굴암 - 돌로 빚어낸 환상의 아름다움◎
석굴암으로 들어가 볼까?
석굴암은 사각형의 앞방과 부처님이 앉아있는 원형의 뒷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각형의 앞방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공양을 드리기 위한 장소야. 불법을 지키는
신이 4명씩 서 있고, 바로 옆에는 근육질의 인왕상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어.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 원형의 뒷방으로 가는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어. 원형의 뒷방으로 들어가 보면, 부처님이 앉아 계신 방
벽면에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어. 그리고 방 가운데 연꽃자리
위에 앉아 계신 석굴암의 본존불을 만나볼 수 있어. 부처님이 “너 왔구나.”하며
부드럽게 반겨주시는 것 같아.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조각하여 모난 데
하나 없는 둥글둥글한 부처님을 만들어낸 신라 석공들의 손놀림이 정말 대단해
보여.부처님이 앉아있는 방향은 정확하게 동남쪽 30도 방향이야. 그래서 동해에
떠오르는 해가 부처님의 이마를 비추면 석실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을 거야.
천장은 360여 개의 돌판을 둥글게 쌓았어. 사각 돌판으로 쌓아 올라가다가 천장의
중앙은 20톤 무게의 연꽃이 조각된 덮개돌로 마무리를 했지. 그런데 지금은
천장의 덮개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있어.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굴을
만들 당시에 이미 깨져 있었다고 하는데, 무려 천 년을 조각난 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야. 접착제도 없이 돌판과 돌판을 둥글게 쌓은 기술은 세계 어느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기술이야. 신라 사람들의 돌 다루는 기술이 정말 대단하지?
◎인공 석굴을 만들게 된 이야기◎
왜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부처를 모시게 된 걸까? 석굴 사원은 인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우리 땅에 전해졌어. 인도나 중국에서는 절을 짓기보다 돌을
파서 그 안에 부처를 모시는 게 쉬웠어. 왜냐하면 그곳의 돌은 이었기 때문이야.
김대성은 인도나 중국처럼 석굴을 만들고 싶었지만, 우리나라 산은 단단한 화강암이
많기 때문에 굴을 뚫기 힘들었어. 그래서 돌을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게
된 거야. 세계적으로 유일한 인공 석굴이 탄생한 거지. 김대성은 석굴을 만들고 그
안을 부처의 세계로 꾸민 후에 절 이름을 ‘석불사’라고 했어. 때 불국사가 크게 훼손
되면서 석불사도 큰 피해를 입었고, 불국사의 작은 암자가 되어 ‘석굴암’이 되었어.
◎성덕 대왕 신종이 에밀레종이라고?◎
이 종은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성덕 대왕 신종으로,
봉덕사에 있었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불러. 또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어. 이 종을 만들기 위해 스님들은 전국을 누비며 집집
마다 쇠를 모았대. 그런데 어느 집에서 너무 가난해 쇠가 없다며 아이를 바쳐 끓는
쇳물 속에 아이를 함께 넣었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야.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모두 수십 년이 걸린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이런 어려움 끝에 만들어진 종소리를 들으며 백성들은 엄마,
아빠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떠올린 거야.
◎김대성 -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사람◎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사람은 김대성이야. 김대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창 발전하던 시기에 모량리에 살던 사람이야. 대성이라는 이름은 워낙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펀펀하여 모양이 마치 성 같아서 ‘큰 성’이라는 의미로 불린 거래.
김대성의 집안은 무척 가난해서 매일같이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정도였어.
김대성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어느 날이었어. 김대성은 가진 밭을 부처님께
기부하자고 어머니를 졸랐어.그런데 그 밭은 머슴살이를 하며 받은 것으로 고작
3묘(90평) 밖에 안 되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땅이었어. 그런데 그 밭을
시주3)하자고 조르는 김대성에게 어머니는 철이 없다고 꿀밤을 때리기는 커녕
아들의 말이 옳다 여기고 전 재산인 3묘의 밭을 스님에게 시주했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그 밭을 시주하고 난 지 몇 달 안 돼서 대성이 갑자기 죽어버렸어.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대성이 죽던 그 시각에 신라에서 아주 잘 나가던 김문량의
집을 향해 하늘에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를 너희 집에
맡기노라.” 그 후 김문량의 부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귀한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난
그 아들의손에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새겨진 쇠붙이가 있었어. 가난한 집의
김대성이 부처님께 전 재산을 시주한 덕으로 부잣집에 다시 태어난 거야.
김문량은 대성의 전생4)의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와 봉양했대. 이렇게 다시
태어난 김대성의 불교를 향한 마음은 지극했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만이
부모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태어난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짓기 시작한 거야. 이 작업은 2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안타깝게도 작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김대성이 못다 이룬 일은 국가가 나서서 완성했어.
◎석굴암에 담겨 있는 신라인의 지혜◎
지금 석굴암에 가보면 석굴 앞에 나무로 만든 집이 들어서 있고, 석굴 내부를
보존하기 위해 유리창으로 석굴을 막아두었어. 원래는 나무집도 없었고, 직접 석굴
안에 들어가야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대. 왜 나무집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일제 시대 일본은 천장의 앞쪽 3분의 1 정도가 손상되어 구멍이 난 것을 보수하려고
석굴 전체를 2m 두께의 시멘트로 발라 기차 터널처럼 만들어 버렸어. 그런데
시멘트를 발라버리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어. 석굴암 내부에 공기 순환이 안 되어
돌 표면에 이슬이 맺히고, 불상들에 푸른 이끼가 끼었으며, 돌들이 쉽게 깨지고 잘게
부서졌어. 이런 문제는 계속 해결되지 않고 있다가 1960년대에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나무집을 지었어. 나무집을 지었지만, 내부의 습기는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해졌어. 그래서 지금은 강력한 에어컨을 가동하여 석굴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고 있어. 석굴암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야. 그런데
신라인은 천 년이 지나도록 습기가 생기지 않는 석굴암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1) 석공(石 돌 석, 工 장인 공) 돌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
2) 사암(沙 모래 사, 巖 바위 암) 모래가 퇴적되어 만든 바위
3) 시주(施 배풀 시, 主 주인 주) 절이나 스님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
4) 전생(前 앞 전, 生 날 생)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생애
◎불국사◎
종 목 사적 제502호
지 정 일 2009.12.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 대 통일신라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
(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석굴암◎
종 목 국보 제2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시 대 통일신라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첨성대◎
종 목 국보 제3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이 고대국가에서 중요
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천마총◎
종 목 사적 제40호
지 정 일 1963.01.21
소재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82-2
시대 신라시대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에 속하는 제155호 고분으로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과 천마도장니이다.
높이 12.7m, 지름 50m의 능으로 봉토 내에는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적석층 안에는 길이 6.5m, 너비 4.2m, 높이2.1m의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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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후기 ★
2012년 4월 24일 [경주 토함산]불국사.석굴암.첨성대.대릉원(천마총) 을
다녀왔습니다.계속해서 전국적으로 비가 왔었는데 다행히도 우리가 경주에
가는 날 하루만 날씨가 넘 좋았고 경주의 날씨 31도에 적당히 무더운 날
이었습니다.항상 매년 초에는 시산제도 지내지요^^몇 년 동안 다녀도 별로
비가 와서 힘든 적은 기억이 안 나네요~ㅎㅎㅎ
★경주로 떠나볼까요~~★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 가서 공부하는 기분으로~ㅎ
[경주 토함산]불국사.석굴암.첨성대.대릉원(천마총)등등...,그 외에도 많은 곳이
있으며,,(포석정.안압지)경주시내권 불국사권 보문 단지권 남산권 서악권 북부권
동해권 월성지구 남산지구 산성지구 황룡사지구 대릉지구 토함산지구 대본지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습니다. 아침 7시 사무실 앞에서 출발해서 12시 반에
도착하여 도착하자마자 모두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하루에 일정이 빠~듯해서
최선을 다 해 답사했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수학여행을 온 학생 단체팀과 일본.중국 등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여행지라서인지 많이 볼 수 가 있었습니다.중고등 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가 보고
싶었었는데,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가 보지 못해 꼭 가고 싶었던 마음에 요번이 세
번째로 가게 되었습니다.48명 만석으로 회장님을 비롯하여 임원님들 좋은 여행지
택해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했습니다~대단히 수고 많이 하셨구요~!! 꾸~벅~(^0*)
다음 달에도 좋은 곳으로 갈것을 기대하면서 울 회원님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2012년 4월 25일^^☎☎☎♡^^*
불국사 삼층석탑.대웅전.다보탑을 돌아 돌아서~ 첨성대.대릉원 가는길에 유체꽃밭^^
선덕여왕 촬영지^^ 경주 동부 사적지대^^ 대릉원 입구^^ 미추왕릉 ←천마총←가는길^^
김영임/ 어디로 갈거나
새오정 산악회 사랑합니다^^* |
첫댓글 이곳은 멋진 그림만 있내요^^ ㅎㅎㅎㅎㅎㅎ
천마총 보고 또 보고 성산님 고생 마너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