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직랑 정릉 참봉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공의 묘갈명
[奉直郞靖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수약(守約)이고 자는 약증(若曾)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6세손이다.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냈는데 두 번 증직되어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호는 동암(東巖)이다. 기(岐)는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지냈다. 희철(希哲)은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지냈으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회(櫰)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4대이다. 정부인(貞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는 통덕랑(通德郞) 익중(益重)의 딸이며 참봉 확(確)의 손녀로 공의 모친이다. 효종 기해년(1659)에 공을 낳았다.
공은 국량(局量)이 준정(峻整)하고 의표(儀表)가 우뚝하여, 참의공이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넓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품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다른 사람의 선행을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알리기를 좋아하였고,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바로잡았다.
또 일찍이 노여움이나 원망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나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며 속이는 일이 없었다. 남의 환란과 궁핍을 보면 온 힘을 다해 도왔는데, 대부분 보통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모두들 공의 의로움을 경외하고 그 덕을 흠모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는 효성과 사랑이 정성스럽고 지극하였고, 지체(志體)의 봉양12)을 함께 다하여 세월이 지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행할 때는 더욱 엄숙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과 정결함을 다하였다. 집은 가난하였지만 미리 제수(祭需)를 준비하여 때가 닥쳐도 군색함이 없게 하였다.
항상 “비록 어진 사람의 곡식13)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구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의롭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새로 지은 비단 저고리를 시장에 내다 팔아 제수를 마련한 적도 있었다. 사정이 생겨 시절 음식을 올리지 못하면 문득 상을 물리고 하루 종일 먹지 않았기에 집안사람들이 왕왕 그 때문에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외가 선조(外家先祖)의 기일에도 제수를 가지고 반드시 참여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으니 제행(制行)의 독실함을 엿볼 수 있다. 식솔들을 다스림에 안팎과 상하로 하여금 각각 분수대로 편안하게 하여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일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에 절도가 있어 자제들도 가르침을 잘 따라 감히 어긋남이 없었다.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었고, 질문하는 경우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작은 잘못이 있으면 저녁까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더불어 말을 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린 연후에 그만두었다.
학업을 엄하게 단속하였으나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성취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반드시 행실을 먼저 올바르게 하고 문예(文藝)를 나중에 하도록 하였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에 엄격하였다.
매양 끼니때마다 거친 음식을 내오게 하며 “기름진 음식은 독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몸에 사치스런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침착하고 의연하여 안정된 힘이 있어 비록 갑작스런 일에 처하더라도 화복과 이해에 동요되지 않았다.
매사에 공명정대하여 무릇 고을에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으면 공의 한 말을 기다려 결정하였으니, 검약한 몸가짐과 신의가 다른 사람들을 감복시킨 것이다. 무신년(1728) 이래로 조정에서 숨은 인재를 널리 구할 때, 공이 이밀암(李密庵14) 이식산(李息山15) 등 제현과 함께 특별히 천거되어, 임자년(1732)에 참봉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735)에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1월 15일이었다. 건지산(搴芝山) 불모동(不暮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뒤에 막내아들인 세사(世師)가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자(鄑)의 딸이다. 부인의 법도를 잘 갖추어 집안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엄숙하였다. 제삿날에 임해서는 반드시 매 물품을 헤아려보고, 제사를 마치면 또 헤아려서 제대로 지냈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식사를 하지 않고 자책하였으니, 그 정성과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1657)에 태어나 정축년(1697)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세진(世震)은 문과에 올라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지냈고, 세관(世觀)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세항(世恒)은 전부(典簿16)를 맡았고, 세사(世師)는 문과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신익형(申益亨)․ 오상직(吳尙稷)․ 김도원(金道元)은 사위이다. 세형(世亨)․ 세정(世貞)․ 세영(世榮)과 신☐☐申☐☐에게 시집간 딸은 서자녀(庶子女)이다. 사서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통덕랑(通德郞) 귀범(龜範)과 귀하(龜夏)이다.
참의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귀원(龜元)과 통덕랑 귀휴(龜烋)이다. 전부(典簿)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통덕랑 귀년(龜年)이다. 지사공(知事公)도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 귀서(龜書)이다.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아! 공은 걸출하고 엄정하여 범하기 어려운 기색이 있었다. 평생토록 입심행기(立心行己)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고을 사람들에게 의범(儀範)이 되기에 이른 것은 한결 같이 정대한 충절을 따르는 가운데서 온 것이며, 일이 조금이라도 부끄럽고 인색함에 가까우면 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의 공론은 그를 조정에 나아갈 그릇이라 일컬었는데, 만년에 천거를 받아 그 능력을 다 펼 수 없었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 없다. 공의 손자들이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고자, 증손인 주부공(主簿公) 야순(野淳)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짓도록 하였다.
대개 공은 나의 선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과 실제로는 외손의 친함이 있고, 나 또한 공의 문중에 사위가 되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높고 높도다 거인의 금도여 / 屹屹乎巨人襟度。
굳고 굳도다 장사의 법도여 / 栗栗乎莊士矩矱。
덕 있는 자는 반드시 보답을 받나니 / 有德者必受其報。
하늘은 후손에게 복을 내려 위로하리 / 天故綏之以後祿。
[주해]
01) 지체(志體)의 봉양
부모의 뜻을 받들고 또한 음식 등으로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말하여 물심의 정성을 다함을 이른다.
02) 어진 사람의 곡식
예기에 “부모가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어진 사람들의 곡식을 구하여 그것으로서 제사를 지낸다. 『父母旣沒 必求仁人之粟 以祀之』”
하였다. 여기서는 어진 사람의 곡식을 구하는 것보다도 평소에 미리 준비하는 정성을 중히 여겼다는 뜻한다.
03) 이밀암(李密庵)
밀암은 이재(李栽,1657∼1730)의 호이다. 자는 유재(幼材),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이현일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
(徽逸)과 숭일(嵩逸)에게 배웠다. 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부친이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였고, 성유록(聖喩錄) 금수기문(錦水記聞) 등의 많은 저술을 하였다.
저서로는 밀암집이 있다.
04) 이식산(李息山)
식산은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호이다. 자는 중서(仲舒), 본관은 연안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식산집. 역통(易
統). 대상편람(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講目). 도동편(道東編). 노여론(魯餘論)등이 있다.
05) 전부(典簿) : 조선 시대 종친부에 두었던 종5품직이다.
06) 덕……받나니
중용 17장에 “대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으며, 반드시 그 수를 얻는다. 『大德 必得
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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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奉直郞靖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墓碣銘 幷序
公諱守約字若曾姓李氏。退溪先生六世孫也。諱詠道原州牧使。再贈至吏曹參判。號東巖。諱岐恭陵參奉。諱希哲長水道察訪贈吏曹參議。諱櫰贈吏曹參判。公之四世也。貞夫人光州金氏。通德郞益重女。參奉確孫。公之妣也。以寧陵己亥生公。器宇峻整。儀表魁梧。參議公曰是展拓吾門戶者。性好善疾惡。見人之善。誠心嘉悅而樂道之。其有不是。必正色裁之。又未嘗藏怒匿怨。處己處人。一以誠信無僞。患難竆乏。盡力周恤。多有人不及處。人皆畏其義而懷其德也。事親。孝愛懇至。耦盡志體之養。年幾不毁。執喪制猶嚴。祭祀極其誠潔。家貧。預備物品。無臨時之窘。常曰雖仁人之粟。以求爲心則非義也。嘗有新製帛襦。鬻諸市。以辦祭用。有故闕節薦。輒推案不食以終日。家人往往爲之不火。外先忌日。賷需必與。雖風雨不廢。其制行之篤也。御家衆。令內外上下。各安其分。無有爭鬨。日用凡百。皆有節度。子弟遵奉敎戒。無敢越。日必具冠帶。非有問不敢言。有小過差。竟夕不命之入。不與之言。竢其恐懼悔悟然後已。嚴其課程。不借以色。多有成就立揚者。然亦必先行誼而後文藝。其治家敎子之嚴也。每食令進麤糲曰。膏梁是荼毒也。體不近華靡之物。沈毅有定力。雖在倉卒。不爲禍福利害動。每事公正。凡有鄕邦大議。待公一言而定。其奉身之約而信義之服人也。戊申來。朝廷搜訪遺逸。公與李密庵李息山諸賢。同入別薦。壬子除寢郞。乙卯年七十六而卒。十一月十五日也。葬搴芝山不暮洞坐乾原。後以季子世師貴。贈吏曹判書。配貞夫人晉州姜氏。贈司僕寺正鄑之女。梱範甚修。治家勤肅。臨祭必衡量每品。旣祭而又衡之。以驗享否。少有未盡。廢食自咎。其誠篤如此。生丁酉。卒丁丑。葬同塋。世震文科侍講院司書。世觀贈吏曹參議。世恒典簿。世師文科知中樞府事。其四男也。申益亨,吳尙稷,金道元。其女壻也。世亨,世貞,世榮。適申▣▣者。餘男女也。司書二男龜範通德郞,龜夏。參議二男龜元僉樞贈吏曹參判,龜烋通德郞。典簿一男龜年通德郞。知事一男龜書參奉。曾玄以下不盡錄。嗚呼。公傑卓凝嚴。有難犯之色。平生立心行己。以至刑家梱儀鄕黨者。一從正大忠實中來。事有微近羞恡者不爲也。當時公誦。稱其有廊廟之器。而晩被甄剡。未得卒究其用。可勝惜哉。公之諸孫。爲墓道將有石。以公曾孫主簿公野淳之狀。徵銘於興洛。葢公於吾先君文忠公。實爲彌甥之親。而興洛又爲公門壻。義又不可辭者。銘曰。
屹屹乎巨人襟度。栗栗乎莊士矩矱。有德者必受其報。天故綏之以後祿。<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