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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초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따라서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결과에 따라
결정될 정도였다.
아군은 3개 사단(국군 1·6사단, 미 1기병사단)이었으며,
그나마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1사단은 낙동리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시켰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의 미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1일 국군의 방어선을 왜관 ∼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1사단 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8월 16일 낙동강변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대구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폭격이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북한군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8월 18일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미 1기병사단 정면의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6사단 지역에서도 전폭기 지원을 받아 격퇴함으로써
적의 공격은 1사단 지역인 다부동에 집중되었다.
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8군의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 영천으로 전환했고, 다부동 위기는 해소되었다.
* 학도병의 일기
이우근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 여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지금 내 곁에서는
수 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긑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도 싶습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 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 중. 후략 )
* 코로나 사태로 기념관 내부 관람 금지
바이오린연주곡
첫댓글 대구에서 가까이 있지만 대구 사람들도 자주 들리지 못하는 칠곡 다부동전투기념관을 다녀 가셨군.
코로나로 인한 이 난국에 멀리까지 와서 전투기념관을 찾아 준 반석의 마음을 헤아리며
올려진 사진들 속에 깃든 6.25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다시 생각해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