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이겨 낸 학교 자활 영양급식
충북 음성군 원당초등학교
교장 박 성 갑 (57세)
시골의 조그만 농촌 학교
원당국민학교는 음성읍에서 북쪽으로 24km 떨어진 충북에서 서울로 통하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9년에 개교하여 현재는 10개 학급 301명의 학생과 13명의 교직원이 알찬 내일의 꿈을 키워가며 정진하고 있는 조그만 농촌학교이다.
1977년 3월 박 교장이 부임한 당시의 학교 급식은 손으로 빵을 만들고 가마솥에 쪄서 주는 빈약한 실정으로 영양급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 고장 주민들의 생활은 인삼재배 과수원 등으로 비교적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나 식생활 개선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 교장은 “잘 가르치고 잘 먹여서 튼튼한 국민을 길러내는 것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평소의 신념을 바탕으로 교육의 내실을 다지고 학교급식을 보다 바람직하게 개선해 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영양급식을 위한 채소원 조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모로 구상하던 중 다행히도 본교의 2,500평 실습지에 수익성이 적은 일반 관상수가 심어져 있어 이것을 영양급식 원인 채소원으로 전용하면 학생들에게 근로 학습교육도 충실히 할 수 있고 그 생산품으로는 바람직한 급식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교직원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토의 하였던바 찬반양론으로 의견이 상충되었으나, 결국은 채소원으로 전용하기로 결정하고 곧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굳은 점토질 땅에 깊숙이 뿌리박은 만여 그루의 관상수를 10여명의 남녀 교직원들의 연약한 손으로 캐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보다 어려운 것은 학생들을 매일 작업 현장에 동원할 수도 없는데다가 실습지에 가득한 관상수를 파 옮긴다는 것은 주민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기에 교직원과 학생들은 즐거운 방학 후나 공휴일에도 땅과 싸워야 했고 땀과 흙투성이가 되는 고통도 견디어 나가야만 했다.
박 교장은 학부형들에게 여러분의 자녀를 잘 먹여서 튼튼하게 기르려고 하는 일이니 협조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도 해 보았으나 농촌의 바쁜 일손과 무관심한 마음을 학교 작업장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박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자기 시간을 실습지에 쏟아 정성을 다한 결과 드디어 2개월 만에 그 자리는 토박하나마 실습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캐어낸 관상수를 운동장의 이곳저곳에 심어 학교를 공원처럼 아름답게 가꾸었고 교제원도 만들어 학습의 장으로 조성해 나갔다.
자활의 꿈을 키우기 위하여
이렇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또 하나의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원래 2개의 우물로는 학생들의 식수마저 부족한데다 채소재배에 필요한 물은 더욱 없었다. 지하수를 찾아 깊이 15m 정도의 우물을 4군데나 팠으나 물이 나오지 않아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게 된 교육청에서는 타설식 방법으로 23m 깊이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서 간이 상수도를 만들고 채소원 운영에 필요한 물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1977년 11월 촉성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 20평을 설치하고 영양급식을 위한 첫 사업으로 오이, 토마토 등 채소재배를 시작하였다.
실과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자활의 꿈을 키워주고 학년별로 분담 재배토록 하여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관리방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엄동설한에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비닐을 붙잡아 매어 보았으나 이내 채소를 얼려 죽이고 마는 뼈아픈 시련도 겪었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끈질긴 집념은 그칠 줄을 몰랐다. 실패하면 다시 씨를 뿌리고 가꾸어 마침내 비닐하우스 재배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가축사육의 성공
한편으로 영양급식을 하려면 가축도 길러야 하겠기에 기존 닭장을 고치고 수돗물도 끌어들이고 천정에 창도 만들어 사육관리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새로이 돈사를 지어 양돈에 필요한 여건도 갖추었다.
달걀을 먹이기 위해 1977년 봄에 진천농업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 500수의 병아리를 분양받아 기르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아리 사육을 담당한 교사는 가정생활도 잊은 채 악취 풍기는 닭장 속에서 병아리와 같이 밤을 새우기도 하였고 죽어가는 병아리를 살리기 위해 애 태운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산란율이 높은 란계 500수를 길러 매일 전교생에게 달걀을 먹일 수는 있었으나 사료 값이 올라 란계 사육이 어려워져서 그 대신 육계를 길러 닭고기를 먹이려고 연간 6회에 걸쳐 500수씩 3,000수를 길러 그 중 일부는 급식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팔아서 사료 값으로 충당하였다.
또한 1977년 봄에 새끼돼지 20두를 구입하여 사육하던 중 피부병에 걸려 가축병원을 찾는가 하면 새끼 돼지를 살리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4시간마다 분유를 먹여야 하는 실로 눈물겨운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해 12월에 7마리는 종돈으로 두고 나머지 13마리는 230만원에 팔아서 사과와 우유를 구입 공급하게 되었고 이 작은 정성이 널리 알려져 1970년에는 문교부에서 전교생이 사용할 수 있는 급식기구류 구입비를 지원해 주어 개선된 급식 시설을 완비하였다.
한편으로는 잉여교실을 조리실로 개조하여 식품의 저장 관리에 사용하는 등 영양급식의 기반을 이룩하였다.
계절과 주간별로 식단표를 작성하여 혼식일과 분식일을 정하고 특히 매월 2주와 4주 수요일은 “고기 먹는 날”로 정하여 닭고기를 공급하고 매일 빵 1개에 야채국과 우유 1병, 달걀 1개, 과일 1개를 급식하고 한 달에 2번은 닭고기를 먹게 되어 학생들은 하루 800칼로리의 영양을 섭취하게 되었다. 마냥 맛있게 먹는 아동들의 티 없이 맑은 표정을 볼 때 마다 박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은 지난날에 겪은 쓰라림과 고난들이 보람의 열매로 영글어가고 있다는 벅찬 기쁨으로 더욱 뜨거운 사랑을 쏟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난관
이와 같이 영양급식은 성공 하였으나 축사에서 나오는 분뇨처리가 큰 문젯거리로 대두되었다. 그것은 바로 퇴비장, 닭장, 돼지우리에서 번져나는 참기 어려운 악취와 파리 떼의 극성이었다. 이로 인하여 주민들의 비난과 항의는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금비를 사용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게 되었고 농약에 중독될 염려도 있어 금비와 농약을 쓰지 않고도 재배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현대 농업 기술지에서 선진외국의 공해 없는 작물재배법과 돼지 및 닭똥의 사료화 방법이 소개되었음을 알고 그 해 건국대학교의 동계 농민 대학에 자진 입교하여 유기농법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교육을 받고 연구를 거듭하여 이를 실천하기로 하였다.
새로운 사육재배법을 모색
유기농법은 농약과 금비의 사용을 줄이고 효소퇴비와 효소사료를 생산하여 재배 사육하는 방법으로서 효소퇴비는 쌀겨에 설탕을 배합하여 효소 균을 배양시켜 각종 분뇨에 혼합하여 만드는 것으로 악취가 없고 파리가 달려들지 않는 유기성 퇴비이고, 효소사료는 효소를 설탕, 쌀겨 등에 배양하여 돼지 및 닭똥과 톱밥에 발효시켜 가루로 만들어 사료화 하는 것이다.
박 교장은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실습지 한 모퉁이에 효소 처리장을 마련하고 효소를 사들여 청정 채소를 생산 해 보고자 유기농법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이것 역시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를 동일하게 접근시키는 데는 상당히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숙련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효소처리 과정에서 기술 부족으로 발효에 실패했고 거의 완성 단계에 가서는 비를 맞추어 잡균이 들어가 계속적인 실패를 거듭하기도 하였으나 줄기찬 노력으로 땀과 악취가 뒤범벅이 된지 수개월 만에 마침내 완숙된 효소퇴비와 사료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제까지 비웃음과 방관으로 지켜보기만 하던 학부형들도 박 교장의 굳은 신념과 끈질긴 노력에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학부형들은 자진 모임을 갖고 자모는 급식을, 부형은 사육 및 재배를 연 3회 이상 출역하여 학교를 지원하게 되었고, 생산된 효소 퇴비는 학부형들의 힘에 의하여 토박한 실습지에 뿌려지고 녹황색 채소를 재배하게 되어 명실 공히 영양급식 학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금비를 사용할 때 많이 나타나는 낙과 현상도 줄었으며 수확기간도 늘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효소퇴비를 사용함으로써 무, 당근 등 근채류의 작황도 좋았고 맛도 좋았으며 농약을 쓰지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날 것을 먹일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효소 처리된 사료를 일반 사료에 3:7의 비율로 혼합하여 가축에 먹였던바 닭은 유행성 질병에 강해지고 산란율도 높아졌다. 돼지는 식욕이 왕성해져서 비대해졌고 피부병에도 걸리지 않아 운영비도 절감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이득을 보게 되었다.
자급하는 영양급식
학교 실습지에서 생산된 채소와 가축에서 얻어진 수익금으로 우유와 고기를 아동들에게 급식시키게 되자 학교 신체검사를 맡은 담당의사의 말에 따르면 타교의 학생에 비해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은 오로지 영양급식의 성과라고 믿어 기쁘고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본교에 근무하고 있는 전 교직원은 유기농법의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교육을 받고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10년 내지는 20년의 훗날 우리나라 농촌의 훌륭한 농업기술의 역군이 되어 내 고장 발전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하면서 박 교장과 전 교직원은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구수한 흙냄새를 맡으며 실습지에서 정성을 쏟고 있다.
새마을운동에도 앞장
지역사회 개발과 알찬 학교 건설에 꾸준히 노력한 결과로 1979년도에는 새마을교육 최우수학교로 대통령 봉황대기를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한 1980년도에는 서울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열린 제 2회 유기농산물 전국 품평회에 채소류를 출품하여 은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얻은 지식과 기술을 새마을교실을 통하여 학부형 및 영농인들에게 전달하는 데 노력하였다.
박 교장이 유기농법에 성공한 것을 알게 된 전국 농업기술자협회는 건국대학교에서 열리는 농민대학을 비롯하여 농업기술자 훈련원에서 강사로 초청 효소사료 제조에 대한 강의를 맡게 하였으며, 수강생들의 현장실습을 여러 차례 실시하였다.
앞으로 박 교장의 계획은 보다 알차고 풍요로운 학교를 만들어 모든 학생들이 튼튼하게 자라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농촌을 지키고 가꾸는 새나라의 일꾼을 길러낼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익혀 온 유기농법을 지속적으로 연구 발전시켜 학교는 물론 지역사회에 확산 보급하여 식생활을 개선하고 배부른 것 보다는 영양가 높은 깨끗한 채소와 과일을 먹고 단백질을 섭취하는 등 영양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줄기찬 계도활동을 전개할 것이다.
그리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고 예식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식당을 건설하는 과제 해결에 온갖 정성을 다해 나가고 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1981 내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