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십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애완견을 기르려는 마음은 꿈에서도 품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큰아들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대기념으로 '퍼그'종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와서 마지못해 기르게 되었는데, 귀여워만 할 줄 알았지 입 하나 더 딸리게 됨으로써 따라붙는 뒤치다꺼리는 애초부터 몽땅 어미 차지가 된다. 말로야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행동이 선뜻 따라주지 않으니 어찌하랴.
날마다 배설물 치우기·이빨 닦아주기·바깥운동 시키기 따위를 하고, 털 많은 짐승이니까 집안 청소도 더 자주 하고, 주말마다 목욕도 시키고 이부자리도 빨아주는데 그 일이 웬만한 애기 하나 건사하는 일과 버금갈 만큼 꽤나 성가시다. 처음에는 나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아내 혼자 애쓰는 것이 하도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거들어 주게 된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가까워지면서 신통한 짓거리도 많이 보고 정(情)도 차츰 깊게 든다.
집에서는 대·소변 누는 때와 곳을 잘 가리고, 밥그릇에 주는 음식만 입에 댄다. 누울 자리와 놀 자리도 가릴 줄 알고, 자기 장난감만 물고 다니면서 놀고,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가족의 서열(序列)도 신통할 정도로 잘 꿰뚫는다. 나가서 뒤볼 때는 사람이 다니는 길바닥을 피해서 밭고랑이나 풀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제 딴은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뒤볼 자리를 골라서 눈다. 나는 그 모습을 숱하게 보았지만, 개가 왜 뒤볼 자리 고르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볼일 마치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다가 사람과 개와 식물이 서로 똑같은 방향으로 운동한다는 현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뒤볼 때마다 냄새를 맡아가며 자리를 고른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세 바퀴를 맴돌다가 자리를 잡고 누고는 뒷발로 덮는 시늉까지 한다. 눌 때마다 거듭되는 행동을 무심히 보다가 주변에서 자라는 칡·메꽃·호박 등이 감은 넝쿨이나 덩굴손의 방향을 보니까, 놀랍게도 모두 개가 도는 방향과 똑같지 않은가! 과학적으로야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같이 지구에서 사니까 자기적(磁氣的)현상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다고 손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현상을 속 시원하게 입증하지 못하므로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낱 개가 배설을 끝내기를 기다리다가 동식물이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보고서 신기하게 느낄 뿐이다.
정이 들어서 잘 보살펴주려니까, 이만저만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아침과 저녁에 규칙적으로 바깥으로 데리고 다니며 운동시켰더니 그것이 몸에 배어서 나갈 시간만 되면 고양이가 자고 일어날 때처럼 허리를 쭉 펴고는 앞발로 사람을 끌어당기며 나가자고 보챈다. 아무도 없을 때는 현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 누구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 모습이 눈에 선하여 누구인가는 그 시간에 대서 돌아와야 한다. 어쩌다가 그 일을 맡노라면 강아지 돌보는 일이 같잖게 생각되어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와 '무자식 상팔자' 등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진 만큼 심화를 더 끓이며 살게 마련임1)'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태어나기 전을 모르는 것처럼 죽은 뒤도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내므로, 생전과 사후의 세상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더라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내 몸뚱이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만 아주 귀하며, 살아가는 많은 순간을 보람차고 즐겁게 보내는 삶이 흔히 말하는 웰빙(well-being)이라고 여기면서 지낸다. 죽으면 그만인 몸뚱이를 남에게 잘 보이려고 쓸데없이 꾸미려고 하는 자신의 욕심이 보일 때는 스스로 가소롭기도 하다. 튼튼하게 살면서 누구나 갖게 마련인 물욕·명예욕·식욕·수면욕·색욕은 사람마다 크기가 다르면서도 자기 분수에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면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개는 먹거리와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알맞게 운동시키면서 귀여워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하게 산다. 말은 못해도 얼굴표정과 재롱떠는 꼬리 짓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나타내면서 살아간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다보면, 사람에 따라 개를 대하는 마음도 여러 가지이다. 귀여워하거나 덤덤하게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싫어하는 사람·무서워하는 사람·까닭 없이 개와 주인을 묶어서 업신여기는 사람·애완견과 사람을 가족으로 생각해서 아예 엄마·아빠로 부르는 사람 등이 있다. 나는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쪽 귀로 흘려듣지 않고 '개 주인'이라고 일러준다. 사람에 따라 "뭘 그런 걸 따지느냐?"고 말하지만, 그건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부르자는 말일 뿐이다. 사람에게 쓰는 '엄마·아빠'라는 말이 '개 주인'을 뜻하는 말로 잘못 쓰이고 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리. 결혼 전에 애인에게 부르던 "오빠"가, 남편이 된 뒤에도 오빠이다가 아기를 낳으면 "아빠"가 되어 "여보·당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헷갈릴 노릇이다.
암컷이므로 이따금 새끼 밸 신호를 보내기도 하지만 그냥 넘긴다. 순리에 거슬려서 죄를 짓는 마음이지만, 낳게 되면 개의 다음 대까지 이어가며 보살펴야 하므로, 인연 닿은 한 마리나마 튼튼하고 흐뭇하게 살도록 돌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어떤 사람은 천장에서 밤새 뛰노는 쥐 소리를 들으면서 '부지런 하라.'는 가르침을 얻었다지만, 나는 가진 것이 변변찮으면서도 흐뭇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애완견으로부터 가난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슬기를 터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