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컨슈머(White Consumer)의 슬픔
글 德田 이응철(수필가)
보온병에서 노루오줌만큼 온수를 따라 마시며 마른 목을 추스리는 새벽이다.
마셔도 더욱 메마른 목은 그야말로 사막의 물길이다. 엄청난 삶이 주름져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독사와 전갈은 피할 수 있지만, 비겁한 인간은 피하기 힘들다고 평소에 입버릇처럼 즐겨쓰던 이 말이 결국 한 치과의사의 가슴에 비수라도 꽂았단 말인가?
까탈스러운 소비자로 군림하며 대중문화를 등에 업고 소비자 권리를 호령하는 시대이다. 심지어 반품과 환불 요구, 불매운동, 강제 퇴출과 질긴 악플 등 기업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소비자를 흔히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라고 하며, 그와 반대로 따뜻한 소비자, 착한 고객들로 기업 발전에 시너지 역할의 소비자를 화이트 컨슈머(White consumer)라 칭한다..
이순(耳順)을 넘어설 무렵이었다. 여기저기 몸에 신호가 온다. 특히 참았던 치통이 소문처럼 죽을 맛이다. 아픈 턱을 움켜쥐고 여기저기 들린 결과는 어떤가? 알몸으로 내리는 달구비를 맞으며 뛰어다닐 때, 직장 동료가 권해준 곳에 당도했을 때 진정 내겐 파라다이스였다.
만성 치주염으로 그곳에서 받은 치료는 어떤 것일까? 생소한 의도적 재식술이었다. 아픈 치아를 의도적으로 발치했다가 다시 그 자리에 심어 고정하는 수술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색다른 수술에 놀랐다. 이것이야말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아니던가!
유난히 웃으면 노란 금니를 보이던 곱슬머리 의사 선생님은 나보다 너 덧 살 연하였지만, 엄장이 크막하고 과묵하셨다. 수억 년 전 혼돈인 카오스시대바닷속으로부터 산소가 방울방울 오르는 태초의 지구를 속삭이듯 들려주신 덕에 아픔도 사라지고 언제 치료를 다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갔다.
임플란트보다 자기 치아를 살리는 것이 그의 오롯한 주장이다. 임플란트를 심는 것이 얼마나 서민에게 부담이 되는지도 조근조근 건너 주셨다. 그 후 아내와 처남, 친구들까지 단골주치의로 치료를 받아 즐거웠다.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가기 싫은 곳이 치과병원이다, 명의(名醫)로 마음에 심으니 두렵지 않았다. 대부분 병원들이 의도적 재식술 보다 영원하고 자연치에 가까운 임플란트가 대세로 자리 잡지만, 나 원장은 사라져가는 의도적 재식술의 끈을 쥐고 가일층 심혈을 쏟는다.
라포(rappor))가 어느새 실핏줄까지 전해졌다. 함께 식사도 나누고, 문학과 낭만에 대해주고 받는다. 예술의 고장 남녘이 고향이라 살아온 궤적 만큼이나 삶의 방식이 다르지만 아니다. 반듯하시다. 시편처럼 사무사(思無邪)로 간특함이 없으시다. 하모니카를 애지중지하신다.
소중한 의사친구를 얻은 셈이다. 점잖을 삭제하니 소탈하시다. 생의 발목을 잡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주저없이 고하기도 한다. 치간치솔을 당부한다. 외로운 별인 자신을 선생님 덕에 문학 세계도 넘보며, 감히 상재(上梓)라는 꿈도 꿔본다고 고백도 하고, 명상은 깨어있는 존재의 꽃이라고 좁은 방에서 즐기신다.
낙엽이 산불처럼 타오르던 7년 전 동짓달 어느 오후였다. 아픈 곳도 없이 들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문 한 장을 펼치셨다. 벽에 걸어드린 시화를 흘금흘금 보신다. 권위있는 치과 신문이다.
-치의신보! 제목- 나도 이런 환자를 얻고 싶다.
신문에는 내가 지은 시화 “님께서는 명의(名醫)”란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식은 오복이 아니라도/ 이는 오복(五福)이다.
다시 허물어지는/ 오복을 살려주신 님이시여! /
자연치아가 뒷전이고/ 임플란트 광풍시대에/ 의도적 재식술로 다가오신 분.
신소리 펑펑 제압하지 않고/ 겸손과 설득, 사랑으로 신뢰감을 심어주시다/
오복의 피안처 나00 원장님/ 낮게 머리숙인 가을/ 제 위치에 살려준 님의 교훈
/ 차세대 블루오션이 될 명의시여!
언젠가 의도적 재식술에 감동되어 국내 유일한 치과신문에 투고한 것이 문자화되어 배달된 모양이다. 명의(名醫)라고 부를 때마다, 선생은 명의라는 말이 존재하는 한,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손사레 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원장은 착한 환자의 언행으로 의사는 신뢰가 쌓여 좋은 일이 생겼다고 신문에 한줄 답 하시고, 그 날부터 나를 화이트 컨슈머로 불러주셨다. 텅빈 방, 고독이란 놈이 찾아와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문자가 답지한다. 미리내 오케스트라 정기연주 티켓을 보내오시며 하모니카 연주를 꼭 봐주십사 나를 일깨우고, 참석 못하면 찍은 동영상을 보내오곤 하셨다.
원장님과 마지막(2021.11.24) 통화가 생각난다. 무산 조오현 큰스님의 열반송을 보냈더니 답이 왔다.
-청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저도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하느님께서 큰 벌을 내렸습니다.
문학을 함께 마시며, 과학을 조곤조곤 일러주던 원장님은 몇 달 후 거짓말처럼 지구를 떠나셨다.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아주 최근이다. 바위만한 고독이 심장을 눌러 사라진 것이 아닐까? 비겁한 인간의 날카로운 악플에 낙하한 꼬리별은 아닐까?.
어제도 명동을 나갔다가 주인 잃은 병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올라가면 반가이 맞아줄 것만 같다. 젊은 의사의 죽음이 내내 가설로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천상에서 치통으로 고생하는 영혼들이 서둘러 명의를 모셔간 것은 아닐까? 목자를 잃은 어린 양들은 갈 곳 몰라 무거운 발걸음을 끈다.
독사와 전갈은 피할 수 있지만 비겁한 인간은 피할 수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을 다시 되뇌인다. 터무니 없이 많은 댓가를 요구하는 비겁한 인간들이 그의 주변을 서성였으리. 화이트 컨슈머(White consumer)의 슬픔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