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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역지사지와 어부지리에 와신상담 그리고 내로남불!
우리나라에는 많은 속담이 전해져 내려오니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를 떠올리다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속담으로는 “배 고픈건 참아도 배 아픈건 못참는다” 나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최근에는 “내로남불” 이라는 4자성어 까지 생겼습니다.
4자성어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이니 신화· 전설· 역사· 고전· 문학 작품 등 옛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생긴 말로 비유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데.... 중국과 한국에서 발생한 고사성어는
“어부지리” 처럼 4자 성어가 대부분이지만 벼슬에서 물러나는 “계관”, 도둑을 뜻하는 “녹림” 도
고사성어에 속하며 또 흔히 쓰는 “등용문” 과 “미망인” 등 2자성어나 3자성어도 이에 해당합니다.
1. 내로남불
“똑 같은 일도 내가 하면 로맨스 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라는 말은 한자로 쓰면
아애타불(我愛他不) 이라고 할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지라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에는 오래전 부터 “只许州官放火不许百姓点灯” 라는 말이 있으니....
번체자 로는 只許州官放火 不許百姓點燈 (지허주관방화 불허백성점등) 입니다.
州官(주관) 즉 “주(州)의 관리는 불을 질러도 되지만, 백성(百姓)은 등불도 켜서는
안 된다.” 즉,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한국어 표현은 중국의 저 말과 같은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 오래전 부터 전해오는 4자 성어 중에 내로남불 과 비슷한 것으로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가 있으니..... 벼농사가 주업인 한국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자기 논에
물을 남의 논 보다 앞서 먼저 대느냐 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 논에 물 대기” 는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억지를 써서 자기
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궤변을 늘어놓는 처사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니....
비슷한 말로는 가당치 않은 말을 억지로 갖다 부쳐 자기 주장에 맞도록
우기는 견강부회(牽强附會) 가 있고 반대 말은 역지사지(易地思之) 가 아닐까 합니다?
2.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 는 당사자들간에 서로의 처지,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역지사지의
태도는 공감 능력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 셀먼
(Robert Selman) 은 사회와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역할수행능력' 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자공이 물었다. "평생을 지니고 다닐 한 마디가 있다면 무었이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것은 서(恕)이다. 네가 원하지
않는 바는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논어 12편 안연편(顔淵篇)
내게 그런 핑겔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김건모, 핑계(1993)
역지사지는 맹자(孟子) “이루(離婁)” 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 에서
유래한 말이니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해도 하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인데,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듯이 자신도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라는
의미로 영어로는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place/position 이라 합니다.
6. 25때 유엔군 중에 영연방 군대는 영국등 4개국 94,000명인데, 영연방은 유엔군이 38선
을 넘어 북진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승만과 맥아더가 우겨서 38선을 넘습니다만,
헨리 키신저는 저서에서 유엔군이 39도선에서 멈출수도 있었다고 말했으니.....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함으로써 전쟁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는 뜻 입니다.
중국은 세계 최강의 미군이 자국과 국경선을 마주하고 압록강변에 주둔하는 것을 절대로 용인할수
없었으니, 임진왜란때 "왜군이 평양을 점령" 하자 파병을 결정했듯,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바로 압록강을 넘어오는 것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해서 중국이 강대국과 완충지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 황해도와 원산선에서 진격을 멈췄다면 "중공군은 참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은 아직 우상화 하기 전이니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을 것이며 평안도와
함경도의 북한은 훗날 소련이 무느질 때, 한국이 영세중립국 스위스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화해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4대국 신탁통치 군대를 철수시킨 오스트리아
처럼 영세중립국이 되겠다고 설득할수만 있었다면 북한을 흡수통일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보면 중공군이 서울을 지나 평택에 이르니 영국과 캐나다 및 호주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국에 압력을 넣어 현 전선에서 휴전하지 않으면 영연방 군대
는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니..... 고심 끝에 미군은 "일주일 기한부로 휴전을 제의"
하는데 모택동이 고민하자 주은래는 휴전제의를 거부 하자고 말하니 전투는 재개됩니다.
주은래의 생각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부산까지 진격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무위키에 보면 당시 UN군은 전선이 금강까지 밀리면 한반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으니, 200만명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중국의 대만 처럼
후일을 도모하는 옵션도 검토했다고 하니 얼마나 상황이 절박했는지 알만 합니다.
휴전제의가 거절된후, 리지웨이 미 8군은 1월 23일 선더볼트작전 융단폭격으로 중공군을 밀어
올려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하는데.... 제공권을 유엔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중공군은
본토로 부터 보급이 어려우니 37도선에서는 버틸수 없었던 것인데, 만약 주은래와 모택동이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으면 대한민국의 휴전선은 "충청도 ~ 경상북도" 선이 되었을 것 입니다!
3. 어부지리 (漁夫之利)
두 사람이 이해관계로 싸우는 사이에 엉뚱한 사람이 애쓰지 않고 가로챈 이익을
이르는 말로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燕)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의 혜문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침략 준비를 서둘자......
연나라 소왕은 소진의 동생 소대(蘇代)에게 혜문왕을 설득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오늘 귀국에 오는 길에 국경인 역수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을 바라 보니 조개가 조가비 를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뾰족한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화가 나서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도요새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죽고 말 것이다'
라고 하자, 조개도 지지 않고 '네가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야말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 하고 맞받았습니다. 이렇게 쌍방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이곳을 지나가던 어부에게 그만 둘 다 잡혀 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만,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이옵니다.
연과 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백성들을 피폐하게 한다면, 귀국과 접해 있는 저
강대한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을 다 마셔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리하여 조나라의 혜문왕은 당장 침공 계획을 철회 했다고 합니다.
(1) 실제 역사의 사례
1) 펠로폰네소스 전쟁 : 아테네는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세력을 자랑했지만.... 실수를
연발해 나중에 마케도니아 왕국에 무릎을 꿇으며... 스파르타는 전쟁은 승리했지만
적국인 페르시아를 끌어들인 바람에 대의명분과 지지를 잃고 제국을 이끌기에는 마땅치
않는 정치체제라 오히려 부작용이 많았고 페르시아도 끝내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패합니다.
2) 로마 - 페르시아 전쟁 : 전쟁을 일으킨 사산조 페르시아는 그 후유증으로 분열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포카스 황제의 막장 통치의 후유증으로 인해 이슬람 제국의 발흥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3) 삼국시대 이릉대전 :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열 받은 유비의 촉한과
손권의 동오가 서로 치고 받고 싸운 사이..... 지켜보던 북쪽 조비의 조위는
더욱 성장하여 격차를 더욱 벌려놓았으니 결국 두 나라 모두 위나라에 망합니다.
4) 비수 대전 : 무리하게 백만 대군을 출병시킨 전진은 그마저도 동진에게 약점이 잡혀서 패하면서
이민족들의 반란으로 무너져 버렸으며... 동진 역시 전투에서 이긴 기세를 몰아 잠깐 동안은
영토를 넓혔지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혼란을 거듭한 끝에 유유의 송나라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5) 우드로 윌슨의 대통령 당선 : 1912년에 윌리엄 태프트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진보당이라는 자신만의 정당을 세우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같은당이던 태프트와 함께 낙선하고 상대방 정당인 민주당의 윌슨이 당선됩니다.
6) 임진왜란 : 명나라는 7년에 걸쳐 연인원 25만이라는 대병을 멀리 파견했으니 보급
의 어려움을 겪었고 이 전쟁을 틈타 중국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일본
에서는 히데요시의 아들을 제치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7)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후진타오의 공청단 : 이 두 파벌은 서로 권력 암투를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제3의 세력인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을
내세워 뒤에서 조종하려 들었지만... 권력 다툼으로 인해 두 세력이 약해져 있는
틈을 타 시진핑의 태자당이 이 둘을 제압하고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해주고 말았습니다.
8) 브레드 버리에는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준준결승 4명 중 3위로 완주
하여 탈락인데 앞에서 1명이 실격당해서 2위로 통과했고, 준결승에서는 5명 중
5위로 달리다 마지막 바퀴에서 선수 3명이 넘어져서 2위로 완주했으며, 결승은
5명 중 5위로 달리다 앞선수 4명이 마지막 바퀴에서 죄다 넘어져서 금메달을 땁니다.
(2) 6.25 평양 입성 경쟁
1) 2군단 6사단과 8사단 경쟁 : 8사단은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신계~곡산~양덕으로 북상해 평양
으로 서진(西進)하게 돼 있었고 6사단은 원산~양덕을 거쳐 평양으로 서진하도록 돼 있었는데,
제2군단은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서울울 먼저 점령하는 경쟁을
했듯, ‘양덕을 먼저 점령하는 부대에 평양~양덕간 도로 사용의 우선권을 부여한다’ 고 발표합니다.
말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인 평양에 누가 먼저 입성하는지 내기를 하는 셈
이었으니 6사단과 8사단은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게 됐는데, 문제는 교차지점에
도착한 것은 두 사단이 거의 같은 시각이어서 서로 먼저 도착했다며 길을 양보
하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선두의 중대장끼리 싸우다가 대대장·연대장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국군 6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8사단장 이성기 준장 간의 싸움으로 확대되더니
급기야 부대 사이에 “사격전” 까지 벌어지게 됐는데.... 군단에서 조정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자 8사단 10연대장 고근홍 대령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도보행군으로 앞장을 서버립니다.
그리하여 차량화한 6사단 제7연대는 도보행렬이 길을 비켜주지 않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만일 이럴 때 적이 기습을 가했더라면 큰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런 졸렬하고 유치한 작전계획은
군단의 커다란 실책이었는데 그나마 어부지리로 1사단이 먼저 평양에 입성해 버립니다?
2) 국군 1사단 최초로 평양 입성 : 6사단과 8사단이 교차지점에서 서로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백선엽(白善燁) 준장의 제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단은
작전계획을 변경하니... 제6사단에 부여된 새 임무는 평북 순천에 진격해 북한 정부요인
(要人)의 퇴로(退路) 차단 임무를 수행 중인 미 제187 공수연대와 연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평양 최초로 입성한다는 기대에 흥분했던 6사단은 공격방향을 평양에서 순천으로 바꾸게
됐으며... 그리고 추가적인 임무로 우군(友軍) 포로의 구출작전도 받으니, 10월 22일 순천
으로 진격해 비행기에서 낙하한 미 제187 공수연대와 연결됐지만 실랑이를 벌이느라 늦어진
탓에 북한 정부 요인은 이미 북상(北上) 한 뒤였고 우군 포로도 일부 밖에는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순천 북서쪽 9㎞ 지점에 명우점이란 터널이 있는데 주민들이 터널 속에 미군 시체가 많다고 제보하기로
현장에 갔더니 미군 시체와 함께 영양실조에 걸려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미군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먹을 것을 주며 위로했더니 “고맙다” 고 다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서양인이 대한민국을 위해
북한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이런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끼리는 최초입성 다툼을 벌였던 것입니다.
2003년 10월 9일 국방일보에 실린「한미군 선의의‘입성’경쟁」은“1950년10월 19일. 백선엽 장군이 지휘
하는 국군 제1사단이 유엔군 중에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국방일보는 2009년 10월 12일「금주의
전투사」‘ 평양탈환작전 : 국군 1사단, 미군보다 한 발 앞서 평양 입성’ 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국군이 만끽한 승리의 순간중 하나는 1950년 10월 19일 1사단이 미군보다 한발 앞서 평양
탈환의 선봉부대가 된 사실이다.”백선엽 장군도 2009년 출간한 자서전「군인과 나」 ‘평양 입성,
생애 최고의 날’에서 “월남한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 5,000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여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중앙일보에 2010년 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 을 연재한 백선엽
장군은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할 지점은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였다. 그곳에
선착하면 평양 입성의 경주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가 그곳에
도착한 때는 오전 11시쯤 이었다. 미군들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3) 칠성전우회“7사단이 평양 최초 입성”: 1950년 창설된 7사단 출신들의 모임인 칠성부대 전우회는
“우리 칠성부대는 평양지구 전투에서는 1950년 10월 18일 연합작전부대 중 최선두로 평양에
입성하여 김일성 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한국전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 7사단 8연대 3대대 9중대장 김호규 씨도 2010년 2월 16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
하는데 “1사단 15연대는 19일 오전에 들어왔고, 7사단이 하루 전날인 18일 저녁 무렵에 먼저
평양 김일성대학을 점령해 들어갔다. 지금도 우리는 18일에 행사를 하는데 1사단은 19일에 한다.”
“1사단 전투지역이기는 했지만 1사단은 도하작전을 못하고 있었다. 도하작전에 성공한 부대는
7사단 8연대다. 그러면 7사단 8연대가 평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7사단 8연대
중에서도 3대대가 제일 먼저 대동강을 건너서 강동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특명이 내려져
다시 돌아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19일 오전에 1사단이 서남방쪽에서 동평양으로 올라왔다.”
실제로 10월 18일 강원도 화천 공설운동장에서는 원홍규 제 7사단장의 주관으로 김호규 씨 등 6·25
참전용사 42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최초 입성’ 62주년 기념식이 신병수료식과 함께 열렸습니다.
4) 공식적인 역사 기록과 엇갈린 증언들 : 그런데도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여전히‘평양 최초 입성’
의 공을 7사단이 아닌 백선엽 장군이 이끈 1사단으로 돌리고 있으니 국방군사연구소가
1995년 발간한 「한국전쟁」‘평양 입성’에는....“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함으로써 평양 탈환 주역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 이다.”
2005년 육군사관학교가 편찬한 「한국전쟁사 부도」 ‘평양 입성’에도 “10. 19 오전
1사단 선봉인 제15연대는 율리에서 주력과 떨어져 더욱 깊숙이 북상하여
대동강 상류에서 도하한후 모란봉을 동북쪽으로 부터 공격하여 14:00경에
이르기까지 평양시내의 주요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고 기록돼 있습니다.
국군의 '평양 입성' 당시 2군단장을 지낸 유재흥 장군이 1975년 6월 2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6·25
를 회상한다’ 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평양에 먼저 도착한 부대는 제2군단에
배치된 7사단의 8연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 밝힌 바 있지만, '역사적 기록' 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국군을 총지휘한 정일권 육해공총사령관도 동아일보에 연재한 「비화 6·25 회고록」 ‘ 평양 입성 한미군
선두 다툼’(1985년 7월 24일)에서 칠성전우회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의미있는 증언을 했습니다.
국군 제1사단이 미군 제1기병사단 보다 조금 뒤쳐져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
이 ‘반드시 우리 국군이 평양에 먼저 입성해야 한다’ 라는 특명을 내렸고, 곧 바로
최전선 제7사단 전방지휘소를 직접 방문해 김용주 제8연대장으로 부터 ‘이틀 후면
평양 입성이 가능할 것 같다’ 는 보고를 받고는 진격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 입니다.
하지만 정 전 총사령관 또한 이어지는 증언(1985년 7월 25일. “김일성을 생포하라”)에서는 국군의 평양
입성을 제1사단과 제7사단 모두의 공으로 돌렸으니 “(10월 19일) 오전 11시 1사단이 동평양에 돌입
했고, 같은 시각 제7사단의 8연대도 김일성대학과 모란봉을 거쳐 평양 서북쪽으로 진입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우리 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이 동평양과 서평양을 선두 탈환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가 가장 최근에 작성한 기록물에서 ‘평양 최초 입성’ 부 대가 백선엽
부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나와 눈길을 끌었으며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블로그 「생생! 6·25」의 ‘유엔군 반격 / 북진 / 적의 심장부
를 향한 경쟁’ 편(2010년 4월 23일)은‘평양 최초 입성’ 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국군은 도섭지점을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여 미군보다 하루 빠른 19일 밤, 제15연대가 드디어
본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2연대가 동평양에, 15연대가
본평양을 제일 먼저 점령하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 최초 입성과 관련하여
국군 제7사단 8연대가 먼저 평양에 진입했다는 주장도 있어 아직 까지도 의견이 분분 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로도 6·25전쟁사의 가장 핵심부분 중 하나인 ‘평양 최초 입성’ 기록이 ‘의견이 분분한'
채로 방치돼 있다는 점이며, 7사단 전우회는“백선엽부대보다 하루 먼저 김일성대학에 태극기
게양”을 굽히지 않는데..... 6사단 19연대 조달진 소위는 6월 28일 홍천 말고개에서 북한군 자주포
10문을 파괴했는데, 탱크를 파괴한 것으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다가 최근에 바로잡은 것 같습니다?
4. 와신상담(臥薪嘗膽)
와신상담은 불편한 섶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거나 마음
먹은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사기의 월세가(越世家) 와 ”십팔사략“ 등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중국 춘추 시대에 양자강 이남 소주에 자리한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항주에 있던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에게 패배한 월나라의 왕 구천이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월왕 구천이 병법의 대가인 손무가 오나라를 떠나고, 오왕 합려가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오를 공격하자 오왕 합려와 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오는 막대한 손실
을 입었으니...; 오나라 왕자 부차는 그날의 치욕을 갚기위하여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부하들 더러 인사 대신에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각인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오나라 부차는 오자서 등의 도움으로 수년간 복수를 다짐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끝에,
오나라는 월군을 몰살시키고 월왕 구천을 생포해 오국으로 압송해서는 합려의 묘지기
일을 보고 왕후와 함께 삭발시키는 등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수년후, 구천은 부차의 신임을 얻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고국에 돌아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경국지색이라고도 불리는 서시와 온갖 진귀한 조공품을
보내면서 20년을 기다려서는.... 부차가 제나라와 초나라에 진(晋) 나라를 굴복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틈을 타서 오국을 기습해 부차를 죽이고 오국을 월에 합병합니다.
와신상담은 '장작에 누워 복수를 다짐하고 곰의 쓸개를 핥으며 노력해 고난을 이겨낸다' 뜻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어느 일본인의 회고에 보니 1895년 청일전쟁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3국간섭으로 토해놓은후 학교 선생님이 칠판에 臥薪嘗膽(와신상담) 네글자를 쓰고 말이 없으니
무거은 침묵이 흐른 후 어느 학생이 흐느끼고 이어 교실은 선생과 학생들로 울음바다로 변했다고 합니다.
남녀노소 일본인들은 모두 울면서 오늘의 이 수치를 잊지 않겠다며 이빨을 앙다물고 절치부심
각고의 노력으로 국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증대시켰으며.... 일본 정부는 저 세 나라에 대항
하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고는, 미국과도 동맹에 가까운 외교관계를 수립해 영국과 미국
에서 차관을 얻어 그 돈으로 군함과 무기며 탄약을 구입해 10년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합니다!
1840년 동아시아에서는 경천동지할 대 사건이 발생하니 하늘 같은 대국인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어처구니 없게도 대 참패를 당하고는,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강제로 열며 엄청난 배상금에다가 아편 판매를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 중국인들이 아편쟁이가 되는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이때 충격받은 중국의 웨이위안(魏源 위원)은 1842년에 해국도지(海國圖誌) 를 출간하는
데, 세계 주요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 기후‚ 물산‚ 교통‚ 무역‚ 민정(民情)‚ 풍속‚
문화‚ 교육‚ 국제 관계‚ 종교‚ 역법(曆法)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특히
전함과 화륜선(火輪船)‚ 지뢰‚ 수뢰‚ 망원경등 전술무기와 병기의 제조방식과 생산입니다.
책은 모두 100권 24책으로 해안 방어 체제의 강화와 강역 방어‚ 국난의 예방 등을 역설한 내용
이니... 먼저 의수(議守)는 해안 및 변경 방어의 기본 원칙을‚ 의전(議戰)은 서양 열강에
대한 대응전략‚ 의관(議款)은 아편전쟁 이래 축적된 서양과 외교 경험 등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해국연혁각도(海國沿革各圖)」에는「지구정배면도(地球正背面圖)」‚「아세아주각도(亞細亞洲各圖)」‚
「구라파주각도(歐羅巴洲各圖)」‚ 「아묵리가주각도(亞墨利加洲各圖)」 등으로 구성되어 세계지도
와 각 대륙의 지도를 수록했으니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일본, 인도, 이란, 터키, 이집트,
미국, 멕시코, 콜롬비아등 여러나라의 역사·지리와 다양한 환경에 관련된 내용들을 서술 했습니다.
해국도지는 출간하자 바로 일본 나가사키에 수입되어 막부 로쥬는 물론 시판되어 일본에서
널리 읽히니... 유성룡의 징비록이 수기로 몇권 필사되어 아는 사람끼리 돌려 읽는
정도로 조선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일본에서는 활자로 출판되어 시중에서 판매되니
통신사로 갔던 사신이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저 책을 보고 대경실색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조선에서는 몇년후 사신이 다녀와 "북경 시내가 예전처럼 조용하다" 고 보고하니국왕 헌종과 신하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끝났지만.... 중국과 일본은 연구하고 대비했으니
무사안일로 넘어간 조선과는 다른 점인데, 일본은 중국 상인들과 나가사키 데지마섬의 네델란드인
을 통해 싱가폴에서 발행된 영자신문을 입수해 아편전쟁에 대한 실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북경의 관보를 구해 보는 정도인 조선과 일본은 엄청 다르다는 것인데....
일본에서는 “해방(海防 해양방어) 의 방법으로 이정(夷情 서양사정) 을 아는 것만 한게 없는데,
해국도지만큼 상세한게 없다”고 막부와 번주 및 지사들에서 말단 사무라이들 까지도 다투어
읽으며 서양침략에 대비하는데, 이무렵 해국도지는 북경에 간 사신을 통해 조선에도 들어옵니다.
“사학(邪學, 천주교) 을 배척한 책으로 해국도지 만큼 분명한게 없으니 사교의 뿌리를
분별할수 있다” 고 조선의 승정원 일기에 적혀있으니!!! 서양 문물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방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저 책으로 천주교도 탄압에만 기세를 올리는데.....
이슬도 뱀이 먹으면 독 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고 했던가요? 똑 같은 책 인데?
5.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백번 싸워 백번 모두 이긴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손자(孫子)가 저술한 “손자”의 모공편(謀攻篇)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니 해당 구절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 不知己. 每戰必殆.
(지피지기, 백전불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부지피, 부지기, 매전필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 적을 모르되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은 진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움마다 위태하다. ”다만, '백전백승'
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니 전쟁이라는 건 어마어마한 비용을 소모하므로 설사
이겨도 출혈이 무지막지한 경우가 대다수니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고 이겨야 한다고 봅니다.
로마의 침공 위협에 직면한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인 부유한 타란토는 BC 279년
그리스 북부 에페이로스왕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35만 보병과 2만 기병의 지원을 약속하는데,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는 로마군에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타란토가 병력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다가 로마군이 점점 증강되어 지구전이 되자 병력이 줄어들어서 결국 패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대마도주와 부산에 설치된 왜관을 통해서 조선의 정보를 입수하는 외에도
오쿠무라 죠신(奧村淨信)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부산에 고덕사(高德寺)라는 절을 운영하며
조선사정을 염탐한데 비해...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게을렀으니 규슈 가라쓰
에 30만 대군이 모여들고 히데요시의 거처인 나고야성을 짓는데도 그런 사실 조차 몰랐습니다.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판옥선 30척 보다도 많은 40척 이상의 판옥선을 가진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은 수많은 왜선들이 모여드는 대마도에 정탐선 하나 띄우지 않았고... 부산 왜관에
300명이 넘던 상주 왜인들이 철수한뒤, 동래부사는 대마도주가 황급히 찾아와 왜군
이 곧 침략한다며 조정에 보고해 사신을 보내는등 급히 조치해 달라는 요청마저 무시했습니다.
부산 좌수영의 부산진첨사 정발은 1592년 음력 4월 12일 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700척 왜선이
몰려오는 것을 보는데... 처음 선두의 선박 몇십척만을 보고는 세견선인가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후진까지 700척이 나타나니 놀라 황급히 말을 달려 부산진성으로 들어가는 실정이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 조선군 전사자는 3명이고 명량 해전 전사자는 단 2명이니
함포사격 위주의 전투임을 알 수 있는데... 판옥선은 대포 20문을 장착한 140명이
타는 튼튼하며 높은 군함이지만, 일본 세키부네는 70명이 타는 낮고 작은 수송선
이며.... 왜군 조총은 사거리가 80미터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600~1,000 미터 입니다.
그러니 300미터 쯤 거리를 유지한 채 밀집 대형인 왜선에 대포를 쏘았으면 부산 상륙이
불가능한데도... 박홍은 정보 수집도 않고 사전에 배를 모아 훈련 한번 않했으니
당일 겁에질려 단 한척의 판옥선도 띄우지 못하고, 멀리 동래성에서 연기가 나자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에 불을 지른후 1만 수군을 해산하고 서울로 도주했던 것입니다.
1854년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개항하자 조슈번 요시다 쇼인등은
존왕양이운동을 일으키는데... 1862년 8월 나마무기에서 영국인 4명이 말을 타고
사쓰마(가고시마) 번주 히사미쓰 일행의 행열 사이로 지나가자 호위병이 영국인을
살해하니 다음해 1863년 7월 보복을 위해 7척의 영국 함대가 규슈 가고시마를 습격 합니다.
사쓰마번은 결사항전해 영국 기함을 파손시키고 상륙은 저지했지만 가고시마 시내가 불바다가 되는걸
막지는 못했으니... 이에 사쓰마번은 영국에 보복하는 대신에 서양의 위력을 절감하고는 방향을
크게 전환해서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15명의 젊은이를 뽑아 쇄국정책 중인 막부 몰래 비밀리
에 적국이었던 영국에 유학을 보내는데, 들키면 관계자들이 "배를 갈라야" 하는 위험천만한 짓 입니다.
양이를 강하게 외쳤던 조슈번(야마구치)은 막부 10만 대군의 토벌을 받게되자 항복하니 강경파는 모두
할복자결하고 유배되었으며 온건파가 정권을 잡자.... 다카스키 신사쿠는 80명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300명을 모아 3천이 넘는 조슈번병을 격파하고 정권을 잡은후 조슈번은 막부 몰래 영국에 5명을 유학
보내니,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등인데 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1854년 미일 개항조약 기념으로 미국이 증기기관차 모형을 선물하니....
일본은 18년 후인 1872년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간 철도를
서양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일본 자체 기술로 건설해 개통하게 됩니다.
일본의 기술력은 100년이 넘는 기업이 한국은 두산과 동화약품등 10개가 되지 않지만
일본은 3만 3천개나 되며, 20년 전에 오사카 뒷골목에 중소 기업 12개가 모여
인공위성을 만들어 쏘아올린 것도 서양을 배우려는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서울대학교는 해방후 수십년동안이나 일본학과를 개설하기를 거부했는데....
미운 나라를 연구해서 무엇하느냐는? 또 중국은 춘추시대에 노나라에 역사서 춘추와
한나라때 사기가 편찬되었고 일본은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가 있는데 비해,
한국은 1145년 삼국사기가 오래된 책이니 없어진 백제본기가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지만
우린 일본서기를 완역할 생각이 없으니 적을 알지 못하고 어찌 이길수 있을른지 모르겠습니다?
6. 새옹지마(塞翁之馬)
직역하면 '변방 노인의 말(馬)' 이고 풀이하면 인생의 화복(禍福), 즉 행복과 불행
은 변수가 많으므로 예측이나 단정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중국 전한
시대의 서책 “회남자”의 내용 중에 “인간훈”에서 유래한 고사성어 라고 합니다.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노인이 기르던 말이 어느날 도망가자 사람들은
"말이 도망가서 어쩝니까? 정말 안됐습니다." 하고 위로했더니.... 이 노인은 오히려
"글쎄요, 이 일이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 라며 낙심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이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으니 사람
들은 "이제 부자가 되셨구려! 축하합니다!" 라고 환호했지만..... 이 노인은 또
"글쎄요, 이 일이 재앙이 될 지도 모르지요." 라며 기뻐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뒤 노인의 아들이 그 말들 가운데에서 좋은 말 하나를 골라서 타고 다녔는 데,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고 절름발이가 되자 사람들은 "아드님이 다리를
다쳐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떡합니까? 정말 안됐습니다." 하고 걱정하며 위로하자
노인은 "글쎄요. 이게 다시 복이 될 지 어찌 알겠습니까?" 라며 덤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얼마 뒤, 오랑캐가 쳐들어와 많은 남자들이 징집되어 대부분 전장에서 전사하였고, 그나마
살아 돌아온 이들도 상당수가 중상으로 장애자가 됐으니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장애를 가진 이들의 가족의 안타까운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못쓰게 된 것이 오히려 약이 되어서 징집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노인은
이때 "인생만사란, 새옹지마라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원나라의 승려
'회회기' 라는 사람이 시를 지은 데서 '새옹지마' 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인생의 화와 복은 알 수 없으니 매사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7.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一夜之宿長城或築)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을 우 린 “하룻밤만 같이해도 부부사이에 정이 깊어진다” 라고
해석해 왔는데 사실과는 다르니.... 18세기 이전만 해도 이 속담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약용은 이 속담을 한자로 '일야지숙장성혹축(一夜之宿長城或築)' 이라 하며, 그 뜻은 '비록 잠시 머물
지라도 마땅히 주변을 경계하여 대비해야 한다' 는 유비무환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장성 長城' 이 중국의 '만리장성' 으 로 변했고 그에 따른 구전설화도 그럴듯하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중국 젊은 남녀가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장에 징용되었는데
한번 노역장에 한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에....
부부에게는 청천벽력의 생이별이었고 또한 살아 돌아올지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노역장에 보낸 얼마 후에 소금장수가 여인의 집에 찾아들었다가 검탈하려고 하자 여자는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허락할테니 부탁 하나만 들어 달랍니다. 노역장에
간 남편에게 옷 한벌 전해주고는 편지 한장만 받아 돌아오면 당신을 새 남편으로 섬기겠다는.....
소금 장수 는 다음날 길을 떠나 노역장 에 가서는 옷을 건네는데 남편이 옷을 갈아
입다가 편지를 발견하니 “당신을 구하기 위해 하룻밤을 잤는데 용서하신다면
집으로 오라는!편지를 읽은 남편은 도망치고 그 대신에 노역을 하게된 소금 장수
는 "겨우 하룻밤만 잤을 뿐인데....." 평생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어느분이 4자성어를 정리했는데, “ㄱ” 부분만 해도 380개니 추려서 52개를 적어봅니다.
가렴주구 (苛斂誅求) 세금 같은 것을 가혹하게 받아 국민을 못 살게 구는 일
각자도생 (各自圖生): 제각기 살아 나갈 길을 꾀함.
간장막야 (干將莫耶) 명검도 사람의 손이 가야 빛나듯, 사람도 교육해서 선도해야 한다.
감언이설 (甘言利說) 남의 비위에 들도록 꾸미거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서 속이는 말
감탄고토 (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로, 필요 없을 때는 괄시하는 것.
갑남을녀 (甲男乙女) 보통 평범한 남녀. 張三李四(장삼이사) 善男善女(선남선녀)
갑론을박 (甲論乙駁) 자기의 주장을 세우고 남의 주장을 반박함.
강개무량 (慷慨無量) 한탄하고 분개함이 끝이 없음
강상죄인 (綱常罪人) 삼강(三綱)과 부모애 대한 오상을 거역한 죄. 오륜(五倫)을 뜻함.
개과천선 (改過遷善) 지나간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
거두절미 (去頭截尾) 앞뒤의 잔 사설을 빼놓고 요점만을 말함
건곤일척 (乾坤一擲) 흥망 성패를 걸고 단판 싸움을 함
격물치지 (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함 - 주자학
격세지감 (隔世之感)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세대 차이)
격화소양 (隔靴搔痒)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음. 일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함
견강부회 (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주장에 맞도록 함
견물생심 (見物生心)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김
견원지간 (犬猿之間) 개와 원숭이 사이로 사이가 몹시 나쁨.
결자해지 (結者解之)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해결해야 함
결초보은 (結草報恩) 죽어 혼령이 되어서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겸양지덕 (謙讓之德) 겸손한 태도와 사양하는 덕.
경거망동 (輕擧妄動) 경솔하고 분수에 없는 행동을 함.
경국지색 (傾國之色) 온 나라를 움직이게 하는 미인. 아름다운 미인을 일컫는 말.
경세제민 (經世濟民)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다스리기에 열심히함.
경자유전 (耕者有田) 경작자가 밭을 소유한다.
경천동지 (驚天動地)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
고육지계 (苦肉之計)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꾸미는 계책
고장난명 (孤掌難)鳴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같으니까 싸움이 난다는 말
고진감래 (苦盡甘來)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 興盡悲來 (흥진비래)
곡학아세 (曲學阿世) 배운 것을 굽혀 가면서 세상의 비위를 맞추어 출세를 하려한다
골육상잔 (骨肉相殘) 같은 혈족끼리 서로 다투고 해하는 것. 골육상쟁(骨肉相爭)
공명정대 (公明正大) 마음이 공명하며,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이 바름.
과유불급 (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 과여불급 (過如不及)
관포지교 (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처럼 친구 사이의 우정이 깊음
교각살우 (矯角殺牛)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 작은 일에 힘쓰다 큰일을 망친다는 말
교언영색 (巧言令色) 교묘한 말과 얼굴빛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함
구곡간장 (九曲肝腸) 굽이굽이 사무친 마음속. 또는 시름이 쌓이고 쌓인 마음
구상유취 (口尙乳臭) 아직 어리고 유치한 짓을 하는 사람.
구우일모 (九牛一毛) 많은 것 가운데서 극히 적은 것을 말함. 창해일속(滄海一粟)
구절양장 (九折羊腸) 양의 창자처럼 험하고 꼬불꼬불한 산길 길이 매우 험함
군계일학 (群鷄一鶴) 평범한 사람 가운데 아주 뛰어난 한 사람.
궁여지책 (窮餘之策) 막다른 골목에서 그 국면을 타개하려고 생각다 못해 짜낸 꾀
권토중래 (捲土重來) 한번 실패에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남
극기복례 (克己復禮) 자기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
금과옥조 (金科玉條) 금이나 옥같이 귀중한 법칙이나 규정
금상첨화 (錦上添花) 좋고 아름다운 것 위에 더 좋은 것을 더함. ↔ 설상가상(雪上加霜)
금의야행 (錦衣夜行)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닌다. 성공은 했지만 효과를 내지 못함
금의환향 (錦衣還鄕) 비단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옴. 타향에서 성공하여 돌아감
금지옥엽 (金枝玉葉) 임금의 자손이나 집안 또는 귀여운 자손을 소중히 일컫는 말
금석지교 (金石之交) 쇠와 돌처럼 굳고 변함없는 사귐. 금석지약 (金石之約)
기사회생 (起死回生) 다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남.
기승전결 (起承轉結) 기에서 말머리, 승에서 풀이, 전에서 뜻 변화, 결에서 끝맺음.
기호지세 (騎虎之勢)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 처럼 도중에서 그만둘수 없는 형세말
그 외에 몇가지 더해 보자면.....
樂善不倦 : 락선불권 - 선을 즐기는 사람은 권태로움이 있을 수 없다
大道無門 : 대도무문 - 큰 도는 이름조차 없는 것이다
無言實踐 : 무언실천 - 모든 일은 말없이 실천하라
浩然之氣 : 호연지기 -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당한 기운
事必歸正 : 사필귀정 -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대로 돌아간다
先公後私 : 선공후사 - 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우선한다
初志一貫 : 초지일관 - 처음의 뜻을 끝까지
言行一致 : 언행일치 - 말과 행동이 일치함
弘益人間 : 홍익인간 - 널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仁義禮智 : 인의예지 - 어짐 정의 예절 지혜
孝悌忠信 : 효제충신 - 효도 우애 충성 믿음
苦盡甘來 : 고진감래 - 고생 끝에 낙이 온다
結者解之 : 결자해지 - 자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多情佛心 : 다정불심 - 다정다감한 마음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非禮不動 : 비례부동 -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행동하지 않는다
溫故知新 : 온고지신 - 옛 것을 익힌 후, 새로운 지식을 찾는다
愚公移山 : 우공이산 - 어리석고 힘든 일이라도 차근차근 하면 뜻을 이룬다.
有備無患 : 유비무환 -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뒷 걱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