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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그이는 잘랄루딘 루미나 칼릴 지브란 같은 글을 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자신을 “시인, 사진작가, 혁명가”라고 부르는 그이를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제게 국어를 가르쳤던 나혁채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서정주 시인의 제자였는데, 교사생활로 담아내기에 버거운 기인이었고, 시인이었습니다. <빛들이 터지는 길목을 돌아>라는 시집을 내고 제자였던 우리들은 그 책을 한 권씩 사서 읽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선생님은 교실을 사상의 거처로 삼아 온 시공을 오가며 철학적 담론을 펼치곤 했습니다. 똥 덩어리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똥무더기가 더럽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미시적 세계로 들어가면 똥 덩어리에서도 절경이 펼쳐진다는 거였습니다. 당시 그분의 꿈은 니체를 방불케 하는 사상전집을 내는 거였습니다.
꽃씨를 심어요
노동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독방에서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았다는 그이는 박노해입니다. 표지의 짙푸른 색감과 제목에 끌려 <너의 하늘을 보아>(느린걸음,2022)라는 300여 편의 시가 담긴 시집을 사서 읽었습니다. 프로필에는 “감옥에서부터 30년간 써온 한 권의 책, 우주에서의 인간의 길을 담은 사상서를 집필중”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이는 지금 ‘적은 소유로 기품있게’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 <참사람의 숲>을 꿈꾸고 있다 했습니다. 그이의 문체는 <잠언>처럼 간결하고 명징합니다. 외람되지만, 그이는 사상서가 아니라 일기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이의 수많은 시의 숲에서 제가 건져올린, 가슴에 와닿은 시는 한 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떠돌던 생각이 막 지구별에 닿은 것 같은 ‘꽃씨를 심어요’라는 시였습니다.
“지난 가을
그대가 보내준 편지봉투에
꽃씨를 받아 넣었죠눈 내리는 겨울밤에
책장 선반 구석에서
봉투 안의 꽃씨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에
몸을 뒤채며 봄을 기다렸죠첫 봄비가 내리고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다시 읽으며
봉투에 간직해온 꽃씨를 심어요
......
지구에서 보낸 한 생의 길에서
곧고 선한 걸음으로 꽃을 피워온 그대
사랑이 많아서 슬픔이 많았지요
사랑이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요그래도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고
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좋은 날이 오고
눈 녹은 땅에서 씨 뿌려가는 걸음마다
봄이 걸어오네요
꽃이 걸어오네요”
카메라로 다시 쓰는 노동의 새벽
박노해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2014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노동의 새벽> 출간 30주년을 맞이해 열린 박노해의 사진전 <다른 길―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를 보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가서 그이를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박노해는 아시아 전역에서 촬영한 7만 컷의 흑백필름 사진 중 엄선된 120여 점의 사진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박노해는 줌렌즈를 사용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줌렌즈를 사용하는 작가는 피사체를 제 편의대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냅니다. 철저히 작가 중심의 촬영 방법이지요. 그러나 박노해처럼 단렌즈를 사용하는 작가는 피사체를 자세히 보려면 피사체에게 작가가 직접 다가가야 합니다. 배경을 함께 담고 싶으면 작가 자신이 뒤로 물러서야 합니다. 피사체 중심의 촬영법입니다. 사진찍는 방법에서 타자를 배려하고 응대하는 방식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행위 하나에서도 내가 타인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 깨닫게 됩니다.
게다가 박노해는 필름카메라를 사용하기 때문에, 매순간 결정적인 한 컷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혼신을 다합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일단 수없이 박아 놓고나서, 괜찮은 컷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버리는 방식은 너무 자본주의적입니다. 타인에 대한 섬세한 주의력이 필요없고, 물량공세로 좋은 컷을 골라내는 삶은 참혹합니다. 여기서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제 삶의 방식이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당시 박노해는 스스로 ‘실패한 혁명가’이며,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카메라를 들고 제3세계의 내전지역과 오지를 넘어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그이가 발견한 세계는 ‘비즈니스 문명의 시대’였습니다. 엄마 뱃속의 태아부터 가정, 학교, 종교, 사랑과 결혼, 우정, 인문학, 개성, 나의 내면까지 시장이 들어선 시대라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념과 진영 대립을 넘어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며, 아시아 토박이들에게 배운대로 “대지에 뿌리박고 자급자족하는 좋은 삶을 사는 것, 우애와 아름다움을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이를 두고 ‘카메라를 들고 다시 쓰는 노동의 새벽’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다른 시선, 다른 발걸음으로
박노해를 생각하면, 늘 떠나지 않는 감정이 있습니다. 왜 박노해는 ‘자발적 은둔’을 선택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헤아려봐도, 제 시선의 반경 안에서는 박노해의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따금 내어놓는 책이나 사진을 통해 그이의 안부를 엿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이가 참 외롭겠구나, 생각합니다. 그이는 사진에세이 <다른길>(느린걸음, 2014)에서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이는 지금쯤 그 길을 찾았을까, 궁금합니다.
“비 내리는 차밭에서 잡목을 치며 나아가는
날랜 칼놀림이 대지의 여전사들만 같다.
할머니 손에서 어머니 손으로
어머니 손에서 딸들의 손으로
식구들이 목숨을 살려온 정결한 칼.
죽임의 칼이 아닌 살림의 칼.
칼날이 빛나고 신성해지는 곳은
오직 논밭과 도마 위이리라.”
<다른 길>에 실린 ‘고산 차밭의 여전사들’이라는 글입니다. 그녀들의 야무진 손끝에서 길을 발견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처럼 “가장 가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살아가지만 정결하고 단아한 살림 솜씨가 빛나는 집”에 머물고 싶은 모양입니다. “남을 밟고 오르지 않고, 밭을 밟고 오르며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이에게 희망이 번지는 새벽이 오길 바랍니다. 이제 그이가 심어놓은 꽃씨들이 걸음마다 봄이 되어 걸어오길 바랍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