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가톨릭일꾼 기사
최태선 승인 2025.01.06 09:32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구절이다. 나는 목사 초년생 시절부터 모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늦게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늦게 목사가 된다는 것은 목사로서 치명적인 일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해보라. 그것이 자리를 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늦게 목사가 된다는 것은 곧 거의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백이십 세 때까지 눈이 빛을 잃지 않고 기력이 정정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바라는 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건강하게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죽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꿈을 위해 충성,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늙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겉 사람은 늙어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나는 바오로 사도가 느꼈고 가졌던 그 열정을 지금 느끼고 있다.
그래서 팔십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처럼 되고 싶다. 죽을 나이인 팔십이 의미하는 것은 온전한 무력함을 상징한다. 그렇게 무력해진 후에 부르심을 받아 모세는 나머지 사십 년을 주님의 마른 지팡이처럼 살았다. 모세의 백이십 년 인생은 단 한 순간도 주님의 손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새해를 맞아 모세처럼 주님의 손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내 인생을 바라보고 있다.
일전에 만난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난다. 그분의 딸이 자신의 차를 몰고 가다 뒤집어져 차를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가 났지만 딸은 작은 상처만을 입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일을 두고 이구동성으로 하느님께서 보호하셨다는 말을 했지만 자신은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보호해주셨다고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분은 자신의 믿음이 미신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에서 주님의 허락이 없이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 믿음이 미신적인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주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처럼 보였던 일들도, 사소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까지도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좋은 일만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하고 나쁜 일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사탄이 한 일이라는 주장을 한다. 전광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것, 사고, 가난을 포함하여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감사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가장 크게 감사하고, 내가 망하고 실패한 것들을 더더욱 감사한다. 내가 성공하고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이루었다면 나는 지금 내가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신뢰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내 이름을 자랑하고 남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 인생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었고, 주님의 허락이 없이 일어난 일은 없다는 것이 새삼 새해 첫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내 믿음이다. 내게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 안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정적 존재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자라는 존재다. 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단순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일이 우연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성을 신봉하는 사람이 어린아이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의 사고가 모두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뢰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신뢰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삶과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영원을 모르는 인간이 영원 속으로 들어갔다는 징표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죽음 이후에 죽음이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는 나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얼마나 신기할까, 그리고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간직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대와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이십여 년을 신용 불량자로 살았다. 새삼 그런 나를 버리지 않은 아내와 두 딸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소리도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아내는 돈을 벌 수 없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나와 살아준 아내가 고맙다. 두 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돈이 줄 수 없는 사랑과 행복으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이름 없이 도움의 손길로 다가왔다가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분들에게도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는 없다. 주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아내와 딸들이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주장해주신 것이고, 이름 모르는 도움의 손길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 주변의 모든 신용 불량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쓰다 좌절하고, 가족이 해체되거나 관계가 단절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 가운데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없지 않다. 나는 나와 그분들의 차이는 오직 하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내 힘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대신에 주님을 의지했고, 주님은 그런 유치한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 가운데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드신 주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감사한다.
내게 새로운 한 해가 선물로 주어졌다. 내게 이 새로운 시간을 여하히 잘 살아내느냐 하는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물론 내 몸짓 하나, 내 표정 하나도 허투루 놓칠 수 없다. 아니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말없이 거울 앞으로 다가가 그런 몸짓과 표정을 지어본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미소는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와 찬양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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