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된다. 이런저런 프로그램에서 그에 관한 특집이 방송되었고 몇 차례 추모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세상을 뜬 후에도 끊임없이 기억되고 지속적으로 추모되며 그 음악이 현재진행형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경우가 꽤 있다. 대표적인 사람들을 굳이 꼽아본다면 배호(1942-1971), 김정호(1952-1985), 유재하(1962-1987), 김현식(1958-1990) 그리고 김광석(1964-1996)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곡들을 내놓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때 이른 죽음과 함께 그들은 신화가 되었고 그들의 음악은 영원히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 가운데서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 특히 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를 젊은 감성으로 통과했던 세대에게 가장 큰 안타까움으로 기억되는 이름이 김광석이다.
내가 김광석을 처음 만난 건 82,3년 무렵 그가 명지대생이었던 시절이다. 당시 대학 노래패를 졸업한 몇몇이 노래에 관심 있는 친구들을 모아 대학 연합동아리를 만들었는데 김광석이 거기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한 친구였다. 늘 기타를 메고 다니며 노래를 흥얼거렸고 틈만 나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함께 활동하던 선배 입장에서 보면 늘 궂은일을 마다 않고 도맡아 하는 착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가 공식적인 음반 제작에 참여하면서 음악 활동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건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음반을 통해서다. 이 음반은 대학 바깥에서 노래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던 노래패 출신들이 당시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올라와 아동용 뮤지컬 음반 제작을 시도하던 김민기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음반이다.
김민기의 프로듀싱으로 만들어진 이 음반은 모두 합법적으로 검열을 통과한 노래들로 이루어졌지만, 앨범 표지에 김민기의 이름은 빠져야 했고, 자켓 사진이 검열에 걸려 다시 제작하는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으며, 그나마 당국의 압력으로 시중에 제대로 유통되지도 못한 채 사장되었다.
하지만 이 음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후 ‘노래모임 새벽’을 결성해 본격적으로 노래운동을 펼쳐나갔고 김광석도 그 일원으로 활동했다. 87년 민주항쟁과 함께 민주화가 시작될 무렵 ‘노래모임 새벽’은 처음으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공연을 시도했고 이 공연의 주체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87년 10월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번째 공연에서 최고의 스타는 단연 ‘녹두꽃’을 부른 김광석이었다. 이 공연이 크게 성공하면서 ‘노래모임 새벽’은 김광석과 안치환을 포함한 일부 멤버를 중심으로 ‘노찾사’를 조직적으로 분리했고 이후 ‘노찾사’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김광석은 음악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이란 그룹을 준비하고 있었다. 88년 ‘동물원1집’을 낸 후 한동안 ‘노찾사’와 ‘동물원’ 활동을 병행하다 곧 ‘동물원’ 활동에 전념했고 다시 솔로로 독립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던 김광석에게 ‘노찾사’나 ‘동물원’이 가진 특유의 아마추어적인 분위기가 성에 차지 않았을 터다.
이후 김광석과 노찾사의 행보는 널리 알려진 바다. ‘노찾사’는 안치환, 권진원 등 뛰어난 뮤지션들을 배출하며 음반과 공연 활동을 활발히 벌이면서 민중가요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성과를 올렸다.
노찾사’의 성공적인 활동은 ‘대중문화:민중문화’라는 이분법을 깨트리면서 대중문화의 공간 안에 진보적인 문화의 토대를 만들어낸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솔로로 나선 김광석은 특유의 가창력과 성실함으로 라이브 공연을 꾸준히 벌이며 70년대 후반 이래 사실상 끊어졌던 한국적 모던포크 음악의 계승자 역할을 해냈다.
김광석은 스스로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지만 특히 좋은 노래를 찾아내고 이를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해 부르는 탁월한 기획자이자 보컬리스트이기도 했다. 김민기, 한대수, 김의철, 백창우, 이정선 등 한국 모던포크의 기라성 같은 선배 뮤지션의 노래들이 김광석에 의해 재창조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7,80년대 대학가에서 창작된 노래들, 민중가요들도 그의 음악적 자장에 흡수되면서 재해석되어 새롭게 대중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서도 가 특히 명반으로 꼽히는 까닭이 그것이다. 김광석은 말하자면 70년대 통기타 음악의 정신과 80년대 민중가요의 진정성을 함께 흡수하면서 90년대식 모던 포크 음악의 물줄기를 새롭게 만들어낸 유일한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행보는 서른두 살의 나이에 끝나 버렸고 그 새로운 물줄기는 아쉽게도 거기서 멈춰버린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우리의 대중음악은 좀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고 우리의 세상도 한결 더 살만한 곳이 되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물론 지금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는.
김광석의 노래는 드라마, 영화 등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쓰이는 음악 가운데 하나다. 그의 노래 속에는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어서다. 모던 포크의 계승자답게 그는 메시지가 살아 있는 노래를 좋아했고 그런 노래들을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삶의 구비에서 밟고 지나가는 통과 의례처럼 그의 노래들을 만난다. 사랑을 할 때, 사랑의 아픔을 느낄 때, 청춘을 통과해 중년의 고비를 지날 때,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할 때, 나이 먹어 세상을 관조하고 싶을 때, 우리의 눈앞에 그의 노래들이 하나씩 놓여 있다. 마치 나의 노래처럼, 나의 이야기처럼. 그의 노래가 사후에 오히려 더 많이 팔리고 그가 떠난 지 15년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JSA>는 김광석의 노래가 현재형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보여준 가장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 영화 내내 김광석 특유의 처연한 목소리로 깔리는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는 영화의 분위기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분단의 역사가 낳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김광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연결되면서 영화의 비극성을 한층 깊게 새겨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광석이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대냐?” 하는 송강호의 대사를 들을 때,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 대사는 같은 시대를 겪은 동세대의 예술가로서 감독 박찬욱이 김광석에게 던지는 안타까운 헌사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