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 “So aparena samayena ariyaṃ dhammaṃ suṇāti, yoniso manasikaroti,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ti.(그는 그 후에 성스런 법을 배우고, 올바로 作意하고, 법에 이르는 법의 방도를 따릅니다.)”[DN. vol.2. p.214]
<‘단수일 때’는 三昧[=定]에 들고> 이 말씀에서 삼매=사마타로 이해해야 하나요?? '<‘복수일 때’는 般若(paññā, 慧)를 닦을 기회' 라는 말씀에서.... 여기서 혜해탈은 '욕계의 현실에서 오욕락을 파악한 상태의 삼매를 전제하기 때문에 복수의 법들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아위자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마타의 의미중에서 제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행의 적지 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능소로 나뉘지기 전이 법의 단수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를 저는 행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지집멸도 같거든요 ㅎㅎㅎ
이런 상황에서 위빠사나로써 그 법의 특성을 파악 가능하리라 보았거든요....
제가 위 질문을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ㅎㅎㅎ
'일상의 대화에서 중에서 삼매에 들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ㅎㅎ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서요...
우선 반야와 위빠사나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정립을 해야겠습니다. ㅎ 개인적으로 반야는 식과 반대편의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명계와 무명계처럼요. 사리불 존자의 지적 처럼 식과 반야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말씀에서 명계와 무명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라고 이해했었는데요... 식이 계에 거주처라면 반야도 계에 거주처라고 ㅋ
비구여, 다시 어떤 비구가 들은 바대로 암기한 대로, 法(dhamma)을 따라가며 心으로 위딱카하고 위짜라하며 意로써 고찰한다(고 하자). 그는 그러한 ‘法에 대한 위딱카(dhammavitakka)’로 하루 종일 보내고,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며, 內로(ajjhattaṃ) 心의 사마타에 몰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비구여, 그러한 비구는 위딱카는 많이 하지만 ‘法에 머무는 자(dhammavihārī, =법등명하는 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 종일 보내지 않고,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지 않고, 內로(ajjhattaṃ) 心의 사마타에 몰두 한다면 그와 같은 비구가 ‘法에 머무는 자(dhammavihārī)’이다.[AN. vol.3. pp.87~88]
첫댓글
“So aparena samayena ariyaṃ dhammaṃ suṇāti, yoniso manasikaroti,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ti.(그는 그 후에 성스런 법을 배우고, 올바로 作意하고, 법에 이르는 법의 방도를 따릅니다.)”[DN. vol.2. p.214]
‘dhammānudhammaṃ’는 .......... <단수 法(dhamma)과 단수 法(dhamma)>으로 이루어진 ‘복합어’로 보입니다.
@아위자
그리고 ............
‘육육(六六)과 12연기’의 차이점에 대하여 ........ 오해가 있으신 듯.
‘육육(六六)’은 <法(dhamma)이 ‘處(āyatana)’의 모습>인 경우이고, ‘12연기’는 <法(dhamma)이 ‘界(dhātu)’의 모습>인 경우입니다.
@아위자 단수 아누 단수 였다니…. 대박이네요 ㅎㅎㅎㅎ
2해도 안 되는데 감히 5해까지나 하겠습니까? 어차피 ‘단수 법 anu 단수 법’ 이라면 뒤이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단수…. anu…. 단수….. 라니……
@새벽 ‘작의의 집이 법들의 집’ 에서는 복수의 법이고…..
@새벽 ‘제법이 현현한다’ 에서 제법은 표현상 복수의 법…….
@새벽
dhamma(法)는 <‘心, 意, 識’의 對境(visaya)이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유한 경계(visaya)’이기에 ‘고짜라(gocara, 攀緣)’입니다. 그래서 .......
<‘眼, 耳, 鼻, 舌, 身’의 對境(visaya)이고, ‘고짜라(gocara, 攀緣)’인> ‘色, 聲, 香, 味, 触’은 ............. ‘단수일 때’와 ‘복수일 때’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나 ........ dhamma(法)는 ‘단수일 때’와 ‘복수일 때’에 .......... <‘단수일 때’는 三昧[=定]에 들고>, <‘복수일 때’는 般若(paññā, 慧)를 닦을 기회[=慧해탈의 기회]>입니다.
@새벽 문제는 ,,,,,,,, dhamma(法)을 보면서도 <dhamma(法)인 줄 모르고> .......
dhamma(法)을 보면서도 <名色(nāma-rūpa)인 줄 알고> .... 지랄발광 하는 것이 문제.
@아위자 흠..........
<‘단수일 때’는 三昧[=定]에 들고>....
<‘복수일 때’는 般若(paññā, 慧)를 닦을 기회[=慧해탈의 기회]>....
<‘단수일 때’는 三昧[=定]에 들고> 이 말씀에서 삼매=사마타로 이해해야 하나요??
'<‘복수일 때’는 般若(paññā, 慧)를 닦을 기회' 라는 말씀에서....
여기서 혜해탈은 '욕계의 현실에서 오욕락을 파악한 상태의 삼매를 전제하기 때문에 복수의 법들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 사마타 ca 위빠사나는 쌍수가 아니게 되나요??
허어얼 ~ ㅠㅠ
헤롱 헤롱...... @_@
외람되지만 설명 부탁드립니다. ()
@물마
부처님께서 정의하신 <사마타>의 의미.
................................................
@물마
가야 할 길이 ............ 먼 듯~~~
@아위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마타의 의미중에서 제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행의 적지 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능소로 나뉘지기 전이 법의 단수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를 저는 행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지집멸도 같거든요 ㅎㅎㅎ
이런 상황에서 위빠사나로써 그 법의 특성을 파악 가능하리라 보았거든요....
제가 위 질문을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ㅎㅎㅎ
'일상의 대화에서 중에서 삼매에 들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ㅎㅎ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서요...
우선 반야와 위빠사나에 대한 정의도 새롭게 정립을 해야겠습니다. ㅎ
개인적으로 반야는 식과 반대편의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명계와 무명계처럼요. 사리불 존자의 지적 처럼 식과 반야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말씀에서
명계와 무명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라고 이해했었는데요... 식이 계에 거주처라면 반야도 계에 거주처라고 ㅋ
무척이나 송구하지만 먼 길 가기 위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_()_
@아위자 문제는 ,,,,,,,, 괴로움을 보면서도 <dhamma(法)인 줄 모르고> .......
dhamma(法)을 보면서도 <名色(nāma-rūpa)인 줄 알고> .... 정신들名을 식별하고 물질色을 무상.고.무아.에 여리작의... 작의 대상이 곧 法이죠..근데 왠 말씀을...ㅈㄹㅂㄱ하시는지요.
법에 머무는 사마타
법에 대한 위빠사나
두 날개
색성향미촉의 단수/복수 상황과 다름
식은 이 줄기 저 줄기 옮겨다니는 원숭이
의는 사띠에 의지하여 모이고 흩어짐
비구여, 다시 어떤 비구가 들은 바대로 암기한 대로, 法(dhamma)을 따라가며 心으로 위딱카하고 위짜라하며 意로써 고찰한다(고 하자). 그는 그러한 ‘法에 대한 위딱카(dhammavitakka)’로 하루 종일 보내고,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며, 內로(ajjhattaṃ) 心의 사마타에 몰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비구여, 그러한 비구는 위딱카는 많이 하지만 ‘法에 머무는 자(dhammavihārī, =법등명하는 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 종일 보내지 않고,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지 않고, 內로(ajjhattaṃ) 心의 사마타에 몰두 한다면 그와 같은 비구가 ‘法에 머무는 자(dhammavihārī)’이다.[AN. vol.3. pp.87~88]
크흐 역시 경문을 들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