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1장을 보면 욥은 평생에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보상심리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30장 30절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1절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그 다음 31장 1절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이 말은 욥은 처녀에게 눈짓도 안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한창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어느 야구단의 응원 댄스를 보니까 참 예쁘던데 욥은 훨씬 뛰어납니다.
2절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분깃과 그 분의 산업으로 욥은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분신앙에는 투철합니다. 요즘 이만한 이도 드뭅니다.
3절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절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절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절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입니다. 철벽입니다.
7절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 외엔 완벽합니다.
8절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원하노라”
9절을 보세요. 욥은 한눈을 판 적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10절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욥은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의 동해보상법으로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습니다.
11절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12절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원하노라”
잘 못이 있으면 하나님 보다 사람들에게 정죄를 당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 못이 있으면 법의 심판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욥의 신앙은 철저한 자기를 단장하는 미학이라는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땅으로 깔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교훈이 아닙니다.
사실은 욥이 진리 안에서 여자를 초월한 사람 같으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건 안 돼 하고 말을 해서 죄를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아야 이깁니다.
13절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욥은 노동법에도 전혀 하자가
없는 모범적인 기업주입니다. 지금 같으면 국가가 표창을 할 만한 인물입니다.
14절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절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죄를 의식한 상태에서는 한 것이든 안 한 것이든 다 죄 아래에 있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에서 죄와 저주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어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뒤에 사랑을 좇아가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갈5:6)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이 짓을 하면 된다, 안 된다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건 잘 되는 일이다 잘못 된 일이다 하는 분별이 있어 잘 못이 싫어지는 겁니다.
16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절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절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버지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절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절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남이 자신을 위해 복을 빌어 달라고 구제를 했다고 진술합니다.
이런 욥과 같은 신자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회봉사이고 또 욥과 같은
신사숙녀를 만드는 것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제자훈련이 아닐까요?
21절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절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절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욥은 두려움 때문에 이런 일을 했답니다.
24절 “만일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으면”
25절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26절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절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 맞추었다면”
28절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사실 욥만큼 한 목사나 신부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의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잘 해도
그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원인이 자신이기에 결과의 상도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롬8:7절 육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자신의 영광이 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나님을 숨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리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과 물로 나는 거듭남이 필요한 겁니다.
욥의 신앙은 부자 청년이 ‘내가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눅18:18) 묻는 것과 같습니다.
35절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36절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37절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8절 “만일 내 말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39절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40절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의 최후의 진술입니다.
욥은 철저한 인과응보의 자연의 법칙을 설파한 겁니다. 땅에서 난 인간으로서는
의인 중에 의인인 욥의 삶입니다. 거의 완벽합니다. 자신의 말대로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욥14:1) 욥만큼 할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항복할 일입니다.
그래서 세 친구는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명 검사라 할지라도 욥에게서
먼지 하나 털어내지 못할 겁니다. 그만큼 아담 안의 선악과의 독성이 무섭고
그 선악의 지식에 대한 인간의 의가 질기고도 질김을 욥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