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노령의 빙판
"상현아! 자네 소리 소문 없이 죽을 뻔했다면서?"
부산하게 떠들며 선우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앞에서 신발을 벗던
성삼대는
"호강했지 뭐. 기생방에 일주일 넘게 누워 있었다면. 하여간 인복있는
작자는 병이 나도 기생품속이라, 부럽네 부러워."
말쑥한 양복의 선우일과는 반대로 무명 두루마기에 수염도 안깍고,
목수건을 끄르며 성삼대는 선우일 옆에 앉는다.
"인복이 아니라 여복이네."
상현이 이불을 걷고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얼굴이 축갔군. 앓기는 되게 앓은 모양이야."
선우일이 상현의 얼굴을 쳐다본다.
"본바탕으로 돌아온 게지. 술살이 쪼옥 빠졌던 게야. 바은 따뜻하군."
성삼대는 방바닥을 짚어본다. 농담부터 앞세우며 얼렁뚱땅 넘기고
있으나 상현은 이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재미가 어때?"
상현도 딴전을 피우듯 물었다.
"재미? 죽을 지경이지. 재미는 자네가 톡톡히 보지 않았나. 그래
지성으로 병간호했다는 기생은 쓸만한 계집이든가?"
"박색이야. 성깔 고약하구,"
담배를 붙여물었던 상현은 심한 기침을 하다가
"제에기랄!"
담배를 눌러 꺼버린다. 태연스럽게 말은 했지만 심중이 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화에 대한 죄택감보다 최참판댁의 침모 딸이며 기생인 기화
몸에서 자신의 핏줄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치욕감 없이 되새길 수가 없는
것이다. 뭣이든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고 싶었다.
"당분간은 담배 안 피우는게 좋을 게야."
선우일은 험악해지는 상현의 얼굴에서 벽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늘
그러했다. 두려운 것도 아닌데 정면으로 대하기만 하면 벼르고 별렀던
충고를 못하고 마는 이상현의 분위기다. 잇몸이 근질근질하지만 결국 그의
행사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은 충고 아닌 병문안을
위해 온 터이기는 했다.
"태수형님이 걱정을 하시더군."
겨우 선우일은 얘기를 이었다.
"무슨 걱정?"
"자네가 앓는다는 소문을 들었지."
"이젠 괜찮어,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을 뿐이지."
"몸도 다스리고 글도 쓸 겸 절에 가볼 생각 없나?"
"태수형이 그러라 하든가?"
"그러라기보다 그러는 편이, 말하자면 심기일전하는 뜻에서 말이야. 나쁠
것도 없잖겠나?"
상현은 쓴웃음을 띤다. 살빛이 검은 편인 상현은 앓고 난 뒤라서
그랬던지 얼굴빛이 노오랬다. 좋지 않은 안색이었다.
"난 틀렸어. 죽을 용기도 없는 놈이라구. 값싼 동정심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거든."
"자학하는 게 바로 자네 병일세."
들은 척 만 척 상현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아주머니! 아주머니!"
신경질적으로 불러댄다.
"네 가요오."
하숙집 여자가 신발을 끌며 다가오자 뭔가 귓속말을 하더니 방문을
닫는다.
"요즘 선우일이 자넨 물산장려운동인가 뭔가 때문에 상당히 바쁜 모양
아니야?"
순간 선우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성삼대는 상현을 흘깃 쳐다본다.
"왜? 그 일 땜에 바쁘면 안 되겠나?"
시작부터 흥분한다.
"안 된다는 말 안했다. 덕분에 황태수 같은 사람 돈벌게 됐다는 얘기는
할 수 있겠지."
"자네도 공산당이야?"
"민족 전체가 호응하는 운동을 공산당만이 반대하니까 하는 말일세."
"흥부나지 말게. 공산당이라고 다 반대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반대하진
안았다구. 고무공장 설립에 열올리는 황태수형이 부자 되겠다는 얘기,
그것뿐이야."
"그러면 태수형이 그 운동을 이용한다, 그 말인가? 왜들 이러지? 왜들
이러느냐 말이야. 모두 삐딱하니,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픈 상판들 하구서,
그러니 조선놈들 될 일도 안 되는 게야."
"절에 가라니 마라니, 불쾌해서 그런다 왜! 값싼 동정보다 훨씬 더 값싼
인간이지말 말이야, 나 비럭질은 안 해!"
"공과 사를 혼동하니까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야. 어째서 이
운동을 몇몇 기업가를 살찌우는 운동으로 보느냐 말이다."
"결과가 그렇다면 그런 말 들어도 별수없지. 아무튼 팔방미인
황태수보다 찧고 볶고,ㅡ 천하 망나니 서의돈 쪽이 내게는 매력이 있어."
"서의돈? 흥! 그 사람 공산당이야. 맹랑한 소릴 하고 다니더군."
눈살을 찌뿌리며 선우일은 씹어뱉듯 말했다.
"공산당이면 어떻고 사회주의면 어때?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거야 팔자
좋은 사람들의 일, 양반놈들 백정하고도 야합하는 세상인걸. 하지만
말이야, 의돈형은 무정부주의자지 공산당은 아니다."
"백 보 오십 보 아닌가."
"이 친구 자본가 다 됐군."
"오핸 말게, 내 근본은 알다시피 응시 자격이 없었던 조상의 후손이고
보면 양본놈들 백정하고 야합했다하여 혐오감을 느낄 까닭이 있겠나."
"흥, 백정하고 쌈질하는 놈들은 농청놈이더군 그래."
모멸의 웃음을 띤다.
"나는 남의 얘길 하는 게 아니야. 내 얘기란 마일세. 내가 공산당 아니라
하여 무산계급을 옹호하고 나서는 공산당을 송충이 보듯할 하 등의 이유도
없지. 다만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나서는 일만은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반대하는 놈들은 다아 총독부하고 붙어먹은 놈이다! 그렇게 말하겠어."
"나는 자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네." 처음 농담 몇 마디 하고는
뭔지 모르게 우울한 얼굴로 듣기만 하던 성삼대가 말했다.
"어째서!"
선우일은 날카롭게 반문한다.
"특히 의돈형님이 반대하는 이유 중에는 타당한 것이 있어."
"타당한 것이 있다? 천만에! 민족 분열 운운하는 서의돈이야말로 민족의
대동단결을 저해하는 해독분자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겠다 어떠한
이론으로도 반대의 이유는 못되는 게야!"
핏대를 세운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왜 그리 감정적으로 몰고 가누. 도무지
자네답지가 않단 말이야."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자네 말마따나
경제를 한 나야. 뭐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하여 반대하는
놈들, 별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삼일 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거도 아니라구. 새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야. 길가에
쫓겨나 앉아서 집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선우일은 자제심을 잃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건 정설이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고, 삼일운동 하곤
성격이 다르지만 우리 민족을 동원할 수 있는 활력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순 없지. 허나 불길이 지나간 뒤에 솟아날 것을 일단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의돈형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도 자네 의견과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표면으론 일치하는 것 같지만 의돈형님은 심층을 찌르고 있고
이곳 좌파들은 일반론을 펴고 있단 말이야. 어느 곳에 가져가도
적ㅇ요되는 이론 말이야. 의돈형님은 동경서 지진을 겪으면서 목격한
현실을 토대로하여 이 운동의 성격과 결과에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독부의 속셈이야. 문화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소극성을 띤
방해의 방습이란 말이야. 아까 자네는 중국식 인도식 오라가왈부하는 것이
우습다 했는데, 총독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인도식일 게야.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지금 조선에서 불고 있는 근대화 바람이란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으며 지식인들의 구십구 프로가 계몽주의거든. 그게
먹혀들어가고 있는 게야. 물산장려운동만 하더라도 근대화라는 용어는
아주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것도 적당한 시기에 불을
꺼야 한다는 총독부의 심산이라면 뭘 의미 하는 걸까? 미구에 올 사회주의
혼란기를 대비하는 일환이라 본다면 비약일까?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사실이 그렇다구.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을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 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 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 자본가의 방패가 되는 동시
민족 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
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건 무산계급 쪽에서
서서 한 말은 아니었어. 착취하는 데 일본놈 조선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중국이 러시아를 업고 공산화되는 것을
누구니 누구니 해도 젤 무서워하는 것은 아마 일본일걸?"
마침 술상이 들어왔다. 선우일이 반론을 제기할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병문안 온 처지에 술상을 받아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너 미쳤어?"
성삼대가 소리를 질렀다. 하숙집 여자는 쓴 웃음을 띠며 술상을 놔두고
급히 나가버린다.
"다 나았다고 했잖아. 나가기 싫어서 누워 있는 거라구."
"그러면 이 술 자네도 마시겠다 그 얘긴가?"
선우일이 묻는다. 상현은 피시시 웃으며,
"조금은 마실 수 있겠지."
"구제받을 수 없는 사내로군."
"구제는 자네들 같은 애국자나 받아라. 지금 내게는 이 술만이
구세주야."
상현을 술상을 질질 끌어당겨 술잔에 술을 친다.
" 별수 없다. 제 몸 제가 아껴야지 남이 어떻게 해. 괜찮다는 말 믿기로
하고, 아닌게 아니라 맨입으로 지껄였더니 입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마시자."
성삼대가 술을 들이켠다. 두 사라도 따라 술잔을 든다.
"의돈형님 동경에 있었던가?"
상현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응, 이십 일이 넘었나? 신이놈하고 함께 왔다더군."
"지진을 겪었단 말이지?"
"음,"
"몸뚱이가 작아서 숨기엔 좋았겠다."
"상현이 어쩌고 있느냐고 묻더군."
"중국에 있는 줄 알았지. 태수형이 쓰디쓰겠다."
"숨바꼭질이지, 서로가."
성삼대가 말이었다.
"안 만났단 말인가?"
"음, 욕을 해쌌더마는 임명빈 씨는 만난 모양이더군."
"임명빈 씨..."
"그야 앞뒷집인데 안 만날 수 있어?"
선우일의 말이다.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뭐가,"
마땅찮은 것을 삭이려고 애를 쓰며 선우일은 성삼대에게 반문했다.
"의돈형님 말이야."
"왜."
"이곳저곳 분주히 나다니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네."
"걱정 마라. 잡아가진 않아. 물산장려운동의 반대잔데 무슨 걱정인고?"
"지랄한다."
"날보고 황태수 사냥개라 하더군."
"들어 싸지. 너무 두둔하고 다니더라니,"
"길게 그런다면 늑대가 될까 부다. 어디 일자리 없어서 태수형님을 돕는
줄 아나?"
"일자리 없을 턱이 있나. 경제학 학사신데, 은행에 들어가면 장차의
두치감이요 전문학교 교수 자린들 어려울 것 없지. 뼈빠지게 일 하고서
장사꾼 시녀 노릇 한다는 소리 듣는 건 확실히 억울한 노릇이야."
성삼대는 약을 올린다.
"자네 생각을 해서 참아야지. 나보다 억울한 자네 말이야."
"가만있자, 내가 남한테 돈 빌려주고 못 받은 일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장사꾼 시녀지만 자넨 안사람 시녀란 말일세."
순간 성삼대의 얼굴이 구겨진다. 큰소리는 쳤지만 병 후 처음 마신 술은
고통스러웠다. 비스듬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상현이 선우일에게
눈짓을 한다. 어지간히 약이 올랐던 선우일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렇군 그래."
성삼대는 헛웃음을 웃었다. 너무했나 싶었던지 선우일이 당황한다.
성삼대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은 친구들간에 유명했다. 부모가 시킨
결혼이었지만 성삼대는 혼전에 여학교를 다니던 차만소녀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삼대로선 만족한 마음으로 신붕를 맞이했던 것이다.
온순하고 소극적이며 여학교를 나왔어도 구식의 사고 방식에서 헤어나질
못한 여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며 안 살고 가겠다는 용단도 내리지
못하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남편을 싫어하는 것이다. 계집아이를 하나 낳은
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남자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청산 못하는 것은 성삼대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 피차를 위해 비극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인내이기도
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사는 여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사랑이 없는
여자를 옆에 두어야 살 수 있는 남자의 경우도. 언젠가 선우일과 상현은
폭음을 하고 우는 성삼대를 본 일이 있다.
"역시 좀 무린 것 같군."
상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쥔다.
"당연하지. 이제 마시지 마. 내가 대신 처분하겠다."
성삼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비애와 분노를 짓씹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의돈형님은 일본에 뭣 하러 갔을까?"
머리를 싸쥔 채 상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제를 돌려보려는
노력이었다.
"목적없이 갔을 리가 없지."
선우일이 덤비듯 말꼬리를 잡았다. 성삼대에게 깊이 상처를 주었을
자신의 말이 무산되기를 바란 나머지 서둘렀던 것이다.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글세... 뭔지 심상찮은 것은, 박열이 지난 시월에 체포되었거든."
"그래서?"
"그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아니키스트 박열."
"아지가 무슨 소릴 하려는 게야? 의돈형님은 아직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무정부주의자란 말을 한 일이 없어. 함부로 어디 가서 그 따위
소리 지껄였다간,"
성삼대는 의혹 자체를 휘저어버리듯 강한 어세로 말했다. 무정부주의자
박열 박열을 두고 말할 것 같으면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경성제이고보에서
퇴학을 당했고 지식청년들에게 매혹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의 일이다. 비밀 결사 흑도회에 가입, 일녀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거사 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 작년 시월이었다. 공산주의와 상충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무정부주의가 독립운동과는 계열이 다른 것은 물론, 상당한
조직과 위 을 내포하고 있는 일본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토양으로 한
박열의 거사 계획을 두고 만주, 중국을 떠돌던 서의돈을 연관시켜보는
것은 사실 모호한 얘기였다. 또 서의돈을 아나키스트로 단정하는 것도
분명찮은 일이긴 했다. 성삼대가 강력히 부인하는 것은 그런 판단에 의한
것이기보다 천황 암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 그 사건이 지닌 무게
때문에 서의돈 신변을 근심했던 것이다. 선우일도 평상시 같으면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을 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선우일 말에 성삼대는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든다.
"사상을 입에 올리지 않고는 앞으로 지식인 대접 못 받을걸. 흥!"
상현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럴 게야. 노령에서 불어오는 공산주의 바람, 일본서 불어오는 무정부,
사회주의 바람, 맞불어젖히니 말씀이야. 불어오는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바람맞이를 할 여건도 조성되어가고 있으니, 근간에 와서만 해도
소작쟁의가 전남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일어났고 백정들의 형평운동또한
전국적으로 번질 기세, 특히 일본 니이가타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백 명
가까이 학살한 사건, 동경진재 때도 그러하였고."
"새로운 단체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솟아오르고."
상현은 관심없다는 듯 말하고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는다.
"자금도 많이 흘러들어왔지. 이동휘를 통해서 말이야. 모스크바의 돈은
중국공산당, 일본 좌익 단체에까지 미쳤으니, 국내만 하더라도 흘러들어온
자금 때문에 말썽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단시일내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도 돈의 위력이 컸었다는 얘길게야. 조직이란
주둥이나 손발 가지고 되는 건 아니거든."
선우일은 돈의 위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했다. 상현이 이어,
"그 이동휘도 이제는 숨통이 막혀버린 것 아닐까? 작년에
이르코츠크파가 조선공화국이라는 것을 조직했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놈이 먹고,"
"이동휘는 이미 흑하사변때 간 사람이고 꽤 일은 많이 했는데 결국
이르크츠파가 승리한 것은 텃세가 주효한 것 아니겠어?"
"텃세나 재주가 어디 있어? 승리는 또 어디 있고? 조선독립군이 주축이
되 원동혁명군의 편성을 두려워한 일본의 입김이 흑하사변으로 몰고 간
게야. 이르크츠파의 중상 모략, 자금 약탈, 사할린 군대의 이탈 같은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야."
성삼대가 매듭짓듯 말했다.
이르크츠파란 1921년 6월 비참했던 흑하사변으로하여 사람들 귀에 익은
명칭이다. 귀화인이 중심되어 조직된 러시아내의 조선공산당인데, 성품이
강건하고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발엘리야가 이끄는 사할린 부대, 저 유명한
1920년 겨울 니항사건때 적군계 빨치산과 합세하여 니항을 습격하여
일인을 전멸시켜버린 사할린 부대하고는 다 같이 귀화인으로 조직되었어도
앙숙이며, 이동휘가 장악한 상해파하고도 심각하게 대립해온 터이다.
흑하사변을 말할 것 같으면 그 배경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요인에 대한
관점도 구구하지만, 러시아 형명에 성공한 레닌이 장차있을 중국과 일본의
적화를 염두에 두고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조선독립군을 모두 흡수하여
소위 '인터내셔널 오트랴드'를 편성하는데 조선, 중국, 일본, 몽고 등의
혁명적 청년들을 참가시켜 전초병을 훈련하자는 것이었다. 당면 목적은
대일전쟁이었으니 만주 일대에 흩어져서 일군 토벌대에 쫓겨야 하는
독립군이 노령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했고, 일찍이 막대한 자금을 받아
상해에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국내와 일본, 중국에까지 손을 뻗쳤던
이동휘가, 전적으로 독립군을 받아들일 것이며 보다 강력한 군대로
훈련시키겠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약속을 믿고 독립군의 노령행을 독려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자유시에 군대를 집결해놓고 진작부터 꼬릴르 물고
오던 상해파와 이르크츠파사이에 주도권 쟁탈의 불이 붙은 것이다.
살기등등한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고려공산당대회를 열자는 결정을
보았는데, 대회 참가 대표에 관한 심사에서 이르크츠파의 일방적 심사,
이동휘와 노백린의 대회 참가 거부 등, 결국 대회에서 상해파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몰고온 각 군대들에 대한 실권마저 잃게 된 것이다. 반발한
사하린 부대가 이탈을 선동하고 집결한 독립군이 동요하고,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정세가 변해버린 러시아 혀명정부는 이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무장 해제에 앞장선 것이 이르크츠파의 사할린 부대와는
앙숙인 자유대대였으니 피비린내나는 참극은 결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쌍방간의 총격전에서 사할린 부대는 대부분 살상대고 말았다. 무장
해제를 하는 쪽이 승리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박엘리야, 그밖에
혼성부대의 인솔자는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일전쟁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또 그것은 조선
독립사상의 일대 오욕이었으며 약소민족의 피눈물나는 비극이기도 했다.
"이동휘가 왜 당했을까? 왜 실패했을까...:
"자네 부친 생각을 하나?"
선우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현은 그 말 대꾸는 아니 한다.
다시 선우일은
"글세 이동휘가 당한 원인... 무골의 로맨티스트, 한말의 그림자가 감도는
로맨티스트의 당연한 결말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일리일교의
계몽주의자이기도 했었지. 아무튼 의병의 마지막 흐름이 이제 산송장이 된
게야."
순간 상현의 얼굴에 그간 찾아볼 수 없었던 분노의 빛이 떠오른다. 역시
부친 이동진으 ㅣ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독립투사들 중에서 이동휘만큼 변신을 거듭한 사람도 드물 게야.
아전의 아들로 태어나서 궁전진위대장, 참령에 까지, 기독교의 전도사가 된
일도 있었고, 교육 사업에 정열을 쏟았는가 하면 상해 임정을 요리하였고,
또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기구하다면 참 기구한 생애 아니겠나."
성삼대는 주전자를 들어보다가 빈 것을 알고 술상에서 물러나 앉는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변절자라 할 수는 없어. 독립투쟁의 신념만은
투철했으니까. 그런 민족적인 의식 때문에 패배했다 할 수도 있을게야.
민족자본주의자니, 기회주의자니 하고 욕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인데, 과연
이동휘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그 많은 자금을
받아냈을지 의문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패장에 대한 찬송가는 그만 하고,"
성삼대는 얘기를 계속하려는 선우일을 툭 치며 일어섰다.
"몸조리 잘하게. 술 마실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성삼대는 모자를 눌러쓰며 나갔고, 선우일은
"절에 가는 것, 생각이 있거든 알려주게, 태수형님의 호의를 삐두름하게
생각하지만 말고. 그럼 가네."
그들이 돌아간 후 상현은 쭈그리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벌떡 일어섰다. 목도리를 두르고 자리옷으로 입었던 한복 우이에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뒤 휭하니 하숙을 나섰다. 뒤에서 하숙집
여자가 뭐라 하는 말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무턱대고 걷다가
상현은 얼굴을 들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해거름이었다.
'하여간 걸어보자. 아직 안 왔으면 기다리는 거구.'
그는 임명빈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쩌면 서의돈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왜 가는지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선 길이다.
산호주의 마지막 말이 바늘끝처럼 심장을 계속 찔러댔으며 목덜미에
스며드는 바람이맵고 차가운데 어쩐지 몸이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
상쾌한 것을 느낀다. 무슨 까닭일까. 새로운 천지가 저만큼 서서 손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것도 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왜 오늘 갑자기 부친의 죽음이 그처럼 뼈에 사무치게
슬퍼했더란 말인가. 춥고 뼈를 깎는 듯한 만주 벌판의 바람과 끝없이
번들거리는 노령 빙판이 어찌 그리 가깝게 가슴에 와닿았는가. 생전의
부친은 상현에게 천근 같은 납덩어리의 무게였었다. 죽은 후 오늘까지의
부친은 상현에게 회한이요 죄의식의 고통이었다. 그 무지무지하게
고통스러웠고 무거웠던 구각을 오늘 돌연히 벗어던진 것은 홀연히 찾아온
기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구, 이거 몇 해 만이지요?"
임명빈의 처 백씨가 놀란다.
"선생님 돌아오셨습니까?"
"곧 돌아오실 거요. 어서, 사랑에 드시오."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신지,"
"차도가 있을 리 없지요. 지금 잠드셨어요."
"네, 제가 여기 온 지 한 삼 년 되겠지요?"
상현은 쑥스럽게 웃는다.
"그렇게 됐을 거요. 이선생도 얼굴이 많이 달라졌군요."
"저야 뭐, 사모님께서는 오랫동안 병간호에 수고가 많겠습니다."
"어느 집이나 노인을 뫼시면 으레 그렇지요."
상현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는 사랑, 명빈의 서재로 들어갔다.
반신불수가 된 노인, 출가한 명희,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지난일들이
뿌듯하게 가슴에 치민다. 임명빈은 조병모가 설립한 영화중학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인편을 통해서 학교에 오지 않겠는냐는 전갈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때 상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차르
끓여 왔다.
"명희아씨는 친정에 더러 오시느냐?"
"가끔 오세요."
아이가 나가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산호주의 말을 생각한다. 고개를
젓는다. 명희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과 성삼대의 괴로워하던 얼굴을
생각한다. 성삼대의 아내와 명희의 경우, 그 성품도 비슷한 점이
깨달아진다.
'최서희는 다르지. 어느 여자 어느 사내보다 그의 삶은 강렬하다.'
"상현이 왔다구?"
문 밖에서 들려운 음성이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이 사람아, 안 죽고 살아 있었구먼."
사십이 다 된 임명빈은 옛날과는 퍽 달랐다. 교육자 특유의 안정감을
풍겨주었고 나이보다 늙은 것 같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잘 왔어, 잘 와. 앉으라구."
명빈은 고수머리의 큰 두상에서 모자를 벗어 걸고 외투도 벗어걸고
자리에 앉는다.
"그새 많이 늙어습니다. 교장 선생님 다 됐군요."
"별수 있겠나? 나같이 능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님 말씀대로야."
서글프고 좀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글쓰는 놈들이라고 별수 있습니까? 저같이 성격파탄자 아니면
허풍꾼들이 아니겠습니까?"
임명빈은 지난날을 생각하는가, 어쩌면 명희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상현을 바라본다. 상현의 근황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폐렴을 앓아 죽을 뻔했던 소식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매부 되기를 원해던 사내, 차림새와 얼굴이 다 피폐할 대로 피폐한 것
같은데 눈빛은 맑다.
"요즘도 술 하나?"
"얼마 동안 못했습니다."
아팠다는 얘기는 안 한다.
"그럼 나하고 술이나 하세. 놀다가 천천히 가아."
순간 명빈의 얼굴에 외로움이 스쳐간다.
"선생님, 술 늘었습니까?"
"별로, 조금씩 하지만,"
"저도 오늘은 많이못합니다."
"그래? 그건 환영할 일이다. 신문사에 나가나?"
"때려치웠습니다."
"그렇담 글 많이 써야겠지."
"글쎄요."
"내게 자네만큼 재질이 있었다면 결코 훈장은 안 됐을 게야."
"무의미한 일입니다. 의의가 없어요. 그보다 의돈형님을 만나셨다구요."
"음."
"댁에 계실까요?"
"아마 없을걸. 어쩌다 한 번씩 오기는 오는 모양이지만. 자네 아직 못
만나보았나?"
"네."
"꼭 만나봐야 할 일이라도 있는가?"
"의돈형님 따라가려고 생각했습니다."
"뭐?"
놀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른안주에 따듯하게 데운 정종, 술상이
들어왔다. 상현은 명빈의 술잔에 술을 붓고 명빈은 주전자를 받아 상현의
술잔에다 술을 채운다.
"깊이 생각해보았나?"
"..."
"즉흥적으론 안 돼."
"이 문제는.... 제가 노령에서 돌아온 그때부터 마음에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가겠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마는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이해할 만하다구."
"솔직히 말해서 가겠다는 생각은 돌발적인 것입니다. 가서 뭘 하겠다는
작정도아직 하지 않았고,"
"의돈이하고 자넨 맞지 않을 텐데... 감정 문제를 말하는 건 아니라구."
"압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명빈은 술을 마신다. 상현이
문학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 있다는 불만은 늘 있었던 것이지만
재질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은 떠나겠다는는 마당에서도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묘하게 질투 같은 감정, 자기 혼자만 동그마니 남는 것 같은
외로움,사돈댁 그늘에 덮여서 사는 비굴감, 그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ㅅ어나온다. 그런 명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는 상현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같은 해방의 환희가 스쳐가곤 하는 것이다.
'이젠 도망간다. 도망치는 게야.'
"세월이 빨라."
"네?"
"진주 최여사 큰아들이 중학에 들게 됐으니."
상현의 낯빛이 순간 달라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길상을 생각한
것이다.
"선생님 학교로 옵니까?"
"명문도 아닌데 우리 학교에 오겠나? 다만 서울서 공부하는 동안
우리집에 맡겼으면 하는 의사를 비췄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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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3부/2권/3편) 4장 노령의 빙판
黎明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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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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