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점선뎐을 다시 펼쳤다. 2009년 3월 초판 2쇄다.
모서리를 접고 줄친 부분도 있다. 스토리 위주이기때문에 읽으며 생각이 난다. 이 책에 없는 스토리까지 떠오른다. 별난 여자, 아니 여자이기를 거부한 자유인 김점선.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결정하며,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갔다. 이때 '자뻑'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이렇게 용감하고 솔직하고 맹렬한 사람은 없다.
예전처럼 밑줄을 긋는 대신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었다.
이 치열한 자유혼이 내게 전염되기를.
언니가 가꾼 풍성한 꽃밭의 꽃색깔보다 자신이 가꾼 엉성한 꽃밭의 꽃이 짙은 붉은 색으로 이뻤다. 처음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한다. 다섯 살때 기억을 이렇게 풀어낸다. 싹부터 달랐던 김점선이다.
* 그 후부터 나는 늘 비밀리에 자뻑했다. 그러면서 내색 안 하고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래서 채송화는 내 이생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내 자부심, 나의 첫 번째 승리, 만족,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인간의 상징, 굶으면서 심고 가꾼 꽃, 굶어 죽어가면서도 아름다움에서 환희를 느끼는 인간의 본능을, 현실을 초월해서 자부심을 갖게 해준 꽃, 건강이나 번식, 번영을 밀어젖히고 선택한 짙은 색채. 심미주의적인, 예술지상주의적인 의식이, 이런 복합적이고도 다면적인 정신작용이 다섯 살의 어린 인간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체험적 사례다. (34쪽)
말 위에서 죽다. 그를 잘 나타내는 좋은 수필이다.
* 전시회를 자축하는 모임이 선배네 화실에서 성대하게 벌어졌다.
흥이 무르익을 무렵, 낯선 청년 하나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노래를 두세 소절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하는 감이 왔다.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사람을 난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감성의 소유자였다... .
....
드디어 첫 번째 노래가 끝났다. 순간 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결혼하자, 나하고 결혼하자!"
그러자 그도 나만큼 큰 소리로 즉각 외쳐댔다.
"좋다!"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소리 지르고 웃고 난리가 났다. 축배를 들고 함께 소리소리 지르면서 축가를 부르고... .
현장에서 청혼하고 그날 밤 가장 가까운 여인숙에서 같이 잤다. 그 후 20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 청년의 성이 김가라는 것은 자고 나서 일주일쯤 후에 알았다. 나이가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그래도 그가 가난하고 집도 절도 없다는 것은 자기 직전에 알았다. 그 사실 만으로 그는 내가 찾던 나의 동반자인 것이다. 결혼하고 그림 그리며 살았다. 당연히 굶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135쪽)
* 나는 내 아이가 마음이 아주 넓고 부드러우며 환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 군고구마 장수 아주머니처럼 그렇게 웃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추운 겨울밤, 누군가가 입다가 버린 구멍난 나일론 치마, 이불감보다 더 찬란한 원색의 꽃들이 그려진 여름 치마를 임부복이라고 떨쳐 입고 고구마통 옆으로 다가서는 그 하찮은 모습의 여자에게도 따뜻하게 웃어주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156쪽)
* 나는 무언가를 많이 읽어대는 사람이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만큼 읽어대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런데 암이라는 화두가 우리의 생활 속에 던져지고부터 나는 읽기를 그쳤다. 읽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읽는다는 건 외부의 자극을 내 골속에 넣는 행위인데 이제 외부로부터는 그 어떠 것도 필요치 않았다. 내부가 팽창해서 스스로 넘쳐흘렀다. (194쪽)
* 내가 만난 변종화 화백
예술가는 개안을 위해 많은 경험을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개안을 하고 나서는 다시 욕심을 버리고 멍청해져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257쪽)
* 나의 유언장
나는 너무나 엄정하게 아들을 대했기 때문에 특별한 유언장이 없다.
줄기차게 칭찬, 숭배, 예찬 일변도로 대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개선된, 진화된 생명체로 태어난 미래의 인간으로서 숭배했다.
....
나의 아들은 기억 속에 나를 종종 추억하면서 웃기만 하면 된다.
(381쪽)
첫댓글 예술가 다운 개성만점.
성품이네요.
김점선 그녀는 온전히 마음으로 사는 멋진 예술가네요.
어제 백중기도 6재가 있어서 절에 갔는데
노 스님 법문을 하시면서 마음이 무엇이냐고 묻더라고요. ..............모두 묵묵부답이었지요.
모든 물질을 빼면 마음만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물질은 소리, 냄새, 색깔, 감촉 모든 지수화풍이 물질이라면
마음은 느낌, 생각, 기억, 상상, 접촉 이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마음은 없다고......
선배님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점선 작가가 자꾸만 좋아지네요.
나와 다른 훌륭한 분이라 나는 그리 될 수 없고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