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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새로운 만남
2018년 무술년,개해에 아빠의 행복이 오련가?
40년전 1978년1월 매서운 추운 겨울,
필자는 어린 두딸을 데리고 제주항부두에서
부산항으로 떠나는 연락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필자는 7년전인 1971. 3.11 육군보병7사단에서 전역신고를 긑내고
수색의 예비사단에서 전역교육을 마친후 제주도에
정착하여 신민당 제주도지부 김 욱위원장의 요청하여
도당 선전부차장으로 4월에 실시하는 대통령선거유세반장에 위촉되어
"김대중후보를 당선을 위해 20대 젊은혈기와 직설적인 웅변으로
마지막 제주북초등학교 유세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면서
김대중후보 대세론으로 새로운 선거분위기를 이어 갔습니다.
그러나 선거패배후 유진산 주동의 당내파동으로 제주도당이 분열되어
필자는 정치적인 야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각오로
예비군 중심의 청년조직을 활성화하기로 "용진청년회"를 창립하여
지역발전을 위해 용진교건설,우범지역 정화운동,산지천환경개선사업 등
2년동안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필자는 정당생활을 잠시 뒤로 미룬채 청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결과
제주시 5개지역(건입,1도동,2도동,3도동,용담동)에 청년회조직을 확장시켰습니다.
배타적이고 텃세가 심한 지역 몽리민들은 외지인 출신이지만 나를 신뢰하여
젊은 나를 지역일꾼인"건입동새마을지도자"로 추천을 하였습니다.
수원 새마을연수원(원장 김 준,전남 영광출신. 작고)교육을
모범적으로 수료하고,각종 웅변대회(3차례)에서 금상을 수상하여
1974.12.22 ,제주도 대표로 KBS배 전국새마을운동 성공사례발표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3위로 입상하는 저력으로 제주도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山池川 건입동 명예를 대한민국전체는 물론 제주출신 재일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까지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4.3사건으로 도일한 많은 제주도출신 조총련간부들이 모국방문을 할때마다
고향마을회관을 찾아오면 새마을 청년지도자인 필자를 격려해 주곤 하였습니다.
필자는 제2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일념으로 지금의 "신제주"건설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주시 건입동은 제주항부두입구로 동.서부두의 취약지역을 정화하는
도시새마을운동이 필요한 곳입니다.
지금은 확장하여 제주항입구 첫번째 교량인"용진교"도 그 당시에 건설 된 것입니다.
제일먼저 지역주민 30년 숙원사업으로 용진교를 우선적으로 선정하여
동.서부두를 잇는 교량건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량총공사비 3천만원의 절반은 필자가 앞장서서 지역유지들의 모금운동으로 부담하였고
절반은 새마을사업으로 정부에서 지원받아 교량이 완공되자 전국의 우수새마을사업성공사례가
되어 박경원내무부장관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박대통령님의 격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여 유명해 졌지만 필자는 과거의 정당이력때문에
특히 통일사회당(대표 김 철)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한 경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주도는 군사기밀보호란 차원에서 필자가 지역예비군 동 중대조직을
청년회 조직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판단때문에
제주도 육군보안대"한라기업사"의 감시,도청으로 청년회조직을
사사건건 방해와 제지로 좌절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배우 오수미의 백부이신 오사카거주 조총련재력가 윤모회장님이 격려차 청년회에 기부해 주신
금일봉도 제주도 육군보안대에서 공작금운운하며 문제가 제기되어 연행되었지만
건입동청년회의 제주역전마라톤에 출전한 참가 선수들의 경비영수증이
첨부된 사용내역이 증명되어 방면 된 적도 있었습니다.
필자는 "박정희정권은 새마을운동을 내세워 유신정권을 대만총통제로 변질시켜
장기집권하려는 술책"을 직감하고 제주도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제주도 새마을 지도자 5년생활이 아내의 이해부족때문에 가정파탄으로 이어져 이혼하게 되었고
필자는 두 딸을 양육하기로 합의 한후 아내의 행복을 빌면서 엄동설한에 제주도를 떠난 것입니다.
그 후 신장염과 간암으로 투병하던 첫번째 아내는 끝내 회복을 못하고 저승 길로 떠난 것입니다.
필자는 부산에 도착하여 배운 특기가 웅변이라
대한가족계획협회 부산시지부(지부장 정병호박사) 전임강사로 취업 하였습니다.
1978년 봄부터 시작하는 부산시내 4개 예비군교육장에서
가족계획 정관시술권장 명강의로 청년예비군들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부산시가 가족계획사업실적이 전국 꼴지에서 전국1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또한 복강경시술 권장사업도 부산시는 물론 경상남도일대와
울산시 전하동 현대그룹 아파트단지까지 출장하여 대강당에서 주부님들 상대로
명강의 스피치로 하루에 70~80명씩 부산가족계획협회로 유치하여
년간 3천여건의 가족계획 시술실적으로 모범성공사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술과정을 불임시술세계기구에서는 멀리 싱가포르 의사들을 초빙하여
복강경시술 집도과정을 참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산에는 각구,지소 보건소 9곳과 4개의 가족계획센타에
가족계획요원 간호사가 3백명이 넘었습니다.
13개지구 요원들이 실적경쟁으로 서로가"쿠폰"확보 싸움(?)이 한창일때
우리 가족계획지부에서는 복강경난관시술보다는 정관시술쿠폰을
다량으로 확보하고 있어 협조를 잘 해주는 보건소,지소,센타요원들은
덤(?)으로 몇십장씩 쿠폰실적을 배당하여 명강사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때 만난 파독간호사 출신이 현재 광주에서"서독조산소'를 운영하는 아내입니다.
학부 졸업후 5년간 독일간호사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29세의 처녀간호사였습니다.
필자는 33세의 혈기왕성했지만 혹(?)이 둘이나 달린 이혼남으로
재혼할 염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하동출신 광산김씨문중의 둘째 딸로 진주명문의 진주여중고를 졸업하여
부산의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수재였지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해 왔습니다.
물론 아내의 부모님,형제들은 적극 반대했지만 아내의 필사적인(?)구혼과 믿음과 사랑으로
1979년 9월25일에 부산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의 축하속에 제양성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2부: 믿음으로 시작
아내는 독일에서 모아온 거액을 믿음으로 세운 개척교회에
건축헌금으로 은혜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필자와 새생활을 시작한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던
1979년10월18일 필자는 부산민중항쟁배후 피의자로
동래경찰서로 연행,구금되었습니다.
아내는 면회도 안되고 언제 석방될지도 모르는 상항에서
두딸과 어머님을 보살펴 주는 천사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10.26 박정희 사망으로
구금이후 열흘이 지난 28일 면회가 시작되었고
모든 조사가 무협의로 되고 그 동안 불법구금이 문제가 되어
계엄당국은 무조건 구류20일로 정한뒤 11월 6일 풀려 나왔습니다.
짧은 이별이지만 사랑의 정은 더욱 더 깊어져 같습니다.
필자는 조양그룹의 천일고속 관광전세부 간부사원으로 취업이 되었고
아내는 계속 가족계획4센타(에덴공원) 팀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해 6월 나는 더 이상 부산에서 영.호남간 갈등으로
생활환경이 무척 어려워 어머님을 모시고 두딸과 함께
부산을 떠나 광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내는 부산에 홀로 남아 호주재단에서 운영하는 부산 일신부인병원 조산원1년과정을
기숙생활로 수료하여 광주에서 조산소를 개업하기로 약속하고 필자가 먼저 떠나 온 것입니다.
필자는 광주 팔도 전세관광 상무이사로 재직하면서 학단(수학여행)을
인솔하여 경주,설악산,부여,속리산코스를 여행하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아내는 조산원1년과정을 수료하고 조산원면허증을 취득한후
광주운암동 주공아파트 정문앞 건물2층에"서독조산소'를 개업하였습니다.
1982년4월 어느날, 공안당국은 필자를 이모(2007.12월,민정수석)와 연계시켜
전국에 지명수배가 되어 부산시경에서 송정리까지 찾아와 '행방을 찾는다'는
누나의 소식을 듣고 어머님과 두딸을 누나집에 맡겨 둔채로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하여 경기도 성남시로 거처를 옮겨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부 수배생활
성남은 서민들이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수배생활은 직장 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송재각이란 친구가 오리고기 유통사업을 제안 한 것입니다.
필자는 중학동창"오리왕" 나원주회장을 수소문하여 송재각에게 연결되었는데
서울에서 오리고기 유통사업을 시작하자면 시범시식음식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 마침 중학선배(서중29회) 위모선배의 부인이신 왕여사가 오리시식점을
찾고 있던중 먼나 뵙게 되어 강남 영동사거리 근처 3층건물 전체를 통크게(?) 임차하여
"靑童王오리"라는 음식점을 개업하였고 필자는 지배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 7월 2일 아내는 성남시 모 산부인과에서 큰 아들녀석을 출산하였습니다.
그 때 고인이 된 송재각 친구가 선뜻 출산(제왕절개)비 100만원을 지불 해준 것을
펑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하는 사람치고 애향심이 남 다르고,
조국을 떠나 이국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애국심이 더 열렬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동사거리 대로변 4층 옥상에 寶海 간판(15m)에"청동왕오리"라는 글자가 돋 보였습니다.
단골 손님중에는 금호그룹,조양상선그룹,육사11기생중 우수생도11명의 매월11일 저녁6시모임.
광주일고32회동창 매월2일모임등 건물 1,2,3층 음식점에 매일 만원사례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영등포시장에서 6층 건물을 갖고 계시는 이북출신 최사장이
"청동왕오리 2호점을 영등포시장 자기 건물에 개업하겠다."고 찾어 왔습니다.
필자는 진로의 본거지인 영등포에"寶海"간판으로 "청동왕오리 2호점"상호를 내 걸고
영업이 시작하였고 이용식,등 유명연예인이 찾아와 "오리샤브샤브"전골을 즐겨 찾았습니다.
어느날 진로 장모상무가 찾아와 보해간판을 떼어내면 진로 간판을 해주겠다고
필자에게 요구하자 일언지하에'오리고기는 보해30도가 맞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애향심에 밷은 말인데 영등포 본거지 진로회사는 무척 쾌심하게 느겼을 것입니다.
그 후 수배한 이모는 중국집 철가방 배달꾼을 하다가 불심검문에 검거되었고,
필자는 1983년 3월10일 영등포시장 가게에 찾아온 경찰의 신고(진로측?)검문으로 연행되어
수배사건이 행불자 최종 거주지로 이첨된 광주서부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1983년 3월11일부터 3월17일까지 1주일동안 광주서부경찰서에 불법감금되어
국가보안법관련 피의사실을 친인척,지인등 탐문수사와 배후연계조사를 마친후
무협의로 풀려나와 1983년 3월18일 광주 송정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아내는 두딸과 큰 아들을 데리고 다시'서독도산소'를 개업하였고
그해10월 6일 송정리에서 둘째아들도 역시 분만수술(제왕절개)로 태어 났습니다.
나는 송정리 매일시장통입구에서 두 아들의 지능을 위해'장난감가게'를 열었습니다.
4부: 다시 시작한 재야운동
그러나 필자는 1985년2월 동토의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전남제6지구당(나주,광산) 선전부장으로 선거유세를 전담하였고
민한당 이재근의원이 신민당나주,광산지구당위원장이 되자 계속하여 선전부장을 재임명 받았고,
전국농민회(전농)조직,표정두열사추모대회,직선제개헌투쟁 전남.광주지부 총무부장으로
재야활동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7년10월21일에는 "노태우처단 송정리역전 화염병투척사건"에 연루되어 오부동(5월부상자동지회),
민가협회원들,이한열모친 배은심여사와 광산경찰서(서장 고. 김재종총경)에 48시간 구금된 적도 있었습니다.
민정당수뇌부는 투척장면을 선거운동기간 내내 저녁9시 TV뉴스에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영남지역의 민심을 노태우후보쪽으로
유도하는 술수를 내세워 200만표를 이동시켰습니다. 송정리사건은 결국 노태우후보에게 승리를 안겨준 꼴이 되었습니다.
그 후 광산경찰서장은 대선일등공신(?)이 되어 경무관승진후,지안감을 거쳐 경찰대학장인 치안정감까지 고속 승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6.29선언으로 야권 단일후보가 무산되어 김대중후보의 평화민주당 중앙유세단(단장 유준상)의
부단장으로 부산지역 유세 임무를 맡아 김광일,이흥록 변호사 등과 함께 연사로 뛰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선거 막판에 필자는 광주지역의 몰표를 위해 송정리 영광통사거리 유세장에서 오후4시에 김대중래광유세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계속 늦어져 밤8시까지 연단에서 마이크를 놓을수가 없어 무려4시간 동안 수십만 유세군중앞에서 목에서 피가 나올때까지
"호남의 한"을 외치면서 몰표를 던져 주실것을 하소연 하였습니다.
그러나 패자는 말이 없습니다.직선제 개헌 단일후보가 무산되어 3김이 출마한 가운데 선거 패배는 당연한 것이 었습니다.
88년 13대총선 평민당공천후보에서 제외 된 필자는 JP의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광주광산구에 입후보 하여 낙선하였습니다.
1990년1월 민정,통일민주,신민주공화당 3당통합으로 유일하게 광주에서 필자가 지킨 신민주공화당위원장이
민주자유당 지구당위원장을 맡기로 3당합의가 되었으나 신민주공화당 중앙당 사무차장인 김용호(전.유정회국회의원)씨가
밀고 내려와 필자는 집권당 사무국장으로 만족해야 만 하였습니다.
JP는 YS와 3당통합때 합의된 "내각제개헌 약속"이 물거품이 되자 뛰쳐나와 다시 "자유민주연합"이란 정당을 창당하여
필자 역시 자유민주연합으로 15대총선에 입후보했지만 역시 낙선의 아픔을 감내해야 되었습니다.
3번의 낙선으로 자존심 강한 아내는 더 이상 필자에게 기대를 하지 않고
"날품팔이 해서라도 돈이나 벌어서 갖다 주세요."라는 식으로 냉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번 DJP연합정권에 기대를 걸고 마지막 총력을 다해 대선에 승리했으나
DJP연합정권 윗선의 요직(국무위원급)안배는 만족스러웠지만
지구당위원장급 안배(공기업 임원직)에서는 동교동계가 독식하여 JP계열은 공염불(?)이 되었습니다.
필자는 더 이상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내조한 보람이 백수타령이냐?"는 아내의 한탄속에 더 이상 버틸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자본 없이 할수 있는 중국왕복 "보따리소무역"의 길로 나섰습니다.
제5부 중국생활-(1)보따리 소무역
1999년 1월초순 엄동설한에 "신년호 여성잡지 5상자(150권)"를 인천국제여객부두에서 천진탕구항으로 가는
여객선"천인호"에 싣고, 저녁6시 출발하여 2박후 아침8시 도착하는 선박, 무려 26시간만에
중국 천진 탕구항에 도착한 것입니다.
필자는 남이 하지 않는 비즈니스인 "월간잡지 정기구독자모집"이라는 이색 아이템으로 시작했습니다.
책은 무겁지만 매월 한번씩 배달하는 일로, 언어 장벽이 없는 교민들이 하는 미용실,영업장 등을 상대로
정기구독을 위한 영업활동을 하기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서울사직터녈입구에 있는 잡지도매상 "경복서점"에서 정가의 50~70% 가격(사은품 포함)에 운반비를 포함하여
연간 1권당 2,000위안(24만원)을 받으면168,000원이 남아 150권이면 연간2천520만원의 수입이 생겨
한달동안 기본 경비는 충당하고 나머지는 특색있는 히트상품을 선택하여 1주일에 한반씩 운반하면서 판촉하여
대량 주문을 받으면 년간 5천만원~6천만원의 목돈을 마련할수가 있었습니다.
인천항에서 중국으로 출항하는 위해,청도,진황도,연태,단동 등
국제여객선의 따이공"들은 필자를 모른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객선안에서 고주망태로 술 잘 마시고 덕담 잘하고 친절한 만인의 벗이요,아우요,서방(?)이 었습니다.
주문 받은 물건을 따이공 한사람이 운반을 다 못합니다.
예를 들면 미화를 1인당 1만불까지 적법하게 갖고 나갈수가 있습니다.
따이공 30명이 동원되면 30만불 운반이 가능합니다.서로 품앗이 하는 것이 의리입니다.
어떤 따이공은 배추김치,또 어떤 타이공은 소갈비찜,동태찌게,한국소주팩,캔맥주,라면 등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내 놓고 넓은 선실방에 둥그랗게 앉아 오손 도손 이야기하며 또 먹으면서
각자가 갖고 온 신제품 소개와 수익성 등을 자랑하며 상품정보를 교환하면서
인천을 출발하여 중국항구에 도착 할 때까지 서로가 믿고 도우며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중국항구에 해관(세관)을 통과하고 나서 다시 만나 배분한 물건을 서로 교환하고 헤어집니다.
1항차당 100만원 정도 수익이 있어야 한달4주에 4항차 하면 400만원, 경비를 제하면 최하200만원 수입은 가능합니다.
필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때는 따이공들 도움으로 흑진주알 15mm~18mm 30개 정도는 기본으로 갖고 나옵니다.
남대문시장 단골 보석도매상에 넘기면 300만원~5백만원정도의 차익을 남김니다.
중국으로 출발 할 때는 코리아스타킹,코리아나화장품,쿠쿠전기밥솥,석발기,빙수기,정수기,염색약,
어린이 전자손풍금,피리 등 수백가지 제품도 필자가 첫 시제품으로 수출시장을 개척하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 올 때는 흑진주 따이공 운반외 통관 수입품은 주로 OEM식 니트의류를 동대문시장 디자인크럽에서
의류도매상을 영업하는 둘째 딸(지금은 미국 시카코거주)의 가게에게 넘겼습니다.
2002년 11월 첫주에는 겨울 4색오리털파카 6,000벌을 개당 98위안(11,760원)에 구입하여 운반비 세금포함하여 1벌당
18,000원의 원가를 2만원씩 이익을 포함하여 38,000원에 도매를 하였더니 6일만에 품절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1천벌씩 판매 한 것입니다.3층상가에 몰려드는 전국각지의 상인들 주문에 아스라장(?)이 되었습니다.
10월 한달 동안 북경에 40펑아파트 월세를 얻어 통역아줌마와 검품을 꼼꼼이 하면서 1000벌이상 하자가 발견되어
즉시 반품교환도 이행시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동절기 상품 출시에 맞춰 시기적으로 첫 히트였습니다.
그후 동대문 상인들이 너도 나도 중국제품을 구입했지만 거의가 재고품으로 남아 실패했고
유일하게 필자의 딸은 중국정보통(?) 아빠가 상품 출하를 통제하고 있어
갖가지 새로운 디자인 힛트 의류 출시로, 또 한 시기적으로 적시에 출하하는 계절패션으로 준비한
제품은 "딸 옷가게"의 상품구입을 따라 올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딸은 첫번째 이익 1억2천만원중 절반인 50% 6천만원을 필자의 아내에게 전달하여
못난 아빠의 체면을 세워 준 적도 있었습니다.(다음주 다음부분이 계속 됩니다.)
끝부분: 아내에게 자유를!
2014년 7월 어느날,
아내는 "35년 넘게 당신과 살아오면서, 낙선 세번 뒷바라지에 청춘은 할매가 되었소!"
한탄을 하며"남은 여생, 자유를!"외치면서 두 아들과 함께 내 곁을 떠나 갔습니다.
생이별의 아픔과 노년의 외로움이,
날마다 이유없는 술이요,신세타령입니다.
그러나 죽기전에 명예를 회복하여,
언젠가는 미국으로 이민간 딸,사위,외손자녀석들,
그리고 4년전에 떠난 두 아들과 마누라도
양재동 두칸방에서 만나 볼수 있을련지!!!
-"忠과 孝는 같이 이룰수 없다."는 고인이 된 친구의 충고를 생각하면서 이 밤을 세웁니다.-
[위 글은 필자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는 글 내용의 일부입니다.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