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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작품방 스크랩 김경훈 제주4.3순례시집 `까마귀가 전하는 말`
김창집 추천 0 조회 167 18.03.05 19: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까마귀가 전하는 말

   -제주43평화공원에서

 

1

 

그해 겨울엔 저리

눈보라 주둔군처럼 휘날렸네

 

낙엽처럼 아픈 사연들 무수히 지고

속절없이 억새는 제 몸 뒤척였네

 

쫓기듯 암담한 세상

아득한 절망의 끝자락

 

어디로든 길이 막혀

앞일을 가늠할 수 없었네

 

그렇게 그해 겨울엔

몸 녹일 온기 하나 없었네

 

 

2

 

온통 언 땅 속에서도

생명의 봄은 있었네

 

억새도 갈옷 벗어

연두빛 봄맞이 하고

 

이름 없는 무덤들

고운 잔디옷 저리 푸르네

 

맺힌 원정 앙금 풀어

봄바람 속 가벼이 흐르니

 

솟아오른 마음이 영을 달래듯

그렇게 무리 지어 목놓아 우네

 

 

 

평화에 대하여

    -4.28 구억국민학교에서

 

  그날 평화가 있었다고 한다 평화를 위한 협상이 있었다고 한다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협상이 있었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태해결을 위한 평화 협상의 제스처가 있었다고 한다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 그런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채찍이냐 당근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협상의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는 파괴로 가는 길목의 어느 작은 정거장 정도였다고 한다 그냥 지나쳐버려도 무방한 무임승차가 배제된 그런 작은 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화란 미국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어떤 미세한 위협도 차단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런 텅빈 상태를 만들기 위해 무력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제압이라는 것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완벽하게 말살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식민지 조선의 작은 귀퉁이 제주섬에서의 1948년의 평화란 아예 멸종 상태의 정적과 침묵 그리하여 그 존재자체가 아주 무의미할 정도의 그런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평화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평화란 파괴이자 전쟁이라고 한다 평화의 과정이란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 끌기 전술이라고 한다 세계도처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그 모든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이 평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따위 사실도 알지 못한다면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도 한다 이것이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4.28평화협상의 실체라는 것이라고 한다

   

 

 

조작

   -51, 오라리 방화사건

 

강요배의 4.3연작 중에 조작이라는 그림,

미군들이 공중에서 오라리 방화 현장을 촬영하는데

더 높은 시선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렇다

너희들이 아무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럴싸하게 조작해도

너희를 내려다보는 하늘은 알고 있다

그렇다 고개 아프게 너희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아픈 기억이 각인된 땅은 진실을 알고 있다

 

모진 원한과 증오를 표적처럼 한 몸에 받고도

그리 오래 버틴 놈이 없다는 것을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의 역사는 알고 있다 끝내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분노로 치솟아

너희가 조작되리라는 것을

   

 

 

북촌리에서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성 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발사된 총탄은 어김없이 산 목숨에 꽃혀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

 

시체산피바다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이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 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동복리 팽나무

    -바람타는 나무

 

얼마나 못 볼 걸 보았길래

다래끼 옹이진 가지마다

뒤틀린 역사

허리께쯤 어긋난 채

휘어져버린 하늬바람 앞

횃불처럼 버텨 선

까마귀의 눈 같은

신록의 응시

 

 

 

삼면원혼三面冤魂의 한을 풀다

 

눈물로 적신 모진 세상 지나고

한숨만 흘린 험한 세월 지나서

이제 좀 패와지나 했더니

이제 좀 살만하나 싶더니

 

너른 마당 번개치듯

좁은 마당 벼락치듯

불현듯 무지악마無知惡魔한 총칼에 붙잡혀가니

 

조부님!

아버님!

삼촌님!

형님!

 

마지막 가는 길 잘 있으란 말 뒤로는

아침에 부른 좋은 이름 저녁에 못 부르고

오늘 본 고운 얼굴 내일 다시 못 보았네

 

저 구름은 또 무슨 흉사를 가져오고

저 바람은 또 무슨 흉험을 가져올지

이제나저제나 숨죽이고 마음 졸인

육십년 찬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지만

 

오늘은 반백半白의 유족들이

비로소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역사를 닦고

억울한 원정 맺힌 원한 풀어

고운 이름 좋은 얼굴 목 놓아 다시 부르네

     

 

섯알오름 길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 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연死緣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 막은 섬 귀퉁이 섯알오름

 

하늘과당,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 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식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새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이덕구 산전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

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울음소리 사이로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고

우리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고

우린 여태 시퍼렇게 살아 있노라고

 

 

      * 김경훈 제주4.3순례시집까마귀가 전하는 말(도서출판 각,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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