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숲에서
박지숙
흙을 밟는다.
밤사이 내린 가랑비로 지표면은 축축하고 보드랍다. 나뭇잎 끝에 빗방울 하나 머물러 있다. 나는 젤리처럼 동그란 그것을 톡, 건드렸다. 문득 뒤돌아 매표소 입구를 바라보았다. 노출콘크리트로 새로 단장한 왕릉 역사박물관의 외벽이 보인다. 그로부터 겨우 이, 삼 미터의 거리만큼 멀러졌을 뿐인데 이곳은 벌써 숲이다. 꿈이 아니다 나는 지금 숲 속에 서 있다.
수려한 나무는 허공에 잎들을 뿌려놓았다. 조밀한 나뭇잎 틈 사이에서 하늘은 조걱보가 되었다. 햇발은 어느새 내 정수리에 위로처럼 꽂혔다.
지난 석 달 가까이 나는 거의 거울을 보지 않았다. 립스틱과 비비크림의 뚜껑을 열어 본 기억이 없다. 화장을 잊은 셈이다. 두 번의 장례식이 있었던 지난 가을과 겨울은 이제 지나간 시간이 되었다. 재빠른 달음박질로 청설모가 나무에서 내려와 나를 말갛게 바라본다. 부실한 꼬리가 퍽 예쁘다. 내가 있는 길까지 건너와 줄 태세다. 안녕.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그는 바로 후다닥 나무 위로 올라가 버렸다. 경솔한 접근을 후회하고 있는데 숲 깊은 곳에서 꿩, 꿩, 장끼의 탄성이 들렸다. 누군가를 호명하는 소리 같다.
어머니는 영원한 이름이었다. 나무 같았던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스물다섯에 조현병을 얻어 지금껏 병상에 있는 언니는 언제나 오롯이 어머니 삶의 몫이었다. 나는 우둔했다. 죽음이라는 미래는 먼 행성에서 관정하는 기록 속의 문서에 불과 했다. 어머니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고 쓰러진 어머니가 가성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병상의 언니를 의식하지 못했다. ‘보호자 분, 좀 내려오셔야 할 것 같아요. 보호자 분, 보호자 분... 팔년 동안 나는 어머니와 언니 두 사람의 보호자로 불렸다.
두 사람은 속초와 음성이라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나를 호출했다. ‘달님, 물 좀 주세요.’ 면회를 가면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언니는 카스테라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의 요양원과 언니가 장기 입원해 있던 복지시설의 병원, 두 기관은 비밀이 많았다. 종종 나는 그 비밀로 인해 끓어오르는 화를 삭힐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싸안고 울었다. 날마다 두 사람에게 카스테라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지막 나날을 내 곁으로 데리고 올 용기가 없었다. 나의 아이는 선천적 자폐를 앓고 있었으니까.
쿵쿵, 대지를 밟는 발걸음이 심장을 울린다. 대동맥은 판막을 열어 혈액을 순환시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기분 좋은 자극이다. 살아서 숲에 오지 못할 줄 알았다. 숲은 먼 꿈이었다. 폐부 깊숙이 심호흡을 한다. 몸은 조용히, 그리고 역동적으로 독한 기운을 끌어올려 뱉어버린다.
왕릉이 있는 숲길은 이차선도로 만큼 시원스럽게 넓다. 중세의 왕들이 제를 지내가 위해 가마를 타고 다녔던 길이다. 길에서 시간의 흠결이 느껴진다. 과거는 흘러갔지만 길의 시간은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길은 영원성의 증표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언니와 걸었던 고향의 하얀 길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을 터였다. 숲길 중앙에 서서 양팔을 벌려 ‘옆으로 나란히’를 해도 한참이나 여백이 남는다. 이번에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올린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임종 때, 어머니와 언니의 몸은 30키로 미만으로 거의 같은 체중이었다. 두 사람은 팔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야위어 갔다. 몹시 더딘 시간이었는데도, 면회 때마다 화인 찍히든 그들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마지막 달에 두 사람의 노가 쪼그라져 있었을 때, 그 작아진 머리를 보고 내가 말했던가. ‘탱탱 볼처럼 작아졌어요.’
눈을 뜨니 눈앞에서 작은 벌레가 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연둣빛 벌레가 의지하고 있는 투명한 줄은 여간 집중해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서 꼬물거리는 그것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사물의 세부를 들여다보듯이 공중에 줄을 유심히 바라본다. 작은 초록벌레는 땅을 일 미터 앞에 놓고 대롱대롱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렸다. 나는 그것의 몸짓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어머니와 언니, 두 사람의 숨쉬기는 희박한 생명이었다. 나는 숲길을 오르다 말고 등 뒤로 손을 뻗어 가방 앞주머니를 더듬거린다. 예외 없이 휴대폰이 없다. 어머니와 언니를 연결해주던 전화기 보호자를 찾은 전화는 긴 시간 끊임없이 울렸다. 아픈 가족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나의 인격과는 별개로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내 영혼 깊숙이 공포라는 적을 투입 시켰다. 나는 때때로 전화기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고 며칠씩 장롱 속에 숨겨두었다. 그런 날, 램프를 켜 둔 것처럼 희부옇게 동터오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서어나무 숲이 보인다. 뿌리부터 갈라진 가지가 매끈하게 수직을 그리고 있다. 어느해 봄에 어머니와 언니를 데리고 왕릉에 온 적이 있다. 따로따로 왔었지, 두 사람을 나란히 데려온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능침까지 올라가보고 싶어서 어린애처럼 나무울타리를 넘으려고 했었다. 언니는 푸른 소나무 그늘 아래서 적송의 몸피를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천지분간 못하고 얼룩말처럼 겅중 풀숲을 뛰어다니는 아이도 아랑곳 않고 돗자리를 폈다. 새벽부터 준비한 도시락을 열었다. 메뉴는 두 통 무두 배추된장국과 김밥이었는데, 어머니는 국이 참 맛있구나, 하셨고. 어니는 김밥 만드느라 힘들었겠네,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이라는 이별을 거부하고 있는 사이 시간은 나를 갉아먹고 있었을까. 볕 좋은 가을날에 언니는 리무진을 타고 화장터로 갔다. 어머니는 그 다음 계절, 눈이 아직 녹지 않았을 때 장례버스를 타고 화장터로 가셨다. 두 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암 선고를 받았다. 의사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안개처럼 퍼진 암세포를 설명하는 동안 암의 ‘선고’가 카프카의 소설 ⌜선고⌟와 어떻게 다를까 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유난히 벤치가 많이 놓여 있다. 나무의자에 앉는다. 내게도 꿈처럼 휴식이 찾아왔다. 암수술을 끝냈다. 마취에서 깨니 천둥벌거숭이 아이가 남편과 함께 서 있었다. 세계로부터 스스로 유리된 저 아이를 지키고 싶다. 남편과 이전보다 더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숲을 걷고 싶다. 그런 바람이 통증과 항암이라는 좁고 깊은 협곡을 통과하게 했다.
생애 주기에서 중년이 갖는 중압감은 크다. 진로문제로 힘겨워하는, 아직은 지켜줘야 할 아이들이 있고 피부 가죽이 나무껍질이 되어버린, 돌봐야 할 노쇠한 부모가 있다. 게다가 다양한 징후를 드러내는 자신의 노화까지 겹친다. 이중 삼중의 스트래스로 중년은 위태롭다. 이즈음의 나는 숲을 자주 찾는다.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오는 눈부신 프리즘, 햇빛을 본다. 나무가 만들어 낸 정정한 냄새를 맡는다. 그러면 숲속 길에서 서성거리다 긴 꼬리를 보이며 덤불숲으로 들어가는 장끼의 깃마저도 손 끝에 만져질 것 같다. 아픈 가족의 보호자로 지내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숲에 오지 않았다. 숲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숲은 보이지 않았다. 숲은 없었다. 숲에 대한 소문은 꿈에 불과했다.
인간을 옥죄어오는 삶에 대한 공포는 끝없는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는 어머니와 언니, 아이라는 질병과 장애엣 자유롭지 못했다. 늘, 그 순간만을 모면하려 애썼다. 어머니와 언니가 떠나는 그들을 배웅할 줄 몰랐다. 그들이 살아나기를 부질없는 회복만을 꿈꾸었다. 이별을 준비하지 않았고 미련 할 만큼 죽음에 대해 무지했다. 힘겹다, 도로하면서 두 사람을 영원히 붙잡고 싶은 바램을 버리지 못했다. ‘현재를 잡으라’는 라틴어를 외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 생각난다. 좋아하는 귤을 까서 입 안에 넣어주면 어머니는 씹지도 않고 너무 빨리 삼켜버리고 금방 입을 아, 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천천히 먹어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병원 외출증을 끊어 언니와 외식을 하면서, 언니 눈은 진짜 예뻐요. 간호사였을 때 환자들한테 그런 말 많이 들었지요? 하며 칭찬을 했었다. 순간순간 현재라는 시간을 잡고 카르떼 디엠의 마음으로 행복의 벽돌을 쌓았더라면 숲으로의 선망을 꿈꾸었더라면, 나는 죽음이라는 이별을 배웅할 수 있었을까.
숲을 조용히 걷고 있으면 모든 사념이 무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이 중년의 삶에서 욕망이라는 집착을 비우는 숲의 장소를 준비한다. 그곳에는 위험한 멜랑꼬리에 빠지지 않도록 적정기간의 애도에 대한 지침서도 놓여 있을 것이다. 먼 꿈이었던 숲을 빠져나간다. 매표소가 보인다. 그가 흙을 밟기 위해 숲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는 꿈이 아니다. 지금, 현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