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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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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선릉(宣陵)
오대댁손자 추천 0 조회 160 07.08.10 11:3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이 글의 도입부-성종대왕이 승하하고 선릉에 국장행렬이 도착하기 까지

과정은 너무 길어 ‘성종의 국장’ 이란 제목으로 별도로 떼어 냈으나

사진도 없으며 지루하게 여길 듯 하여 필자의 블로그에만 올려 놓았으나

혹시 관심 있으면 다음 주소에 들어가 읽을 것.

 

http://blog.daum.net/robustus/11699982

 

 

지하철 선릉역 북쪽 약 200m 에 선정릉(宣靖陵) 또는 삼릉이 있다.

선정릉은 조선 제 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 (尹氏)의

선릉(宣陵)과 제 11대 중종(中宗)의 (*) 정릉(靖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고

삼릉(三陵)은 경내에 능상(陵上: 민간의 봉분)이 셋 있어 생긴 표현이다.

보기엔 능상(陵上)이 셋이나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 능은 하나의 능-

선릉(宣陵)이니, 삼릉이란 정확한 이름이 아니나 말이 이미 굳어져 있다.

 

 

금천(禁川)

 

속세와 신령(神靈)의 세계를 가르는 냇물-왕릉에 반드시 있는 금천(禁川)을

필자는 70 년대 말 까지 선릉 공원 앞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복개되어 아스팔트 포장 도로와 주차장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표소에 1천원을 내미니 아주머니가 ‘경로(敬老) 아니셔요? ‘ 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가끔 듣는다.

경로같이 보이면 굳이 물을 것 없이 그냥 들여 보내면 좋으련만,

묻는데 거짓말 할 수도 없고.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도 경로 혜택이

이곳 저곳 조금씩 있다. 정작 필자가 그 나이 되면 그거 다 받아 챙길

기운이 남아 있을 지 모르지만.

 

 

선정릉 구글지도

 

안에 들어가면 바로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선릉(宣陵)이 있고

중종의 정릉(靖陵)은 오른 쪽 깊숙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선릉(宣陵)만 다룬다.

 

(*) 정릉(靖陵) : 흔히 부르는 정릉은 성북구 정릉동의 정릉으로

한자가 貞陵이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홍살문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 이라고도 하며 왕릉 또는 주요 관아의 표지다.

 

 

사진: 선릉의 홍살문. 바로 앞 오른쪽 네모난 돌판은 능행(陵幸)온 임금이

절하는 배위(拜位) 또는 판위(板位)다. 홍살문 너머 정자각(丁字閣)까지

죽 벋은 참도(參道)는 좌우 층이 졌으니 왼편 높은 쪽은 선왕의 혼령이

지나는 신도(神道)요, 오른 편 낮은 쪽은 금상(今上)이 걸어 가는 어도(御道)다.

참도(參道)가 끝나는 곳에 있는 정자각(丁字閣)은 지금 공사 중이다.

참도 좌우로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수복방과 수랏간이 있었을 텐데

그 동안 세월에 없어져 버렸다. 조선의 왕릉은 정자각 뒤로 급경사

잔디밭-사초지가 있고 그 위로 능침(陵寢)이 보이는 법인데

선릉에서는 라마다서울 호텔 만 보인다. 이것은 선릉의 합장방식이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이기 때문이다.

 

 

동원이강(同原異岡)

 

조선조에서 왕과  왕비를 합장할 때 같은 곳에 봉분-능상을 나란히 쓰는

쌍릉(雙陵), 또는 아예 한 봉분-능상에 두 분을 같이 모시는 방법이 있다.

선릉은 이와도 달리 같은 지역 Area - 동원(同原)에서, 언덕-강(岡)을 달리

하는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이다. 왕과 왕비의 위치는 사후세계의 법칙대로

우상좌하(右上左下) 다.  (필자의 다른 글 ‘사후엔 좌우가 바뀐다’ 참조)

 

 

 

사진: 선릉의 참도와 능침

우상좌하(右上左下)는 능의 주인공 시각에서 보는 것이니 참배객 쪽에서

보면 왼쪽이 높은 곳으로 공사중인 정자각 왼쪽 소나무 사이로 살짝 보이는

봉분이 성종대왕의 능침(陵寢)이다.

 

  

 

성종대왕의 능침(陵寢)

 

 

 

정 중앙에 능상(陵上)이 있고 그 앞에 혼령이 앉아 쉬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 그 앞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쌍씩이 각각 뒤에 석마(石馬)를

거느리고 있는데, 혼유석과 문인석 그리고 다시 문인석과 무인석 사이는

장대석이 놓여 능침을 세 부분으로 가르고 있다.

 

 

능상과 병풍석

 

 

세조대왕의 명령으로 없어졌던 병풍석이 다시 나타났다.

세조가 병풍석을 없앤 것은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라는 설과

살이 빨리 썩어야 혼백이 분리되어 승천(昇天)하는데 석물이 이에 방해가

되어 없앴다는 풍수에 입각한 설, 두 가지가 있다.

필자 생각에는 둘을 절충하면 될 듯 하니, 대외적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을 구실로 걸어 놓고 속으로는 풍수적 이득도 챙긴 것이 아닐까? 한다.

 

성종의 능에서 병풍석이 다시 나온 것을 어느 왕릉 연구가는

당시 권신들이 왕권에 아부하기 위함이라고 쓰고 있으나… 글쎄..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그 중 묘제(墓制)는

특히 완고하니 옛날과 다르면 뭔가 빠진 듯 하여 다시 나왔을 게다.

 

 

병풍석의 12지신(支神)

 

능상 주위를 12 면으로 나누어 두른 병풍석은 각 12지신(支神)임에

틀림 없으나 어느 것이 어느 동물인지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위 사진은 오(午) 즉 말이라는 데 말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또 위 사진은 어떤 동물인지?

 

 

인석

 

 

병풍석위 능상을 들보 같이 지르고 있는 돌이 인석이다.

인석 끝에 무늬가 새겨져 있으니 왼쪽은 모란, 오른 쪽은 해바라기로

부귀와 다산(多産)의 상징이다.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능상과 곡장 사이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각 2쌍 씩

4쌍 8마리가 담 쪽을 향하고 있다.

 

 

 

위 석양의 꽁무니를 보니 불두덩이 없다. 없는 쪽이 숫놈이란다.

(필자의 다른 글 ‘양의 불두덩’ 참조)

 

 

망주석(望柱石)

 

 

민간에서는 망주석을 곡장(曲薔) 바깥에 세우는 데 왕릉은 곡장 안쪽이다.

 

왜 망주석을 세웠느냐 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혼령이 무덤을 쉽게 찾아 오기 위한 표지라는 설

묘지의 음기를 양기로 조화시키기 위한 음양설 내지 남근설

 

표지설은 (*)덕종(德宗)의 경릉(敬陵-서오릉에 있는 능 중 하나)에는 없는 데

그럼 그 혼은 자기 무덤을 찾아 오지 못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음양설에 의한 양물(陽物)이라면 1,3,5,7,9로 나가는 홀수로 세워야 마땅한데

왜 짝수냐 하는 반론이 있다.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 예종의 형님으로 동궁시절 죽은 의경세자다.

뒤에 그 둘째 아들-성종이 등극하자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追尊)한다.

석물이 빈약한 이유는 세자로 죽은 때문으로 추존해도 석물은 더 세우지

않는 것이 조선조의 관례였다.

 

따라서 이 부분은 명확한 해명이 없는데 장영훈 씨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주장한 설이 그럴 듯 하게 들린다.

 

장씨에 의하면 곡장(曲薔)을 능상 주위 삼면에 둘러 쳐 생기(生氣)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다만 앞이 터져 있다. 망주석은 이 터진

앞 쪽으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수구막이 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 우리 선조들이 풍수설을

정도의 강약은 있지만 믿은 것도 사실이다.

 

 

세호(細虎)

 

 

망주석 끝 부분에 도톰하게 솟아 오른 부분이 세호(細虎)로 조선 후기에는

보통 동물 문양을 새긴다. 그러나 초기는 위 사진같이 분명치 않다.

(耳)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왜 망주석에 귀를 달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 한다.

 

후기에 새긴 동물도 이름이 세호(細虎)일 뿐 호랑이 인지, 다람쥐 인지,

또는  도마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을 왜 새겼는지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후기에 동물을 새기면서 한 쪽은 내려오고, 다른 쪽은 올라가는 모양이 일반이다.

올라 가는 것을 두고 격상(格上)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그럼 양쪽 다 올라가게 만들지

왜 한 쪽은 내려오게 만들었나? 양쪽 다 올라가는 망주석도 있다.

아무튼 세호도 의견만 무성할 뿐 결론이 없다.

 

 

혼유석(魂遊石)

 

 

 

혼유석은 선왕의 혼령이 나와서 앉아 쉬는 의자다.

다리-고석(鼓石)이 넷인데 각각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문무인석(文武人石)

 

혼유석과 장명등 앞 쪽 좌우에 문무인석(文武人石)이 한 쌍씩 늘어서 있다.

언뜻 한 쌍이 같아 보이나 찬찬히 뜯어 보면 좌우가 표정이 각각 다르다.

 

 

 

 

 

 

문인석과 무인석 사이로 장대석이 경계를 지르고 무신이 아래 단으로 문신 우위다.

 

 

비각(碑閣)

 

 

정자각 오른 편 뒤에 비각이 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朝鮮國成宗大王宣陵

정현왕후 부좌강      貞顯王后 示+付 左岡

 

 

보통 합장에는 부좌(示+付 左)로 쓰나 위 비에는 강(岡)자가 더 붙었다.

(岡)은 언덕이니 정현왕후를 (성종 릉) 왼쪽 언덕에 모셨다는 뜻이다.

 

 

잘산군(乽山君)

 

비각 옆에 있는 해설을 읽으니

 

전략 …1457년 7월 30일 탄생하셨다. 신사년(1461) 처음으로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고 성화 4년 (1468) 자을산군으로 다시 봉해졌으며 기축년 (1469) 11월

즉위하셨다. 1494년 12월 24일 승하(昇遐)하시어 을묘년 (1495)년 4월 6일

광주 서학당동 (廣州 西學堂洞) 의 임좌병향(壬坐丙向- 남남동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재위 25년 보령 38세이셨으며 후략

 

성종의 즉위 전 군호(君號)를 흔히 그리고 나아가 왕릉연구가들 책

또 저렇게 능 안내판까지도  자을산군(自乙山君)으로 쓰고 있으나

잘산군(乽山君)이 옳다. 필자도 잘(乽) 자는 성종 때문에 처음 보는 한자다.

 

 

 

공혜왕후(恭惠王后)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처복(妻福)이 별로 없어 이혼(離婚)-옛날엔 이혼법이

없으니 곧 폐비(廢妃)시켜 내치거나 사별하여 재취(再娶), 삼취(三娶)가 보통이다.

 

성종도 처음 상당군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를 맞았으나 성종 5년

1474년 소생 없이 사별한다. 두 번째 비(妃)가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고 정현왕후 윤씨는 세 번째로 중종대왕의 어머니다.

 

예종(睿宗)이 1469년 재위 13개월 만에 승하할 때 왕위계승 1순위는 예종의

소생 제안대군이나(1466-1525)  불과 네 살이고, 예종의 형님으로 동궁 시절

죽은 덕종(德宗 : 추존)과 인수대비 한씨 사이 아들 둘 중 맏이 월산군으로 계승 제 2순위요,

둘째 잘산군(乽山君) 곧 성종은 3순위로서 등극하였다.

 

이렇게 1,2 순위를 제치고 3 순위 잘산군(乽山君)이 보위에 오르니

구구한 해석이 없을 수 없는 데 대략 당시 실력자인 상당군 한명회가

자기 사위를 미는 책략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설이 정사에 나올 수는 없고 다음과 같이 적혀 있을 뿐이다.

 

성종  즉위년( 1469) 11월 28일

 

…. 진시(辰時)에 예종(睿宗)이 훙서(薨逝)하니….

 

대비(즉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얼마간 슬피 울고 나서 정현조(鄭顯祖)와

권감에게 명령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主喪)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신숙주 등이 말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신(臣)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敎旨)를 듣기

원합니다.”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장인 한명회 덕분에 성종이 등극했다면 소생 없이 일찍 죽었지만

성종에게 대단한 은공을 끼친 공혜왕후 한씨는 통일로 주변 공순영릉에

친언니이자 예종의 비 장순왕후와 같이 묻혀있다.

성종의 선릉 능침 옆에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 다음으로 왕비가 된 정현왕후 윤씨가 있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에 묻을 지문(誌文)을 보면서 처음으로 정현왕후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필자의 블로그에

있는 글 ‘성종의 국장’ 참고할 것.

 

 

정현왕후(貞顯王后)

 

정현왕후의 능침과 성종의 능침이 다른 언덕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니

정자각이 두 능침 가운데 있으니 신로(神路)가 정자각에서 직선으로 벋지 못하고 휘어 있다.

 

 

 

사진: 정형왕후 능침으로 올라가는 신로(神路)

중앙 소나무 사이로 녹색으로 보이는 차일이 공사중인 정자각이고

그 아래 소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신로(神路)가 거꾸로 된 기역자로 벋어서

사진 왼쪽 아래로 하여 정현왕후 능침으로 올라간다.

 

 

 

 

사진: 정현왕후 능침 전경- 배치는 성종의 능침과 같으나 병풍석이 없다.

 

 

사진: 정현왕후 능상-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석양의 불두덩

 

 

꼬리 밑에 양쪽으로 뭔가 보이는 데 저걸 불두덩이라 해야 할지?

어쨌던 그래서 암놈이라는 사람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필자의 다른 글

‘양(羊)의 불두덩’ 참조.

 

망주석 세호

 

 

 

성종의 망주석 세호 보다는 더 세밀히 조각을 했으나 아직 동물의 모습은 뚜렷하지 않다.

 

문무인석

정현왕후 능침 앞에도 문무인석 한 쌍이 좌우에 늘어서 있는데

표정은 성종대왕 능침 앞 문무인 보다 풍부한 것 같다.

왕릉 앞 문무인 그리고 돌로 된 동물들이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뜯어 보면 다 표정이 다르다.

 

 

사진: 정현왕후 능침 좌측 무인

 

 

사진: 정현왕후 능침 우측 문인

 

 

 

사진: 뒤에서 본 정현왕후 능침 전경. 현대식 빌딩에 둘러 싸여 또 다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재실(齋室)

 

 

재실은 능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있어야 하나 한일합방 후 옆 중종대왕의

정릉(靖陵) 재실과 합치는 바람에 두 릉의 가운데쯤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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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10 12:45

    첫댓글 많은 지식과 능에대해 이제는 조금 알듯하군요 혼휴석 혼이다니는길 잘 이라는 글자에대해 者아래乙이니 잘 흡사 우리글 표기처럼 느껴져서 금방 접수가 되는군요 하하 문인과 무인의 표정또한 재미를 더하게되어 흥미롭습니다,더운날씨 건강 유의 하시구요 경노 걍 받으시지 거짓말하기싫으셔서 누가 함오 아니시랄까봐서요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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