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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솟은 봉수산 푸른 기슭에-금마초등학교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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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지식인 스크랩 칭기즈칸 : (22) 전쟁의 신
미루나무 추천 0 조회 211 12.04.29 16: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테무진to the칸(22) 전쟁의 신

 

 

 

지난 회

 

(1) 짓밟힌 소녀

(2)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3)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4) 살인의 추억

(5)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6) 달콤한 인생

(7) 아내가 결혼했다

(8) 복수는 나의 것

(9)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0) 테무진 라이징

(11) 13익(翼) 전투

(12) 레저렉팅 테무진

(13) 내 이름은 칸

(14) 에너미 앳 더 게이트

(15) 패자의 역습

(16) 킬링필드

(17) 배신의 계절

(18) 컨스피러시

(19) 사막의 폭풍

(20) 왕의 귀환

(21) 안티 테무진

 

 

 

옹쿠트 족장 알라쿠쉬 디긴 코리에게 나이만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테무진. 테무진은 군사훈련을 위해 하던 네르제(몰이 사냥 훈련)를 접고 급하게 전략회의에 들어가는데…

 

 

 

 

 

 

(전편에 이어) 쳐들어오면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때를 기다릴 수도 있다. 고정된 영토가 없는 초원의 싸움은 땅따먹기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기 위한 싸움이다. 그렇다면 좀 아깝긴 하지만 세력권과 말이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 등을 일부 양보해주고 군대와 울루스를 뒤로 물린 후,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다. 물론 적이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고 돌아가도록 물자를 어느 정도 흘려 놓고 도망가야 할 때도 있었으리라.

 

테무진 오르도의 쿠릴타이는 찬반 양론이 갈려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때는 1204년 초봄이었다. 겨우내 풀이 마르고 얼어 말들이 가장 굶었을 때이자, 비로소 다시 살찌기 시작할 때였다. 말이 비실비실해져 있으니 전쟁을 하기엔 부담스러운 계절이었다.

 

“우리의 전통을 빼앗겠다고 쳐들어 온다지 않는가!”

 

위기감에 더해, 촌놈들의 열폭까지 더해진다.

 

“저 잘난체하는 타양 칸과 구르베수의 꼬라지를 보세요. 우리가 이대로 참아야겠습니까? 상대의 전통을 빼앗는 자가 누구인지 보여줍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거세마들이 죄다 비쩍 말랐습니다. 말들 꼴 좀 보세요. 저렇게 말라가지고 어떻게 전쟁터에서 온갖 무장을 한 군사들을 태우고 뛰어다니겠습니까?”

 

“일단 대결을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 타양 칸 이 미친놈은 왜 난데없이 이런 계절에 전쟁을 벌이겠다고 지랄이야…”

 

열받은 테무진의 막내동생 테무게는 억지를 부렸다.

 

“내 거세마들은 살만 쪘더만요! 말들 상태 양호합니다. 출정하자구요!”

 

 

 

 

겨우내 테무게가 사는 게르 뒷편에만 풀이 싱싱했을 리도 없고,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이건 술꼬장이다. 마유주(아라크)는 쿠릴타이의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무게의 억지 대사는,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공연히 무시한 나이만에 얼마나 화가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때 테무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씨바, 이럴 때야말로 벨구테이가 필요한데…”

 

그는 쿠릴타이가 열린 천막 바깥에 있던 벨구테이를 생각했다. (지난 기사 참고) 벨구테이는 타타르를 쳐부술 때 저지른 실수의 대가로 쿠릴타이 참석 권한을 빼앗겼었다. 하지만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열 때 벨구테이가 천막 바깥의 제 1인자가 되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천막 바깥에서는 벨구테이와 따로 의논했다.

 

테무진은 그만큼 벨구테이를 신임했고, 또 벌은 벌대로 주면서도 자존심을 챙겨주었다. 배다른 동생 벨구테이는 얼음처럼 냉정하고 때로 잔인함도 보이는 성격이었지만, 그 특유의 과단성으로 이처럼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보다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다.

 

“야 벨구테이, 지금 의견이 완전 반반이다… 젠장, 어떻게 해야 좋겠냐?”

 

“무조건 싸워야 돼.”

 

벨구테이는 싸울 땐 싸워야 하며, 예정된 싸움을 미루는 것은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단 ‘싸운다’쪽으로 못을 박은 것이다.

 

참고로 테무진은 격식과 권위를 매우 불편해 해서, ‘칭기스칸’은 공식적인 호칭일 뿐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냥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칸을 알현하기 위해 큰절을 한다는 등, 정해진 절차를 거친다는 등 하는 것도 싫어했다. 그는 칸이 백성에게 받은 물자를 함부로 쓰는 건 군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사치를 싫어했고 옷도 일부러 누더기 가죽 옷을 입었다. 음식도 일반 병사들이 먹는 것 이상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대다수의 최대 먹고사니즘’에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던 테무진은 한 울루스의 사람들이 지위에 따라 다른 수준의 음식을 먹는다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벨구테이가 테무진을 부르는 방식도 그냥 “테무진 형!” 정도였을 것이다. 사적으로는 테무진과 친구 관계인 보르추도 “어이 잠깐만”하는 식으로 테무진을 불러세웠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원래 테무진의 노예였던 젤메나, 그의 동생인 수부테이, 원래는 전쟁포로였던 제베 등은 그렇게 편하게 대하진 못했겠지만…

 

테무진은 초원의 절대권력자가 되어서도 어머니 헐룬에게 말대꾸도 못하고 혼쭐이 나기도 했고, 헐룬이 화가 나면 도망가서 짱박히려고 한 적도 있다. 테무진의 라이프스타일은 ‘검소한 동네 아저씨’였다. 그리고 그걸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테무진은 자기가 전혀 새로운 타입의 군주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삼천포로 잠깐 샜다.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자.

 

“하지만 벨구테이, 우리가 불리한 조건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야. 나이만은 큰 나라다. 인구와 물자가 많아. 일단 많으면 유리하다, 전쟁의 기본 상식 아니냐.”

 

여기서 벨구테이는 몽골 군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된 비결, 그 비결의 기본 개념을 내놓는다. 역사에 기록된 벨구테이의 대사 중 가장 중요하다.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극복하는 건 물론 좋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떻게?”

 

“적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이만으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응??”

 

 

 

 

이번엔 <몽골비사>에 적힌 벨구테이의 말을 그대로 옮기도록 한다.

 

“그들의 많은 말 떼가 멈춰 쉬느라고 낙오되지 않겠습니까?”그들이 궁실을 지고 가느라고 낙오되지 않겠습니까?그들의 많은 백성이 높은 곳으로 피하려고 오르지 않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는 몽골인들이 시적으로 압축해 놓은 문장과 서사를 다시 풀어보도록 하자.

 

 

 

 

“그들의 많은 말 떼가 멈춰 쉬느라고 낙오되지 않겠습니까?”

 

당시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은 유난히 말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나이만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자태를 뽐내는 아라비아산 말을 수입해 쓰고 있었다. 초원 토종 말과 섞인 교배종이었을 수도 있다. 아라비아산 말은 크고 근육질이고 빨리 달린다. 일단 눈으로 보기에 뽀대가 확 나니 당연히 위축된다. 그러나 벨구테이는 두 종류의 말이 갖고 있는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아라비아산 말은 지구력이 없다. 빨리 달리지만 빨리 지친다. 나이만의 말에 근육이 있다면 초원 토종 말에는 폐활량이 있다. 전쟁의 속도는 순간스피드가 아니라 지구력이 결정한다. 예를 들어 단거리 육상선수는 마라토너처럼 2시간 초반대에 42.195km를 주파할 수 없다. 시야에서 멀어지거나 따라잡히지 않을 만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두고 추격하거나 퇴각하다 보면, 나이만의 말이 먼저 주저앉게 되어 있다. 결국 작고 순한 토종 말이 더 강력하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먼저 지치게 한다.>

 

이는 앞으로 몽골군이 초원 바깥의 기병을 상대하는 기본 전략이 된다.

 

“그들이 궁실을 지고 가느라고 낙오되지 않겠습니까?”

 

성공해서 먹고 살 만해진 유목민들은 정주문명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 우리도 좀 세련되게 살아야지… 금나라와 송나라, 고려에 비하면 한없이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나이만은 궁궐을 갖고 있었다.

 

테무진 울루스의 정부, 즉 오르도는 군사들과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다. ‘올해 두 번째’ 쿠릴타이를 보르추의 게르에서 열면, 쿠릴타이가 진행되는 시간에는 보르추의 집이 정부가 된다. 반면 나이만 권력의 심장부는 땅에 붙어 있다. 이걸 옮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이만에 쳐들어가 그들의 홈그라운드를 위협하면 나이만 정부는 허둥지둥 어렵게 이동하며 속도가 떨어지고,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원정 준비를 했다가 역으로 침공을 당하면 심리적으로도 당황할 것이다. 즉 군사를 모으고 움직일 시간을 주지 말고, 그 전에 적의 심장부를 압박한다는 것.

 

 

 

 

벨구테이는 ‘기동력의 전쟁’을 제안한 것이다. 적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치고 빠지며, 유리한 곳을 선점한다. 이동하면(도망가면) 추격해 괴롭히고, 반격하면 거리를 확보하며 안전하게 물러난다. 그러면서 회전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한다. 참고로 테무진은 나이만과의 전쟁 이후 정주문명의 생활방식을 결코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의 많은 백성이 높은 곳으로 피하려고 오르지 않겠습니까?”

 

적국의 백성이 군대로 변모할 시간을 주지 않고, 거주지를 위협하면 자기편 군대를 찾아 달아나거나 성 안이나 고지 등으로 몰려가게 된다. 좁은 공간에 웅크린 많은 민간인들은 결국 군대의 짐이 돼서, 이동 속도를 떨어뜨리고 혼란을 가중해 군대가 통제력을 상실하게 한다. 또한 식량난이 생기고 공포가 전염된다.

 

테무진은 벨구테이의 의견을 듣자마자 즉각 동의했음은 물론, 이 전쟁은 이길 전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벨구테이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전략을 수립했으며, 이는 앞으로도 몽골군 전술의 교범으로 자리잡는다.

 

“네르제는 이만 끝낸다. 전 병력을 소집해라! 우리는 '오르 습원'으로 간다!”

 

테무진 울루스의 모든 병력이 오르 습원에 집결했다.

 

 

 

 

오르 습원은 케를렌 강(오논 강과 케를렌 강 사이는 테무진의 고향이자, 근거지이다.)이 끝나는 곳 언저리에 있다. 상류에서부터 흘러온 물이 깨끗이 증발하지는 않을 터. 이 물이 땅에 배어 축축한 땅을 형성한다. 수십만 년 동안 쌓인 퇴적물이 젖은 풀밭을 풍요롭게 만든다. 여기도 좁은 강줄기가 있긴 하지만, 습원에 굽이굽이 흐르는 물로서 기본적으로 케를렌 강이 남긴 부산물에 가깝다.

 

애매한 곳이지만 말 떼를 ‘속성’으로 살찌우기엔 더없이 좋다. 소화 잘 되는 촉촉하고 부드럽고 영양 많은 풀이 지천으로 자라는, 초원에 몇 안 되는 장소. 테무진은 여기서 한 달여 동안 말떼를 풀어놓았다. 아마 오르 습원의 풀이 초토화 되다시피 했을 것이다.

 

나이만보다 먼저 움직여야 하므로 상당히 급했다. 테무진은 거의 완성해가고 있던 십진법 군 편제를 재빨리 마무리 지었다. 밍간(천호대)의 지휘관들을 정하고 체르비들을 임명하는 일을 끝냈다. ‘체르비’란 케식의 장군을 말한다. 케식은(지난 편을 얼릉 참조하라! 1편부터 읽는 바른 습관을 들이자!) 칸의 친위대를 뜻한다.

 

1204년 늦봄 (당시 초원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초여름), 테무진은 오르 습원에서 자신의 영기에 술을 뿌렸다. 출정이었다. 초원통일전쟁이 시작됐다.

 

 

 

여기는 나이만 땅. 동쪽 평원을 바라보는 ‘캉카르’ 산 봉우리는 테무진 울루스의 동태를 감시하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여기서 일군의 나이만 전초부대가 테무진이 있는 동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저 멀리 휘날리는 말 먼지…

 

테무진이 적진을 살피러 보낸 일군의 전초부대였다. 아마 2~3개 아르반, 혹은 자우트였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된 건가? 일상적인 전초활동이 아니라 본격적인 전투를 세팅하기 위해 보낸 건가? 그렇다면 나이만의 정보와 지리를 가져가기 전에 죽여야 한다! 나이만 전초부대가 산에서 급히 내려와 테무진 군 전초를 가로막았다.

 

“씨바 들켰다! 이렇게 된 이상 저놈들을 죽여 우리가 쳐들어가고 있다는 정보를 주지 말아야 한다!”

 

두 소부대는 화살로 조준 사격을 해가며 서로 쫓고 쫓기는 싸움을 벌였다. 테무진 군의 전초도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전초의 존재를 들킨 이상, 나이만 전초가 살아 돌아가면 신속히 전쟁 태세를 갖출 게 분명하다. 테무진이 기획한 ‘전격전’에 애로사항이 생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평원을 오가며 치른 치열한 국지전은 거의 무승부, 테무진 측의 신승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이만 전초는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테무진 전초의 예비마 한 마리를 빼앗은 게 전부였다. 테무진 군 전초도 더 이상 쫓아가지 못하고 본대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전초의 존재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나이만 전초는 제 기능을 했다.

 

이미 나이만의 근거지를 향해 행군 중인 테무진의 본대는 이동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치려면 말이다. 테무진이 엑셀레이터 페달을 밟듯 전쟁의 속도를 높이고 있던 그때, 나이만 조정은 한가로운 짓을 한다.

 

‘몽골 말 전시회’를 연 것이다.

 

나이만 전초에게 빼앗긴 말은 다른 몽골 말과 마찬가지로, 다리가 가늘고 작았다. 몽골 말은 체형 때문에도 소박해 보이지만 얼굴 주변이나 엉덩이처럼 ‘엄한’ 곳에 점박이가 많아 더욱 촌스러워 보인다. 예비마를 빼앗겼지만, 달리는 중에 예비말에 갈아탈 때 안장과 마구를 옮길 틈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예비마도 채비가 갖춰져 있다.

 

이 안장과 마구가, 나이만의 물건에 비해 너무 조잡했던 것이다. 구르베수는 말을 세워놓고 노골적으로 몽골을 조롱했다.  이 운수 나쁜 말은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테무진 군의 말과 보급품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교보재가 되었다. 말의 입장에서도 기분이 참 더러웠을 것이다(동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다.).

 

우리는 결과를 모두 알고 역사를 보기에, 실패자들이 실패하는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만 사람들 중에 자기들이 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곧 다가올 전쟁이긴 했지만, ‘테무진의 속도’는 기동력을 자랑하는 기마민족들이 상상하는 속도마저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불과 며칠 만에 19명의 부하를 수만 명의 울루스로 바꾸고, 열흘 만에 초원 중동부를 제패했다.

 

테무진을 잘 모르던 나이만 조정이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일에만 신경을 쓴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우리가 얼마나 강하며, 적이 얼마나 볼품없는 존재인지 떠드는 건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흔한 프로파간다다. 유치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이 와중에 적에게 빼앗은 말의 꼴이 저 모양이라면, 선전에 활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물론 자신들의 말이 구르베수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소식에 테무진과 그의 부하들은 또 한 번 속이 뒤집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미 전광석화처럼 나이만 땅에 진입한 테무진의 군대가 거주지를 휩쓸고 있었다. 이것은 자무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로, 그는 최대의 라이벌인 테무진이 불과 1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얼마나 진화했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나이만이 준비할 틈도 없이 등장한 테무진은 철저한 계획에 의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며 초원통일로 직결되는 결전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나이만 진격 후, 차키르마우트 전투가 벌어지까지의 과정은 자세히 기록된 바가 없다. 워낙 그 속도가 빠르기도 했고, 차키르마우트 전투가 전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가려진 면도 크다.

 

따라서 정황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 정황 판단에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들이 있다. 벨구테이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 수립한 테무진의 전략, 결전이 벌어지는 지형, 전투 이후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된다.

 

테무진군은 나이만 주민들을 게르에서 쫓아내 가축을 몰듯 잠시 동안 끌고 다니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방생’했을 것이다. 이러면 첫째, 남자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 무기를 챙겨 들고 군대로 결집할 정신머리가 없어진다. 득달같이 말을 달려서 정보를 전파하는 유목민들 특유의 네트워크가 망가진다. 결국 회전을 치를 대병력의 결집을 방해한다.

 

특이한 것은 테무진은 이 와중에도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나 약탈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약탈품은 울루스의 공동자산이 되었다가 전후처리가 끝난 후 공정히 분배되므로,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챙길 이유도 없었다. 혹 그런 일이 있었다간 당장 사형이었다. 테무진은 나이만전에서 승리했을 경우에 나이만인들을 테무진 울루스의 백성으로 편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이만 백성들까지는 자신이 구상하는 ‘문화공동체’의 일원이 될 ‘우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을 방생하게 되면, 이들은 자기 편 군대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갑자기 민간인과 가축 떼를 떠맡은 군대는 일시적이라도 움직임이 느려진다. 역시 대군의 결집이 방해된다.

 

가공할 속도를 획득한 테무진 군은 주민들을 동요시키고 적군의 결집을 방해하고, 나이만 궁정을 압박하며 전투의 위치를 확보하는 일을 동시에 처리했다. 즉 테무진 군은 쉼 없이 이동했고, 이 모든 일은 결전지로 향하는 행군의 일부였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테무진 군에 압박을 받게 된 나이만 조정은 벨구테이의 말대로 '그 많은 궁실을 지고 가느라' 움직임이 느렸다. 따라서 테무진은 그들을 원하는 위치로 몰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나이만의 군대와 백성에 비해, 군사가 적다는 게 문제였다. 군사가 적다는 것보다, 적은 것을 들키는 게 더 문제였다. 그래서 테무진은 역으로 군대를 활짝 산개시켰다. 행군로를 크게 세 줄기로 나누었을 것이다. 이렇게 종횡무진 군사들이 퍼지고 모였다를 반복하면, 적은 상대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도통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자무카는 테무진의 군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테무진이 노린 것은 나이만 백성들의 심리적 공황과 군사들의 공포, 그리고 타양 칸 압박이었다. 여기서 심리전의 진수가 펼쳐진다. 테무진이 새로 임명한 체르비 중 ‘도다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체르비는 칸의 직속 호위부대인 ‘케식’의 지휘관을 말한다. 확실히 사람 하나는 잘 뽑았다. 도다이의 아이디어를 보면 말이다.

 

“칸, 우리 야영을 해야겠습니다.”

 

“이 전쟁은 속도가 생명이야! 그런데 야영을 하자구? 이렇게 적은 숫자로, 적이 득실거리는 적지에서?”

 

“일부러 하는 거죠. 지금까지 네르제를 하면서 훈련한 대로 아르반 단위로 뚝뚝 떨어져서, 게르를 치지 않고 숙영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사람당 다섯 개의 모닥불을 피우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숫자가 5배 많아 보이죠.”

 

“너 이 아름다운 새끼! 오늘 밤 당장 야영한다!”

 

약속된 움직임과 루트를 이용해 신출귀몰하는 테무진군, 도저히 테무진군의 사이즈를 가늠할 수 없던 나이만군… 그들은 그날 밤, 초원 사방에 “별 보다 많이 퍼진” 적의 모닥불을 본다. 원래 모닥불 하나에 여러 명이 붙어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수십 배를 뻥튀기한 것이다.

 

이 압도적인 광경에 나이만 군대는 감히 싸움을 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들도 모르게 테무진이 점찍어 놓은 격전장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모닥불 작전에 이은 허수아비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마 이 짓 하느라고 다들 밤들을 샜을 텐데…

 

기상시간부터 테무진군 병사들은 테무진의 막내동생 테무게가 예비마를 관리, 후송하는 후위부대로부터 한 사람 당 5필 이상의 말을 추가보급 받는다. 그리고 한 병사 당 자신이 끌고 다니는 말 다섯 마리 위에, 허수아비 다섯 개씩을 앉혀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테무진이 대(對)나이만전에 이르러, 세계 최초로 ‘병참’을 기획하고 운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갑옷과 무장까지 구비해 필요할 때 전장에 즉각 투입 가능하도록 해놓은 거다. 왜냐하면 허수아비에 병사들의 차림을 어느 정도 입혀놓지 않으면, 적이 금방 눈치채기 때문이다.

 

허수아비는 물론 나무로 만든다. 초원에 나무가 어디 있을까? 강 근처마다 자생한다. 하지만 역시 나무가 적기 때문에, 초원 유목민들은 나무로 된 도구나 가구는 웬만해선 쓰지 않는다. 물통도 가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테무진의 출신부족인 몽골족은 시베리아 삼림에서 기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족은 특이하게도 나무 가구와 물통을 썼다. 젤메와 수부테이 형제도 숲 출신. 테무진 군대는 나무를 보급, 가공할 줄 알았던 것이다. 역시 몽골족인 자무카는 약관 스무 살 때 순식간에 전 부대가 강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을 만들어 ‘킬코 강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적이 있다.

 

테무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말 꼬리마다 나뭇가지를 매달아 놓았다. 이러면 나뭇가지가 흙을 쓸면서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보다 몇 배의 시각 효과가 나타난다. 테무진 군의 ‘어마어마한 군세’를 목격한 나이만 군대는 감히 독자적으로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군 통수권자인 타양 칸을 중심으로 속속 모여들 뿐이었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이동이 민첩하고 시력이 좋다. 유기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런 블러핑으로 적을 속일 수 없다. 결국 이 속임수가 멋지게 성공한 것도, 테무진이 군대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기에 가능했다.

 

전초의 절망적인 보고가 타양 칸에게 접수되었다.

 

“몽골 놈들의 숫자가… 너무 너무 많습니다. 도저히 파악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대회전으로 테무진을 쓰러뜨리고, 초원 중동부에 화려하게 복귀할 생각이었던 자무카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채 뒷짐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틱한 재기에 성공하려면 역시 운명을 건 회전의 사령관을 맡아야 하니까.

 

하지만 타양 칸은…

 

 

 

애초에 나이만의 자신감은 압도적인 인구수에 있었다. 그것만 믿고 있었는데, 이제 전력의 우위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뭘 믿고 싸우지? 타양 칸의 뇌는 테무진 군에 없는 나이만의 강점을 재빨리 검색했다. 그렇다. 역시 말, 말의 차이다!

 

이 대목에서 <몽골비사>에는 ‘테무진 군의 말은 말랐고, 나이만의 말은 살쪘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똑같이 겨울을 났을진대, 어떻게 초원 동부와 서부의 말의 식생활이 달랐겠는가. 이 표현은 말의 크기를 나타낸 것이다.

 

나이만 말이 우월하다. 그렇다면…

 

“일단 튀는 척 하는 거다. 쫓고 쫓기는 밀땅 싸움을 해서, 테무진 군의 말이 먼저 지치게 한 후 쳐부수자!”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타양 칸은 말의 지구력이 덩치에 비례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능력가였던 왕자, 타양의 아들 쿠출룩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몽골 군의 군세가 과장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테무진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편이 군사가 더 많은 건 주지의 사실. 그렇다면 대병력을 소집해 결전을 치러 나라를 지키는 편이 현명하다.

 

쿠출룩은 평소에도 나약한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그만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타양, 내가 후레자식이라고 욕하지 말고 잘 들어. 다 니가 못나서 듣는 얘기니까… 이 나약한 겁쟁이야! 계집애도 너보다는 낫겠다. ‘여자가 오줌 누러 게르 바깥에 나간 것만치도 멀리 못 가본’ 온실 속의 화초야. 우리 병사가 더 많어 이 병신아! 당장 궁뎅이 띠고 일어나서 정신 차리고 싸울 준비 하라고!”

 

이 와중에 나이만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해당하는 비밀병기가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켜주었다.

 

“우리한테는 자무카가 있다.”

 

여기에 더해, 쿠출룩은

 

“가서 내 아버지한테, 내가 한 말 고~대로, 내가 욕한 거 고~대로 전해.”

 

라고 당부까지 해서 사자를 보냈다. 쿠출룩,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친아버지이자, 국가의 수장인데… 하지만 상황판단만큼은 정확했다. 헌데 아버지 타양 칸은, 아들에게 모욕을 당한 게 속이 상했는지 혈육에 대한 복수심부터 불태운다.

 

“그래… 넌 언제나 나를 무시해왔지. 언젠가 너랑 나랑은 한 판 대결을 해서 서로를 죽일 사이 아닌가? 그때가 돼서 보자. 니가 같은 말을 또 할 수 있는지.”

 

비록 감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했지만 지금은 같은 편이었다. 타양 칸은 이 시급한 시기에 ‘회전을 준비하라’는 현실적인 주문은 듣지 않고 욕만 들은 것이다. 이때 나이만 군의 대장군 ‘수베치(옹 칸을 죽인 전초대장 코리 수베치와 동명이인으로 보인다.)’가 쿠출룩의 판단을 옹호하고 나섰다.

 

“테무진군에 쫓겨 모여들고 있는 우리 병사들로 당장 대군을 편성하십시오! 우리의 존경하는 대장군 쿡세우 사브락께서 은퇴하고 저는 그분만한 능력이 없는 지금, 타양 칸 당신이 우왕좌왕하고 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의 어머니인 구르베수 여왕님을 무장시켜 전장에 내보내는 게 나을 겁니다…!”

 

수베치는 자신이 인정하듯이 쿡세우 사브락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쿠출룩처럼 상황 판단은 정확했다. 어차피 타양이나 구르베수나 군사적 능력은 제로다. ‘여기에 나이만이 있다’는 상징으로, 심리적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 전장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겁 많은 타양보다는 다혈질인 구르베수가 등장해 소리라도 지르는 편이 낫다.

 

타양 칸은 화가 났다. 무시 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분노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그는 “그렇다면 싸우자”며 의지를 다졌다. 아버지가 결전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쿠출룩도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자기 군사를 몰고 합류했다. 물론 나중엔 아버지를 갈아 마실 생각이었을 것이다.

 

자무카, 드디어 테무진과 마지막 결판을 낼 기회를 잡았다.

 

테무진 군의 정교한 기동에 몰린 나이만군은 회전 장소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차키르마우트 평원이었다. 차키르마우트는 우리 한국어의 고향이기도 한 알타이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평지다. 알타이 산으로 들어가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에 속한 ‘나코’라는 절벽이 나온다.

 

테무진은 왜 알타이 산으로 향하는 평원을 선택했을까. 일단 평원이 회전에 맞는다. 적지에 들어온 이상 한 번의 회전으로 적국을 붕괴시켜야 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이쪽에 불리하니까. 그렇다면 굳이 다른 평지를 놔두고 알타이 산과 그 주변을 택한 이유는, 테무진이 나이만 땅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테무진은 알타이 산기슭 일대를 관장하던 타양 칸의 동생 부이룩 칸을, 그의 근거지인 알타이 산맥에서 무찔렀다. 산 속에서 스펙터클한 추격전을 벌였고 부이룩 칸의 게릴라 전법에도 맞섰다. 여기라면 적의 홈 어드벤티지, 즉 ‘지리정보’가 대등해진다.

 

그러나 ‘대등’을 넘어 유리해져야 한다. 테무진 군은 머릿수가 적다.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적 병력을 계곡 입구로 압박한 것이다. 압박만 잘 하면 본대부터 후위부대까지가 계곡을 틀어 막아,  적이 실제로 운용하고 있는 전력이 줄어든다. 병목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테무진은 자신이 그걸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반은 성공했다. 나이만 군의 태반이 결집에 실패했다. 이미 모인 병력도 테무진 군보다는 많았지만…

 

그렇게 나이만 수뇌부가 알타이 산 밑에서 전쟁을 결의한 순간.

 

“바로 지금이다.”

 

테무진은 나이만 땅에 산개한 휘하 병력을 즉시 소집, 그 자리에서 전투대형을 구축했다. 이미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포메이션이었다. 이제부터는 행군이 아니라 진격이었다.

 

 

 

 

나이만의 전초가 타양 칸 앞에 들이닥쳤다.

 

“칸! 지금 전투대형을 갖춘 테무진 군대가 진격하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에 전투준비를 그렇게 빨리… 이 새끼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그런데 숫자가 엄청 적어요! 이놈들이 우리를 블러핑으로 속인 게 확실함다!”

 

“에이 씨바 그러면 해 볼 만 하잖아? 당장 전투 준비!”

 

나이만군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자무카의 지휘 아래 훌륭한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가운데 중군이 있다. 용감한 선봉대가 적의 기세를 꺾으면 중군이 적을 압박한다. 병사의 수가 많으니 충분히 압박 가능하다. 그러면 역시 적보다 훌륭한 군세를 가진 양 옆의 좌, 우익이 상대를 포위한다. 포위가 성공하면 섬멸한다. 게다가 산을 등지고 있지만 평원을 바라보는 위치. 좌익과 우익이 포위기동을 펼치기 좋다. 압박이 실패할 리도 없으니, 병사들이 계곡에 갇힐 이유도 없다.

 

나이만군이 포메이션을 구축하자마자, 압도적인 속도를 앞세운 테무진 군의 전 병력이 나타나 그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차키르마우트 전투가 시작되었다.

 

 

 

 필독 선생님(a.k.a. 들개)이 친절하게 설명해주겠다.

 

 

 

바로 전투의 전개를 알려줄 만큼 친절하지 못해서 미안타. 이건 정말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에 조금 브레이크를 걸어야겠다.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참으로 여러 면에서 ‘결전’, 즉 결정적 대결이었다.

 

1. 베스트프렌드이자 불구대천의 원수인 테무진과 자무카가 오랜 라이벌 역사를 끝내는 결정전이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세 번 싸웠고, 2승 1패를 기록한 자무카의 우세다. 그러나 자무카의 1패는 전적으로 갑작스레 불어닥친 돌풍으로 인한 운 나쁜 패배였다. 실력으로는 3전 전승이나 다름없다.

 

2. 몽골족 통일 결정전이었다. 초원의 작은 부족 몽골족은 하필이면 두 젊은 영웅(지금은 둘 다 나이가 지긋해졌지만)을 한꺼번에 배출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칸이 됐어도 한 몸이 아니었다. 보르지긴 씨족을 비롯한 일부는 테무진, 자다란이 포함된 나머지는 자무카를 따랐다. 이 전투의 결과로 드디어 부족이 하나가 된다.

 

3. 초원통일 결정전이었다. 테무진이 이기면 초원에는 단 한 명의 대칸만이 남는다. 나이만-자무카 연합이 이기면 구르 칸(자무카의 공식 명칭)과 타양 칸, 두 대칸만 남는다. 후자일 경우 장차 자무카가 나이만을 노릴 것은 불보듯 뻔했다. 이 경우에도 어느 쪽이 이기든 초원은 통일될 가능성이 높다.

 

4. 혁명 결정전이었다. 하도 많이 설명해서 더 이상 말하면 입 아픈, 테무진의 사회개혁과 전통주의의 대결이었다. 어떤 면에선 계급투쟁 결정전이기도 하다.

 

역사엔 수많은 ‘결전’이 있지만 그 싸움이 결과적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하게 될 것은 당사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양측 모두가 이것이 단 한 번의 결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테무진은 적지 깊숙이 들어와 이미 블러핑 쳤던 군세까지 들켰다. 지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생환에 성공해도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이만은 나이만대로, 홈그라운드에서 벌인 대회전에 패배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지면 자무카도 몰락한다. 그를 따르는 몽골 씨족과 메르키트족 등, 테무진에게 패해 자무카라는 그늘을 찾은 집단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테무진을 피해 달아날 곳이 없다.

 

이 대결전에 임하는 나이만군, 특히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을 감행하는 나이만의 1차 선봉부대원들의 마음은 실로 비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테무진군은 전위가 없다…? 회전의 상식인 전위가 없다니, 어떻게 된 걸까.

 

이제 우리는 테무진 군의 포메이션을 관람하도록 하자.

 

 

전위가 없다! 아니, 테무진이 직접 전위를 이끈다. 대체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게다가 중앙 본대를 카사르가 지휘한다? 자 이걸 설명해보겠다.

 

우리는 중앙군을 사령관이 있는 주인공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있다. 뭐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역사학자들도 중군을 지휘한 카사르를 칭찬하곤 한다. 하지만 그림을 잘 보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카사르는 군대를 <앞-중앙-뒤>로 나눴을 때나 중군의 지휘자이다. 실제 전투는 아군과 적의 전열, 즉 양측의 ‘횡적’ 포메이션의 충돌에서 벌어진다.

 

전투대형의 기본 개념인 ‘횡 포메이션’을 기준으로 보면, 진짜 중앙군의 수장은 테무진이다. 카사르의 ‘중군’은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맡은 바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대전투라도, 전세를 결정하는 인원은 소수다. ‘양’은 중군과 좌우익의 전열이 그림을 만들어놓은 후에 투입되어 승부를 결정짓는다. 즉 테무진이 그려 놓은 선에 색칠을 하는 게 카사르의 임무였다. 물론 그 임무엔 뒤에서 예비마를 끌고 본대를 받쳐주는 테무게의 보급부대도 동원된다.

 

테무진 자신이 직접 본대를 이끈 건 전투의 속도와 관계가 있다. 테무진은 나이만군을 신속히 압박해 계곡 안에 밀어넣기 위해, 스스로 선봉대장이자 실질적 중군대장 1인 2역을 했다. 전위가 돌격해 상대 전열을 무너뜨린 후, 본격적인 중군의 압박이 시작되는 것이 상식. 이 순서를 하나로 통합해버린다. 자무카에게 대응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투의 공식을 한 단계 건너뛰는 ‘속도’를 추구한 것이다.

 

따라서 테무진의 전위-중앙군은 가장 중요하며, 실제로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혼자 찜쪄먹다시피 한다.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테무진의 참모진, ‘네 마리 말’인 보르추와 무칼리, 칠라온, 보로쿨이 보좌한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네 인재의 보좌를 받을 만큼 중요했다.

 

전위로 쓰기 딱 좋은 소수정예 전투집단, 망구트와 오로이드족은 중앙군도 아니고 좌우익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그 이유도 곧 알게 된다.

 

최고 장군들, ‘네 마리 개’인 제베와 수부테이, 젤메와 쿠발리이가 2인씩 콤비를 이뤄 좌익과 우익을 맡는다. 포위섬멸을 기획한 이상 좌우익은 당연한데, 왜 지휘 계통을 일원화하지 않고 콤비로 짝지웠을까? 곧 설명해준다.

 

전위-중앙군의 테무진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이만 선봉 결사대를 보고 소리친다.

 

“카라카나 대형!”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날 고생시킨 챕터인, 다음 8장을 주목하자.

 

 

 

카라카나가 뭔가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초원의 마른 풀들이 애완동물 털처럼 둥글게 엉켜, 초원의 바람에 굴러다니는 풀뭉치. 둘째, 초원에서 자생하는 꽃풀로, 대단히 빽빽하게 꽃이 피는 식물의 한 종.

 

둘 다 결론은 동일하다. ‘밀집대형’이다. 일단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병대가 밀집을 이루고도 완벽한 군사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맹훈련과 군 편제 개혁의 결과다. 그런데 초원 기병들은 기본적으로 활을 쏘고, 그래서 백병전을 위한 포메이션은 없는데 왜 백병전스러운 밀집대형일까. 일제공격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기마궁병'에게 일제공격은 또 무엇인가.

 

바로 ‘일제사격’이다.

 

그 전까지 초원 전사들은 싸움터에서 각자 조준사격을 했다. 테무진은 조준사격이 아니라 수만 명의 병사들이 하나의 신호에 맞춰 동시에 원거리 무기를 쏘는 일제사격을 최초로 도입했다. 조준사격이 아니므로 화살 수 대비 살상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전술상으로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한다. 상대의 전열이 일순간 무너지고, 포메이션 전개에 ‘렉’이 걸리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집중포화’에 해당한다.

 

(전투 초반, 화살을 비오듯 쏟아부어 적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전법은 투르크족이 중앙/서아시아 일대에서 아랍인, 유럽인과 싸울 때 자주 써먹었다. 그러나 이것은 적의 머릿수를 줄여 놓고 싸우자는 심산의 무차별 폭격으로, 테무진의 집중포화와는 다르다. 전통적인 ‘폭격’은 화살이 먼 거리에서 포물선을 그린다. 즉 곡사무기다. 그에 반해 초원의 활은 직사무기이다. 말을 달리는 와중에 쏘는 데다가 지휘관이 지목한 적 전열 일대를 정확하게 타격한다. 전통 폭격이 단순히 적 전력의 약화를 기대한다면, 테무진의 집중포화는 전투 중 적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아군의 기동을 확보하려는 본격적인 전술이다.)

 

카라카나 일제사격에 나이만의 선봉은 일거에 무너졌다. 살아남은 전위들이 말을 돌려 도망가는 속도에 맞춰, 테무진의 전위-중군이 나이만 중앙군을 공격했다. 물론 일제사격이 이어졌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공격방법에 나이만 중앙군의 전열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속도에서 자무카를 앞질렀다. 자무카가 다시 테무진을 추월하는 일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테무진의 두 번째 명령이 이어졌다.

 

“호수 대형으로 산개하라!”

 

드넓은 호수처럼 넓게 퍼지라는 뜻. 전속력으로 달리는 밀집 대형의 기마군단이, 달리는 속도 그대로 좌우로 깨끗하게 퍼지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테무진의 기동에 발맞춰, 네 마리 개가 이끄는 좌익과 우익도 길게 퍼지는 건 당연하다. 이제 왜 한 익을 두 사람에게 맡겼는지 이해가 된다. 한 장수가 이끄는 익은 퍼져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더 중요한 것. 원래 본대는 본대끼리, 좌우익은 익끼리 싸우게 된다. 이 싸움에서 이긴 익이 상대의 배후로 가 아군의 포위섬멸을 지원하는 것이다.

 

테무진은 익을 분할함으로써, 나이만군의 좌우익마저 본대처럼 포위섬멸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좌익 콤비는 각자가 작은 좌익과 우익으로, 우익 콤비도 그렇게 나뉘어 적 좌우익을 각자 포위 섬멸한다. 인재 배치도 기가 막힌다. 수부테이는 제베의 부장 출신이다. 보좌를 하고 받았던 만큼 찰떡궁합이다. 함께 기동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한편 테무진의 ‘아바타’인 젤메는 재기 넘치는 지략가였다. 반면 쿠빌라이는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근성의 성실남. 쿠빌라이의 성실함에 젤메의 두뇌가 결합된다. 이렇게 되면 테무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젤메의 두뇌에 쿠빌라이가 ‘감염된다'. 시너지 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카사르와 테무게를 제외한 테무진 군은 얇고 긴 끈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단 포위에 얼추 성공했으니 나이만군에서 사상자가 속출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병력의 열세로 포위의 끈이 너무 얇다. 이래서야 적의 ‘두께’에 금방 뚫려버리고 만다. 그래도 일단 나이만군은 테무진의 ‘호수’에 대응하기 위해 넓게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테무진의 세 번째 명령이 하달되었다.

 

“끌 대형으로 모여라!”

 

포메이션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테무진의 전위-중앙군은 추처럼 뾰족한 대형으로 변신해, 말 그대로 목재 한가운데를 파내는 끌처럼 나이만 군의 중심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테무진의 출신부족인 몽골족이 시베리아 숲 출신이라는 걸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끌은 나무를 다루는 도구니까.).

 

 

 

 

그런데 이 끌은, 그냥 끌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초원이다. 백병전을 상상하면 안 된다. 여기서 테무진은 영어로 ‘카라콜’이라 부르는 궁극의 기병 전술을 시전한다. 기본적으로 기병 1열 종대가 한 단위다. 아마 분대일 것이다. 맨 앞의 전사가 활을 쏘면, 곧바로 말을 돌려 자기 분대의 끝으로 간다. 앞 사람이 없어지는 즉시, 이미 활시위를 한껏 당기고 있던 바로 뒷줄의 전사가 사격한다.

 

 

 

 

활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재고, 어깨를 이용해 끝까지 당기고, 조준하고 시위를 놓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카라콜 전법을 쓰면 그야말로 기관총 집중사격이 이뤄진다. 그것도 한 발 한 발이 정확한 조준사격이다. 카라콜은 기병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완벽한 제식’이 없으면 꿈도 못 꿀 전술이다. 훈련 없이 이걸 했다가는, 전진하는 말과 돌아오는 말이 부딪히면서 대재앙이 일어난다. 뒤이어 오는 기마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초유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니까. 그런데 테무진 군대는 이걸 깨끗하게 해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끌 대형’은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간다. 그러면 측면이 취약해진다. 누구보다 가장 중요한 테무진이 위험해진다.

 

 

이를 대비해 미리 배치한 것이, 바로 테무진 양옆을 지키는 망구트족과 오로이드족이었다. 두 부족은 활이 만고불변의 주력무기인 초원에서 유일하게 '어려서부터 창과 칼에 숙달된' 백병전 전문 집단이었다. 이들은 족장부터 최말단 전사까지 테무진이라는 인간에 흠뻑 심취한 컬트집단이었다. 아마 테무진이 집단자살을 명령했어도 그대로 따랐을 인간들이다. 한 마디로 테무진을 위해 죽기로 한 결사대. 눈 앞에서 적의 두개골이 깨지고, 동료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백병전은 이런 정신 상태의 사내들이 가장 잘 하는 법이다. 백병전 전문가들인 중세 유럽 기사들이 이성 대신 뜨거운 감정 상태에 도취된 삶을 살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테무진이 전통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군 편제에 인재를 배치하는 과정에서도 망구트와 오로이드를 그대로 놔둔 이유를 알 수 있다. 초원 최고의 백병전 전문집단이 테무진과 그의 전위-중앙군을 보호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국면이 진행된다.

 

 

 

 

보다시피 테무진의 끌에 1차 분쇄되고, 이어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이라는 강력한 방패에 튕겨나간 나이만 기병들. 뒤에는 이미 알타이 산맥 입구에 동료들이 끼어 돌아갈 데도 없다. 좌익과 우익은 이미 격퇴당하고 밀려 본대와 뒤섞여 죽어갈 뿐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글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보여준 학익진과 닮았다. 서구에서는 ‘T 포메이션’이라 불리는 천재적 해전 전술과 비슷한 그것을 테무진은 달리는 기병을 가지고 구현한 것이다.

 

나이만 전군은 테무진과 그의 네 마리 말, 네 마리 개가 진두지휘하는 ‘선’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제베 ? 수부테이 ? 테무진+네 마리 말 ? 젤메 ?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선이다. 테무진과 여덟 명의 심복이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지는 모두 알 것이다. ‘테무진 식 학익진'은 신뢰와 우정으로 뭉친 아홉 명의 전사들의 놀라운 팀웍을 보여준다. 이 아홉 명이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설계 및 시공’한 당사자였다.

 

한편 아무리 포위가 완벽했다고 하더라도, 100% 기병대와 기병대의 싸움이다. 달리는 말은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적이든 아군이든 서로 뚝뚝 떨어져 여기저기 달리며 싸운다. 그러다 보니 포위망에서 운 좋게 빠져나가는 나이만 병사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들은 원군을 불러올 수도 있고, 자기들끼리 즉석에서 별동타격대를 조직해 ‘아홉 전사의 띠’의 배후를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홉 전사의 띠 뒤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은, 뒤에서 전투를 조망하고 있는 카사르의 싱싱한 중군이 있다. 이들에게 사냥 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뒤에는 테무게의 예비마 보급부대가 있다. 카사르 중군의 사냥에서마저 빠져나간 나이만 군을, 싱싱한 기동력을 ‘냉장보관’하고 있던 이 부대가 2차 사냥하는 구조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홉 전사로 이루어진 띠는 당연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즉, 띠가 너무 얇다. 적은 비록 포위 당해 차키르마우트 평원을 피로 물들이고 있지만 아직 두터운 ‘양’을 가지고 있다. 자무카가 띠의 약한 부분에 전력을 집중한다면, 띠는 끊어지게 된다. 그러면 오히려 테무진 군의 포메이션이 붕괴하고, 테무진의 배후가 위험해진다. 그러나 테무진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이제 색칠로 그림의 선을 채울 차례. ‘물감’인 중앙군을 전투진행상황에 맞춰 착실히 전진시킨 카사르가 자기 역할을 할 차례였다.

 

확신하건데, 테무진은 아홉 전사의 띠를 뒤로 물렸을 것이다. 생사가 고속으로 오가는 전투에 집중하다 보면 사람이나 말이나 체력 게이지가 추락하듯 떨어지는 데다가, 어떻게 싸워도 아수라장 속에서 전열이 흐트러지는 법이다. 그래서 테무진은 적진 깊숙이 돌진하는 영웅적인 싸움법을 엄금했다. 조금이라도 신변이 위험해지거나 판단이 흐려지면 분대와 중대별로, 정해진 집결 포인트로 되돌아오는 게 룰이다. 자기 부대 대장에게 뒤통수 한 대 맞고 다시 전술을 하달 받아 싸우는 식이다. 타타르 정벌 때부터 도입된 현대적 전술이다.

 

따라서 적의 눈에는 마치 지상에서 증발하는 것처럼, 특정 부대를 일제히 뒤로 물리는 게 가능하다. 어차피 적과 마주치는 ‘전선’은 한 줄이 되는 게 모범적인 상황이다. 테무진은 이 한 줄의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 1진이 빠지는 동시에 2진이 일제 투입되는 방식을 썼다. 또한 이후 몽골군의 영구적인 교범이 된다. 나이만전에서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전투진행과정 및 포메이션 구조를 봐도 그렇다.

 

우리는 계속 전투를 구경하면서, ‘교대 전투’의 위력을 실감해보자.

 

 

 

 

아홉 전사의 띠가 사라지는 동시에, 완벽한 전열을 갖추고 있던 카사르의 중군이 지친 나이만 병사들을 향해 일제 투입된다. 이 중군에는 테무진도, 네 마리 개와 네 마리 말도 없었지만 모든 전사들이 그들의 기동을 목격했다. 바통 터치하듯 전열을 물려받아 그대로 모방하면 되는 것이다. ‘두께’도 충분하다.

 

이제 나이만군은 궤멸당하기 시작한다. 포위는 끝나고 섬멸만 남았다. 그러나 그 섬멸도,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도록, 확고하고 신속해야 한다. 테무진의 전위-중앙군, 오로이드와 망구트, 네 마리 개의 네 ‘익’들은 뒤로 물러나 테무게의 예비마 보급부대와 만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싱싱한 새 말을 보급 받아 전열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다시 카사르의 중군에 합류해 전 병력이 섬멸 단계에 러쉬 돌입, 승리에 확실한 방점을 찍는 것이다.

 

 

 

 

나이만군은 계곡으로 패퇴해 나코 벼랑으로 도망쳤다. 좁은 산 입구에서 말과 사람이 충돌하는  병목 현상 때문에 추가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차키르마우트 전투가 끝났다.

 

 

 

 

테무진은 완전무결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차키르마우트 전투 직후에도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승리가 확실시되는 순간 전군에 추격 금지 명령을 내렸다.

 

전장의 전사는 적이 등을 보이고 도망가면 본능적으로 쫓게 되어 있다. 승리를 마무리 짓는 가장 흔하고 직관적인 방법이며, 적이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약해진 기회를 그냥 놔두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테무진은 압도적인 승리에 도취한 병사들의 흥분을 재빨리 가라앉혔다. 계곡으로 숨어든 적을 쫓으면 불필요한 아군의 희생이 생긴다. 좁은 계곡길에서는 전술과 포메이션을 펼치기 힘들다. 나이만군은 믿을 수 없는 대패로 기세가 꺾였을 뿐, 남은 병력만 모아도 테무진군과 대등했다.

 

적은 높은 곳으로 쫓기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지를 먼저 점령한다. 따라서 테무진군의 동향을 먼저 파악한다. 말머리를 돌려 ‘반돌격’에 나서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치고 내려온다. 확실히 유리하다.

 

수뇌부가 바보로만 이뤄져 있지 않은 한, 먼저 같은 땅을 밟은 쪽으로서 지리적 이점을 선점하는 것도 상식이다. 그래서 상식적인 추격전을 벌일 경우 아래 그림과 같은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 상황으로 이어진다.

 

 

 

 

보다시피 계곡은 추격군이 역으로 포위당하기 딱 좋은 지형이다. 또한 후방에서 추격군 전방과 싸우는 동안, 나이만 수뇌부 그리고 자무카와 그의 추종자들은 얼마든지 퇴각할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던 테무진은 승리한 자신의 병사들을 즉각 기동시켰다. 테무진군은 커다란 반지처럼 원형을 그리며, 패퇴한 나이만군 전체를 통째로 포위했다.

 

테무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술을 펼치자 나이만군은 산 깊숙이 도주하는 데 실패하고 나코 벼랑 일대에 갇히고 말았다. 방금 전 회전에서 포위 섬멸을 당한 후, 또 다시 2차 포위를 당했다. 전형적인 ‘네르제(몰이사냥)’가 시작된 것이다.

 

 

 

테무진은 ‘나코 벼랑 전투’도 계획하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차키르마우트 평원 전투가 끝난 후의 상황을 미리 예측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이 포위 압박 전술은 미리 계획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키르마우트 전투 직후 즉석에서 수립된 전술이다. 두 경우 모두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다.

 

이제 전쟁은 ‘나코 공방전’이라는 제 2국면으로 전환된다. 테무진은 초원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차례였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다음 편에서 나코 공방전의 진행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초원이 통일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기병전투의 영원한 교범이자 궁극의 이상에 해당하는 전설적인 대첩이다. 테무진은 전쟁 개시에서 전투까지 모든 상황을 전적으로 주도했다. 또한 기병의 모든 장점을 극대화하고, 모든 단점을 극복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으며,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깨끗하게 궤멸시켰다.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만한 아찔한 속도뿐 아니라, 자신이 동원 가능한 전 병력으로 치른 대결전이었던 만큼 스케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후 기병의 역할을 헬기와 탱크가 대체하게 된 현대에 이르기까지, 차키르마우트 전투의 수준을 넘어서는 기병 회전은 지상에 출현해본 적이 없다.

 

여기에 더 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는 세계사에 영원히 남은 대첩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일단 군 편제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전쟁을 결정하고, 군을 통수하며, 전투를 지휘하는 모든 일을 테무진이 해냈다. 그는 현장지휘까지 맡았으며, 중앙군뿐 아니라 선봉대장 역할까지 했다.

 

전설적인 군사적 승리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점들이 있다. 첫째, 세련된 무언가를 새롭게 내놓는 쪽이 승자가 되고 패자는 전통적인 전투의 논법을 따른다. 전통적인 포메이션이 진보된 포메이션에 당한다. 그러나 나이만 군은 초원의 전통적인 포메이션인 '쿠리엔' 단위로 군을 편성하지 않았다. 충분히 현대적인 군 편제를 운용했으며, 당시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중군과 좌우익, 전위 운용은 당시의 초원에서 충분히 진보적 형태였다. 나무랄 데가 없다. 나이만의 국가시스템과 자무카의 솜씨가 만난 결과였다.

 

둘째, 승자는 적을 잘 알고 완벽히 파악한 반면 패자 쪽은 늘 그렇듯 다소 순진한 확신을 가지고 싸움에 임하는 경향이 있다. 허나 자무카와 나이만은 자신들의 역량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싸웠으며, 테무진의 장단점을 자무카만큼 잘 아는 인물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전설적인 대첩을 보면 패자 측의 사령관은 천재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중에 간혹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물도 꽤 있다.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에게 제대로 털린 왜장 '와키자카'는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이천 년 전 로마 내전 당시,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털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만 없었다면 지중해세계 최고의 전술가였다. 이들은 자신이 아는 상식 내에서는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지만, 적이 상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무언가를 내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경우다. 이것이 수재와 천재, 상식적 엘리트와 상식에 반항하는 비범한 자의 차이다.

 

그런데 테무진을 일시적으로 몰락케 한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제 19편 '사막의 폭풍'을 참고하시라)에서 볼 수 있듯 자무카는 천재적 인물이었고, 재능과 카리스마로 테무진을 압도해왔다.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범재가 천재를, 더 천재적인 모습으로 이겼다는 점에서 세계 전쟁사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차키르마우트 대첩에는 한 가지 묘한 특징이 더 있다. 벨구테이부터 도다이 체르비까지, 테무진의 부하들은 계급과 위치에 상관없이 좋은 의견을 쏟아냈다. 테무진은 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전쟁계획이 수립된 것도 쿠릴타이에서였다. 그러한 사회체제를 만든 건 테무진이지만, 어쨌든 자기 사회가 가진 자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건 사실이다. 특히 네 마리 개와 네 마리 말이 없었다면 차키르마우트 전투의 완벽함은 불가능했다. 일개 병사들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테무진의 명령에 따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움직였다.

 

이것이 차키르마우트 전투가, 한 영웅의 개인적 비범함에 승리의 비결이 집중되는 역사적 대첩들과 다른 또 한가지 요소다. 우리는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테무진의 원맨쇼로 볼 수도 있지만, 테무진 울루스 사회의 승리로 볼 수도 있다. 테무진은 ‘승리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고, 드디어 극적인 보상을 받은 것이다.

 

헐룬이 맏아들 테무진을 딱히 칭찬할 게 없어, '테무진은 가슴에 재능이 있다'고 평했던 걸 생각해보자. 그녀의 말 그대로 테무진은 '태도의 천재'였다. 공정하고 겸허한 태도. 거기에 수많은 실패와 절망, 비참을 삼키고 소화해내는 그야말로 한계를 측정할 수 없는 끈기가 더해졌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군사, 정치, 사상 모두에서 거의 인간을 초월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테무진 자신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로써 유라시아 대륙 최고의 군사적 두뇌가 자기 목 위에 있다는 것을… 어쨌든 그는 이제 나코 벼랑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 편 ‘초원통일’에서 계속.)

 

부편집장 필독twitter: @DDanziFieldDog

 

 

원문 출처 : http://www.ddanzi.com/blog/archives/6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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