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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전제(田制) 8
정전의(井田議) 1
정전이란, 전가(田家)의 황종척(黃鐘尺)이다. 황종척을 만들지 않으면 풍악 소리를 바룰 수 없고, 정전을 만들지 않으면 전제(田制)를 정할 수 없다.
《맹자(孟子)》에, “이루(離婁)의 밝은 눈으로도 규구(規矩)를 이용하지 않으면 방원(方圓 : 모난 것과 둥근 것)을 이루지 못하고, 사광(師曠)의 귀 밝음으로도 육률(六律)을 이용하지 않으면 오음(五音)을 바루지 못하며, 요순의 도(道)로도 인정(仁政)을 쓰지 않으면 천하를 화평하게 다스리지 못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맹자는 매양, “정전으로 인정(仁政)을 한다.” 했는데, 인정이란 정전하는 것이다. 맹자는, “요순이 정전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천하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성인들이 서로 전해오는, 요체를 안다는[知要] 말이었다. 정전은 규구나 율려(律呂)와 같은데 황종에다 비유한 것은 내 말이 아니고 바로 맹자의 말이다.
생각건대, 정전이란 균(均)을 세우고 도(度)를 내어서 여러 전지를 셈[率]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순과 삼왕 때에도 오직 평평하고 기름진 땅에만 정전을 만들었고, 산릉(山陵)과 천택(川澤)을 포괄한 천하의 전지를 다 정전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뚤어지고 기울어져 평평하지 못한 땅으로 모진 것, 타원형인 것, 뾰족한 것, 굽은 것은 그 실제 면적을 셈해서 몇 묘(畝)로 계산하던 것은 지금 법과 같았다(첫째 편에 있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해서 정전 제도를 회복할 수 없다고 하는가?
요순과 삼왕의 시대에는 일찍이 인구를 계산해서 전지를 분배하지 않았고, 전지는 모자라는데 인구가 넘쳐나는 것은 바로 지금뿐이 아니었다(그 뜻을 앞에 말했다). 이미 이와 같이 했는데 어찌해서 정전 제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늘이 방(方)과 원(圓)의 이치를 만들어서, 무릇 원은 여섯으로 하나를 에워싸고, 방은 여덟으로 하나를 에워쌌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것을 법해서 직관 제도에 육관(六官)을 설치해서 한 임금을 받들고, 전지 제도에 8부(夫)를 두어서 공전(公田)을 다스렸다. 또한 직관이 위에 있는 까닭에 그 수리(數理)에 원을 썼고, 전지는 아래에 있는 까닭에 그 수리에 방을 썼다. 이것이 천지와 음양(陰陽)의 바른 이치이며 신성했던 제왕(帝王)의 큰 법이었다. 이를 어기는 것은 천리를 거스름이 되고, 이를 배반하는 것은 법이 아니니, 사사 뜻으로써 변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명색은 성인을 사모한다 하나 실상은 성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성인은 순박하여 팔짱을 끼고 묵묵히 이해에 관심이 없다. 그 도(道)는 바름만 지켜서 시의(時宜)에 맞지 않고, 그 마음은 광대하므로 때에 따라 오활함이 있다.” 한다. 성인을 이와 같이 아는 까닭에, 하는 일이 없을 때에는 실속없이 성인을 높이다가 일을 당해서는 제도를 의논하게 되어, 혹 성인의 법으로써 당세에 베푸는 자가 있으면, 무리지어 짖어대고 많은 사람이 꾸짖어서 고담(古談)이라고 지목하며 오원(迂遠)하다고 배격한다.
춘추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버릇이 없었는데, 7국(國)이래 진ㆍ한(秦漢) 동안에 이 풍속이 크게 성하게 되었다. 그때[古]는 옳았으나 지금에는 그르게 여기며, 고원(高遠)한 것은 좋아하고 비근(卑近)한 것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드디어 유사(遊士)의 큰 계율이 되었다. 그러나 소위 7국의 군후(君侯)들은 모두 몇 대(代) 만에 망했고, 종묘(宗廟)에 혈식(血食)도 못해서, 그 결과[成效]가 이와 같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옛법 가운데 지금에 남은 것은 오로지 〈요전(堯典)〉ㆍ〈고요모(皐陶謨)〉ㆍ〈우공(禹貢)〉 세 편과 《주례(周禮)》 여섯 편뿐이다. 나는 이 아홉 편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했는데 대개, 다년간의 그 고적(考績)하고 주적(奏績)하는 법과 정토(正土)하고 평부(平賦)하는 제도에 각종 조례는 엄혹(嚴酷)하고 늠렬(凜烈)했다. 종핵(綜核)한 것이 치밀하여 물 한 방울 새지 않고 머리카락 한 가닥 흐트러지지 않은 것이, 후세의 법처럼 기울어지거나 어수선하여 군더더기와 사마귀가 헐고 찢어진 것과 같지 않아, 그 정묘한 뜻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특히 전국 말기에 왕자(王者)의 풍도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진 시황(秦始皇)과 항우(項羽)가 불태웠는데, 드디어 1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협서율(挾書律)이 없어졌다. 이리하여 세대[宇宙]가 두 동강이 나고 삼고(三古) 적 일이 아득하여 천상(天上)과 같아졌다.
정중(鄭衆)과 정현(鄭玄) 등이 간신히 더듬어 찾아서 겨우 훈고(訓詁)는 통했으나, 실제 제도에는 엉터리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후세 사람은 두 정(鄭)의 주석으로 경서를 풀이하여 다시 연구하지도 않고, 결국에는 선왕의 법은 지금에 시행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성인은 그 지혜가 가장 깊은 데도 그가 마련한 법이 한 시대에만 적당하고 만세(萬世)에는 적당하지 않다 하니,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봉건(封建)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 법이어서 지금 사람이 반드시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고염무(顧炎武)가 지은 《군현론(郡縣論)》에는 군현 제도에 봉건하는 법을 이용하고자 했다.
지금 중국 법에, 몽고와 결혼하고 그 여서(女壻)를 북쪽 번왕(藩王)으로 삼으니 변경(邊境)이 드디어 편해졌다. 일본 법은 군현제로 바루고 봉건제를 겸하며 수령이 세습하니 나라가 편히 다스려졌다. 봉건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조짐이겠는가? 봉건하는 것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정전하는 것이겠는가?
9분의 1세는 천지 방원(方員)이 바른 이치로, 9분의 1보다 많으면 백성이 지탱하지 못하고, 9분의 1보다 가벼우면 나라가 넉넉할 수 없다. 옛적에는 9분의 1로 하여 상하(上下)가 다 편했는데, 한(漢)나라 이래로 9분의 1보다 가볍게 했다. 그러나 부역을 번거롭게 일으키고 징렴함이 한정없어 호활(豪猾)한 자가 겸병(兼幷)하니 농부가 가난해져서 수입을 모두 계산하면 10에서 7, 8을 바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진실로 9분의 1로 하는 법을 회복하여, 9분의 1세 외에 생기는 여러 가지 해를 모두 제거할 것 같으면 백성으로서 춤추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9분의 1세의 법을 시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평평한 들판, 기름진 땅을 정전으로 구획하여 구(矩)로 잰 것처럼 경ㆍ위(經緯)를 바둑판같이 반듯하게 한 다음 만민에게 보이면서, “9분의 1하는 율(率)은 이와 같다.” 한다. 드디어 이 율을 세우고 황종척(黃鐘尺)을 만들어서 여러 율을 바로잡아, 무릇 모진 것, 타원형인 것, 뾰족한 것, 굽은 것을 한결같이 이것으로 표준하니, 이것이 바로 정전을 만든 것이다. 그 본 뜻을 궁구하면 10리 또는 5리에 오직 1정(井)을 설치해도 가하다. 또 정전하는 법이 매우 좋은 까닭에 그 편평하고 광활한 땅을 모두 정전으로 구획하니, 이것이 널리 정전으로 된 까닭이다. 지금 악기를 만드는 자가 “비록 황종척이 없어도 나는 오음(五音)을 바룰 수 있다.” 한다면, 그 어리석음을 물리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제(田制)를 확립하고자 하면서도 정전을 설치하지 않으니, 악기를 만드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정전을 회복함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마땅히 한두 대신과 그 논의를 흠정(欽定 : 왕이 친재하거나 그 명을 받아 제정함)한 다음, 3일 동안 재계하고 태묘(太廟)에 들어간다. 이에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세조(世祖)와 열성 선왕(列聖先王)에게 명백하게 고(告)하기를, “경계(經界)를 다스려서 위로 왕도에 따르고, 아래로 민생을 편하게 할 것인데 만세를 위해서 경법(經法)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베풀겠습니다.” 한다. 이에 돈화문(敦化門)에 나앉아서 문무 백관과 육부 팔도의 백성을 모아서 큰 호령을 포고하기를, “내가 너희의 슬픔을 없앨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한다.
생각건대, 경계(經界)하는 것은 천지를 새로 이룩하는 큰 일이니, 그 예를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옛적에, 호령 발포를 모두 종묘에서 한 것은 감히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일은 조금이라도 경장(更張)하는 것이 있으면 삼사(三司)의 뭇 신하가 반드시 입(喙)을 다투어 논쟁하고 발언이 뜰에 가득하여, 의견이 분분하니, 먼저 성상(聖上)의 뜻을 확정함이 마땅하다.
이에 한두 대신과, 나라 일을 의논할 만한 자를 불러서 그 의논을 든든하게 정한 다음에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만 백성에게 알리면 신민으로서 보는 자는 선왕의 혼령을 속이기 어려우니 이 일은 반드시 시행될 것으로 다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무 백관들에게 거듭 타이르기를, “무릇 옛 법대로 따라서 고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정원(政院)이 그 소장을 바로 물이나 불에 던져버려라. 오직 반포한 조례에 혹 불편한 점이 있거나 더러 편리한 것이 있어 채용할 만한 것이라면 내가 기꺼이 듣겠으니 각자 죄다 아뢰어라.” 한다. 이와 같으면,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나라 일도 막히지 않을 것이다.
대저 요순이 요순으로 된 까닭은 그 역량이 넓고 큰 때문이었다. 요전(堯典)에 ‘유능분용(有能奮庸)’이라는 말이 있는데, 분이란 빠르다[迅]는 것이요, 발(發)한다는 것이다. 닭이나 양(羊)이 뛰어나게 힘이 세면 분(奮)이라 하는데, 분이란 뛰어나게 힘이 있는 것을 말한다. 경계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오직 임금의 역량이 넓고 클 뿐 아니라, 분발해서 시작하여야 이에 일할 수가 있다.
정전을 만들고자 하면 먼저 재용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에 대신을 불러서 그 의논을 흠정(欽定)한다. 하나는 서울과 지방에 유고(留庫)한 돈의 액수를 죄다 계산하는 것이고, 하나는 서울과 외방의 장신(將臣)ㆍ번신(藩臣)ㆍ수신(帥臣)ㆍ목신(牧臣)의 봉전(俸錢)을 계산하는 것이다. 합법이건 비합법이건 죄다 아뢰어서 숨김이 없도록 한 다음, 10분의 2를 남기고 나머지는 이 역사(役事)를 돕도록 한다. 하나는 여러 도(道)의 금ㆍ은광에 이미 시험해서, 희망이 있는 곳은 죄다 차관(差官)을 보내서 채굴하는 것을 감시한다. 그리고 별도로 어사를 보내서 그 간악한 짓을 엄하게 살핀다.
생각건대, 경계를 만드는 정사는 특별히 많은 비용이 들지 않고(다음 조목에 있다), 오직 공전(公田) 한 구역만을 관에서 값을 주는데 공전 한 구역은 대략 100묘이니(논 10묘 되는 땅이 바로 네 마지기[斗落]로 되었으면 100묘는 40마지기에 해당한다), 한 마지기에 1관씩이라도 그 돈은 벌써 400냥이나 된다(1관을 10냥이라 이른다). 만약 10구역을 사려면 4천 냥이고, 만약 100구역을 사려면 4만 냥이요, 만약 1천 구역이면 40만 냥, 1만 구역을 사려면 400만 냥이 된다. 비록 온 나라의 힘을 다해서 두어 주(州)의 공전을 사고자 해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함을 걱정할 터인데, 하물며 8도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매우 작아서 나라 안의 백성은 주머니 속에 있는 것 같아, 위에서 재물을 흩더라도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그대로 나라 안에 있다. 마치 굴산(屈産)의 말[乘]과 수극(垂棘)의 구슬[璧]을 내부(內府)에서 내어 외부에 두어도, 초인(楚人)이 잃었다가 초인이 얻는 것과 같아서 나라로서는 일찍이 손해됨이 없다. 관자(管子)는 강회(江淮)의 세모 띠풀(三脊茅)을 나라 화폐로 삼아서 쓰임을 넉넉하게 했다.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날로 흩어도 도로 모여져서, 범여(范蠡)가 세 번 흩었으나 세 번 모은 것 같고, 무후(武侯)가 일곱 차례 놓았다가 일곱 차례 사로잡은 것과 같다. 옛날 성인은 그렇게 되는 줄을 알았던 까닭에, “부(富)를 백성에게 갈무리한다.” 하였다. 이를 말미암아 말한다면, 조정에서 비록 날마다 천금(千金)을 허비해도 그 천금은 필경 나라 안에 있으니, 도(道)를 아는 자가 걱정할 바 아니다.
내가 일찍이 건륭(乾隆 : 淸 高宗의 연호, 1736~95) 임자년(1792) 무렵에 비변사에서 기록한 서울과 외방의 유고전(留庫錢) 액수를 보니, 병조ㆍ호조ㆍ선혜청(宣惠廳) 및 다섯 군문(軍門)에 유고된 돈이 통계 100만 5천 240냥인데, 내수사(內需司)와 장용영(壯勇營) 돈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四都)와 팔도(八道) 순병(巡兵)과 수영(水營)의 휴번전(休番錢), 칙수전(勑需錢) 및 각 항목의 유고전도 통계 100만 2천 350냥이었다.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의 그 부고(府庫)에 저장된 것이 이 같음에 불과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그러나 나라에서 저축하는 법은 물품에 따라 각각 같지 않다. 나라에 3년 동안 먹을 양식을 비축해놓지 않으면 나라 꼴이 되지 못하니 곡식을 저장해야 하며, 변경에 사단(事端)이 있으면 금은 같은 재물이 긴급히 소용되니 금은도 모아두어야 한다. 오직 돈이라는 물건은 유통하기에는 편리해도, 저축하기에는 편리하지 못하다. 그 바탕이 본디 그런 까닭으로 지금 서울과 외방에 모아둔 돈은 비록 날마다 검사하고 봉함(封緘)하여 자물쇠로 잠그더라도 마침내는 한 곳에 간직할 수가 없다. 관장하는 신하의 뜻이 수장(收藏)하는 데에 있으면 돈이 달아나지 못하지만, 관장하는 신하의 뜻이 유통하는 데에 있으면 돈은 그만 흩어진다. 혹 자신이 범하고, 혹 서리가 범하며, 혹 시정의 부유한 사람 및 빈객으로서 물화(物貨)를 무판(貿販)하는 자가 범하는데, 항상 유치되어서 흩어지지 않는 돈은 있지 않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여러 관청을 감사한 것을 보았는데, 모자라는 돈이 많을 때는 50만 냥이나 되어서 두서너 해 수입으로 겨우 그 액수를 충당했다. 또 일찍이 보니, 해주(海州) 칙수전 7만여 냥을 일개 고지기[庫奴]가 융통한 적이 있는데,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발각되지 않다가 관찰사 이의준(李義駿)이 처음으로 그 사건을 적발해서 그 액수를 충당해내었다. 이로 본다면, 이른바 돈을 유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중에서 대략 수십만 냥만 유고하고 그 나머지는 흩어서, 공전(公田)을 매입할 것이다.
그리고 재물을 관장하는 신하가 진실로 경리만 잘한다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그 원액(元額)을 충당하게 될 것이다(뜻을 다음에 밝힌다).
생각건대, 경계하는 정사는 천지를 거듭 이룩하는 큰 일이다. 그 일은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비용 또한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소민은 재물을 중하게 여기고 의리는 가볍게 여기는데, 비록 큰 부호(富豪)가 재물을 산더미같이 쌓았더라도 권할 수는 없다. 오직 맑은 조정[淸朝]에서 세록(世祿)의 신하와 늠록(廩祿)이 많은 사람으로, 젊어서는 선왕의 도를 배웠고 장성해서는 체국(體國 : 국가에 봉사함)하는 의리를 아는 자에게 수십 년 동안 녹봉을 주지 않고 그것으로 이 역사를 돕도록 하면, 그 누가 감히 즐거워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세사(歲事 : 농사)가 조금 잘못되면 문득 백관의 월록(月祿)을 줄인다. 아아! 멀리 서울을 떠나와서 벼슬하는 사람과 가난한 관청에 복무하는 신하로, 달마다 10여 말의 썩은 쌀을 받아서 연명하던 자도 가끔 그 녹을 감해서 나라의 급박한 때를 돕는데, 하물며 후한 녹을 받는 자이겠는가? 사군문(四軍門) 대장의 연봉[歲食]을 계산해서 10분의 2만 주고 그 나머지로는 죄다 공전을 매입할 것이다. 사도 유수(留守)와 팔도 감사의 연봉을 계산하고, 합법이건 비합법이건 다 기록해서 남김없이 한다. 그리하여 공용(公用)을 제외한 실제 액수를 밝혀서 10분의 2만 주고 그 나머지로는 죄다 공전을 매입할 것이다. 사도 유수(留守)와 팔도 감사의 연봉을 계산하고, 합법이건 비합법이건 다 기록해서 남김없이 한다. 그리하여 공용(公用)을 제외한 실제 액수를 밝혀서 10분의 2만 주고 그 나머지로는 공전을 매입한다. 팔도 병마사(兵馬使)ㆍ수군사(水軍使) 및 큰 주ㆍ목(州牧)과 기름지다고 일컬어지는 군ㆍ현도 모두 위에서 말한 법대로 한다. 오직 연봉이 1천 냥 미만인 곳은, 그 고을 재력에 따라서 혹 한 구역을 매입하고 혹은 반 구역을 매입해서, 더하지는 말 것이다.
전날 영조(英祖) 때에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니 군현에서 먹는 것이 혹 줄어든 것이 있었으나, 감히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줄인 것은 비록 적으나 영영 줄인 것이고, 이번에 줄이는 것은 비록 크지만 잠시 정지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원망하는 자가 있겠는가? 작록은 본시 공물이고 사물이 아닌데, 평생토록 얻지 못한 자도 오히려 제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죄 없이 무고하게 참소를 당해 법에 걸려서 수십 년을 폐고(廢錮)되어, 촌록(寸祿)도 얻지 못하는 자라도 오히려 제 운명을 편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제 몸이 그 직에 있어 존귀와 영화는 예전 같이 그대로이고, 오직 그 봉록의 줄임이 있을 뿐인데, 어찌 원망을 품겠는가? 다만 그 동안은 권속을 데리고 오지 않고, 선물 보내기를 일삼지 않으며, 전장(田莊)을 사들이지 않으면 이에 넉넉할 것이다.
평안 감사의 연봉이 24만 냥인데 그 절반은 공용이다. 9만 6천 냥을 경전사(經田司)에 납부하더라도 오히려 2만 4천 냥이 남는데, 얼고 주림을 걱정하겠는가? 황주 목사(黃州牧使)의 연봉이 3만 냥인데 그 중 1만 냥은 공용이다. 1만 6천 냥을 경전사에 납부하더라도 그 나머지가 꼭 4천 냥인데 얼고 주림을 걱정하겠는가?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으니, 여러 말은 모름지기 들을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이 돈으로 혹 경림(瓊林)에 저장하며 혹 주옥(珠玉)에 허비하여 궁전을 높게 짓고, 대사(臺榭)를 넓게 꾸미거나, 선불(仙佛)에 아첨하고 호맥(胡貉 : 북쪽 오랑캐)을 정벌해서, 그 덕을 폐한다면, 신하가 간하고 백성이 저주해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선왕의 큰 덕에 따르고 만세의 큰 법을 세워서, 위로 나라의 운명을 늘이고 아래로 백성의 삶을 후하게 하는데 그 누가 순종하지 않겠는가?
녹봉이란 임금이 주는 것이니 비록 비법적인 봉름이라도 또한 임금이 하사한 관작에 따라서 더 얻는 것이다. 무릇 임금이 주는 물건인즉, 임금이 주고 싶으면 주고, 임금이 주기 싫으면 주지 않는 것이다. 기꺼이 하고 하지 않는 그 권한이 위에 있는데 봉름을 어찌 감히 사유로 하겠는가?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임금을 섬기기에 부족하고, 임금 섬기기에 부족한 자에게 어찌 그 봉록을 먹게 하겠는가?
소하(蕭何)ㆍ조참(曹參)ㆍ장량(張良)ㆍ진평(陳平)ㆍ강후(絳侯)ㆍ관영(灌嬰)ㆍ수하(隨何)ㆍ육가(陸賈) 등은 8년 동안이나 전장에서 풍우에 시달렸다. 효자도 부모를 섬기지 못했고, 자애스러운 자도 처자를 양육하지 못했으며, 맹물을 마시고 풀을 씹으면서 한 고조(漢高祖)의 제업을 도왔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은 무엇인가? 환난을 함께 한 다음이라야 안락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의리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지금 국가에서 어지럽고 어두운[草昧] 데서 경륜해서 천지를 중창(重刱)하고자 하니 또한 어려운 시기이다. 임금의 조정에 서서 임금의 녹을 먹는 자가 이런 때에 그 돕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하를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이 뜻은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금(金)ㆍ는(銀)ㆍ동(銅)ㆍ철(鐵)은 반드시 높은 산, 큰 메에서 산출되는데, 우리나라는 동서가 1천 리요 남북은 3천 리이다. 그 사이에 편평한 언덕과 넓은 들판이 겨우 두어 곳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광혈(礦穴)이 있는 곳이다. 강계(江界)의 은파동(銀坡洞)이 우연히 은점(銀店)이 되었으나, 남방 여러 산도 실상 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안(遂安) 언진산(彦眞山)이 우연히 금점(金店)이 되었으나, 남방 여러 산도 실상 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찍이 곡산부(谷山府)를 다스렸는데 그 북쪽 마을 여러 산은 온통 은광(銀礦)이어서, 백성이 은덩이를 가지고 은점 설치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내 생각에는 이미 관(官)에서 채굴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나라를 좀먹는다고 해서 채굴을 엄금하고 허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성주(星州)와 창원(昌原)에는 모래를 일어서 얻는 금이 해마다 만(萬)을 헤아린다. 간사한 백성이 밤을 타 도굴하는데, 죽인다 해도 그만두지 않는다. 구리(銅)와 주석(朱錫)이 산출되는 것은 더구나 일정한 곳이 없어, 무릇 절골(折骨)된 사람이 백보(百步)를 나가지 않더라도 생동(生銅)을 캐니, 땅에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라에서 엄한 금령(禁令)을 내려 관에서 채굴하는 것도 허가하지 않는다. 그 까닭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는 중국에서 알면 구색(求索)함이 끝이 없을까 두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뢰배들이 모여들어서, 도망꾼을 감춰주고 간사한 자를 숨기는데, 이것들이 점점 많아지면 반란[不軌]을 도모하게 될까 염려스럽다는 것이며, 셋째는 군자의 도(道)는 이(利)를 물리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데, “취렴하는 신하는 도신(盜臣)만도 못하다.” 하여, 모든 사람들의 말이, “흥리(興利)하는 자는 모두 소인이다.”는 것이요, 넷째는, 놀고 있는 사람과 떠돌이 백성이 금은점(金銀店)을 의지할 곳으로 하여 농사를 힘쓰는 집에서 고용을 구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 등이다.
무릇 이 몇 가지는 모두 그렇지 않은 말이다. 지금 조정 명령은 황금을 가지고 중국에 가는 것은 금하지만, 나라 안에서는 금을 쓸 곳이 없는 까닭으로, 한 해에 천 근(斤)을 캐면 천 근이 중국에 들어가고, 만 근을 캐면 만 근이 중국에 들어가니, 우리나라에 황금이 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서도(西道) 고을에서 서울 관청에 상납하는 돈을 보니, 비록 만 냥이나 되어도 모두 홀동(笏洞 : 彦眞山)에서 생금(生金)을 사 가지고 가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역관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고 “왜 연금(鍊金)으로 하지 않는가?” 하니, “중국 사람이 생금을 귀하게 여기고 연금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기미년(1799) 봄에 황제의 부음을 전하는 칙사가 나온 후로부터 생금 시세가 없고 도로 연금을 구했는데, 그 까닭을 물으니, “황제의 사랑을 받던 신하 화신(和珅)이 생금 200단지로 화분(花盆)을 만들어, 금으로 흙을 삼아 그 복판에다 산호(珊瑚)를 심어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는데, 화신이 오로지 생금만을 구해서 그 빛깔을 같게 하는 까닭에 생금 값이 치솟았으나, 화신이 세력을 잃자 이 물건이 소용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중국인이 우리나라에 금이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화신도 알았는데 또 누가 모르겠는가? 이것은 오졸(迂拙)한 짓이 파탄된 것으로서, 어린아이가 제 눈을 감고서 숨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금이 중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면, 마땅히 금전(金錢)을 만들어 나라안에 통용시켜 그 값이 중국 값보다 비싸면 비록 날마다 회초리로 때리며 중국에 들어가도록 요구한다고 해도 가지고 가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세우려고 도모하지도 않고, 반드시 샐 구멍을 열어놓고 시행하지 못할 법을 베풀어서, 밖으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안으로는 소민(小民)의 습속을 무너뜨려서, 진보(珍寶)가 날로 흩어지고 기강이 날로 기울어지도록 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의 첫째이다.
가경(嘉慶) 임신년(1812)에 가산 역적(嘉山逆賊) 홍경래(洪景來) 등이 다복동(多福洞) 금점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켜서 난을 꾸몄는데, 지금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것은 오직 관에서 채굴하지 않고 백성에게 사채(私採)하도록 허가했던 까닭으로 이런 간악한 도적이 나왔던 것이다.
탁지(度支)와 수부(水部)에서 이 일을 주관하면서, 옥당 학사(玉堂學士)를 보내 감채어사(監採御史)로 삼고, 호조 정랑(戶曹正郞)과 공조 정랑으로서 일찍이 광주(光州)나 나주(羅州)의 목사를 지낸 자에게 가서 그 일을 다스리도록 한다. 무릇 군정(軍丁)을 고용하여 금을 고르되 인원 수를 엄하게 정해서, 그 근맥(根脈)을 조사하여 그 성질을 살피고, 이에 대오(隊伍)를 편성해서 일제히 단속하며, 일체 간사한 백성과 교활한 장사치는 죄 다 물리친다. 사방 5리에 목책(木柵)을 설치해서 표를 세우고 백성의 왕래를 금단하여 전력(專力)으로 금을 캐서 호조에 들인다면, 그 틈에 사고를 내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이렇게 계획을 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이에 토호와 교활한 자에게 스스로 광주(礦主)가 되도록 하고, 혹 감영 비장(監營裨將)이나 고을 군교(軍校)에게 가서 감독하도록 하니 천류(賤流)와 소민(小民)이 서로 더불어 부동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백 가지 간사함이 엇갈려 날뛰고 서로 치솟으며, 무뢰배(無賴輩)를 불러들여서 어지럽게 기통(紀統)이 없으니, 그 폐단에 홍경래 따위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우공편(禹貢篇)을 보면 형주(荊州)ㆍ양주(楊州)는 모두 금ㆍ는ㆍ동 세가지 물품을 공(貢)으로 바쳤는데, 그 주(州)의 제후도 각각 관채(官採)가 있음을 밝힌 까닭에 주(州)를 다스리는 목(牧)이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례》에는 광인(礦人)이 금ㆍ옥ㆍ주석ㆍ광석이 산출되는 지역을 관장해서 여금(厲禁)했는데, 여금이란 백성이 사채(私採)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차례로 전장(典章)을 고찰하여도, 금ㆍ는ㆍ동ㆍ철을 불에 달구어 불리는 것은 모두 관적(官籍)에 올렸으니, 어찌 사채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백성에게 사채하도록 허가하는 것은 본시 동국 풍속이니 이것이 잘못된 것의 둘째이다. 《대학(大學)》 한 편에 취렴(聚斂)하는 것을 깊이 경계했는데, 취렴이란 전부(田賦)를 이랑에 따라 징수하는 법을 쓰는 것을 말한다. 나라에 재물이 나지 않으니 그 형편에 취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실로 제사(祭祀)ㆍ빈객(賓客)ㆍ희름(餼廩)ㆍ병갑(兵甲)의 비용이 막대한데, 재물 나올 구멍은 없고 쓰임이 긴급하면 임시로 취렴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번이라도 취렴하게 되면 도리어 금석 같은 전칙(典則)으로 굳어지는데, 취렴의 해(害)는 재물이 나지 않는 데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대학》에, “재물을 생산하는 데에 큰 도가 있다. 생산하는 자가 많고 일하는 것이 빠르면 재물은 항상 풍족해진다.” 하였다. 성인이 재물을 생산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다. 진ㆍ한(秦漢) 이후, 촉한(蜀漢) 이전은, 사기(史記)에 금은을 채굴했다는 말이 없으나 황금이 똥같이 흔해서 적군을 반간(反間)하는 데에 쓰던 금이 만 일(萬鎰 : 한 일은 스무 냥임), 천 일(千鎰) 이하가 아니었고, 상사(賞賜)하던 금도 반드시 천 근(千斤), 백 근(百斤)이나 되었다. 이와 같았음은, 삼대 때 남은 금이 내려와서 모자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유자(儒者)는 글 읽은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또 배운 것에 치우침이 있어 그 말류의 폐단은 무릇 산림(山林)과 경악(經幄)의 신하가 책을 끼고 연석(筵席)에 오르면 오직 이기설(理氣說)과 심성설(心性說)만 논해 아뢸 뿐이고, 한 글자 반 글귀라도 감히 재부(財賦)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사람도 재질이 본디 소명하니, 천하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재부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나, 이런 아룀이 한번 나오면 무리지어 조롱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어서 명성이 크게 떨어진다. 차라리 식자의 남모르게 하는 비웃음을 받을지언정 망령된 사람들의 현저한 배척을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에, 예(例)에 따라 부연해서 아뢰고 물러나간다.
공자가 그 제자를 칭찬하면서, “유(由 : 자로)는 천승(千乘) 나라의 재부(財賦)를 다스리게 할 만하고, 구(求 : 염구)는 천실(千室) 되는 고을의 수재(守宰)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자고로 재물을 생산하고 돈을 모으는 데에는 관중(管仲) 같은 자가 없었는데, 공자는 항상 그의 공을 칭찬했다. 재부를 전적으로 더러운 물건이라 해서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것은 천하 국가를 경영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나라 선배로는 오직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을 개량해서 10만 군사를 양성하자는 말로 임금 앞에 거듭 아뢰었으니, 참으로 쓸모 있는 학문이었다.
일절(一節 : 절조만 지켜 융통성이 없는 사람)만의 선비가 재부를 거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김도 오히려 부당한데, 하물며 만승의 나라 임금과, 삼사(三事)의 신하가 청소(淸疏 : 청렴하고 소루함)함이 이와 같아서야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이것이 잘못된 셋째이다.
《주례》에, “아홉 가지 직으로써 만민을 다스리도록 맡겼는데, 아홉 가지 직에 농사도 한몫을 차지했다. 셋째가 우형(虞衡)인데 산택(山澤)을 맡고, 다섯째가 백공(百工)인데 8가지 재료로 기물을 만든다.” 하였으니, 천하 백성이 반드시 모두 농사만 하도록 권하지 않았다. 농부는 농사하고 광부(礦夫)는 광산(礦山)을 해도 서로 방해되지 않았다. 광혈(礦穴)에서 몇 리[數里] 안에 있는 농부가 혹 고용인을 구할 수 없어 걱정한다 해도, 어찌 죄다 돌볼 수가 있겠는가? 사설한 금점이 통솔받는 곳이 없어서 난잡한 까닭에, 노는 사람과 떠돌이 백성이 점 안에서 까닭없이 얻어먹고 있으니 폐단이 되었다. 만약 관에서 행사(行司 : 출장소 따위)를 설치하고 엄하게 단속하면, 떠돌고 노는 백성이 10에 7, 8은 줄어들어 또한 농사에 해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잘못된 것의 넷째이다. 나는 여러 도(道)의 금ㆍ는ㆍ동ㆍ철이 나는 곳에 관야(官冶 : 國立製鍊所) 수백 개처를 설치하고 빨리 제련하여 그 소득으로써 서울과 지방에 방출했던 유고전(留庫錢)의 액수를 보충하며, 세출은 전적으로 주화를 사용했으면 한다. 금ㆍ는ㆍ동 세 가지 돈을 각각 3등으로 갖추고 이 아홉 가지 화폐를 나라 안에 통용시켜 금ㆍ은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영구히 막고, 공전(公田) 값을 서서히 충당함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금ㆍ는ㆍ동에 대해서는 또 다른 편에 자세히 적었다).
또 생각건대, 전지를 많이 가진 사민(士民) 중에는 이 일에 대해 감격 흔희(感激欣喜)해서 전지 바치기를 자원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일찍이 도신(道臣)이나 목신(牧臣)을 지낸 사람 중에 유애(遺愛 : 사람은 떠났으나 사랑은 남아 있음)와 인성(仁聲 : 인자하다는 명성)이 있던 자를 보내서 전야(田野)에 순행하도록 한다. 조정의 덕의(德義)를 밝게 교유하고, 민국(民國)의 이해를 자세히 말해주어, 청종(聽從)하는 자가 있으면 그 전지를 모두 기록한다.
생각건대, 조정에서 이런 큰 정사를 하면서 먼저 서민과 의논함은 마땅하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먼저 비용을 마련해서 사체를 바룬다. 그러나 백성의 타고난 천성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지라, 충순하고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대마다 있는 것인데, 더구나 수십 년 이래 백성은 쌓인 곤핍과 무법한 징렴 때문에 살아가지를 못하며, 기사년(1809)ㆍ갑술년(1814) 이래로 가난한 백성이 거의 다 죽어서 민호(民戶)가 감소한 탓에 살아남은 자에게는 요역이 갑절이나 무거워져 쌓인 원망과 깊은 슬픔에 가슴이 답답한데, 조정에서 이런 큰 정사를 행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반드시 감분(感奮)해서 힘을 내어 돕는 자가 있을 것임에랴. 더더구나 그 분명한 효과가 조석(朝夕)같이 가까워, 오원(迂遠)한 일이 오랜 시일을 지난 다음이라야 이룩되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이해에 밝은 자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하여 득실을 비교하면, 또한 기꺼이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내가 마침 이 편을 엮을 때 어떤 부자가 왔기에, 시험삼아, “자네는 부정한 징렴에 곤란당했으니 장차 파산하게 되리라(전 監司 金啓溫의 상소에, “흉년 끝에 부역이 번거로우니 민간에서는, ‘풍년이 흉년보다 못하고, 부자가 가난뱅이보다 못하고,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고 하니, 사람들은 이를 명언이라 합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부유한 백성이 더욱 곤란함을 밝힌 것이다). 만약 조정에서 9분의 1세의 법을 밝혀서 이리이리 한다면, 자네의 기름진 전지는 이미 천맥(阡陌)에 연달아, 아홉 점지기[苫落 : 180두를 심는 곳이다]에 한 점지기씩을 납부해서 공전으로 만들고, 드디어 여덟 농부에게 공전을 농사하도록 하면서 자신은 전감(田監)이 된다. 그리하여 그 조속(耡粟)을 거두어서 조창(漕倉)에 바치면 돈 한 푼, 곡식 한 톨도 다시는 징렴함이 없을 것이다. 징렴함이 있게 되면 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으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즐거워하여 무릎을 치면서, “진실로 이와 같다면 어찌 다만 한 점지기뿐이겠나. 비록 세 점지기를 바치더라도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개, 돼지만도 못하다. 나라를 돕는 것은 우선 두고라도, 고을 아전들의 소굴이 깨어질 참이니, 그 부끄러움을 씻고 분함을 푸는 것만으로도 또한 즐겁지 않겠나?”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의 말은 지나치다. 오늘 한 말은, 내가 한담으로 했고 자네도 무심하게 들었으므로, 가볍게 대답한 것일 뿐이다. 만약 한 사신이 진짜로 내려온다면 겁내고 걱정할 자가 자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이해가 이러이러하니, 자네는 자세히 상량(商量)해보게.” 하니, 그 사람이 손가락을 꼽으며 셈하다가 다시 기꺼워하며, “내가 만약 아홉 점지기를 방납(防納)하면 벼가 45섬(900말)이고, 한 점마다 3냥이면 그 돈이 135냥이다. 지금 논 한 마지기 값이 많은 것은 5냥, 적은 것은 3냥이고, 한 점지기는 많아야 100냥, 적은 것은 60냥이니, 비록 많은 쪽을 따라서 셈하더라도 내가 30냥 이를 본다. 내가 100냥 돈을 방채(放債)해서 그 이자를 1년만에 거두는데, 만약 10의 3을 이자로 받을 것 같으면 나는 그 사람의 신의(信義)를 감사하게 여기고, 재물이 불어난 것을 기뻐할 참인데, 하물며 이것은 앉아서 얻는 것이겠는가? 내가 100냥으로 먼저 대토(代土 : 민간에서는 이 전지를 팔아서 저 전지를 사는 것을 대토라고 이른다)를 잡고, 35냥으로 또 논을 사면 그것이 일곱 마지기이니, 일곱 마지기가 나의 이득이다. 비록 오는 해에 그 법을 도로 파하더라도 나는 벌써 크게 장사했는데, 하물며 해마다 남는 이를 얻어서 자손 만대에 이런 큰 복을 누리는 것이겠는가? 위로 조정 명령에 순종해서 아름다운 명망을 얻고 아래로 자손[家嗣]에게 덕 되게 해서 영원한 이를 누리는데, 내가 풍증을 앓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백 번 절하고 전지를 바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옆에서 가난한 사람 하나가 잠자코 앉아서 듣다가, 다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기름지지 못한 논 두어 배미가 있는데, 서 말은 심을 만하니, 그 가운데 한 말 심는 것은 바쳐서 이 사업을 이룩하기를 바란다.” 했으니, 이것은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이다. 그 후에도 시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 이것을 물었더니, 대답이 모두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관에서 돈을 내어 공전(公田)을 산다는 전번의 말은 곧 준비하기 위함이고, 반드시 낱낱이 돈을 주고서 구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식례(式例)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혹 전지가 아홉 점지기 있는 자는 한 점지기를 바쳐서 공전으로 만드는 것을 허가하고, 아홉 섬지기 있는 자는 한 섬지기를 바쳐서 공전으로 만드는 것을 허가하며(한 섬은 15말이다), 전지 아홉 곡(斛)지기를 가진 자는 한 곡지기를 바쳐서 공전으로 만드는 것을 허가한다(한 곡은 10말이다). 그리고 전지가 9곡 미만인 자는 전지 바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데, 혹 그 전지를 꼭 공전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관에서 돈을 내어서 매입한다. 그런데 이해를 헤아림은 빈부가 모두 같으나, 반드시 값을 표준해서 사사 매매와 같지 않게 할 것이다. 관에서는 비록 후한 값에 따를 것이나, 백성은 싼 값에 따름이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은 만에 하나도 같지 않으니, 다만 그들의 소원에 따라서 후한 값으로 하는 것을 식례로 함이 마땅하다.
총괄해서 말한다면,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는 데는 반드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고, 반드시 본도 감사를 역임하여 유애(遺愛)와 인성(仁聲)이 있는 자라야 이에 그 일을 이룩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믿지 않고, 백성이 믿지 않으면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에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경전사(經田司)라 하고, 오로지 이 일을 관장한다. 그 제조(提調)에는 경(卿) 1인, 중대부(中大夫) 2인, 하대부(下大夫) 2인을, 부정(副正)에는상사(上士) 2인과 주사(主事)ㆍ중사(中士) 4인을 둔다. 문리를 정밀하게 살피는 사람을 엄격하게 선발하여 경계(經界)를 바루도록 한다.
제조 3원(員)은 호조의 3대부로 삼고, 2원은 꼼꼼하고 명찰(明察)한 사람을 별도로 뽑는다. 부정 2원은 옥당(玉堂)에서 가려보내는데 외방에 나가면 경전어사(經田御史)가 된다. 주사 4인은 일찍이 수령을 지냈고, 성적이 있었던 자로써 삼는다.
이것은 항상 있는 관직이니 만약 경계하는 시초에는 더 차임함이 마땅하다.
도제조(都提調)는 삼공(三公)으로 하고 또 원외랑(員外郞) 몇 자리를 두어 그 직품에 따라서 혹은 주사, 혹은 감역(監役), 혹은 참군(參軍 : 다음 조에 밝혔다)이라 일컬어서 전지에 대한 일을 다스리다가 경계가 완성(完成)됨을 기다려서 아울러 감원한다.
생각건대, 이 일이 비록 큰 일이나, 그 제조는 다섯 자리 외에 반드시 더 차임할 것이 아니다. 진실로 발언이 조정에 가득해도 일의 공효에는 보탬이 없다. 당ㆍ우(唐虞) 즈음에 사업이 훌륭했던 것은 오직 우ㆍ직(禹稷) 두 사람이 그 일을 전담했기 때문이니, 성인의 일하던 법은 본디부터 이와 같았던 것이다.
여러 도에 신칙해서 무릇 편평한 들판, 넓고 기름진 땅에는 먼저 정전을 구획하여, 혹 3리에 1정(井), 혹은 5리에 1정을 만듦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주척(周尺)의 진짜 도수는 지금 전해오는 것은 없고, 여러 서적에 있는 것도 들쭉날쭉해서 일치하지 않는다. 오직 중인(中人)의 손가락 치수는 어긋남이 그리 동떨어지지 않으니 《대대례(大戴禮)》에, “손가락을 펴서 치수를 안다.”는 것도 이것을 이름이다. 지금은 시왕(時王 : 당시의 임금)의 가운뎃손가락 중간 마디의 양쪽 무늬 사이를 한 치로 정해서 자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이리하여 여섯 자를 1보(步)로, 100보를 1묘(畝)로, 100묘를 1부(夫)로, 9부를 1정(井)으로 하는데, 구(溝)ㆍ수(遂)ㆍ경(徑)ㆍ도(涂)는 별도로 땅을 구획할 것이므로 계산 안에 들지 않는다.
지금 나라 안 전지는 사전 아닌 것이 없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크게 하려고 하면 자잘한 절차를 어찌 돌아보겠는가? 무릇 정전으로 할 만한 곳은 좋아하는지의 여부를 묻지 말고 정(井)으로 구획한 다음에, 이에 값을 물어서 공전 한 구역의 값을 관에서 정하는데 대략 후한 쪽을 따르고, 사전 여덟 구(區)는 시점(時占)에게 묻는다(모든 전지는 王田이니 사사 주인을 田主라 할 수 없으므로 시점이라 부르는 것이다. 다음도 모두 같으니, 보는 자는 살필 것이다). 만약 그 여덟 구가 모두 한 집 전지로 되어 있으면 또한 예전대로 해서 갈라 쪼개는 일이 없도록 하고, 다만 시점으로 하여금 여덟 농부를 엄선해서 여덟 구역을 갈라주도록 하며, 한 농부가 전지 두 구역을 얻지 못하도록 하면 이것이 정전이다. 이에 여덟 농부에게 함께 공전을 농사해서, 하나같이 옛 법대로 한다. 가을이 되면 공전 곡식을 수확해서 이것을 바칠 뿐이고, 다시 조세와 잡된 요역으로써 이 여덟 부를 침해함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9분의 1로 하는 것이다.
만약 여덟 구의 전지가 본디 여러 사람의 소유로 되어서 정전을 구획할 때에 혹 한 귀퉁이가 정(井)에 들어가거나, 혹은 한 귀퉁이에 모자람이 있는 것은 팔도록 하여 정방(正方)으로 만들고 매입해서 완전한 구로 만들되, 공론해서 값을 정하는데 대략 평균을 따른다.
만약 한 구 안에 반은 갑의 전지이고 반은 을의 전지인데 갑ㆍ을이 모두 가난해서 아무도 사서 합치지 못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경농하도록 허가한다.
이 여덟 농부는 그 집에 반드시 장정 세 사람이 있어야 이에 전지를 받는다. 두 집마다 소 한 마리가 있어야 이에 합우(合
무릇 정을 만드는 일에는 그 전부(佃夫)를 부리고, 부족하면 그 이웃 전지의 전부를 부린다.
무릇 전지 역사(役事)는 모두 상강(霜降) 후에 기공(起工)해서 춘분(春分) 전에 필역(畢役)한다. 만약 마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음 가을까지 기다린다. 그 편평한 둔덕, 널따란 들에 더 구획할 수 있는 곳은 혹은 4정을 만들고 혹은 9정을 만들기도 하며, 혹은 16정을 만들거나 혹은 25정을 만들기도 한다. 특별히 재간 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며, 경계를 이미 구획했으면 초사(初仕)를 제수하되, 승진 또는 전직에 각각 차등이 있게 한다.
생각건대, 표준[黃鐘]으로 백성에게 보이는 정(井)은 비록 3리에 1정을 만들거나(사람이 조밀한 곳이다), 5리에 1정을 만들더라도(마을이 드문 곳이다)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정전은 본디 좋은 법이니 이것을 인연해서 확대하여 9분의 1로 하는 조법(助法)을 더욱 명백하게 함은 그만둘 수 없다. 그런데 표준으로 만드는 정은 백성이 비록 좋아하지 않더라도 관에서 누름이 마땅하고, 정전을 확대하는 것은 백성이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할 필요는 없다. 마땅히 재물이 많고 재간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이정을 만들도록 하는데, 귀한 씨족으로 글 공부를 한 자는 동반(東班) 벼슬을 상주고, 냉락(冷落)한 씨족으로 글을 못한 자는 서반(西班) 벼슬을 상주되 반드시 다른 직을 제수하지 말고, 바로 경전사의 감역 몇 자리, 참군 몇 자리를 더 설치한다. 인원을 한정하지 말고 9품 초사 자리를 만들어서 그 사람을 대우한다.
무릇 네 정을 만든 자는 곧 교지(敎旨)를 주며, 일을 마친 다음에 그대로 그곳에서 전사(田事)를 살피도록 하는데, 6년 동안 감농(監農)하여야 이에 중사(中士)로 승진시켜(지금의 出六과 같다) 여러 사(司)의 직장(直長)이 되어, 서울 관청 벼슬에 들어간다(네 정은 2×2 開方한 것인데, 그 전지는 모두 3천 300묘이다). 무릇 아홉 정을 만든 자는 곧 교지를 주며, 일을 마친 다음, 그대로 그곳에서 전사를 살피는데, 5년 동안 감농하여야 이에 중사로 승진하며, 서울 관청 벼슬에 들어간다(아홉 정은 3×3 개방한 것으로, 그 전지는 모두 8천 100묘이다). 무릇 열 여섯 정을 만든 자는 위의 예와 같이 하며, 4년 동안 감농하면 이에 중사로 승진한다(열 여섯 정은 4×4 개방한 것으로, 그 전지는 모두 1만 4천 400묘이다). 무릇 스물 다섯 정을 만든 자는 위의 예와 같이 하며 3년 동안 감농하면 이에 중사로 승진한다(스물 다섯 정은 5×5 개방한 것으로, 그 전지는 모두 2만 2천 500묘이다).
네 정을 만든 자는 임기가 만료되면 외방으로 나가서 찰방이나 변장(邊將)이 되며, 아홉 정을 만든 자는 만기가 되면 외방으로 나가서 현령이 된다. 그리고 열 여섯 정과 스물 다섯 정을 만든 자는 오직 그 근로(勤勞)했음을 기록할 만할 뿐 아니라, 그 재국(才局)과 역량이 큰 일을 부탁할 만하다. 그러므로 현령에서 승진시켜 군수와 목사가 되기도 하며, 드디어 번곤천망(藩閫薦望)에 천거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편평한 둔덕이 매우 적으니 스물 다섯 정 이상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스물 다섯 정은 사방 5리이다.
비록 재물은 많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덕망과 위세가 족히 한 고을을 화목하게 할 자가 있으면 이 직을 맡김이 마땅하다. 재물을 소비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친척과 벗 중에 반드시 서로 도와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본보기로 만드는 정은 어사가 주장하며(경전사 郞官이 외방에 나가면 경전어사가 된다), 정전을 확장하는 정사는 한결같이 이 사람들에게 맡겨서 그 한 모퉁이를 매매하는 것과 반 도막이 섞인 것(이미 앞에 말했다), 백성을 부리고 재물을 쓰는 것을 관에서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오직 정지(井地)를 시점(時占)한 사람 중에 공론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사욕만 부려서, 억세게 막으며 사납게 끌어서 큰 일을 방해하는 자는 감역과 참군이 어사에게 논보(論報)하여 엄형(嚴刑)한 다음 멀리 귀양 보내고, 혹 조정을 비방해서 만대의 이(利)를 막는 자에게는 바로 극률(極律)을 적용하며, 감역이나 참군으로서 공론을 어기고, 사정(私情)에 따라서 비용을 아끼고, 위엄을 부려서 민원을 일으킨 자는 어사가 경고하며, 죄가 큰 자는 논계해서 파직시킨다.
무릇 정전을 만드는 것은 모두 위에 말한 예를 적용한다. 그 공전 값은 본 고을에서 지급하고, 기타 잡비는 감역과 참군이 스스로 마련하는 것을 허가한다.
감역이나 참군이 혹 일을 마치기 전에 그 친상을 만나면, 그 직명(職名)을 체면(遞免)하도록 허가한다. 장사를 치른 뒤에는 그 형제 자질(子姪)과 더불어 전사(田事)를 살피도록 하되, 직명은 다시 주지 않다가 복(服)을 벗으면 본직을 도로 제수한다.
감역과 참군의 품계가 승진되어서, 상경(上京)할 때까지의 그 녹미(祿米)와 대두(大豆)는, 본현에서 저치미(儲置米)로써 달마다 갈라주되, 아울러 본품(本品)대로 한다.
감역과 참군에게도 수종(隨從)이 있어야 하는데, 서사(書史) 1명, 하례 2명을 아울러, 본 마을에서 사람을 뽑아 스스로 따르도록 한다.
혹자는, “작록은 명기(名器)의 큰 것이다. 지금 구ㆍ혁(溝洫) 따위를 만드는 작은 수고로움에 대해 가볍게 작록을 주는 것은, 비록 귀한 씨족이라도 오히려 삼가는 것이 마땅한데, 하물며 냉락(冷落)한 족속이겠는가? 그 재물을 보고 이 일을 맡겼다가 모두 입사시키면 명기가 헤퍼지고 체면이 구차해질 터이니, 어찌 왕자의 정사이겠는가?” 한다.
나는 대답하기를, “경계(經界)란 왕정의 근본이다. 《요전(堯典)》을 보면, 관직을 임명하면서 먼저 직(稷)에게 명하고, 이에 사도(司徒)에게 명해서 비로소 오교(五敎)로 베풀었다. 공자가 왕정을 논하면서 “먼저 부하게 한 다음에 가르친다.” 하였고, 맹자도 왕도를 논하면서 먼저 백 묘를 말하고 이에 효제를 말했다. 무릇 오교가 급한 것이기는 하나 전정보다 뒤로 했은즉, 왕정은 경계하는 일보다 큰 것이 없다.
경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호구(戶口)가 분명하지 못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며, 교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병비를 부칠 데가 없으며, 간사한 것이 그치지 않고, 사송(詞訟)이 날로 번거로워져서 만 가지 병통과 천 가지 폐단이 끊이지 않아 시끄럽고 어지러워진다. 동을 두드리고 서쪽으로 부딪혀서 다스릴 수 없게 되니, 왕정 중에 경계하는 일보다 큰 것은 없다. 이 일을 다스리고자 하는데 무슨 벼슬을 아끼겠는가?
지금 시를 짓고 부(賦)를 짓는 잡스러운 기예와 광대들의 천한 재주는, 항우(項羽)와 패공(沛公)을 들추는 미친 말과 망령된 논설로 국가에 보탬이 없고 백성에게도 도움이 없다. 그런데 이것으로써 세마(洗馬)를 삼고, 이것으로써 교리(校理)를 삼으며, 이것으로써 총재(冢宰)를 삼고, 이것으로써 정승을 삼아도 명기가 날로 헤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경계하는 큰 일은 위로 나라의 운수를 길게 하고, 아래로 백성의 부역을 평균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ㆍ직(禹稷)의 아류(亞流)와 이회(李悝)ㆍ조과(趙過)에 백중(伯仲)하는 사람에게 감역ㆍ참군을 제수했다가 그 공적을 아뢰면 찰방(察訪)이나 현령(縣令)으로 제수하는데, 홀로 명기를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가?
한(漢)나라에는 역전과(力田科)가 있어, 무릇 농사에 힘써서 곡식 2천 석을 축적한 자는 천문(薦聞)해서 낭관(郞官)으로 제수하였다. 저 사람은 제 농사를 힘껏 했을 뿐이고 백성과 나라에 관여됨이 없었으나 오히려 천진(薦進)하였는데, 하물며 위로 임금의 명령에 순종해서 왕도를 도왔는데도 그 공이 벼슬하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인가? 한나라 무제(武帝)는 전천추(田千秋)를 부민후(富民侯)로 삼았으니, 후(侯)로 봉해도 오히려 가했는데 하물며 벼슬에 임명하는 것쯤이겠는가?
우리 동방(東方)은 천지 개벽 이래로 그 산림ㆍ천택ㆍ구릉(丘陵)ㆍ원습(原濕)이 본래 그 바탕대로 오늘에 이르러서, 혼돈이 트이지 않았고 대박(大朴)이 흩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 큰 사업은 이에 수인씨(燧人氏)와 염제(炎帝)가 물(物)을 열어서 일을 이룩하던 시초이며, 황제(黃帝)와 요순이 구획해서 경리하던 정사이다. 이런 때를 당해서 이 사업에 공이 있는 자는 비록 하집사(下執事)의 반열에 있는 자라도 태사(太社)에 배향(配享)하여 영구히 잊지 않음이 마땅한데, 하물며 변변치 못한 9품 관직이야 어찌 말할 것이겠는가?” 했다.
그대는 “체면이 구차스러워진다.”고 일렀으나, 나는 “재물이 많이 있다는 것으로써 선발함이 반드시 공론으로 선거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이른다. 그러나 이 일에는 허비가 능히 없지 않는데, 진실로 관에서 다 지급하고자 한다면 비록 태창(太倉)을 다 비우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향리 호족에게 사삿일같이 다스리도록 하면 그 쓰임새가 헤프지 않아서 가산을 탕진할 걱정이 없으면서 사공(事功)은 이루어진다. 그 작은 절차에 얽매여서 큰 사업을 폐하는 것이 작은 혐의를 버려서 큰 덕을 이룩함과 어찌 같겠는가?
무릇 공전은 관에서 그 값을 지급하고, 모든 사전(私田)은 모두 예전대로 차지하니, 저가 비록 재물이 많더라도 실상 큰 허비는 없으니, 체면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다만 재물이 많은 다음이라야 그 정전이 된 땅에 제 소유물이 많고, 농부도 제 역속(役屬)이 많아진다. 그 노복이 사령을 대비하기에 족하고, 전포(錢布)도 변통[推移]하기에 족히 이바지하는데, 이런 것을 계산할 때에 재물 많은 자가 아니면 능히 해내지 못한다. 오직 큰 덕행과 큰 권세는 많은 재물을 당적할 만하므로 이에 아울러 천거하는 바이다.
혹자는, “경계하는 일이 이미 나라의 큰 정사라면,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가서 그 일을 다스리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 수령(守令)이 있어 이미 그 지방 주인이 되어 있으니, 그들에게 감동(監董)하도록 하면 거의 기강이 있을 것이다. 지금 초야 한사(草野寒士)에게 이런 큰 정사를 하루 아침에 맡기면 어찌 그르침이 없겠는가?” 한다.
나는 대답하기를 “농사일은 농노에게 물음이 마땅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 물음이 마땅하다. 조정 일은 귀신(貴臣)이 알지만, 초야 일은 한사(寒士)라야 알 것이니, 이는 배우고 익힌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주전(廚傳 : 음식을 공궤하는 일)하며 체류하니 공비(公費)를 감당하기 어렵고, 물정(物情)이 막혀서 민원을 살피기 어려우며, 지위가 존엄하여 역정(役丁)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가지런하게 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수령에게 한번이라도 혹 간여하도록 하면, 간활한 아전이 그 사이에 끼여들어서, 뇌물을 받고 간사함을 꾸며서 제마음대로 넓히기도 좁히기도 할 것이다.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에 방전(方田)하던 일은 전일 경계[前鑒]가 분명하니, 그것을 도습(蹈襲)할 수는 없다.” 하였다.
무릇 군ㆍ현(郡縣)에 혹 문무 조관으로 있다가 낙직(落職)되어 한가하게 사는 자가 있으면 경전사에서 천거해서 그 일을 맡긴다. 혹 벼슬해서 현재 조정에 있거나, 혹 수령으로 나갔더라도 아홉 정(井) 이상을 만들 만한 땅을 본 고을에 가졌으면, 경전사에서 내려보내기를 계청해서 전지 일을 다스리도록 한다.
생각건대, 조관이라 해도 반드시 모두 어질지 않고, 또 반드시 재화를 쌓아서 가난하지 않은 다음이라야 이 일을 맡길 수 있다. 만약 재략(材略)이 본디 얕고 가벼우면서, 한갓 조관이라는 것으로써 공을 바라고 상을 넘보아서 이일 맡기를 도모하는 자는 엄금해서 허가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허가한 자로서 대부(大夫)는 경전부사(經田副使), 상사(上士)와 중사(中士)는 경전사원외랑(經田司員外郞)이라 일컬으며, 하사(下士)는 감역이나 참군이라 일컬어서 직첩을 준다.
현재 벼슬하는 조관은 그 본직을 체임(遞任)하고 경전사 직명으로 고쳐서 제수한다. 무릇 조관으로서 이 일을 맡은 자가 일을 마치면 곧 경관(京官)으로 옮겨서 그 공(功)으로 특별히 서용(叙用)한다. 하사는 중사로, 중사는 상사로, 상사는 대부로 승진시키는데, 혹 그대로 본군이나 본현의 수령으로 제수해서 그 다음에도 잘 하도록 하기도 한다.
2ㆍ3ㆍ4ㆍ5로 개방(開方)한 외에, 혹 그 옆에도 1정을 구획할 만한 것은 또한 본현에서 사람을 뽑아서 맡기고 본현에서 시상한다. 생각건대, 힘이 모자라서 일을 능히 크게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편평한 들판, 기름진 땅에 진실로 경계할 만한 것은 비록 한 부(畉), 두 부라도 모두 구획함이 마땅한데, 하물며 한 정을 만들 만한 땅이겠는가? 본현에서 사람을 뽑아서 일을 맡기고 일이 끝나거든 혹 향관(鄕官)을 제수하거나 혹은 토교(土校)로, 혹은 장관(將官 : 千摠ㆍ把摠)으로 제수한다. 혹 한두 부(畉)를 방전(方田)으로 만들어서 100묘로 구획하고, 네 모서리를 법대로 한 자는 또한 상을 차등 있게 시행한다. 무릇 한 정을 만든 것은 오직 복판 한 구역이 공전(公田)이 되며, 무릇 한 두 부를 만든 것도 구획한 것은 모두 아울러 공전으로 만들어서, 관에서 그 값을 지급한다.
정을 만들 만한데 정을 만들지 않은 것과, 끝내 정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은 모두 타량(打量 : 전지를 측량함)해서 그 실제 면적을 계산한다. 무릇 4방 여섯 자는 1보(步)가 되고, 10보는 1능(畯)이, 10능은 1묘(畝)가, 10묘는 1견(畎)이, 10견은 1부(畉)가 된다.
생각건대, 경계란, 형체가 있는 물(物)이고, 기름지고 메마름은 형체가 없는 바탕이다. 형체가 있으면 자로 잴 수가 있지만, 형체가 없으면 오직 호소하는 것에 빙준(憑準)할 뿐이다. 자로 재면 사사가 없어서 속일 수 없지만, 호소하는 것은 속임이 많아서 믿을 수가 없다. 비록 기름지고 메마른 토질이 1천 묘에 연달아서 모두 같고 만고에 변치 않았더라도 오히려 알기가 어렵다. 하물며 흙의 기름지고 메마름은 반 걸음 사이에도 다르고, 세월따라 변한다. 마을이 번성하고 인구가 조밀하면 메마르던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을이 쇠잔하고 인구가 희소하면 기름지던 땅도 메마르게 된다. 혹 솔숲이 근처에 무성하면 토질이 갑자기 메말라지고, 혹 개흙이 위를 덮으면 곡식 소출이 갑절이 된다. 혹 이유없이 토성(土性)이 갑자기 약해지고 샘물이 갑자기 마르기도 한다. 이것이 약해지면 저것은 성해지고, 이것이 마르면 저것은 넘치는데, 옮겨지고 변해져서 하나를 잡아 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잘라서 9등으로 확정하고 변동 없이 영세토록 미치게 함은, 물리에 통한 정사가 아니다. 하물며 6등으로 차이가 있게 하고 등마다 길고 짧음과, 넓고 좁은 차이가 있는데, 이것으로써 파ㆍ속ㆍ부ㆍ결로 만들 수 있겠는가?
나는 또 생각해보니, 정전하는 법은 다만 9분의 1의 조속(耡粟)을 거둘뿐이고 흙의 기름짐과 메마름은 원래부터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공(禹貢)에 9등이라는 문구가 있음은 반드시 공전 곡식이 정마다 같지 않으므로 부득불 9등으로 갈라서 그 대총(大摠)을 살폈던 것이었다. 사전의 기름짐과 메마름도 반드시 등을 분간한 것은 아니나, 《주례》에는 대사도(大司徒)가 9등으로써 천하의 지정(地征)을 마련했는데, 상지(上地)ㆍ중지ㆍ하지라 이른 것이 그 대강(大綱)이다(뜻은 앞에 말했다). 그런즉 형체 없는 바탕을 주(周)나라에서는 무엇으로써 분별했을까? 내 생각에는, 지금 전지는 모두 사전인데 관에서 세액을 덮어씌우고자 한다. 그러므로 기름진 것을 숨겨서 메마르다고 하여, 그 참과 거짓을 알기가 어렵다.
옛적에는 전지가 모두 왕전(王田)이었고, 관에서 농부에게 주어서 농사짓도록 했던 까닭에, 기름진 땅을 다투고 메마른 땅은 사양해서 그 실정이 곧 드러났다. 지금 부자가 땅을 소작에게 주는데, 기름진 땅은 소작이 뇌물을 바치면서 머리가 터지도록 다투고 메마른 것은 문서를 던지면서 머리를 흔든다. 이러는 사이에 전지의 좋고 나쁨은 저울눈만큼이라도 다 드러난다. 옛적에 전지를 백성에게 맡기던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나라에서 전지를 9등으로 갈라서 그 등급이 모두 어긋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지금 법으로써 전지의 등급을 가른다면 비록 우ㆍ직(禹稷)이 감시하더라도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그러므로 결부 법은 단연코 쓸 수가 없다. 지금 마을에다 이미 1정(井)을 구획해서 표준[黃鍾]되는 율(率)을 세웠으면 기울어져서 정이 되지 못하는 전지도 또한 이로써 율을 함이 마땅하다. 다만 100묘의 면적이 1부(畉)이며, 일곱 부(夫)와 함께 공전을 농사하도록 할 뿐이고, 그 기름지고 메마름은 원래부터 물을 필요가 없으며, 6등ㆍ9등도 원래부터 분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반드시 국내의 전지를 다 왕전(王田)으로 해서, 이 전지를 백성에 준 다음이라야 그 등급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
묘(畝)를 쌓아서 부(畉)로 만드는 일은 본 고을 수령에게 사람을 택해서 하도록 한다. 그 실제 면적을 셈하는 것은 전례[舊例]대로 함이 마땅하며, 부 만들기를 마치면 급히 경전사(經田司)에 보고한다.
경전 어사가 이에 계사(計士) 두 사람을 거느리고, 산학(算學)에 익숙한 자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으며, 또 관상감(觀象監)에서 수리(數理)에 익숙한 한 사람을 별도로 선발해서 별군관(別軍官)으로 삼는다. 이에 본현에 와서 그 타량(打量)한 것을 검사하는데, 정밀하지 못한 것은 묘(畝)에 따라 개정(改正)하고 그 차이를 계산한다. 한 현을 통계해서 차이가 100묘 이상이면 도형(徒刑) 1년으로 하고, 200묘이면 도형 2년으로 하며, 300묘이면 도형 3년으로 한다. 이것으로써 차등하는데, 차이가 900묘에 이른 자는 도형 9년으로 하되, 그 일을 관장한 향감(鄕監)과 서리(胥吏) 등도 아울러 수령과 죄를 같이 한다. 무릇 경전(經田)하는 데에 고의로 범하고 간사함을 부리다가 죄를 얻은 자는 위로 종묘에 고하고, 모두 만기된 다음에 석방하며, 사령(赦令)에도 논의하지 않는다.
공전에서 멀더라도 전지가 9부(畉)로 찬 것은 그 중에서 큰 전지 하나를 택해서 공전으로 한다. 혹 개방해서 100묘가 되거나, 혹 넓이는 5묘이고 길이가 20묘인 곳도 반드시 정방(正方)으로 구획해서, 사전(私田)같이 기울고 비뚤어지고 굽은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살피건대, 산골짜기 비좁고 기울어진 땅에는 다만 정으로 구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부(畉)로도 구획할 수 없다(10×10으로 개방한 것을 부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혹 너비는 5, 길이가 20이거나, 혹 너비가 5, 길이가 10인 것은, 두 구(區)를 합쳐서 한 부로 만든다. 혹 5×5로 개방해서 매양 25묘를 1구로 만드는데 이에 4구를 1부로 만들어서 공전으로 한다. 비록 그러나 이와 같이 공전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네 모서리가 반듯해서, 사전같이 비뚤어지고 좁게 할 수 없다.
혹 구릉(丘陵)에 동떨어진 땅과, 골짜기 깊숙한 곳에 가끔 두어 묘를 기간(起墾)하고 인해서 집을 지은 것도, 모두 천맥(阡陌)이 서로 연달은 것과 함께 통해서, 부를 만들어서 9분의 1의 조(耡)로 묶는다.
9부를 정으로 만드는데 이미 몇 정을 구획했으나, 남은 부와 남은 보가 한 정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근 사방에 개간할 만한 땅을 구해서 풀을 베고 불태우며, 흙을 갈아일으켜서 그 수효에 충당한다. 그 역정(役丁)은 가까운 정(井)에서 뽑아오며, 가까운 정으로도 부족하면, 그 다음 정에서 뽑아온다.기간할 만한 남은 땅이 없는 곳은, 부근 구릉에 가서 기간한다면, 구하지 못할 걱정이 없을 것이다.
[주D-001]황종척(黃鐘尺) : 악기를 만들 때에 쓰던 자의 한 가지로 주척으로는 6촌 6리임.
[주D-002]7국(國) : 전국 시대의 진(秦)ㆍ초(楚)ㆍ제(齊)ㆍ연(燕)ㆍ한(韓)ㆍ위(魏)ㆍ조(趙)의 7웅(雄).[주D-003]혈식(血食) : 혈(血)은 제사(祭祀)에 바치는 생(牲)을 뜻함. 국가에서 거행하는 제사.
[주D-004]종핵(綜核) : 속속들이 파헤쳐서 자세히 밝혀냄.
[주D-005]협서율(狹書律) : 진 시황(秦始皇) 24년(기윈전 213) 이사(李斯)의 말에 따라 민간인(民間人)으로서 의약(醫藥)ㆍ복서(卜筮)에 관한 서책(書冊) 이외의 책은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던 법으로, 한 혜제(漢惠帝) 4년(기원전 191)에 폐지됨.
[주D-006]삼고(三古) : 복희(伏羲)를 상고(上古), 신농(神農)을 중고(中古), 오제(五帝)를 하고(下古)라고 하는 설도 있고, 또 복희를 상고, 문왕(文王)을 중고, 공자(孔子)를 하고로 하는 두 가지 설이 있음.[주D-007]고염무(顧炎武) : 청국 초기의 학자로 청조 학풍(淸朝學風)의 시조(始祖). 《일지록(日知錄)》ㆍ《구고록(求古錄)》 등 많은 저서를 남겼음.
[주D-008]마치 굴산(屈産)의 …… 얻은 것과 같아서 : 《춘추좌전(春秋左傳)》 2년 5월조에, 진(晋)나라 순식(荀息)이 굴산(屈山)에서 나는 좋은 말과 수극(垂棘)에서 나는 좋은 구슬을 우(虞)나라에 주고 괵(虢)을 칠 길을 빌리려 하니, 진공(晋公)이 진나라의 보배를 줄 수 없다고 반대하자, 순식이, “만약 그것을 주어 길을 빌려 괵을 쳐서 진나라의 영향력이 우나라에 미칠 수 있다면, 그곳에 있는 보화는 우리의 궁중에 있는 창고의 것을 바깥 창고로 옮겨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였고, 《공자가어(孔子家語)》 호생편(好生篇)에 “초 공왕(楚恭王)이 사냥 나갔다가 오고(烏皥)의 활을 잃어버리자, 수행원들이 찾을 것을 권했다. 초왕은 ‘그만두어라, 초나라 왕이 잃은 활은 초나라 백성이 얻었을 터이니 다시 구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였다.”는 글이 있음.
[주D-009]범여(范蠡)가 …… 모은 것 : 범여(范蠡)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서 오(吳)를 멸망시킨 후에, 제(齊)에 가서 성명(姓名)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 금이나 모았다. 제나라에서,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정승으로 삼고자 하자 그는 다시 재물을 다 흩어버리고 도(陶) 지방에 가서,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이름하고 농목과 무역으로 또 거만의 부(富)를 이루고 살다 도에서 죽었다 함.
[주D-010]무후(武侯)가 …… 사로잡은 것 : 무후(武侯)는 제갈량(諸葛亮)의 시호(諡號). 남만(南蠻)을 공격해서 맹획(孟獲)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잡았다는 고사.
[주D-011]휴번전(休番錢) : 번(番)을 서야 할 군사가 번을 서지 않고 그 대신 바치던 돈.
[주D-012]칙수전(勅需錢) :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비용으로 마련해둔 돈.
[주D-013]경림(瓊林) : 당 덕종(唐德宗) 때에 경림고(瓊林庫)를 세워서 공물(貢物)을 갈무리하였다.[주D-014]산림(山林) : 덕망(德望)과 학식(學識)은 높은데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름.
[주D-015]삼사(三事)의 신하 : 하늘을 섬기고, 땅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신하. 즉 삼공(三公)과 육경(六卿).
[주D-016]번곤천망(藩閫薦望) : 번(藩)은 감사(監司)를 뜻하고 곤(閫)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뜻하는 것인데, 그런 관직에 그 사람을 추천한다는 서장(書狀)임.
[주D-017]오교(五敎) : 맹자는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을 오교라 하였음.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帝曰契 百姓下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在寬”이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