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미니 특강 '자전적 수필 쓰기'와 관련하여 쳬시 작품 1편을 올립니다.
제 교사 초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리온 선생님
--초임 후포고에서의 추억--
우동식
1982년 3월 1일, 울진 초입의 후포고등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 때만 해도 시골집에 전화가 없어 이장님 집을 통해 늦게 전화를 받은 터라 부랴부랴 학교를 찾아갔다. 신임 동료 교사 서너 명이 함께 부임했지만 국어과 교사라고 전체 조회 때 나에게 대표 인사를 부탁했다.
“ 가르침의 장에 처음으로 접어들면서 후포의 건아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서투르고 부족하지만 선배 선생님들께 부지런히 배우며 여러분의 학업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대략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 대한 인사를 했다.
학교에서는 초임 교사인 줄 모르고 2학년 담임에 중학교 담당 교무기획 업무를 배정해 놓았었다. 교무부장님께 6월말에 입대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며 담임만을 배제해 주셨다. 담당 업무는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터라 고등학교 담당 교무기획 선생님께 배워 가면서 경력 산정이며, 호봉 획정 등을 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2학년 국어와 1학년 한문 수업을 맡았다. 1학년은 여학생 반을 수업했는데, 총각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않았다.
그 해 4월 1일 만우절 날이었다. 요즘은 이 날이 되어도 시들해졌지만, 그 때는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골려 주려고 반마다 작전을 짜곤 했다. 1학년 여학생 반 한문 수업 시간이었다. 교실 복도로 다가가는데 “온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을 드르르 여는데 무엇인가 머리 위에서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종이 꽃가루가 머리며 어깨 위로 흩날렸다. 아마 색종이를 오려 꽃가루처럼 풍선에 담아 문을 여는 순간 터뜨리는 장치를 해둔 모양이었다. 이런 날은 학생들과 호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치 개선장군처럼 양팔을 치켜 올리며 환호를 했다. 그랬더니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면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대개 그 시간에 배울 한자 원문을 칠판에 먼저 적어두고, 읽고 해석하는 순서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 날도 단원 본문을 판서하다 칠판지우개를 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다 스카치테이프를 돌돌 감아 둔 것이다. 또 장난을 건 것이다. 일부러 그 지우개로 지우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끙끙댔다. 교실에는 깔깔깔 웃음보따리가 펼쳐졌다.
본문 판서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교탁 중앙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놓여 있었다. 모른척하고 계속 적어 나갔다. 조금 있으니, “선생님, 이제 개봉해요!”하고 일제히 소리쳤다. “뭘?”하고 교탁으로 돌아섰다. 다시 “개봉해요!” 하는 소리들.
교탁에 놓인 것은 종이로 공과 같이 에워싼 물건이었다. 한 꺼풀을 벗겼다. 연이어 두, 셋 꺼풀…. 그것은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싸여 있지 않은가. 마침내 한 꺼풀을 남았는가 싶더니, “개봉박두!” 하면서 아이들이 책상을 두두둑 두드린다. 과자 한 봉지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오리온, 다이제스티브!”
나는 그 과자 봉지를 번쩍 들어 올리며 광고하는 시늉을 하였다. 당시 라디오에 이 과자 광고가 나오고 있었던 터였다. 학생들의 환호성이 교실을 울렸다. 그리고 그 시간 이후 나는 그 반 학생들에게 나는 ‘오리온 선생님’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퇴근길에 운동장으로 나서는데 “오리온 선생님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학생 반 학생 서너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선생님, 오리온 과자 사 주세요!” 하며 교문 앞 가게로 안내했다. 자의반 타의반 함께 갔더니 다른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야, 오늘 한문 선생님이 오리온 과자 사주신대!”
그러자 아이들이 신이 나서 오리온 상표가 붙은 과자들을 골라 나왔다. 나도 다이제스티브 하나를 골라 들고 계산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초임으로 하여 유별난 추억은 또 있었다. 교무과장님은 일과 후 교무기획 두 사람을 데리고 자주 횟집을 찾았다. 당시 후포 시장 안에 실내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던 그 횟집이 단골이었다. 저보고는 늘 입대 전에 체력 보강 많이 하라시며 회를 권하셨다. 고마운 분이셨다.
때로는 갓바위 위에 올라 놀기도 했다.(사진) 지금은 그 머리 위로 등기산 공원과 스카이워크 시설이 갖추어져 관광지로 탈바꿈해 있지만, 그 때는 순전히 그 갓바위만 돋보였다.(사진)
또한 그 때는 초임 교사가 많은 지역이어서 이른바 처총회도 잘 운영이 되었다. 한번은 이웃 초등학교 여선생님들과 영해로 단체 원정 미팅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익명성 확보를 위한 작전이었다.
이런저런 즐거운 일들이 적지 않았지만, 오리온 선생의 후포 인연은 넉 달이 채 되지 못하였다. 낮이 가장 긴 하짓날에 아쉬움을 안은 채 경주역에서 특별 군용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길이 남은 추억 하나는 있으니, 그것은 지금도 과자 중에는 ‘오리온 다이제스티브’를 가장 좋아한다는 점이다. ‘오리온 선생님.’ 아이들이 지어준 초임지의 별명, 그것이 퇴임을 맞은 내게 아직도 유효한 셈이다.
--《교원문예》 제 11호(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