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流浪)과 정처(定處)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무엇이 바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것을 보는 일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얼마나 속상한 일인가. 그러한 건 사람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다. 떠도는 것은 고달프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데 나의 소장석 대작(大作) 수석의 형편이 마치 그러하다. 한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또 한 차례 자리를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이 옮겨가는 곳은 여수시 문화원인 만큼 앞으로는 떠돌이 생활을 그만두고 오래도록 이곳에 정착했으면 한다.
. 얼마 전까지 소장석들은 보성녹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관광객을 맞으며 수석을 알리는 홍보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 수석이 내쳐지는 바람에 다시 유랑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수석은 대작 넉 점. 음양석 한 쌍과 애무석, 그리고 관통석으로 모두 집에서 30년을 나와 함께지내던 것들이다.
이 수석들은 내가 애지중지 하지 않았다면 오래도록 집에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음양석은 그 중에서도 출중한 멋을 자랑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힘차면서 균형미도 갖추고 있다.
하나, 돌아온 녀석들을 보노라니 그간 핍박받고 내쳐 졌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한 곳에서 수석이 철거된다는 통보를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참담했다. 마치 환향녀(還鄕女)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수석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런 자괴감이 들 만하다. 화향녀 같은 신세. 환향녀는 병자호란 때 잡혀간 부녀자들이 고국에 돌아와 갖은 말한다. 그들은 실상 자기들은 별일이 없었는데 모멸스럽게 바라보는 눈을 어쩔 수가 없었다.
기록에 보면 인조임금은 그런 여인들을 위해 천계천 강물에서 목욕을 시킨후 ‘이제 모두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포를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쏟아진 경멸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 잔재는 호로자(胡虜子)나 화냥년이란 말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데 수석들이 어쩐지 그런 취급을 받은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눈치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될 것으로 믿는다. 문화원장이 우선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고 자신도 직접 귀중한 물건들을 손수 수집하여 개인 박물관을 개설해 놓고 있을 정도로 문화자산에 대한 이해가 높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자주 만나볼 수도 있지 않는가.
이들 수석에게 이상기류가 감지된 것은 최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선거 때 지자체장이 바뀐 후로 돌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려오던 터였다. 들려오는 말에 녹차박물관에 상관도 없는 수석이 놓여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무자에게 미리 당부를 해두었다. 그 돌은 전시목적으로 기증한 것이므로 만약에 치워지는 상황이 생기면 소장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테니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명토를 박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 이유는 돌을 놓아둔 자리에 녹차판매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지만 나는 속내를 알만 했다. ‘있을 자리’에 대한 시비가 인 것을 직감했다. 전화를 받고 나는 당장 가져오겠노라고 의사표시를 했다.
나는 수석이 도착했는지 보러가는 길에 다른 골동품 몇 점도 함께 챙겨갔다. 수석이 증정되는 생활사박물관에다 이참에 부모님의 유품도 보관하고 싶어서였다. 이때 가져간 것은 함지박과 파이프 .
함지박은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져온 것으로 피나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담배 파이프 2점은 애연가이셨던 아버지가 아끼던 것으로 상아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함께 지참한 것은 다른 뜻도 있었다. 흔히 딸을 시집보내면서 혼수에 신경 쓰듯이 잘 간수해 달라는 의미도 담은 것이었다.
나는 돌아오면서 안도를 했다. 이제야 말로 제대로 있을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은 그간 환대받지 못하고 맨날 떠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아픔에서였다.
그리고 약자의 비애로써 그동안 지켜주지 못했다는 후회와 아픔 때문이었다. (2014)
첫댓글 음양석이 보성녹차박물관에서 돌아온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여수 생활사박물관에 전시된것도 자랑이라 생각이 드는 군요.
여수문화원에서 잘 관리되어 애지중지한 수석으로 남았으면하는 기원을 해 봅니다.
여수생활사박물관에서는 잘 보관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임원장님은 문화예술과 생활유물에 관심이 많으시니 다시는 떠도는 일은 없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성 차박물관은 개관 이래 8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갔으니 선생님의 애석들은 지난 3년 동안 팔도강산은 물론 해외에 까지 널리 회자되었다고 봅니다. 치열한 선거전을 거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4~5년의 임기에 그치지 않는가요. 3년의 결코 짧지 않은 나들이를 통하여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니 조금도 서운해 하실 일이 아닙니다. 문화원에서의 뜻깊고 보람찬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여수문화원장님은 향토사에 남다른 열의를 가지고 있고 본인도 직접 향토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잘 보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부모님 유품도 멸점 기증했답니다.
여수에 내려가면 여수생활사박물관을 꼭 들려야 겠군요. 애지중지하던 자식같은 수석이 거기 있을테니 말입니다.
지금 그곳에 잘 전시되어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기증자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쉽사리 치워ㅏ버리지는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