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학헌 팽나무
나주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이름이 된 천년고도이다. 전라북도 옥구김제정읍으로 이어지는 들녘이 지평선평야라면 전라남도 나주함평무안으로 이어지는 들녘은 구름평야이다. 이 기름진 땅은 민초들의 생명줄이었고, 그 민초와 영웅호걸, 절세가인이 민담이 되는 삶터였다.
나주 목포(지금의 나주역 터) 나루터 흑룡동에 살던 오 씨 처녀는 고려를 세운 왕건과 혼인하여 장화왕후가 되고 아들 ‘무’는 고려 2대왕 혜종이다.
이때 왕건과 서남해역의 패권을 다투던 능창은 압해현(전라남도 나주의 속현)의 장수로서 바닷길에 능해 ‘수달(水獺)’이라고도 불렀다. 장보고 청해의 뒤를 이어 해상왕국을 세운 능창은 압해에서 갈초도(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창마을)에 이르는 어민들을 거느리고 고려의 왕건에 맞섰다. 그러나 왕건의 계책에 속아 사로잡혀서 궁예에게 참수당하였다. 이 뒤 능창은 해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킨 영웅에서 한낱 해적으로 격하되었으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를 깨끗이 하는 장보고 청해, 바다를 누르는 능창 압해, 바다를 진압하는 이순신 진해가 같은 말임을 안다. 이는 승자의 기록이 아닌 민초의 삶이기 때문이다.
전봉준이 나주에 온 건 1894년 8월 13일이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나주를 점령하지 못했다. 나주 향리들이 목사 민종렬을 중심으로 뭉쳐 강력히 맞섰기 때문이다. 이에 전봉준은 서성문을 통해 나주성으로 들어가 목사 내아인 금학헌에서 민종렬을 만났다. 그러나 민종렬은 물러서지 않았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전봉준은 하룻밤을 나주 금성관 객사에서 지낸 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빨아 달라고 부탁하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해 12월 2일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잡혀 나주로 왔다. 이곳에서 처형당한 낯익은 얼굴, 산처럼 쌓인 동지들의 비참한 주검을 보았을 것이고 그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에게 나주는 좌절의 장소였다.
전두환은 1980년 나주에서 1박 하며 고려 태조 왕건의 기를 받아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는 말이 있다. 그 숙박 장소가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죽어서 화장한 유골조차도 쉴 땅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왕건의 기를 받지 못한 건 분명하다.
나주에 소부리가 살았다. 그의 딸이 연산군의 애첩 숙화(淑華)였다. 소부리는 토지 약탈, 부녀자 겁탈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지만 누구도 감히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지 못했다.
‘전교하였다. 숙화의 아비 김소부리가 나주로 내려갈 때 말을 지급하라.’는 1506년 5월 12일의 ‘연산군일기’이다. 그렇게 소부리의 신분은 종이었지만 각 고을 수령들은 임금의 사신처럼 접대하고 공손히 술잔을 올렸다.
전라도사로 1505년 부임한 박상이 이듬해 8월 나주에 왔다. 금학헌 앞 관아로 소부리를 잡아 와 심문했다. 소부리가 뻣뻣이 버티자, 박상은 곤장을 치라고 명했다. 그런데 나졸이 곤장을 칠 듯 말 듯하다가 소부리가 방심할 때 내려치니 그 매 한 대에 소부리가 죽고 말았다.
통한의 풍운아 전봉준과 치욕의 29만 원 대명사 전두환을 보았을 테고, 호남 선비의 시조인 박상과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소부리도 보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지켜보았을 금학헌의 5백 살 노거수 팽나무가 1980년대 태풍 때 벼락을 맞았다는 안내 푯말은 믿을 수 없다.
역사를 품은 노거수는 민초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할아버지 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영웅호걸, 절세가인이 민초를 억누르지 않는,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