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굶주리면 나도 굶주리고
1683년 (숙종9년)에 대왕이 여러 도의 감사와 수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유(宣諭)하였다.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요, 사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진 사람의 마음은 사물에 대해서도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동포에 대해서이겠는가. 아! 그대 방백들은 혹시라도 편안히 앉아 있지 말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그 고을 수령과 직접 만나 흉년을 구제할 대책을 의논하고, 아전과 백성들을 보면 조정에서 부지런히 구휼하는 뜻을 깨우쳐 주어서 그들이 원한을 품고 유리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 내가 주자(朱子)가 절동(浙東) 구황사(救荒使)가 되었을 때 그 문인이 기록한 것을 보았더니, ‘공(公, 주자(朱子))이 백성의 괴로움을 캐내고 찾아 묻기를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 잠자고 먹는 것까지 폐하기에 이르렀고, 깊은 산골짜기라고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매번 나갈 때는 반드시 가벼운 수레를 탔고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을 물리쳤으며, 자신이 쓰는 물품은 스스로 싸가지고 다니자, 관할 구역 안에서도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관리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고 신칙하기를 늘 사자(使者)가 들이닥치는 듯 여겼고, 이 때문에 살아난 백성이 매우 많았다. 그 뒤 조정에 들어와 효종(孝宗)을 알현하였는데 효종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절동(浙東)에서 애쓴 수고를 짐(朕)이 아는 바이다」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병사ㆍ수사ㆍ수령ㆍ첨사ㆍ만호ㆍ찰방과 같은 경우에도 또한 각기 소속된 군사와 백성이 있으니, 각각 백성들이 굶주리면 나도 굶주리고, 백성들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병산 이관명 선생, ‘숙종대왕행장(肅宗大王行狀)’에서>
일찍이 율곡 이이 선생은, 관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벼슬하기 전에는 벼슬만을 급급해하다가, 벼슬한 뒤에는 또 그 벼슬을 잃을까 걱정한다. 이같이 골몰해서 그 본심을 잃은 사람들이 많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벼슬이 높은 자는 도(道)를 행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가야 한다. 만약 집이 가난하여 생활을 위해 벼슬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중앙직을 사양하고 지방직을 구하며,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를 구하여 굶주림과 추위나 면해야 할 것이다. 비록 생활을 위한 벼슬을 하더라도 청렴하고 부지런하게 공무를 받들어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하고, 놀고먹기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율곡 이이 선생,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