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김길영
아내와 부산행 KTX열차에 올랐다. 14호 객실에 들어섰을 때 동서 내외가 반겨주었다. 동대구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객차 안은 텅 빈 듯 했다. 우리 내외는 반가운 마음에 동서내외가 앉은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내가 앉은 좌석 주인이 나타났다.
어쩔 수 없이 좌석 표를 꺼내 내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내 자리에 어떤 젊은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티켓을 보여주며 내 좌석이라고 몸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젊은이는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는커녕 귀찮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꺼내어 자기 좌석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재촉하듯 비키라고 채근했다. 젊은이가 재차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제 좌석이 맞거든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이번엔 퉁명스런 말투였다.
뭐 이런 괘씸한 일이 있나 싶어 부아가 치밀었으나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내 좌석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승무원이 내 티켓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그 젊은이의 티켓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다.
“열차표가 이중으로 발급되었나 봅니다.” 우선 빈자리에 앉아서 가라는 승무원의 권유에 마지못해 앉았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컴퓨터 오류가 생긴단 말인가. 십여 분 지났을까, 여승무원이 찾아와 다소곳이, 내 눈 높이에 키를 맞추어 무릎을 굽혔다. 열차 티켓을 확인하던 여승무원의 말은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손님이 소지하고 계신 열차표는 어제 날짜 입니다. 시효가 지나서 새로 열차표를 발급을 받으셔야 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아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열차표를 훑어 내려갔다. “나는 요금을 두 번씩이나 물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여승무원은 한발자국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더 낮은 목소리로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 보려고 애를 썼다.
무릎을 굽힌 여승무원의 그 불편한 자세가 안쓰러워 보인 것도 잠시, 나는 그녀와 말도 안 되는 말씨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무임승차 했단 말이냐? 내 티켓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나 곧 내가 한 말에 스스로 궁색해짐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억지를 부려보긴 처음이었다. 내 잘못에 앞서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예매하던 날, 그 바쁜 창구에 가서 열차표를 예매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너무 세세한 나의 이야기에 직원이 깜박 혼동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승무원은 단호했다. “손님이 예매하신 것은 맞습니다. 다만 어제 날짜에 한해서 이용할 수 있는 티켓 입니다. 혹시라도 예매창구에서 잘못 발행했다하더라도 미리 확인을 하지 않은 잘못은 손님에게 있습니다.”
그녀가 부정할 수 없는 내 결정적인 잘못을 짚어 바늘로 콕콕 찔렀다. 그만 말문이 막히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티켓에 눈을 고정시켰다. 티켓에는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날짜와 시간, 객실 등이 꼼꼼하게 원을 그리며 표시되어 있었다. 분명 내 잘못이었다. 만약 예매창구에서 실수를 했더라도 바로 확인하는 절차를 놓친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인정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승무원의 요구대로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빤히 알면서도, 심술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재발급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어디 마음대로 해 보쇼.” 하고 내뱉어 버렸다. 내 잘못을 시인한들 여승무원이 요금을 깎아줄 리도 만무하고 “아이고, 그런 실수가 있었군요. 그냥 빈자리에 앉아가시죠.” 할 일도 아니었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중에 건너편 좌석에서 조용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중년 부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와 여승무원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었던지, 귀담아 듣는 듯 귀가 쭝긋 쭝긋 움직였다. 그들의 시선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지만 귀는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날, 부산에서 동서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가능하면 그들이 타고 내려오는 열차에 동석하고 싶어 열차표를 예매했던 것이다. 내 티켓에는 4월10일 수요일 오후 16시 55분, 부산행 KTX열차가 맞았다. 오늘이 11일이니까 어제 날짜였다. 옆에서 지켜만 보던 아내가 민망했던지 승무원에게 열차요금을 선뜻 지불해버렸다. 경로우대와 평일할인을 받아 예매한 티켓 값이 21.600원, 재발급 요금 31,000원 무려 52,600원이나 들었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이다. 현장감이 떨어지는 디지털시대가 못마땅하다. 그래서 하루 전날 발품을 팔아 매표창구에서 열차표를 샀다. 3모작 인생을 살면서 남보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내 크고 작은 실수는 아무데서나 반복되고 있다. 백세 수명을 살아야하는 시대에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어떻게 대처할까 걱정스럽다.
첫댓글 실수한 사례가 좋은 글감이 되는군요.
감상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