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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온통 '비밀스런 출생'인가? | |||||||||||||
[TV 이야기] 드라마 '사골 소재'가 너무해…"절망사회 유일 탈출구" | |||||||||||||
한국 드라마에 넘쳐나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럴 정도로 출생의 비밀은 보고 또 볼 수밖에 없는 이른바 '사골 소재'였다.(사골 국물처럼 계속 우려먹는다는 뜻으로 조롱하는 표현-편집자) 그래서 입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비판해왔다. 그래도 요지부동이다. 요즘엔 오히려 출생의 비밀이 더욱 범람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출생의 비밀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일까?
월화에 방영되는 <짝패>는 1회부터 두 주인공의 엇갈린 출생을 부각시켰다. 청소년 드라마인 <드림하이>에도 남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 양념처럼 들어갔다. 수목드라마는 더욱 가관이다. 이번 주에 시작된 <가시나무새>는 주인공 세 명 모두에게 출생의 비밀이 깔려있다. <마이프린세스>도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었다. 한국에 미드와 같은 본격 정치드라마를 열겠다던 <프레지던트>에도 출생의 비밀은 여지없이 추가됐다. 주말엔 <신기생뎐>이나 <욕망의 불꽃>, <반짝반짝 빛나는> 등이 그렇다. 일일드라마인 <웃어라 동해야>나 <폭풍의 연인>에도 출생이 비밀은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시트콤인 <몽땅 내사랑>에서도 출생의 비밀은 주요 테마다. 아무리 출생의 비밀이 재밌어도 물론 출생의 비밀은 재밌다. 있는 집 자식이 불쌍하게 자란다거나, 없는 집 자식이 호강하며 자라다가 갑자기 추락한다거나 하는 이야기에는 상당히 사람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어느 순간 친부모가 밝혀지며 폭풍눈물이 흘러내릴 때 시청자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출생의 비밀과 엮이게 마련인 불륜도 상당히 자극적인 소재다. 나만 하더라도 <몽땅 내사랑>의 시청자는 아니지만, 친아버지에게 구박당하며 고생하고 있는 윤승아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이 드라마를 가끔 챙겨보고 있다. 윤승아의 기구하고 기막힌 삶의 추이가 궁금한 거다. 한 음식점에서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일하시던 아주머니들 전부가 손님이 오건 가건 넋을 잃고 TV에 빠져있는 모습에서 출생의 비밀 코드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제빵왕 김탁구>를 국민드라마로 만든 것에도 출생의 비밀이 작용했을 터. 아무리 그렇게 재밌는 소재라도 너무 과도한 건 문제가 된다. 모두가 손쉽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소재에만 매달리면 다양성이 발전할 수 없고, 전체적인 수준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재벌 아니면 출생의 비밀에만 매달리면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점점 퇴화할 것이다. 그래서 재밌어도 안 되는 것이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 인간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공감을 줄 수 있고,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이 오래 갈 수 있다. 출생의 비밀에 대한 비판은 기왕에도 많았지만 다시 지적할 수밖에 없다. 범람의 수위가 그만큼 심각하다.
출생의 비밀 외엔 답이 없는 사회인가 출생의 비밀엔 알고 보니 부모가 원수, 혹은 알고 보니 애인이 내 동생이라는 식의 구조도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빈부, 계층, 신분차와 관계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천애고아로 그렇게 고생하면서 컸는데, 알고 보니 부모가 재벌 혹은 꽤 사는 집 혹은 양반이거나 왕족이라는 식이다. <몽땅 내사랑>에선 재력가인 학원장이고, <재빵왕 김탁구>에선 식품대기업 사주였고, <욕망의 불꽃>에선 대재벌과 사채업계 큰손이고, <드림하이>에선 재벌 정치인, <짝패>에선 양반 세도가, <마이프린세스>에선 황손이었다. 이렇게 보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출생의 비밀을 비판하는데도 요지부동 이 '사골 소재'가 갈수록 더 범람하는 이유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방 인생역전'을 향한 열망인 것이다. '한 방 인생역전'을 향한 열망은 오디션 열풍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슈퍼스타K>에서 허각이 거머쥔 행운. 그건 출생의 비밀에 준하는 짜릿한 인생 반전스토리였다. 수많은 국민들이 제 돈 들여 방송사 투표에 참여하면서까지 허각의 인생역전 이야기를 함께 썼다. 돈까지 들여 참여할 정도로 짜릿한 인생역전 이야기인데, 그것을 드라마가 공짜로 보여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에선 상층부와 서민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사실상 강남과 비강남 사이에 내부 분단이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통로들이 하나하나 폐쇄되고 있다. 출생의 비밀이 범람하는 것은, 이제 그런 정도의 극단적인 상상이 아니면 서민과 '그 세계' 사이에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우울한 신호로 느껴진다. 온갖 신데렐라 스토리가 인기를 끄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의외로 큰 욕심이 없는 존재여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고 남들보다 크게 쳐지지만 않는다면 인생역전이니 일확천금이니 하는 허황된 생각을 잘 안 한다. 자기 삶이 안정돼 있으면 소소한 개성, 취향, 이런 것들에 더 몰두하는 존재다. 크게 불안하고 크게 빈곤할 수록 허황된 '한탕'의 꿈에 집착하게 된다. 출생의 비밀, 재벌-신데렐라 스토리 혹은 오디션 우승에 대한 집착 외엔 꿈을 꿀 수 없는 나라가 되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