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무장소들을 떠돌다가 덧없이 삶을 마치기 쉽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장소들이 본디의 고유성을 잃고 익명화하거나 사라져간 까닭이다. 특히 교통수단의 빠른 발달과 관광 산업의 확장은 장소들의 고유한 경관을 해체하고 기술중심적 가치관에 입각해 지리적 배치를 효율화하거나 그것을 가공해 번잡한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이때 장소들은 정체성을 잃고 익명화함으로써 무장소로 전락한다. 관광지들은 외부인이나 구경꾼들의 호기심과 몰취향에 영합하는 타자지향적 장소로 가공된 곳들이다. 이를테면 제주도의 섭지코지는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가진 곳으로 한 방송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며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섭지코지는 머잖아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고유한 자연을 모습을 잃고 타자지향적 경관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 근본에서 타자지향적인 관광지는 이국적인 장식과 조경, 키치미학과 첨단기술의 실현, 구경꾼들의 취향에 따른 다른 관광 명소의 무차별적인 차용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익명화된 무수한 인공 장소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장소의 박물관화, 궁극적으로 장소의 해체와 재구축으로 만들어진 무장소다. 이미 재구축된 장소들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장소인 것이다. 관광지는 삶과 깊이 연관된 지리적 환경이 아니라 그것과 무관하게 인위적이고 피상적으로 개발된 이윤 추구의 장으로 변질된 무장소들이다.
국도나 아스팔트 역시 표준화·계량화·익명화된 무장소의 범주에 든다. 현대인들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 표준화하는 힘이 삶의 전 부면에 압도적인 영향력으로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표준화하는 힘은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경관을 해체하고 배치를 바꾸면서 장소들을 재구축한다. 장소를 재구축하는 윤리성은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를 통해 강화된다. 현실을 바꾸는 권력들과 신문·저널·라디오·텔레비전과 같은 대중 매체들도 장소를 인위적으로 가공하는 힘을 행사한다. 대중 매체들은 “대면접촉의 필요를 줄이고”, “지리적 제약에서 공동체를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장소 해체와 재구축에 관여한다. 고속도로나 국도는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옛길과 다르다. 에드워드 렐프는 “길, 철도, 공항은 경관과 함께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경관을 위압하고 가로질러서 경관을 토막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장소성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국도나 고속도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어서 대개는 그 주변의 경관들은 잘리거나 깎임으로써 훼손된다. 장소가 본디 갖고 있던 고유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장소로 전락하는 것이다. 국도, 고속도로, 철길은 대규모 개발로 인해 장소들의 지리적 차별성과 고유성을 없애버린다.
이에 반해 옛길은 경관과 더불어 존재하며 장소와 장소를 연결한다. 옛길은 장소와 장소 사이에 낀 경관과 지리의 일부로 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옛길은 걷기에 맞춤한 장소의 확장이다. 안치운은 옛길 걷기의 의미를 이렇게 짚는다 ; “걷는 것은 자발적인 움직임이다. 걸음은 최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추상적인 것을 걸으면서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산을 오르고 능선을 따라 걷는 걷은 세상과 삶을 다시 연역할 수 있는 계기였다. 배워서 걸은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걸은 적이 있는 길을 다시 걷더라도 부질없다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산 속에서, 옛길 위에서 머물면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걷는다는 행위는 매 순간 사유가 벌이는 축제와 같았다. 걸으면서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유는 근원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것, 발 아래 밟히는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본질로 와 닿는다. 길을 걷다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순환적인 몽상에 빠질 때가 있다. 진정으로 사물과 친근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옛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며 경관과 경관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옛길을 걸을 때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잘 안다. 대개의 옛길은 近景의 지리학 속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걷기는 몸과 정신이 특정 장소와 관계하는 가능한 방식 중의 하나다. 걸을 때 사람은 오감에 들어오는 경관과 그 질펀한 관능성에 제 몸을 섞는다. 추상적인 것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세계는 경관의 관능성으로 저를 바라보는 자의 몸을 덮쳐 실존을 감각화하며 구체와 사실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소 속에서 몸으로써 현존을 실감하며 이동하는 방식이 바로 걷기다. 아울러 장소를 몸의 기획 속에 품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개리 스나이더는 “장소와 장소의 규모는 우리의 육체와 육체의 체적과의 비교를 통해서 측정된다.”고 말했다. 옛길은 걸어감으로써 자연스럽게 몸으로 경관을 끌어들이고 몸의 체적과의 비교를 통해 장소의 실체와 규모를 실감하며, 장소의 실체와 규모와의 교감을 통하여 추상적 실존을 몸으로써 살아내는 현존의 실감으로 되돌려 받는다. 걷기의 형이상학이 나타나는 옛길은 장소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하지만, 경관을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면서 만든 도로들은 걷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장소를 해체한다. 결국은 그것의 정체성을 훼손해서 사람을 장소 상실로 이끈다.
국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죽은 고양이의
저 망가진 외출복 !
이창기 「봄과 고양이」
하이꾸 느낌이 물씬한 이 시는 효율성을 섬기는 현대 문명의 과속을 받아내기 위해 만든 인공 장소가 얼마나 반생명적인가를 증언한다. 집나온 고양이가 생을 마친 이 장소는 장소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익명성으로 塗布된 흔하디흔한 국도다. 국도는 장소라고 할 수도 없는 장소다. 고양이는 자기가 죽은 여기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고양이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 삶을 규정하는 더 많은 사건들이 이와같이 장소성을 잃고 무의미에 의해 견인되는 무장소 위에서 일어난다. 대개는 무장소성 위에는 인공 장소들이 들어서 있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 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 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어린 게가 “군용트럭”에 압살되는 곳은 아스팔트다. 어린 게의 죽음에 연루된 가해 주체가 군용트럭이라고, 무심하게 누설된 정보를 특정한 시대의 정치적 폭압의 은유로 독해하지 않는다면, 이 시는 또 하나 현대 문명과 그것이 만든 무장소성에 내장된 폭력의 고발로 읽을 수 있다. 개펄이나 바다가 생명의 본원적 자리라면 아스팔트는 생명과 관련하여 더는 의미가 생성되지 않는 반생명적 공간이다. 아스팔트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똑같은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장소적 정체성이 없는 장소다. 사람의 내면에 어떤 장소적 표식도 만들지 않는 아스팔트는 그런 점에서 무장소다. 아스팔트는 시각적 특징에서 불모의 회색빛이며, 삭막한 도시의 표상이다. 전혜린이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 자신을 가리켜 ‘아스팔트 킨트’라고 규정한 글을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다. 아스팔트 킨트는 뿌리와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인간실존의 근원적 중심을 잃어버린 세대의 표상이다. 매우 민감한 자의식으로 자신의 생을 견인했던 전혜린은 아스파트 킨트라는 함축적인 용어로 장소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세대의 출현을 예고했던 것이다. 아스팔트 킨트는 도시가 소속감이나 정체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은 근본적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도시에 나와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보았다. 그 첫느낌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나의 내면에 낯선 이질감을 가진 도시의 표상적 공간 이미지의 하나로 낙인찍힌 것은 분명하다. 김광규는 그 아스팔트를 잔혹한 폭력의 장소로 이미지화한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는 근원적 가치를 짓밟는 모든 형태의 폭력성과 함께, 아스팔트가 농경문화에서 근대화·산업화·도시화로 이행해온 압축 근대의 뚜렷한 표상이라는 점에서 오랜 농경문화가 기리고 지켜온 내면 가치를 짓밟는 문명의 폐해를 증언하는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느 날 우리는 농경문화의 장소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시로 몰려나와 생명이 내뿜는 “찬란한 빛”도 외면한 이 회색빛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황지우, 「에프킬라를 뿌리며」
「에프킬라를 뿌리며」는 김광규의 시보다 훨씬 더 섬세한 정치적 독해가 요구되는 시일지도 모른다. 생명을 압살하는 에프킬라라는 화학 물질과, 그 “향기 속의 살기”에 취해 너무나 가볍게 죽어 떨어지는 “파리 목숨”들, “울음 소리”조차 없이 삭막한 “초토”의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은 명백하게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다. 에프킬라를 뿌린다는 행위가 말해주는 것은 구체적 생활의 경험이기 보다는 관념의 메타포로 해독되어야 한다. 초토는 분명하게 장소를 지시하는 말이지만, 장소의 문화적 정체성을 낳는 요소들과 심오한 가치들을 말살함으로써 장소됨을 부정하는 장소다. 그것은 장소의 구체가 아니라 장소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가 없는, 실재가 뭉개져버린 장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초토”는 장소이기 보다는 실존적 외부성으로서의 정치 정황이다. 우리가 겪은 지난 시대의 군부 독재시대는 참된 삶을 가로막고 한마디로 죽음과 마비상태에 지나지 않는 거짓된 삶만을 허용하는 “초토”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양이의 “망가진 외출복”이 널브러진 국도와, “군용 트럭”에 영문도 모른 채 깔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가 있는 아스팔트는 여린 생명들이 다반사로 횡액을 당하는 “초토”들이다. 초토는 장소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장소, 반생명적 불모의 표상이다. 시인의 정치적 무의식이 낳은 실재가 없는 땅이다.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이라는 마지막 시구에는 그 “초토”에 대한 시인의 신랄한 냉소가 숨어 있다. 雜辨을 거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2. 청풍명월의 땅에 숨은 내력과 지리
충청도는 청풍명월의 땅이다. 조선 임금 정조가 처음 썼다는 이 말은 충청도의 산천과 지리에 깃든 온후한 기운과 화해와 중용을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기리는 이 땅 사람들의 순박한 기질과 맑고 너그러운 인격을 아우르는데 적당하다. 그 중에서 충청남도는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해서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대전과 천안을 끼고 있는 땅이다. 서쪽 바닷가 방향으로 이어지는 당진, 서산, 홍성, 보령, 서천 땅은 황해와 맞닿아 있고, 내륙 깊숙이에 있는 천원, 연기, 대덕, 금산 땅은 충청북도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서해안과 내륙 안쪽으로 뻗어나간 땅 사이에 예산, 공주, 부여, 청양, 논산 땅이 끼어 있다. 아울러 경기도 남부의 평택과 안성에 맞닿아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전라북도의 완주, 익산, 옥구 등과 남쪽으로 맞대 경계를 이룬다. 세 면이 육지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 땅은 바다를 껴안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은 이 땅의 동북쪽에서 뻗어 나와 그 중심부를 가로질러 서남쪽 비인만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산계에 잇대인 오성산, 은석산, 흑성산, 광덕산, 갈미봉, 무성산, 국사봉, 금계산, 칠갑산, 조루산, 월산, 성주산, 옥마산, 아미산, 월명산 들은 그 높이가 6백미터 안팎에 이르는 산들이다. 차령산맥 북쪽으로는 영인산, 덕봉산, 가야산, 용봉산, 삼준산, 백화산들이 있는데, 그 높이가 3백미터 안팎의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다. 차령산맥 남쪽으로 우산봉, 도덕봉, 약관산, 향적봉 등을 거느리고 8백미터 높이의 계룡산이 주산으로 우뚝 솟아 있다.
계룡산 일대는 무속과 민속 신앙이 성황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땅의 타고난 생김새와 입지조건이 한 나라의 중심이 되기에 두루 적합한 지 나라가 혼돈으로 몸살을 앓고 혁신의 기운이 드높아질 때마다 눈밝은 이들에게 遷都地로 주목받은 게 이미 여러 번이다. 처음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려고 했고, 그 뒤로 1977년에도 이곳에 행정수도를 세우겠다는 계획이 세워졌다가 스러지고, 최근에도 수도 이전의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르며 한바탕 소용돌이를 겪은 땅이다.
충청남도의 중심 수계는 한반도의 중앙부 서쪽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금강이 아우르는 면적은 9,886 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금강의 상류 유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하류 유역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이밖에 삽교천, 무한천, 곡교천 등이 충청남도의 주요 수계를 이루는 물줄기들이다. 다른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은 높지 않은 대신에 기름진 들은 넓고 강수량이 적당해서 예로부터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알려져 왔다. 황해를 품어 안은 서해안 지방들은 뭍으로 휘어들고 바다 쪽으로 나가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리아스식 해안선이 잘 발달해 있어 바다를 낀 경관이 수려하고 사람들이 생업을 삼을 만큼 갖가지 해산물이 풍부하게 나온다.
이곳은 북방 유랑민 중에서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일부가 삼한 시대에 마한이라는 부족 국가 형태를 이루고 살았던 땅이다. 이 땅에 근거를 둔 마한은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감혜비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만로국, 신소도국, 월지국 등의 12개 나라인데, 대개는 큰 나라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신지나, 작은 나라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읍차가 다스리던 씨족 사회의 공동체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기원 260년경 이 부족들을 합쳐 처음으로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다. 충청남도 땅에서 일어난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사비가 함락되면서 사라지는데, 그게 기원 660년경이다. 이 땅에 백제 문화가 꽃과 같이 피어나 번성하다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스러지니, 그 망국의 한과 못다 한 꿈이 도처에 스민 슬픈 내력을 안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피와 살을 받고 인격을 키운 이들의 유전자 속에 이 슬픈 내력이 계통발생의 기억으로 오롯하여 이 땅의 향토 시인의 시에는 유독 그 슬픔이 서리서리 잇닿아 끝없이 흐른다. 한용운·신대철·이윤학·이정록(홍성), 정훈·김관식·장석주·나희덕·길상호(논산), 최승자·박진성(연기), 박용래(강경), 한성기·임강빈·신협·홍희표·손종호·김백겸·윤택수·강희안(대전), 신동엽·정한모·김강태·이재무(부여), 최원규·조재훈(공주), 이근배(당진), 임영조(보령), 안수환·유재영(천안), 나태주·구재기(서천), 이생진·김순일·박주택·이경교(서산), 공광규(청양), 장대송(태안) 이밖에도 김시종, 김기종, 이명수, 이은봉, 권선옥, 강신용, 백남천, 김소엽, 이면우, 이종진, 함순례, 김명원, 김열 등이 이 땅에 탯줄을 묻은 시인들인데, 그 슬픔에 매혹된 것으로 치자면 으뜸 되는 본보기 시인이 朴龍來(1925 ~ 1980)다.
3.강경, 옛 場市의 영화는 스러지고
박용래는 사람됨됨이와 시가 강경에서 나고 평생을 대전과 그 인근 지방을 떠나지 않고 삶을 꾸린 토박이 시인답게 오갈데없는 충청인이다. 강경은 연무와 논산을 합쳐 놀뫼 문화권 유역에 속한 땅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 “강경은 은진의 서쪽에 있으며 들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불끈 솟아나서 동쪽을 향해 있고 두 줄기 큰 강(금강과 논산천)을 마주 하였다. 뒤로 큰 강이 조수와 통하지만 물맛이 그리 짜지 않다. 마을에는 우물이 없어서 온 마을에 집마다 큰 독을 당에 묻은 두 강물을 길어 독에 부처 둔다. 며칠 후면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윗물은 맑고 서늘하여 오래 두어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될수록 더욱 차가워지면 10년 동안 藏疾을 앓던 사람이라도 1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가 없어진다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土疾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첫째이다’라고 한다.” 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끼어 수륙 교통이 두루 편리하고 큰 상권이 형성된 도회를 이루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한때는 一元山 二江景 소리도 들었으나 지금은 퇴락해서 시골의 작은 읍으로 전락하였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 들어오는 공주·부여·연기·청양 지방의 산물들을 아우르고, 거기에 경기도와 전라도의 수륙 산물까지 더해져서 교역이 이루어지니 한때는 대구·평양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장으로 호가호위하며 흥청망청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 왕래조차 드문 한촌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1905년 경부선이 계속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든 데다 6·25동란 때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어 황폐화되고 군산 하구둑이 완공된 뒤로 河港都市의 기능을 잃어 이곳을 드나들던 크고 작은 상선의 출입이 뚝 끊기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물길을 끼고 물의 도시로 번성하던 곳이 물길이 막히고 끊기니 그 명운이 쇠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시인은 한때 은행과 중학교 교사를 잠시 생업으로 삼은 적이 있지만, 1955년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시인이 된 뒤 달리 직업 없이 시만 쓰다 갔다. 박용래의 시에는 향토의 삶을 서정의 근간으로 삼은 서정 시인이다. 고향의 정서와 고향을 이루는 세목들, 이를테면 감꽃, 뻐꾸기 울음소리, 홍시, 봉선화, 쥐불, 함지박, 메까치, 물꼬, 체장수, 눈둑길, 다랑이, 찔레넝쿨, 끄으름, 머슴, 아궁이, 도깨비불, 창호지 문살, 반짇고리 실타래, 콩밭머리, 콩깍지, 장길, 민들머리, 삼베울, 무우오라기, 싸리울, 보리바심, 허드렛군, 솔개, 굴렁쇠, 상둣군, 지풀, 밀잠자리, 메꽃, 상무 등으로 가득하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저녁눈」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여나는 불빛이여 늦은 저녁
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여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여 밤이여 섧은 盞이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여나는 아슴한 불빛이여.
박용래, 「三冬」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그 봄비」
「저녁눈」·「三冬」·「그 봄비」은 박용래 시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시들이다. 박용래의 시는 지리학적 현상의 탐구가 아니라 몸의 감각에 새겨진 향토를 복원한다. 이때 향토는 나와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조화를 이룬 형태로 존재하는 공감적 경험의 바탕에서 찰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시인은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의 행방을 쫓는다.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 “조랑말 발굽 밑”,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에서 붐빈다. 눈발이 유독 그곳에만 붐빌리는 없겠지만, 시인의 눈엔 그렇게 비친 것이다. 우연찮게도 눈발이 붐비는 곳은 향토의 정겨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시인은 다시 고적하게 땅을 적시는 봄비의 행방을 쫓는다. 봄비가 모여 우는 곳은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이다. 봄비는 종일 내린다. 봄비가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운다는 秀逸한 구절 뒤에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봄비의 卑賤을 거론함으로써 귀함없이 흔하고 작아서 애잔한 것에 대한 연민을 새긴다. 시인의 눈에 발견된 눈발이나 봄비는 고요한 가운데 심미적 감각을 깨우는 매개의 소임을 다하며, 이 향토의 농경문화적 정서를 자극하는 평화스러운 풍경이 곧 추구하고 돌아가야 할 이상향임을 암시한다.
단지 있는 세계의 현상만을 묘사하는 박용래의 시들에 숨은 시적 전언들은 “나”와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고 조화된 채 존재하는 있음에 대한 그리움이다. 왜냐하면 그 “있음”은 이미 없는 있음이기 때문이다. 「三冬」에서는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여나는 불빛”와 “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를 주목한다. 어둠 속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나 저녁 먹고 상 치우며 썼던 그릇을 물에 부시는 소리는 일상적인 소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 의미롭게 되새겨지는 것은 원근법의 구도에서 저 멀리 아득하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遠의 풍경 속에 속하는 불빛과 소리들은 화자의 감각과 기억에만 있는 것이고, 近의 풍경 속에 속하는 것은 三冬의 어둠과 그 어둠 속에서 화자가 홀로 마시는 “섧은 盞”이다. 아마 화자는 혼자 쓸쓸히 술잔을 기울이는 모양이다. 이들 멀고 가까운 것들의 계열체들은 본디 하나로 있어야 하는데,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결핍의 느낌을 자극한다. 시인은 육체의 감각 안에 새겨진 소리나 불빛 따위가 그리는 지리학을 더듬으며 고향으로 나아가는데, 고향은 있음의 세계 속에 결핍된 있어야 할 세계이고 언제 어디서나 찾아가야 할 본향인 까닭이다. 시인은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이다. 이는 시인이 그리워하고 추구한 고향의 지리학은 실은 고향의 실재와 현상 저 너머에 있는 피안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늘 없음에서 절실해지는 마음의 光源이고, 삶의 고단함 속에서 더욱 찾아지는 이상향이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느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박용래, 「겨울 밤」
시어를 아껴 쓰고, 그 근검절약이 철두철미하게 몸에 배인 시인으로 박용래를 따를 시인이 없다. 서술어를 과감히 생략하고 명사들로 시를 꾸리는 「코스모스」·「뜨락」·「모과차」·「옛 사람들」·「울안」·「능선」·「하관」·「고도」·「낙차」·「창포」·「귀울음」·「시락죽」·「나부끼네」·「꽃물」·「겨울 산」같은 시편들에는 고향의 자연과 지리에 그 뿌리를 잇대인 情恨이 깎아내고 깎아낸 뒤 뼈와 같이 남은 언어에서 올곧게 빛난다.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원근의 구도에서 고향을 멀리 둔 자가 마음으로 그곳의 고적한 정경을 그리는 마음이다. 그 잠 못 이루고 정처없이 헤매는 마음을 고향의 지리학으로 이끄는 것은 눈과 달빛과 바람이다. 눈 쌓이는 “고향집 마늘 밭”, 달빛에 훤하게 드러난 “고향집 추녀 밑”, 바람이 일어났다 잠잠해지는 “고향집 마당귀”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는 것은 거기에 감각의 원초가 만들어지고 지각의 뿌리를 내린 까닭이다. 연어가 수천 킬로미터의 고단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제가 태어난 강물을 찾아오는 것도 그곳이 감각의 원초 속에 실존의 최적화된 환경으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향은 유년기의 심신 상관체의 기억 psycohosmatic entity에 원체험으로 낙인찍히는 까닭에 어느 장소보다 장소감이 강렬하게 각인되는 곳이다.
3. 공주, 맑은 기운이 충만한 땅
서천에서 태어났으나 공주에 오래 살아 공주 사람으로 인상이 굳어진 나태주의 시에는 공주 땅의 자연과 지리가 투명한 정서로 살아난다. 공주는 위례성에 이어 백제가 두 번째 도읍지로 삼았던 땅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공주의 영역은 매우 넓어서 금강 남쪽과 북쪽에 에 걸쳐져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첫째가 儒城이고, 둘째가 敬天이며, 셋째가 이인이고, 넷째가 유구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주 일대의 살 만한 곳을 이르는 것이다.” 공주는 차령산맥의 산계에 속한 산들이 골고루 퍼져 있는데, 닭의 볏을 쓴 용의 형상을 한 계룡산이 하늘을 떠받치는 주산으로 우뚝 솟아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조선 왕조의 문장가 서거정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차령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충만하게 쌓여서 큰 고을을 이룬 것에는 오직 공주가 제일이 된다. 대개 장백산의 한 갈래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에 이르러서는 원적산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서 웅진을 만나 움츠려 큰 산악을 이룬 것을 계룡산이라 한다. 물이 용담, 무주 두 고을에서 근원을 발하여 금산에서 합쳐 영동, 옥천, 청주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또 꺾여 사비강이 되어서는 더욱더 큰 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간다. 이에 공주는 계룡산으로 진산을 삼고 웅진으로 금대를 두르고 있으니 그 산천의 아름다움을 알겠도다.”고 했다.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에 산보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릿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나태주, 「대숲 아래서」
박용래와 마찬가지로 토속 취향이 물씬한 나태주의 이 시는 영혼을 헹궈내는 듯 맑음으로 그득 차 있다. 그것은 젊음의 나아갈 바가 없이 뻗치기만 하는 혈기는 눅이고 소슬한 덕과 지혜를 두텁게 쌓은 인격에서 우러나온 맑음이다. 시에 내비치는 그 맑은 인격은 향토의 자연과 지리에 깃든 ‘청풍’과 ‘명월’이 키운 것이다. 시인이 펼쳐 보이는 바람, 구름, 대숲, 댓잎에 어리는 별빛, 대숲에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 소리,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산골의 실비단 안개, 서녘구름, 동구밖에서 떠드는 애들의 소리, 밤안개, 우물가, 달님이 한데 어우러진 이 시는 읽은 뒤 가슴을 울리는 바가 커서 귀에 이명 같은 게 오래 머무는데, 이는 세속의 부조리에 찌든 영혼에게 다가오는 맑음의 경이와, 생존을 위한 泥田鬪狗로 낮밤을 지새우던 이에게 고요한 평화가 도리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거롭고 속된 세상의 일과 인연에 눌리고 매인 데서 탁 하고 풀려나는 해방감과 찬비에 紅塵이 씻긴 듯 빛나는 정화의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 사람의 기질과 인품은 그를 낳고 품은 자연과 지리에 깊이 상관되는 것이다.
하늘, 땅, 사람은 제각각이되 동시에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함께 움직인다. 자연과 지리는 거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감각의 체험으로 내면을 간섭하고 인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맑고 깊은 산과 물은 예지를 주고, 산과 물을 포함한 자연 일체는 거기 사는 사람의 삶과 조화를 이루며 현상과 본질이 하나로 되는 일체감을 주는 테두리로 작용을 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의 전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감각과 의미의 상호 겹침을 겪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나태주의 초기시에서 “부엌에서 뒤란에서 / 저녁 늦게 들려오는 / 어머니 목소리.”(「내 故鄕은」), “짚불 피워 구둘을 달군 뒤 / 조이문에 불을 밝히니 / 대숲에 깃을 찾은 산새떼 / 지줄거리고 / 둥기둥, 꿈결인양 달이 솟는다.”(「짚불 피워 구둘을 달군 뒤」), “시래기밥 먹고 / 마당가에 나온 겨울저녁이면 / 일기 시작하는 솔바람 소리, / 아아, 저절로 배부르구나.”(「어린날에 듣던 솔바람 소리」)와 같은 고향의 정감과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감각의 체험이 나이 들면서 지각의 체험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을 경험하는데, 이때 고향은 더 이상 사실적·구체적 실존을 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곳에 있는 아련한 피안, 이상향의 표상으로 탈바꿈한다.
4, 놀뫼, 그 누런 땅을 적시고 흐른 피
논산 땅은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공주와 경계를 이룬 동북쪽에 솟은 계룡산의 산계에 속한 봉우리들이 두마를 거쳐 뻗어내려 동남쪽인 전라북도 완주 쪽에 속은 대둔산의 줄기와 만난다. 서쪽은 지세가 낮은 넓은 들을 이루는데, 동쪽의 산들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노성천, 연산천, 성평천, 방축천 등의 지류를 이루고 흐른다. 이 물들은 다시 논산천으로 합류했다가 금강을 거쳐 황해로 흘러나가며, 논산천과 금강이 만나는 유역은 넓고 기름진 들이다.
논산의 옛이름은 놀뫼다. 백제 때는 黃等也山郡이라고 했고, 신란 때는 黃山郡이라고 했다. 유난히 땅이 누런 빛깔이어서 ‘누르 황’ 자와 ‘뫼 산’ 자를 써서 황산이라고도 했는데, 토박이 말을 그대로 따서 놀뫼라고도 했다. ‘논산’이란 맥락이 애매한 지명은 일제 때인 1914년에 얻었다. 백제의 옛터전이었던 이곳 황산벌은 큰 전쟁을 여러 번 치른 곳이다. 신라 군사 5만 명에 맞서 계백이 군사 5천명을 이끌고 죽기살기로 대항하나 역부족으로 끝내 이 황산벌에서 5천 군사가 다 함께 자욱하게 피를 뿌리고 죽음을 맞으며 백제는 망하고, 그 뒤를 이은 후백제도 고려 태조 왕건에 맞서 싸우다가 져서 국운을 끊어놓고 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황산은 일명 천호산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벌판에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견훤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을 토벌하니 신검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이 번민하고 憂滿하다가 등창이 발생하여 수일 만에 황산에서 세상을 마쳤다.”고 쓰고 있다.
놀뫼 사람 金冠植(1934 ~ 1970)의 시는 가난 속에 있으면서도 오연한 긍지를 굽히지 않는 浩然함과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인격은 호방하고 괴팍하나 동양 고전과 漢籍 해독에 두루 능했던 김관식은 시보다 1960년대 문단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뿌린 기행들로 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시는 그 넘치는 파격과 기행만으로 다 가릴 수 없는 빼어난 성취를 보여준다.「病床錄」이라는 시편에 의하면 “五臟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망가진 병고와, “둘째의 登錄金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를 걱정해야 할만큼 가난을 떨쳐내지 못하고 평생을 그 질곡에 매여 산 몸이지만 의연하고 늠름했다. 그 의연하고 늠름함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 사람은 憂患에서 살고 安樂에서 죽는 것, / 白金 도가니에 넣어 鍛鍊할수록 훌륭한 寶劍이 된다.”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아들딸들에게 질곡을 훌륭한 삶의 실현을 위한 시련으로 여기고 꿋꿋하게 견뎌내라고 이르는 대목은 시인의 유언과 같아 그 진정성이 뼛속까지 내려온다.
우리 경제가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해 미국의 구호물자로 겨우 연명하던 전후 궁핍했던 시절에 “韓美合同 ! 友情과 信賴의 幄手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 行·住·坐·臥가 이에서 더 편안함이 없으니 /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고 /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虎皮 위에서」)라고 외치는 시구도 허풍이기보다는 여우작작에서 나오는 익살에 더 가깝다. 또한 한편으로 “칼날 밟고 일어서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가슴속을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潚湘夜雨」), “만나는 원수마닥 산멱을 찔러 쏟아지는 피를 마시어 목을 축이고 / 백년 삼만 육천날을 울음으로 새우리라. / 오 ! 타고난 이 설움을 낸드 어이하리야.”(「痛哭」)라는 시구를 보면 풀지 못한 울화와 설움이 타오르는 걸 알 수 있다. 김관식이 놀뫼 땅에 흐르는 백제인들의 드높은 자존과 이루지 못한 꿈에서 비롯된 설움과 적들의 칼날에 붉은 피를 쏟아야만 했던 데서 사무친 원통함이라는 무형 자산을 상속한 이 땅의 嫡子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대숲을 보면 알 일이지
主人은 물어 뭘 하느냐
(爲人의 風度와 그 性品을)
내 靈魂을 키워 온 데야 !
肉身조차도 이제는 너를 닮아
뼈마다 마디마디 야월 대로 야웼으니
내 生涯에 단 하룬들 너 없이 無聊함을
견딘다 하랴.
여름 한고비.
마구 타는 불잉그럭, 지글거리는 太陽.
더위 먹고 숨 죽어
사위 ― 옴찟 못하는 화안한 대낮.
대숲에 들어,
오지랖 풀어헤쳐 땀방울 드리우면
금시 飄然한 바람이 일어......
晋代 淸流들의 주고받는 玄談인 양.
저만치,
누룩장 베고 누워 코를 부는 인
천상 劉伶임에 틀림없는데
山濤는 어데 갔나, 白羽扇으로 낯을
가리고 조으는 向秀 맞는 바래기
逍遙冠을 제켜 쓴
稽康의 거문고와 阮籍의 파람 소리
술榼을 들고 찾아오는 다정한 벗이 있거든
푸른 눈동자로 반기어 맞아들일 일이요,
時俗의 雜輩라며, 눈자위 사나웁게 흰창을 흘겨
당장 그 자리서 쫓아보낼 것이다.
김관식, 「竹林賦」
「竹林賦」는 시인이 꿈꾼 이상향의 삶의 모습을 슬쩍 내비친다. 그것은 다름아닌 표연한 바람이 이는 대숲, “晋代 淸流들의 주고받는 玄談”, “稽康의 거문고와 阮籍의 파람 소리, 술榼을 들고 찾아오는 다정한 벗”이 함께 하는 고향에서의 삶이다. 세속의 잡답을 멀리하고 풍류와 한가로움을 즐기겠다는 바람은 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표연한 것이다. 시인은 맑은 기운이 깃든 그 고향이 “내 靈魂을 키워 온 데야 !”라고 말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자긍심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마구 타는 불잉그럭, 지글거리는 太陽”은 저 대숲 바깥 세상의 일이다. 고향의 자연과 지리 속에서 삶의 평형과 복락을 구하는 이런 태도는 “山에 가 살래. / 팥밭을 일궈 穀食도 심구고 /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 가끔, 날씨 淸明하면 東海에 나가 /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 爵祿도 싫으니 山에 가 살래.”와 같이「居山好· 1」의 시편에서 보다 직접적인 언술을 얻는다. 시인이 예찬해 마지않는 밭을 일구고 질그릇을 구우며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겠다는 유유자적의 삶과 풍류는 두드러지게 과거지향적이다. 그것이 오늘의 삶과 어느 정도 동떨어진 저 堯舜시절에나 가능했을 神仙 놀음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잦은 黨爭과 士禍를 피해 산림으로 피신해 은거한 사대부 선비들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타는 안스러이 부셔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애기의 새끼손가락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어린 아그배 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물 가운데 어떤 놈은 물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蓮꽃이 그 큰 봉오리를 열었다.
김관식, 「蓮」
「蓮」은 다른 동시대 시인들의 시에 견주어도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개흙밭에선 연꽃이 피어 공중에 향기가 진하고, 맑은 하늘엔 잠자리가 떼지어 난다. 사뭇 가시 같이 걸리는 까다로운 한자어도 없이 쉽고 고운 우리말로 연꽃 꽃봉오리가 막 열리는 연못가 허공에 저녁 햇살을 받으며 날고 있는 수천수만의 잠자리떼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는 이 시는 손에 잡힐 듯 그림이 평화롭고 선명하다. 저 累代의 역사에서 놀뫼의 누런 흙을 적시고 흐른 피에 사무친 怨과 恨을 떠올린다면 그것을 알리없는 이 수천수만의 잠자리떼가 평화롭게 비행하는 풍경의 무심함은 가슴을 베이듯 애련하게 하는 바가 있다.
5. 고향의 언어는 몸의 언어다
지리학자 한영우는 하늘과 땅과 인간을 모두 유기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그래서 “모든 만물은 생명체로서의 의지와 이치를 가진다. 하늘의 큰 의지와 원리를 天理라 한다면, 땅의 원리와 의지가 地理다.”라고 했다. 이 천리와 지리를 이어서 통하게 하고 그 이치를 몸으로 실현하는 게 사람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궁극적 궁리는 곧잘 擇理의 영역 속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장소는 존재의 나타남에 불가결한 바탕이며, 생의 필연적 가능성이 일구어지는 곳이고, 존재 근거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장소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정체성이 규정되는 존재다. 도시가 출세와 부를 위한 이전투구의 장소, 체류지, 임시거주지일 뿐이라면, 고향은 본질이다. 언제나 생의 궁극은 고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도시의 이기주의 배타주의에 멀미가 날 때마다 고향을 떠올리고 정서적으로 위안을 얻는다. 고향은 항상 새로운 출발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생의 고비마다 고향을 찾아 무위도식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일견 뜻없어 보이는 무위도식의 시간이 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암중모색과 자기충전의 시간인 것이다. 고향은 도시의 실존에 대한 逆像으로, 우리가 꿈꾸는 피안의 현실적 대안이다.
잎새를 따 물고 돌아 서잔다.
이토록 갈피 없이 흔들린 옷자락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슬리는 저 능선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
박용래, 「엉겅퀴」
우리는 저마다 고향의 자연과 지리의 총아들, 존재 속에 內住를 기어코 일궈낸 개별자들이다. 엉겅퀴가 그것이 뿌리내린 장소에서 저의 존재됨을 발현하고 있듯 인생이란 것도 인격과 장소의 혼성체로써 의미를 키우고 길러낸다. 평생을 향리를 지키며 시를 쓴 시인은 “함부로 폈다 / 목놓아” 지는 엉겅퀴에서 개별자의 쓸쓸한 운명을 꿰어 본다. 개별자의 자기됨은 “잎새를 따 물고 돌아 서”는 행위, “갈피 없이 흔들린 옷자락”, 번지는 “엷은 웃음살”에도 또렷해진다. 저 멀리에 있는 것들과 숨은 화자의 자리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은 꼭 “나”의 소외를 확인해보려는 몸짓이기 보다는 “나”의 의미됨, 즉 “나”가 체현하고 있는 자유와 본질을 짚어보려는 궁리에서 비롯된다. 덧없는 출현과 사라짐 사이에서 엉겅퀴는 그것의 존재됨을 소슬하게 지켜낸다. 다른 자리가 아닌, 바로 그 향리 어느 길모퉁이에서 피어 있는 한송이 엉겅퀴꽃도 장소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 혹은 대중에 의해서건 일단 장소의 정체성이 형성되면,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사회적 상호 작용을 허용한다. 또 그 장소의 정체성이 사회 내에서 정당화되는 한, 장소 정체성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정체성이 영적 교감이나 공동체 내부의 경험을 통해서 육성되는 곳에서는, 그 장소의 상징과 중요성이 의미를 유지하는 한, 계속해서 그 정체성은 지속될 것이다.” 폈다 지는 이 영고성쇠의 순환의 고리 속에 있는 것은 엉겅퀴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마늘쪽 같이 생긴 고향의 少女와
한 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少年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 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 「울타리 밖」
“울타리 밖에도 花草를 심는 마을”, “오래 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와 같은 표현들은 고향의 현상적 외면의 모습을 나타내준다. 하지만 시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별행으로 단독 처리된 “天然히”라는 형용사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겠다. 대개는 어린 시절의 직관과 인지가 형성되고 정서가 着根되는 이 장소는 실존적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곳이다. 고향은 한때의 定住나 체류지가 아니라 “나”의 인격과 장소가 상징적 결속을 이루는 곳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향의 자연과 지리, 사회적 관계와 유대, 전통과 관습, 언어 들에 의해 所與된 고유한 인격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시인이 유난하게 고향의 질박한 사물과 인정, 자연과 지리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것이 원초의 경험이고, 피안의 장소로 내면화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뜨락」이라는 시를 보면 불과 9행으로 마무리된 시에서 “木瓜나무, 구름 / 소금항아리 / 삽살개 / 개비름”과 같이 4행을 아무런 정서적 개입 없이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들을 거명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향의 인정물태에 대한 시인의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은연중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시는 주인 없는 집에서 고립무원의 자세로 앉아 주인을 기다리는 객과 그를 둘러싼 집의 모습, 그 시간과 그늘을 묘사하고 있다. 객과 정물들은 “한 家族과 같이 어울려 있다”고 말하는데, 타자의 눈으로 타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고향을 관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박용래는 향토의 언어, 즉 몸의 언어, 타고난 자연의 언어로 고향을 노래한 시인이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이 내면에 새겨진 영속적 현존인 것이어서 고향의 언어는 그것에 나온다. 고향의 언어는 母語요, 토박이 말이다. 고향의 언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합목적성이나 이성의 규범에 선행한다.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天然한 것이 고향에서의 삶이고 고향의 언어다. 오늘날 고향을 노래한 박용래의 시가 큰 뜻을 갖는 것은 급격하게 도시화·산업화 하면서 잃어버린 고향이 우리 삶을 되비치게 만드는 거울이요, 있는 것의 역상으로서 있어야 할 피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까닭이다. 출세나 성공 따위가 고향 바깥의 타향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지만, 그런 세속의 종잡을 수 없고 변덕스런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과 상관없이 우리 영혼의 풍향계는 늘 타향에서 고향 쪽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