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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와 타 교과서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채택률이 0%가 되었다고 방송에 나왔더군요. 우리 국민의 단결력이 또 한 번 빛을 본 순간인 것 같습니다.
헌데 조금 씁쓰레합니다. 북한의 100% 찬성 의회 운영이 웃음거리가 되듯이 0% 채택률도 민주사회에서의 사건으로 이해해 주기는 조금 꺼려집니다.
국사 교과서 몇 권이 구해졌기로 논란이 된 부분을 찾아 옮겨봅니다. 전문 모두를 옮길 수는 없으니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인터넷 기사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내용을 택해 조목마다 교과서 본문을 차례로 올리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참고로 삼을 교과서들입니다.
1. 수정되기 전의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8차 교육 과정
2. 선생님 검토본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수정되기 전 판. 8차 교육 과정.
3.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금성출판사 판. 초판년도 2003년으로 2010년 발행본. 좌파 성향 교과서로 논란을 일으켰던 책. 7차 교육과정.
4. 1990년 초판 발행 국사교과서 상·하권, 1996년 초판 발행 국사교과서 상·하권(이상 교육부 발행 국정교과서. 실린 지문의 내용이 차이가 없을 경우 상세한 쪽으로 선택 인용). 5차와 6차 교육과정.
5.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의 대안 교과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2권. 초판년도 2002년.
먼저 가장 큰 문제가 된 위안부 문제 왜곡 부분과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로 폄훼했다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 교학사 교과서 247쪽의 지문과 249쪽의 자료 사진
247쪽의 지문 :
…일제는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발표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들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였다. 동원된 여성들은 일본과 한국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중국·동남아 일대·필리핀 등지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했다.
249쪽의 자료 사진 :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 아래 자료 사진과 다음과 같은 지문이 있음. 수정되기 전과 후의 내용.
수정 전의 내용 :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 중인 일본군 위안부들 - 현지 위안부와 달리 조선인 위안부는 전선의 변경으로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수정 후의 내용 : 한국인 위안부는 군 주둔지에서 착취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원되어 강제로 끌려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JTBC 손석희 앵커와 교학사 양철우 회장 인터뷰 화면에서 옮겨 왔음)
#. 천재교육 교과서 280쪽.
지문 : 지금도 계속되는 수요 집회 - 일본은 만주사변 무렵부터 군 위안소를 운영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이를 전면적으로 확대 운영하면서 군 위안소를 계속 늘여갔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하여 일본군의 성 노예로 삼았다.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료사진과 사진 해설 첨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눈물 증언’, ‘뉴욕 주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기념비’)
#. 금성출판사 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163쪽 발췌
지문 : 일본군 위안부 여성까지 전쟁 수단으로 – 일제가 침략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한 가장 반인륜적 범죄 행위는 여성들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한 일이었다.
…일제는 이미 1930년대 초 대륙 침략과 함께 군 위안소를 시범적으로 운영하다가 전쟁 말기에는 이를 조직화하여 조선 여성들을 집단으로 징발하였던 것이다.
일제 말기 침략 전쟁에 간제 동원된 조선여성들의 수는 수십만 명으로 추산될 뿐 정확한 인원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들 여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일본 ‘위안부’로 희생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 중 입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영위해 왔다.
(오른 쪽에 자료 사진. 사진의 해설 지문 :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간 일본군 ‘위안부’들. 할머니가 된 사진 속의 한 여성은 2000년에 열린 ‘일본군 성 노예 전범 국제 법정’에서 비인간적 위안소 생활을 증언하였다.)
#. 초판년도 1996년 판 교육부 국사교과서 하권 136쪽
또 우리 민족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수탈당하였고, 우리의 청년들은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또 징병제와 징용령에 의해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 등지로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잃었으며, 여자들까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초판이 1990년으로 되어 있는 5차 국사교과서에는 징용령 뿐 위안부 문제 언급이 없음.)
#.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제2권 135쪽, 138~139쪽.
135쪽의 지문 : …마침내는 지원병, 징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그들의 전쟁터로 끌고 가 목숨까지 내놓도록 강요하였다.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공장과 일터에 여성들을 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군대 위안부로 동원, 성노예 생활을 강요하였다.
138~139쪽 인터뷰 기사 : ‘군대 위안부, 아물지 않은 상처’제하에 2쪽에 걸쳐 인터뷰 기사를 싣는 등으로 위안부 문제를 가장 상세하고 격렬하게 기술해 놓았음. 아래는 본문 중 일부.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들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위안부를 집단적으로 학살하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이 분들이 살아서 이 땅에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고마운 일이지요.
자료 사진 해설 : 군대 위안부 – 일본군들은 패전 이후 위안부들을 죽이거나 아무런 대책
없이 타국 땅에 그대로 남겨두고 철수하였다.
사진은 1945년 8월 14일 미얀마의 미이토키나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한국인 위안부들과 위안소에서 탈출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위안부 출신 할머니이다.
다음은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로 폄훼했다는 부분입니다.
#. 교학사 교과서 257쪽
임시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의거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성들과 고관을 살상하였다. 윤봉길 의거는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이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건국강령을 발표하는 등 건국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오른쪽에 임시정부 이동경로 지도 첨부)
#. 천재교육 교과서 297쪽
자료읽기 : 일본의 패망과 김구의 탄식
‘백범일지’의 인용 - 왜적이 항복하였다. 아!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시안과 푸안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중요한 곳을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가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도움 글 : 김구는 일본의 항복 소식이 기쁘지 않았다.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계획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무산되었으며, 우리의 힘만으로 독립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이후 김구의 걱정처럼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혀 광복 후 정부 수립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한반도는 결국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 금성출판사 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198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항목의 생각열기 - “일본이 항복한 뒤 우리나라도 전승국이 되어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광복군의 작전은 꼭 성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전승국의 하나가 되어 국제적 지위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김구, 백범일지)
김구선생 실명 등장의 기록으로는 이후 262쪽에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항목에 한쪽을 더 할애했음.
#. 초판년도 1996년 판 교육부 국사교과서 하권 148쪽
임시정부는 일본의 중국침략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로 전전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김구 등의 노력에 의해 조직이 정비, 유지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하 임시정부의 활동과 한인 애국단의 활약,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상술했으나 김구선생의 실명은 195쪽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항복에 ‘남북협상 실패’로 언급되는 것으로 그침. 1990년 초판 발행의 국정교과서도 내용이 위와 온전히 같음.)
#.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제2권 149~150쪽
기쁨 뒤쪽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 일제의 패망, 그리고 해방,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게 당연하건만, 일생을 독립을 위해 투쟁한 김구는 탄식으로 이 날을 맞았다.
‘아, 왜적이 항복…’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 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우리 손으로 일제를 타도하고,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새 나라 만들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던 우리 민족 모두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민족운동에 나섰던 이들 모두는 바로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것이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교학사 교과서가 지금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많은 분들의 답변 중 가장 구체적인 답변을 한 예를 인용하여 교과서를 찾아보겠습니다.
질문 : 지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1.
일단 문맥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존재합니다. 40p에 있는 탐구활동 비슷한 지문을 보면 마지막 문단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내용이 연결되지 않거든요.
#. 교학사 교과서 40쪽 : 이야기한국사 - 발해의 자취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후, 발해 땅에는 거란의 동쪽 나라란 뜻의 동단국이 세워져 발해인들 중 일부가 거란화되어 후일 만주족의 조상이 되었고…
…영순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태씨들은 남한에 남아 있는 발해의 자취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이 바로 대조영의 후손들로…
…그들은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1천여년 전 그들의 조상은 전혀 다른 억양의 사투리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은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을지언정 문화적 수준을 알아보기에는 어려운 너무나 조각난 파편들이다.
위의 지문 중 마지막 단락이 전혀 앞의 문맥과 맞지 않음이 사실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해설한 다른 교과서들을 보겠습니다.
#. 천재교육 교과서 51쪽 : 생각 넓히기 - 발해의 귀족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발해의 귀족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는 성씨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해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발해 관련 자료 중에서 2명 이상 확인되는 성씨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측에 도표)
다수를 차지하는 핵심적 지배층은 단연 대씨였다. 이들은 전체의 약 35%에 달하며, 5품 이상의 관직을 갖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고씨가 대씨에 버금가는 최고위층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하 략)
#. 초판년도 1996년 교육부 국사교과서 상권. 본문 65쪽~66쪽 발췌.
…발해의 영역에는 고구려인 이외에, 원래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써 발해의 주민은 지배층을 형성한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의 말갈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발해가 외국으로 파견한 사신에는 고씨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고구려계 인물들이다.
…발해는 10세기 초에 국력이 약화되면서 거란족에게 멸망되었다(926). 이 때 발해의 왕자인 대광현 등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으며, 고구려 계통 유민들은 대개 고려로 흡수되었다.
#.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제1권 111쪽~112쪽 발췌.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의 말갈족을 거느리고 출발한 나라이다. 말갈족은 만주의 터줏대감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통일 후 신라의 중앙군에도 고구려, 백제 출신과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보다는 우리 민족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반은 고구려 사람이 되어 살았던 그들을 발해는 왜 완전한 발해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일까?
…신라의 진골 귀족들과 발해의 고구려계 귀족들이 각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보수성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중국에 이용당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만주 땅은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그 곳 주민들도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답변 2.
또 5.16 쿠데타도 육사 생도가 인정하는 시위를 했다. 대통령이 인정했다 이런 식의 기술이 되어 있는데, 당시 국민들이 모두 인정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데도 쿠데타가 마치 국민 모두가 인정했고, 필요했던 것이다-라는 복선을 깔고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 교학사교과서 324쪽 발췌
제2공화국의 위기와 5.16 군사정변 – 제2공화국은 4.19혁명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이 1960년 8월에 남북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은밀한 적화를 기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남북 학생 회담을 주장하였고, 혁신계 정당들은 북한과의 정치 협상을 주장하였다.
장면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군비축소를 약속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단행하였다(5.16 군사정변).
반공 정책과 경제 성장 – 5.16 군사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
#. 천재교육 교과서 324쪽 발췌
5.16 군사 정변과 군정
1961년 5월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 세력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 등을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다(5.16 군사정변).
군사 정변 세력은 반공을 국시로 내건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군정을 실시하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민주화를 지향한 4.19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되었다.
…군사 정부는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정치인, 학생 윤동과 통일 운동의 지도자, 각계의 중요 인물을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 초판년도 1996년 교육부 국사교과서 하권. 205쪽 발췌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부 –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사회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구실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었다. 4.19혁명 이후 출범하였던 장면 내각은 자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9개월의 단명으로 끝나게 되었다.
…군사정부는 새로운 정당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여기에 결집시켰다.
…1963년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군사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주요 과제들을 대부분 그대로 실천하려 하였다.
(1990년 초판 교과서 내용은 위와 대동소이했음)
#. 금성출판사 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284~285쪽
생각열기 - “정통적 의미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의 혁명이 그 얼마나 불행한 것이며, 또 그 혁명의 악순환이 종국적으로 국가를 쇠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은 본인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 왔습니다. ……5·16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은 바로 우리가 직면했던 혁명 직전의 국가 위기에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박정희 전역사)
지문 : 4·19 혁명 이후의 정세에서 5·16 군사 정변은 과연 불가피했을까?
5·16 군사 정변과 박정희 정부의 수립 –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제2권 212쪽
군인들 전면에 나서다 - (4.19)혁명 후 1년이 지난 1961년 5월 16일, 다시 한 번 총소리가 서울의 새벽을 흔들었다.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군인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혁명의 씨앗이 싹터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정변이 성공한 것은 그들이 내세운 반공, 친미, 경제 재건이 군부의 뜻을 잘 반영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주당의 잘못된 정치 운영과 경제 정책의 실패에 따른 민중들의 실망도 한 몫 하였다.
제3공화국, 문을 열다 – 박정희는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군사 통치를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때의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집회와 시위, 단체 결성을 금지하였다.
…1963년 8월 30일, 군대로 돌아가겠다던 박정희는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아슬아슬하게 앞질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한 것이다.
답변 3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한 소단원에 그냥 처박혀 있습니다. 수업을 하면 20분 분량? 그게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의 전부입니다.
#. 교학사교과서 326~327쪽. 336쪽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과 87년 체제의 성립 (326~327쪽) :
유신 체제는 이미 자유 민주주의적 생활을 규범화한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따라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유신에 대한 반대를 금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였다.
…1979년 10월 부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마산, 창원에는 위수령을 발동하였다(부·마 항쟁, 1979). 10월 26일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10·26사태를 조사하는 것을 기회로 하여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쿠데타에 성공하였다(12·12사태).
…1980년 봄이 되면서 전국의 대학가는 신군부에 저항하는 시위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러나 정부는 이 같은 대규모 시위에 대하여 5월 17일 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진압군이 투입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다(5·18 민주화운동).
갈등의 양상과 변화하는 가치관 (336쪽) :
양극화 - 1960년대 한국 경제가 수출을 통하여 도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정부는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저임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정책은 성공하여 한국 경제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 집약적인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다. 생산성 향상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청계천 미싱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이루어진 절규였다. 이후 노동자들의 문제에 사회가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노동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0~1980년대의 권위주의 통치를 겪으면서 노동 운동을 통해서 사회 변혁을 이루겠다는 움직임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노동 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노동 단체가 복수화되어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 외에도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이 조직되었다.
시민 사회의 발전 – 한국의 시민 사회는 때로는 정치권에 대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시민의 권리를 찾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시민 사회가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 공 동체 건설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이하 ‘사료 탐구’ 명목의 자료로 ‘경제 정의 실천 시민연합(경실련) 발기 선언문(1989)’첨부.
#. 천재교육 교과서 331쪽. 335~339쪽.
유신반대 민주화운동(331쪽) -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움직임은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어 재야인사 중심의 개헌 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1974년부터 긴급조치를 잇달아 발표하며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연맹과 인민 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다.
…1976년 재야인사들은 긴급 조치의 철폐와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는 3·1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학생 시위와 사회 각계각층에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였다.
…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독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부·마 민주화운동). 박정희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정권 내부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됨으로써 유신 체제도 막을 내렸다(10·26 사태).
민주화의 진전과 확대(335~339쪽)
신군부의 등장과 서울의 봄 – 1979년 10·26사태를 계기로 민주화를 위한 논의가 사회 곳곳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났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 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2·12사태).
…5월 15일 4·19혁명 이후 최대 인파인 10만여 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시위(서울의 봄)를 벌이는 등 전국 각지에서 비상계엄을 철폐하라는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또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가두었다.
5·18 민주화 운동 – 광주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5월 18일부터 신군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끝내는 발포까지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시위대는 21일부터 무장을 시작하였다.
…광부 시민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확보함으로써 성숙한 시민 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진압군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전차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은 이후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일부 대학생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대해 군사 작전권을 가진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반미 운동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신군부의 집권 –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 보위 비상위원회를 구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군부는 민주 인사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하는 한편, 비판적인 기자와 교수를 해직하였다. 또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구실로 삼청 교육대를 설치하였다.
신군부의 전두환은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980.8). 그는 대통령의 비상 조치권과 국회 해산권 등 유신 헌법의 독소 조항을 그대로 둔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새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토록 하였다. …민주 정의당을 창당한 전두환은 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81.2).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 및 사회 운동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외 금지, 학생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대학 학생회 부활 등 유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대학생들과 청년들은 전국 학생 연합과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한편,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비롯한 민중 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6월 민주 항쟁 –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당선된 야당 정치인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신한 민주당으로 결집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을 은폐하였으며,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여 국민의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 무렵 박종철 사망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던 음모가 드러나면서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호헌조치에 대한 국민의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26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국민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여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의 이름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국민 기본권 보장 등 8개 항의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하였다(6·29 민주화 선언).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다른 교과서 내용 옮김은 생략하겠습니다. 구 국정교과서의 내용은 1990년 판의 경우 ‘5·16 군사혁명’으로 수록해 놓는 등으로 인용할 가치가 없었고, 1996년 판은 ‘5·16 군사 정변’으로 용어가 바뀌고 내용은 교학사 판과 비슷한 정도였습니다. ‘금성출판사 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와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천재교육 교과서를 변형 확대한 정도였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고 싶어서입니다.
답변 4. 가장 많이 욕을 먹는 부분이 일본이 어째서 을미사변을 일으켰는지 왜 일으켜야 했는지 생각해보자라고 하는 탐구활동 부분이죠.
교학사 교과서 190쪽.
사료 탐구 ‘을미사변’ - 러시아와 조선이 손을 잡는 것에 대처할 길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오직 비상수단으로써 양국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편의 손을 절단하여 양자가 손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다시 말해 궁중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민비를 제거하여 러시아에게 결탁할 당사자를 제거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다. ……당시 시행하는 정책은 전부 민비의 계책이었으며 국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가 중 그 지모와 수완에서 민비보다 나은 자가 없었으니 민비는 실로 당대 최고의 준걸이었다. ……이 점에 착안하여 근본적으로 화근을 제거코자 도모한 것이다.
-한성순보의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의 을미사변 회고록 “민비 조락 사건”중에서-
도움 글 :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던 일본인이 명성 황후의 시해 과정을 회고하면서 쓴 글이다. 당시 명성 황후는 조선 조정에서 시행되는 모든 정책에 관여하였고 더불어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 보기 : 당시 일본은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천재교육 교과서 203쪽
삼국 간섭과 을미사변 - …이에(삼국간섭) 고무된 조선 왕실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영효가 역모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고, 왕실 측근 세력이 내각에 등용되는 등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일본은 군인 출신 미우라를 조선 주재 공사로 임명하여 무력 행동에 나서고자 하였다.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는 세력의 핵심이 왕비라고 생각하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1895).
#. 초판년도 1996년 교육부 국사교과서 하권 88쪽
박영효가 실각한 뒤,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1895).
…마침내 명성 황후의 시해로 울분에 싸여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이 단발령을 계기로 하여 각자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친러파는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1990년 판 국정 교과서는 위와 내용이 온전히 같음)
금성출판사 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72쪽
역사의 현장 :
외국 공사관 보고를 통해서 본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 – 을미사변을 일본인들이 일으켰다는 것은 사건 직후 구미 공사관들의 보고서와 노스 차이나 헤럴드 신문에서 나왔다. 이들 내용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다음은 미국 공사관의 10월 10일자(양력) 보고에서 기술한 내용이다.
“궁녀의 이야기로는 소란한 사태에 놀란 궁녀들이 왕비의 방으로 몰려들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도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본인 몇 명이 이 방으로 쳐들어왔고, 이경직이 왕비의 앞을 가로 막았지만 일본인 폭도의 칼을 맞고 살해되었다. 공포에 질린 왕비가 자신은 단지 이곳을 찾아온 방문객이라 말하였고, 다른 궁녀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하였으나, 한 일본인 흉한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짓밟고 칼로 찔렀다. 세 명의 다른 궁녀는 왕비와 비슷한 용모 때문에 왕비 시해를 확실히 하기 위한 살인자들에 의해 함께 살해되었음이 틀림없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제2권 48쪽
이런 가운데 개혁에 불만을 품은 왕실과 일부 세력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에 의존한 개화파 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왕비를 살해하고(1895. 을미사변)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명성 황후의 장례식 – 청·일 전쟁으로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일본이 궁지에 몰리자 왕실은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일본에 맞서려고 하였다.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친청, 친러 정책을 유연하게 구사하였던 명성황후(1851~1895)가 이 움직임의 이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하 위에 인용한 답변의 계속입니다. 불편부당의 원칙을 말씀하고 있어 내용이 하도 좋기로 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모두 하신 경우여서 무단으로 인용했으니, 이 글의 저자가 혹 제 글을 보시거든 꾸지람을 주세요.
답변 5.
제가 언급한 내용들 말고도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재개정판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보지 못했지만, 그 이전판을 보고 이야기 해드리는 겁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좌파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고, 우파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좌파냐 우파냐를 떠나서 저자들의 가치관이 문제인 겁니다. 자신들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가고 자신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 가치관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안 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인정해라는 자세가 틀렸습니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으면 남도 존중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그리고 진정 그들이 제대로 된 역사적 사고를 가지고 교과서를 썼다면 이렇게까지 시끄럽지는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서울신문 서동철 논설위원의 글 중 한 단락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역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해주신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측이 밝힌 대로 진보진영의 집중공격을 받은 이후 내용의 상당 부분을 수정한 결과일 것이다. 분노가 치미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학자적 양심에 기반하지도 않은 서술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뜻 아닌가. 욕먹으면 얼마든지 내용을 바꿔줄 수도 있는 정도의 부실한 학문적 소신으로 한국사 교과서 편찬에 나선 지은이들의 용기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결국 보수 시각 한국사 교과서의 보급이 사실상 좌절된 것도 역량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고 스스로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보수의 무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문제를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읽어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좌편향교과서 우편향교과서 친일사관 종북사관 종중 사관등으로 대별하는것은 학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우리나라의 역사는 지금도 쉬지않고 흐르고있다.중요한것은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한다는 것이다.대한민국의 건국부터 모든기록을 국가에서 엄정한사관들이 담당해야지 ..국가에서 민간단체에서 제작한것을 인정, 검정 중고등학교 교과서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국가 예산을 절약하기 위함인가?정권이 바뀌면 소인배들이 애국자가될수 있고 충신으로 기록될수 있으니 위험한것인가?국론을 한데모아 통일이 되기전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직접 편찬한 국사교과서가 맞다고 생각된다 .예산도 전문가도 늘리고...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저도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일개 출판사에 맡기는 것 자체가 엉터리 발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조의 사초는 임금도 볼 수 없었다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꿔놓는 국사 교과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4차 교육과정 이전의 교과서에는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부르고 "나라의 혼란을 걱정한 애국군인들의 거사"로 미화해 놓았던데 그걸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물론 뻔뻔함으로서의 대단함이지만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론이 통일된 교과서를 편찬해야 한다는 뜻의 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며 찬성표 하나 꾹 누르겠습니다.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耳順도 종반이 된 처지에 추억의 영화 찾아왔다 좋은 글 보게 되어 현 세태에 대한 우려가 기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과하객님 그리고 글쓴이들의 절절한 마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세계정상에 있지 않습니까?
한류문화와 체육계의 선전 조선업과 포항제철, 삼성전자 우리가 반세기만에 이룬 쾌거요 기적입니다. 이제 저주에 가까운 매도나 선동 날선 공방보다 상호 인정/보완하는 상생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생각됩니다. 남은 설연휴 잘들 보내시고, 보다 성숙한 토론문화 그리고 50년대 우리의 맹세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하며 외쳤던 패기만만한 기상 우리의 사랑하는 후손에게 남겼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방문해 주시고 좋은 말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큰형님 연배의 선배님으로부터의 격려 말씀이셔서 용기백배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말씀처럼 우리는 단군 이래 최고의 국세를 자랑하는 시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드신 일류기업들의 활략과 체육계의 세계제패에 청소년들의 학습능력평가까지 어느 분야나 세계 유수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아직 편가르기 문화가 남아 안타까운데 그 또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촌 님도 칭찬하셨지만 우선 우리 카페의 회원님들의 건전한 사고방식과 올바른 토론문화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모범적인 것인데, 저는 우리 국민들 중 중년 연배 이상 보통사람들의 표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주장이 강해도 결국 모범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우리 카페 회원님들의 글들을 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항상 감탄하고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이제 상촌 님처럼 선배 되시는 어른이 참가해 주셔서 더욱 마음 든든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좋은 말씀 주시고 혹시 실수가 보이거든 가차없이 꾸짖어 주세요.
2014.2.3.오후8시40분 mbc뉴스를보며 ---내년부터 한국사 필수과목으로 과열 어쩌구로 방송...국사필수과목으로 해야지 공영방송에서 버젓이 방송인이 한국사라고...가슴이답답합니다 .어느것이든 내용만 알면된다는 방송인의자세인가 ?외국인이 우리나라역사를 한국사로 표현해야 맞고 일본사 중국사등은 우리나라사람이 부르는 명칭이 아닌가요? 다른뜻이 있는지 답답합니다.이유를 알고싶네요? 국사를 한국사교과서라니..방송국이나 출판사에 물어볼수도없고.교육부에서는 이유를알고있는지? .국사편찬위원회가 명칭이 한국사편찬위원회로 바뀌지않았다면 즉각 국사로정정 해야지요.혹시아는분이계시면 알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명칭은 그대로인것 같은데.... 국사를 한국사로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호수가의자 님이 지적해 주신 '한국사'교과서 탄생 이유를 아시는 분은 글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암튼, 이러다 국어도 한국어라는 이름으로 배우게 되지 않으려나 싶네요. 허허, 참....
많은 생각을 하게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읽어주셨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너무하군요
그렇게 느끼셨군요. 저도 0%대의 채택률은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저런 글을 역사서라고 쓰고 또 이 내용을 가르치려고 하는 인간들의 속마음이 궁금합니다.
6.25 전쟁이후 남한 정부를 수립했을 때 친일파를 처단했어야 했는데...
요즘 한국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독립 운동한 분들 내용을 읽다보면 화가 나네요.
그 분들 덕에 자기들이 따뜻한 곳에서 배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친일파 처단의 미흡함은 우리 역사의 큰 약점이지요. 그들이 살아남아 기득권층을 형성하여 이 나라의 정치를 농단하고....
교학사 교과서의 저자들이 아마 그들의 대변자였던 모양입니다. 때문에 기술에 무리가 보였어요.
다만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0%대의 채택률로 기록을 세운 점은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북한의 100% 찬성 의회를 민주주의라고 보는 사람이 어무도 없듯이 그 역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었던 거지요.
좋은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과하객 민주주의 국가에서 0% 채택이 문제라는 점은 공감하지만, 솔직히 저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잘못 된 교과서를 채택해서 ' 이런이런 점은 잘못 표시된 내용이다. ' 이렇게 선생들이 가르치면 좋겠지만, 그런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서 제대로 된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을테니까요.
결국 그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은 그 내용이 옳은 것이라 믿게 되겠지요.
그런면에서 저는 차라리 민주주의에 위배된 행동일지라도 현 우리나라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조근조근 조리있게 쓰신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라라라 저도 사필귀정이다 싶기는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란 모두 같은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분개한 내용을 실은 교과서라면 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다만 여럿이 몰려가서 강요하듯 채택 철회를 만든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싶어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역사 교육, 가장 중요한 건데 이런 소동이라니.... 잘 하시겠지요. 국민들이 동기를 주었으니....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해서 최선의 교육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과하객 옳으신 말씀이라 생각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과하객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한다면 이런 시끄러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