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 오후에 출근해 있는게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닌지 좁아빠진 사무실에 앉아있는 사복 형사들이 죄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말이 형사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해봐야 고등학생들 패싸움이나 나이트크럽에서의 깡패들 싸움 뿐인데 그나마도
애새끼들은 줘패서 보내고 깡패 새끼들은 좁아빠진 마을에서 형사들과 유착이 될대로 되어서 구슬러서 보내는 게 일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경찰서가 위치한 속초시 노학동의 경우에는 범죄없는 마을로 10 년 째였다. 그렇다고 정말로 범죄가 없었느냐 하면 그 건
아니지만 일단 위에서 그렇게 뭉개겠다고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 동네였다.
쉽게 말해서 평화로운 동네였고, 마을 사람들 다들 서로의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닌 동네였다.
그게 사실일까? 강원도 속초, 이 동네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 내부 사정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은 매우 무서운 동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시골 마을에 농사꾼이나 어부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하다못해 경찰서가 들어서 있는 이 노학동만 해도 범죄자들이 세운 마을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불모지 개간 활동이 활발했다. 그 결과 아무래도 좋을 인력을 모아다가 불모지에 몰아다 넣고 스스로 살아가라면서
공동체 생활을 시킨 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속초시 노학동.... 자활촌(自活村)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 전쟁까지 올라가게 된다면 속초는 사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외딴 마을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북에서 남으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국군의 북진에 힘입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으로 북으로 따라 올라가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휴전 협정으로
인해 눌러 앉게 된 곳이 바로 이 곳 속초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북 각지에서 온 타성바지들이 어쩌다가 모이게 된 사람들이 토박이 하나 없는 땅에 자리잡게 되었으니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다들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독기를 품을대로 품고서 못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위에서 뭉개겠다고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 동네였다.
쉽게 말해서 평화로운 동네였고, 모두들 알면서도 쉬쉬하는 그런 동네였다.
"아 씨부랄!"
서류작업을 하던 한 형사가 싸구려 모나미 볼펜을 바닥에 패대기 치자 주위가 싸늘해졌다. 경찰서도 시골로 들어갈 수록 군기가
빡쎄지기 마련인데 저런 대담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계급이 좀 있는 사람인 듯 보였다. 15 평 남짓한 사무실에 다닥다닥
붙어서 책상을 나눠쓰는 형사 두 셋은 그 행동에 조금은 걱정하는 눈치였다.
"반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래, 범열아. 너 대학교 들어갔다 나왔지?"
"아 네… "
"그래, 붉은 길 위에 동전이 떨어져 있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가 뭐냐?"
"네?"
"아 씨발 십자말 풀이 하는데 문제 하나가 좃같잖아!"
"첫글자가 뭡니까?"
"첫글자 없고, 끝글자가 전이야."
대학 나온 형사도 문제를 맞추지 못해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정말로 그런 고사성어가 있는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나올리가 없는
일이다. 그 건 넌센스 문제였고, 정답은 홍길동전이니 말이다. 사실 대학을 나왔다면 이런 문제는 맞춰줘야 했던 것이다. 대학생들이
대학교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하는 짓거리라고는 술집에서 술퍼먹는 거랑 길거리에서 데모 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음담패설과 함께 쓰잘데기 없는 유머를 체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쯤에서 번뜩이는 재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저 형사 대학교 못 다닌 거다. 대학교를 들어갔다 나왔다는 표현은 결국 대학교 중퇴 내지는 고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어찌되었든 이 모습이 현재 속초 경찰서 형사반의 모습이다. 그들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서류들은 기껏해봐야 십자말 풀이
정도고, 심지어 도색 잡지도 널려 있었다. 휴일에 근무조가 편성되어 있어서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었고, 일도 없는데 시간
때우려니 온몸이 쑤셔대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아무런 대책없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꼴랑 세명 앉아있는 사무실에서
가장 어려보이는 한명은 그날의 업무 일지를 엉터리로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심지어 순찰일지조차 내일치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근데 승봉이 이 새끼는 어딜 쏘다니는 거야?"
"아, 승봉이 형은 잠복 나갔습니다." "잠복? 내가 뭐 지시한 거 없는데? 어디갔대?"
사무실 안의 책상은 네개인데 앉아있는 사람은 세명, 그중 빈자리가 하나 유독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들의 자리와는 달리 책상위에
펼쳐진 책하나 없이 깔끔했고, 서류철 앞에 놓여져 있는 거라고는 탁상용 달력 하나 뿐이었다. 달력 위에는 스케쥴이 빼곡하니 적혀
있었는데 들여다보면 그다지 영양가 있는 스케쥴은 놓여있지 않았다. 누구네 집 지붕수리, 누구네 집 아이 생일, 주간 만화 잡지
나오는 날... 어디 학교 앞 순찰… 몇몇가지를 제외하면 이게 경찰 아저씨 달력인지 아니면 동네 중학생 달력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이 새끼들 애새끼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서 들어가!"
호랑이도 제말하면 찾아들어온다더니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시골 꼬맹이 셋이 등을 떠밀려서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이 애새끼들은?"
코훌쩍이는 어린 아이들이 들어오는 걸 본 형사반장은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 뒤 따라 들어오는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구.... 하는 소리를 보아하니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른 만났으면 인사하고!"
뒤 따라 들어온 또 한명의 사람은 이내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애들을 인사시켰다. 보아하니 이 사람이 승봉이라는 사람이었고 반장의 지시 없이 자리를 비운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린애 셋이 기가 죽어서 간신히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 받은 반장은 일단 손을 들어 어색하게 인사를 받긴 했지만 왜 이런 아이들이 자기네 사무실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야! 김승봉, 얘들은 뭐냐?" "아니 어린노무 새끼들이 겁도 없이 남의 집 담벼락을 넘고 있지 뭡니까?"
"뭐? 얘들 몇살인데?" "국민학교 6학년이랍니다."
"애들이 정말 겁도 없이.... 그래 늬들 뭐 훔쳤어?"
애들이 나쁜 짓을 한 걸 알게된 반장도 그 때부터는 얼굴빛이 변해서는 애들을 타이르려고 소리를 점점 높여가는데 애들은 고개를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바른대로 말 안해!"
형사반장의 윽박질에 애들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하면서 두 손을 싹싹 비는데 정작 입은 꾹 다물고 있어서 더 혼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가만 놔두기도 어색한 상황이 되었다.
"애들이 담력훈련했답니다."
"담력훈련? 뭔놈의 담력훈련을 남의 집 담을 넘어가면서.... 이 새끼들 그 담이 그 담이냐?"
그러면서 반장은 자기 책상 위의 플라스틱 자를 잡아 들고는 애들 머리를 딱딱딱 때리는데 마지막 세번째 아이에게는 자를 세워서 때렸다.
"왜 세번째 애는 세워서 때려요?"
대학 나온 형사가 반장에게 묻자 반장은 그대로 답을 돌려주었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걸 가르치는 영재교육이야. 이 새끼들! 저 구석에 앉아서 손들고 있어!"
일단 애들을 구석에 앉혀 놓긴 했는데 애들 말고도 반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 애들을 끌고 들어온 순찰 나갔다 온
경찰이었다. 부하직원이라고 있는 녀석이 광복절에 출근해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거기에 편히 쉬지 못하게 애들을 끌고 들어오다니.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로 인해 윗사람이 귀찮아지면 그 건 좋은 게 아니다. 그걸 이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김승봉." "네 반장님?" "너 쟤들은 왜 데리고 온 거야?" "애들이 저 짓거리하는데 가만 놔둡니까? 애들 부모가 신경 안 써주면 마을 어른이라도 신경 써줘야죠." "그럼 근처 파출소에 놓고 오면 되잖아." "그 동네 파출소장이 또 애들한텐 물러터져서 오히려 잘했다 하면서 사탕주고, 연필주고 그런답디다." "그으래?"
파출소장의 특징이 대충 들어오고 나니 반장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해갔다. 사람을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형사 반장의 머릿속에는 김승봉 형사의 행동패턴이 대략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터였다.
"쟤들이 남의 집 담을 넘은 것도 무슨 간첩 잡으면 경찰서에서 자랑 연필이랑 공책준다고 그랬답디다." "그래? 그럼 저 새끼들이 남의 집 담을 넘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집에 간첩 있대?" "지네 반 애 하나가 삐라 줏어왔다고 공산당이라고 놀리다가, 걔네 집에 뭔가 있을까 하고 담넘다가 가네 집 아부지한테 붙들렸다는 거 아닙니까?" "... 뭐야? 삐라가 나왔다고? 그럼 가봐야하는 거 아니야?" "반장님, 청호동입니다." "…뭐야. 청호동이야?"
간첩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한 형사 반장은 청호동이라는 말에 긴장을 풀어버렸다. 청호동이라면 삐라 조각이 돌아다녀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워낙 피난민이 많은 동네가 되다보니 고향 생각에 북에서 넘어온 쪽지 하나 가지고 있는게 대수로울 것도
없고, 심지어 간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수로울 게 없었다.
"그렇다면, 김승봉, 너 오늘 오전에 청호동까지 갔다 온 거냐? 사무실 비우고?" "네 그런데요." "으이구… 아니다. 잘했다. 잘했어."
형사 반장은 그렇게 말을 끊으면서도 작은 혼잣말로는 '어휴 저 청호동 빨갱이 새끼'하고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김승봉 형사는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시골 안에서도 또 동네별로 만들어져 있는 텃세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청호동
사람들은 지독한 사람들이고, 피난민들이고, 결국에는 북한 사람이니 마침내는 빨갱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면 서로 섞여야 할텐데 겉으로는 그 것이 가능해도 막상 사람 사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그 예가 바로 박반장과 김순경이었다.
속초서 형사 반장인 박종구 경위는 속초 토백이로 군생활도 속초에서 전경으로 근무했고, 전역하자마자 속초에서 순경으로 근무하였고,
세월 네월 잘 보내다보니 주위에서 이런저런 공과를 잘 주워다주다보니 어느새 간부승진까지 해서 이 자리에 앉아있게 된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속초시 특유의 사정에 밝은 사람이었고, 거기에 더해 청호동에 대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차별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체감상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도, 시장에서도 그리고 청호동 안에서도 청호동 사람들은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거친 이북말씨, 외부인이라면 믿지도 않고, 동전 한푼도 손해 보려하지 않는 지독한 인종이었다. 유럽에서
유태인들이 차별받는다고 한다면 속초에서는 청호동 주민들이 바로 그런 인종이었다.
그에 반해 김승봉 순경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청호동에 살고 있고, 피난민 2 세이다. 결국 뼛속까지 청호동 주민인 그였다.
하지만 청호동 주민들과 속초 사람들간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차별을 받아봐야 손해보는 쪽은 청호동
주민들이었고, 결국 돌아오는 건 이유없는 싸늘한 시선이었다. 빨갱이라고 놀려도 대들지 못하고, 욕처럼밖에 들리지 않는 청호동
사람이라는 표현을 감수해야하고,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는 청호동이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싫은 그였다. 무엇보다도, 청호동이라는 이유로
제도적으로 받는 차별이 그를 소름끼치게 하였다.
약 10 년전, 청호동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한 아이의 배가 갈라진 채로 내장이 파헤쳐진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 대한
속초서의 대응은 안하무인이었다. 아이 엄마가 정신을 놓고 미쳐버리고, 애 아빠는 사라져버렸으니 사건을 더 수사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사건이 일어난지 시간이 오래 경과하여 증거 수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청호동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속초 경찰서의 대응은 한결 같았다. '단순 가출 사건에 동원할 경찰력이 부족하다.'
청호동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심하게 대응하였을까? 그 때부터 김 순경은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가
청호동 주민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납치범이 그런 청호동을 활보하고 있는데 경찰은 그곳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서야할 것이며, 남에게 기대할 수 없다면, 스스로 나서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경찰이 된 김순경이었는데. 정작 경찰이 되고 나서는 이런 모양이었다. 여전히 미묘한 시선을 느껴야 했고, 청호동 순찰 한번
다녀오는 것도 이렇게 눈치보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경찰이 된 터라 아이들의 스케쥴을 달력에 적어 놓고 있었지만,
정작 박 반장은 그런 행동을 좋게 보지도 않았다.
결국 이 사무실은 바깥 세상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다들 오늘 웬일이십니까? 박 반장님 오늘 비번이잖아요.”
“몰라, 서장이 긴급사안이라면서 전부 소집했어.”
“긴급 사안이요? 허, 이 동네에도 긴급사안이 있나보네요. 왜 쌍둥이파 애들하고 혜성파 애들이 붙었답니까?”
“그런거면, 우리가 서장을 불렀지. 니미 좃도… 나이도 어린 게 서장이랍시고.”
“꼬우면 공부하세요. 공부해서 남줍니까? 그치 조 순경?”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나머지 한명의 형사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발을 내려놓으며 반장의 속을 긁었다. 그러면서 대학교 문턱이라도 다녀와봤다는 신입에게 다독이듯 말하는데 결국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최 주임님….”
안그래도 승진하겠다고 열심히 승진시험 준비하고 있던 조 순경은 반장 눈치 보느라 작은 목소리로 최 주임을 다그치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만한 짬밥이 되지 않는터라 결국은 소리없는 아우성, 침묵 속의 외침이었다.
“냅둬라. 지도 짜증나니까 저러는거지. 야, 최 주임! 어디가?”
“오줌 누러 갑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걸어가는 최 주임이란 형사는 인상이 매우 더러운 사람으로 경찰인지 깡패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런
형사였다. 얼핏보기에도 거칠어보였고, 박 반장 역시 그를 제대로 콘트롤하진 못하는 듯 싶었다. 그런 형사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손들고 있는 꼬맹이들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자 꼬맹이들이 반성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였다.
“저기… 공지 사항에 2 시까지 회의장에 집합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어디 어디 집합한데?”
“전 부서 총집합이랍니다. 열외 없이 전원 집합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야, 김승봉.”
“네, 반장님.”
“여기 애새끼들 대충 반성문 받고 내보내. 그리고, 이 새끼들아. 담벼락은 도둑놈이나 넘는 거야.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러면서 박 반장은 서랍을 열어서 30 센치 자 세 개를 꺼냈다. 그 걸로 애들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으면서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다.
“늬들 잘해서 주는 거 아니야. 두번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는거다. 알았어?”
“네.”
기가 죽어서도 학용품 하나씩 주니까 좋다고 받아드는 게, 어린애는 어린애인 모양이었다. 지들끼리 좋다고 웃는다. 한쪽 구석에는
‘간첩․좌익사범 신고는 112, 113’이라고 캠페인 문구가 적혀 있는 플라스틱 자였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경찰한테 물건 받은 게 자랑이 되다보니 삐라 주워오면 학용품 나눠준다는 소문이 돌아서 남의 집 담벼락을 넘으려했던 모양이었다.
“늬들, 집에 가서 반성문 써서 내일 갖구와! 안가져오면 알지? 아저씨 경찰이야. 남 속이는 거 제일 싫어한다.”
“네.”
김순경은 애들에게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애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애들을 붙들어 놓고 혼을 더 낼 수도 있었지만 2시 회의가 바로 코앞인터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오후 2 시, 속초 경찰서 2층 회의장
“에~ 또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하신 이유는~ 에~ 그러니까 속초경찰서의 우수한 민완 형사들의 도움을 받고자,
지금도 가슴 졸이면서, 도움을 요청하신 명승 그룹의 리조트부부장 임현철 부장님의 요청으로, 우리 경찰서는, 최선을 다해 우수한
수사력을 앞세워, 신속하며 또한 정확한, 그리고 안전한 사후처리를 약속 드리는 바로, 그와 동시에 빠른 검거를 통해 언론과 국민의
의심을 종식시키며, 더 나아가 민주 경찰의 표본이 될 것을 약속 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일단 국어가 아닌 말로 열심히 준비해 온 연설문을 읽어내리는 연단 위의 수사과장이 애처로워보였다. 반 대머리에 노안이 와서 안경을
코 끝에 살짝 걸쳐쓰고서도 그래도 간부라고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있었으나 그 모습에서 위압감이라거나, 단정함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앞에 앉아있는 50 여 명의 경찰들의 모습은 너는 떠들어라. 나는 귀지나 파고 있겠다 수준이었다. 저들끼리 떠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진 시험 보겠다며 손바닥 만한 요약 노트를 읽는 사람도 있었고, 간혹 가끔은 지금 저 아저씨가 뭐라는 거야?
하면서 해석 되지 않는 한국말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충 이야기가 끝나가자 수사과장을 연단에서 내려오게 한 속초 서장이 대신 연단 위에 올라가서 그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였다.
“자, 수사과장 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 임정은 양이 실종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속초 경찰서는 최선을 다해 정은 양을
수색할 것이며, 강력 범죄와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특수 수사팀을 편성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정은 양의 아버지
임현철 부장님의 말씀을 직접 듣겠습니다.”
늙다리 수사과장과는 달리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경찰 서장은 역시 주위의 질시를 받을만 하였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하며,
세련된 서울 말씨 그리고 말하면서도 떨림 하나 없이 깔끔한 목소리까지… 엘리트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움을
많이 받을 것같아 보였다.
“올라오시죠.”
한쪽 자리에 앉아있던 양복을 빼입은 남자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딱 보기에도 경찰이 아닌 것같아 보였다. 뺀질거리는 사복 경찰이나
눈에 안띌 수 없는 유니폼 경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얼굴에 근심, 수심이 가득하였다.
“저희 정은이를 찾아주십시오. 이름은 임정은이고 나이는 6 살입니다. 키는 120 센치미터 정도이고 사라질 당시에는 초록색 원피스에 검은 단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으으….”
감정이 벅차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인한 남자답게 그는 크게 숨을 넘기고 말을 이었다.
“잘 우는 편입니다. 사라진 시간은 어제 오후 1 시경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없어졌고, 그 때도 울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기타 등등에 대한 내용도 계속 이야기가 이어졌으나 그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김승봉 순경은 의문점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의문점이란 게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거나, 아니면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의문들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의문은 청호동 주민들에 대한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임현철 부장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속초 서장이 연단에 올라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아이가 계속 울고 있었으나 주위의 신고나 제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납치 사건으로 추정 중이며, 이러한 파렴치한 범죄가 우리
관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니 이 시간 이후부터 교통 및 순찰조는 관내 불심검문을 실시해주시고,
수사2과는 이 시간 이후부터 정은양 수색본부로 운영될 것입니다. 네, 김승봉 순경. 뭡니까?”
일단 질문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본 김순경이었으나 경찰 서장이 자기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의아해하였다. 일단 질문을 받아주겠다니 거침없이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말씀에 의하면, 실종 시각은 불과 24시간입니다. 아직 실종으로 보기에는 이르지 않습니까?”
“납치 사건은 시각을 다투는 범죄입니다.”
“하지만 납치라는 증거도 없고, 48시간 이전에 수사를 개시한다는 건, 실종 수사가 성립되지 않을 것같은데요.”
“김 순경.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래서 일하기 싫다는 겁니까?”
서장의 말투가 공격적이 되었다. 자칫하다가는 자르겠다는 소리로 들렸지만 김순경도 타협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요. 주위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소년 사건에 대해서 누구보다 열심히인 사람이 바로 접니다.”
“누구보다 열심히라는 분이 관내의 사건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겁니까? 최근 10 년간 어린이 실종 사건이 몇건인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14 건입니다. 일년에 한두번씩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그렇게 되도록 상황을 방치한 무능한 경찰로 남고 싶습니까?”
그 이야기까지 듣고나자 김 순경은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 14 번의 실종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서장님, 그 열네번의 실종사건… 그 사건들이 어쩌다가 미결로 끝난지 아십니까?”
“그야 미온적인 대처로….”
“그놈의 48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네, 그 아이들은 48 시간 때문에 여전히 실종되었는데, 왜 이번에는 즉각 수사에 나서야한단 말입니까? 지금 아이 차별하는 겁니까?”
“지금 그런 거 따질 시간 있으면 당장 밖으로 나가서 애부터 찾아!”
그쯤에서 경찰 서장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큰 소리로 주위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었고, 한동안의 침묵은 조용히 조용히
한명 두명 회의장을 나가는 것으로 바스라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김 순경은 계속 서장을 올려다보았다. 서장 역시 김순경을
내려다보았으나 이 둘의 대립은 처음부터 싸움이 될리 없는 것이었다.
“야, 김승봉. 그만하고 나가자.”
박 반장은 그런 김 순경의 옆구리를 밀면서 억지로 밀고 나갔다.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던 김순경은 결국 박반장 덕분에 자연스럽게 회의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회의장을 나오자 마자 박반장은 김순경에게 호통을 쳤다.
“야! 너 미쳤어? 너 때문에 내 고과 떨어지면 어쩔거야! 부하직원 간수 못한다고 감봉 조치 받으면, 니가 책임질 거야!”
박 반장의 호통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김순경은 흥분 상태였다.
“반장님, 이 사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거 제가 제대로 끝내면 다 괜찮은 거 아닙니까?”
“이 녀석이, 아직 정신 못차렸어?”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면 서장도 절 무시 못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너 말이야. 너, 너… 흥분 좀 하지마. 청호동 애들 없어지는 거랑 이 사건이랑 아무 관련 없어.”
“하지만 관련이 있다면 없어진 애들을 찾을 수 있는 기회 아닙니까? 10 년 동안 청호동 애들이 죽든 없어지든 신경도 안
쓰더니, 대기업 부장 자식이 없어졌다니까 난리통 피우는 꼬라지 좀 보십쇼. 아니꼽지만 제겐 기회로 보입니다. 저 먼저 나가볼게요.
말리지 마십쇼.”
그렇게 툭 던져 놓고 경찰서를 나가려는 김순경을 박반장이 불러세웠다.
“야! 너 혼자 가다가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범열이 데려가.”
“그 애송이는 쓸데없는데.”
“씨바 직급도 똑같은데 뭔 애송이야? 걔도 오리엔테이션 받아야 할 거 아니냐? 현장 구경 좀 시켜줘.”
김순경은 거기에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박 반장 뒤에 서 있는 조 순경에게 시선을 주며 따라오라는 턱짓을 하였다.
“승봉이 형 잠깐만요. 무전기 좀 챙기고요.”
하지만 김 순경은 전혀 기다리지 않고 먼저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그런 김승봉 순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 반장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쯔쯔… 하여튼 청호동 새끼들은 다 저 모양이라니까.”
주위와 타협할 줄도 모르고 지 잘났다고 떠들어 대면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족속들… 그게 박 반장이 바라보는 청호동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였다.
첫댓글속초와 청호동이네요. 이방인 때에서 세월이 좀 흘렀나요. 전 속초에 청호동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여기서 글을 읽고 검색해 보고 알았어요. 분위기가 굉장히 리얼하다고 느꼈는데 청호동에 대한 차별같은 건 정말인가요? 싶구. 목성 도마뱀인의 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청호동에 대한 차별 감정은.... 글세요... 제 어릴 적엔 많이들 놀렸는데... 갯배타고 하와이간다고... 뭔가 다른 게 있긴 해요. 저렇게 격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방인에서부터 2 년 전 이야기로 아직 정의감이 투철한 순경 김승봉 씨의 이야기입니다.
첫댓글 속초와 청호동이네요. 이방인 때에서 세월이 좀 흘렀나요. 전 속초에 청호동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여기서 글을 읽고 검색해 보고 알았어요. 분위기가 굉장히 리얼하다고 느꼈는데 청호동에 대한 차별같은 건 정말인가요? 싶구. 목성 도마뱀인의 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청호동에 대한 차별 감정은.... 글세요... 제 어릴 적엔 많이들 놀렸는데... 갯배타고 하와이간다고... 뭔가 다른 게 있긴 해요. 저렇게 격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방인에서부터 2 년 전 이야기로 아직 정의감이 투철한 순경 김승봉 씨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어요, 처음 읽는건데. ^^
서술에 사실성이 무척이나 돋보이는군요.
필력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