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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고린도전서 1장
고린도전서 1장
고린도전후서는 성경 안에서 매우 독특한 서신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전·후서를 읽고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쑥 들어가질 모릅니다. 물론 다른 교회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처럼 문제 많은 교회는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이자 헬라지역에서 경제의 중심에 서 있던 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에 많은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술집이 많습니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육신적 피로로 인해 술을 자주 마십니다.
두 번째는 사창가가 많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술과 여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세 번째는 점집이 많습니다.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이들에게 ‘다음’이란 단어는 행운의 단어인 동시에 미지의 단어입니다.
바다로 나가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던 항구 도시였던 고린도교회는 너무나 세속적인 동시에 대단히 영적인 성향이 동시에 상존했던 도시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철학입니다. 헬라지역은 고대로부터 그리스를 중심으로 철학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초대교회 당시는 그리스 지역보다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많이 옮겨 갔지만 그래도 철학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또한 항구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오갔습니다. 요즘처럼 육로나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훨씬 약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의 정보나 교통은 배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고린도가 갖는 다양한 특성과 복합적인 성향들을 그리고 가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고린도 지나치게 닮아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성적인 문란함으로 교회가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헬라철학의 영항을 받아 잘못된 영적 지식으로 인해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육적인 것을 악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았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부활 후 다시 몸을 입고 살아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성경적 타당성과 진실성을 열정적으로 변호합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전·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한 다음 고린도로 향합니다.
이곳에서 본도에서 온 유대인 사람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만납니다.(행 18:2)
고린도 전후서는 3차 전도여행 기간 에베소에 머물 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는 53년 말 또는 54년 초에 고린도 전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1장을 구분했습니다.
1. 1-9절 인사와 감사
2. 10-17절 교회 안의 분쟁
3. 18-31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그리스도
1. 1-9절 인사와 감사
1-3절 인사
편지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합니다.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고린도교회 안에서 바울의 사도직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2절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문안합니다. 그런데 2절 중반에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다보면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맞는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아갔던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거룩한 성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4-9절 감사
4-9절까지의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한 감사입니다. 5절에서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7절에서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7절 후반부에서는 간절히 주의 강림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언급한 다양한 은사와 지식들에 대해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본다면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의 그 어떤 교회보다 많은 혜택과 사랑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다른 교회에 비해 거룩하거나 정직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은사가, 많은 지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지 못합니다.
2. 10-17절 교회 안의 분쟁
10-12절 문제의 양상
10-17절까지는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이야기합니다. 첫번째 분쟁은 자기의 성향에 따라 추종하는 사람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바울에게, 누구는 아볼로에게, 누구는 베드로에게, 누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순수하게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자랑했습니다. 바울을 좋아 하고, 아볼로를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은 절대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11절 후반부에 ‘너의 가운데 분쟁(ἔρις)이 있다’는 표현은 ‘논쟁(contention)’ ‘다툼(quarrels)’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3-17절 해법
바울은 논쟁하는 그들을 향해 묻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고,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14절)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과 보내신 이유는 세례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3. 18-31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그리스도
18-31절까지는 10-17절에 언급했던 교회의 분쟁에 대한 답이자 권면입니다.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8-25절 십자가와 세상의 지혜
바울은 좀더 본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다양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과 지식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고발합니다. 20절에서 세상에 변사도 없고, 21에서는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26-31절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교회 안에 성도들은 대체로 높은 신분이나 부유한 자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26절)고 말합니다. 즉 자신들을 되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한가. 지혜롭고 위대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세상에서 미련하다는 말을 들으며, 약한 자도 무시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너희들을 택했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무리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교회 안에 분쟁을 언급합니다. 교회 안의 분쟁은 세상적인 지혜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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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장 분쟁을 해결하는 길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리도전서는 교회 안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만 초대교회도 상당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파문제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몇명만 모이면 서로가 편을 나누게 됩니다. 누구는 누구편 누구는 누구편 이렇게 편을 갈라서 서로의 험담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못된 버릇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들은 4개의 파로 갈라졌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음도 아플 것입니다. 성도들 서로서로도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조롱거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분파는 이렇게 서로를 아프게 하고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일입니다.
해결책
바울은 분파소식을 듣고 바로 마음을 하나로 합치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합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자랑을 한다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을 하십시오." 바울은 성도들이 분파를 만드는 이유를 사람을 자랑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집중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날도 교회 안에는 끊임없는 분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갈등들을 겪으며 다시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들도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았고 나도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성도를 보며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 자매라는 생각을 가지면 우리는 훨씬 빨리 분파적인 생각에서 빨리 벗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 안에 거함으로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데 쓰임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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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십자가를 자랑하라.
1.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졌습니다. 이후 3차 전도여행 때, 사도가 에베소에서 3년간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는 동안,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이전에도 고린도교회에는 음행하는 자들의 문제가 있었고, 사도는 고린도전서 이전에 짧은 편지를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고전 5:9).
2.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는 고린도의 글로에라는 여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속한 한 사람이 전해준 소식이기도 하고(고전 1:11), 스데바나, 브드나도 그리고 아가이고 등이 사도에게 고린도교회의 헌금을 전달하러 왔을 때 가지고 온 편지를 통해서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고전 16:17; 7:1).
3.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교회 내의 분열과 부도덕한 음행, 교인 간의 소송문제 외에도, 그들은 결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예배의 규범, 영적인 은사들, 부활의 본질,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모금하는 문제 등에 관하여 사도에게 문의를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불신이 일어나고 있는 문제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전서는 어떤 서신서보다 더 실제적이며,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원리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우리는 사랑 장(13장)이 왜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4. 로마제국 내의 대도시였던 고린도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18~32에서 열거한 죄악상은, 로마서를 쓸 때 사도가 거하고 있던 고린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당시 타락한다는 뜻으로 ‘고린도 화되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풀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많았고(1:26), 대다수가 주님을 믿은 지 불과 3~4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니, 이들이 사회의 압력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고린도전서가 쓰던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요?
5.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1). 바울이 사도로서,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권위를 의심받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사도에 대한 신뢰가 분명하지 않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로 부름 받았는지를 상기시켜줍니다.
6.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2). 존재와 정체성처럼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속한 집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사도는 이들을 축복함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3).
7. 놀라운 것은 사도가 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사실입니다(4). 그들이 자기가 바라는 어떤 모습이 되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족할지라도 사도는 그들의 흠과 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그들에게 이미 베풀어진 은혜와(5~7), 그들의 미래에 베풀어질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8). 그러니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만들어주실 것을 바라보기에 그는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현재의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모습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8. 사도는 교회 내의 분열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사도의 간절한 바람은, 그들이 주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10). ‘온전히’는 성숙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미숙한 교회였고 우리 시대의 많은 교회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그 미숙함 가운데 교회는 계속하여 분쟁이 있었습니다. 헬라인 신자들은 바울파가 되었을 것이고, 유대인 신자들은 게바(베드로)파, 좀 더 학식이 있고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아볼로파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파까지 더해졌습니다.
9. 사도는 이런 분열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13) 자신이 드러나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합니다(13~17). 이는 세례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부르심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열은 특정한 주의 종들을 따르는 분열이었는데,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목사는 종입니다. 교회의 주인도 아니고, 주인노릇을 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사도는 가르치고(목사) 다스리는(장로)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며 사랑 안에서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갈 6:6; 살전 5:12~13). 그러나 이런 대접을 받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는 자기를 추종하는 파(일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된 것을 화평케 하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17).
10. 십자가의 도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도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18,23) 거리끼는 것이지만(23), 구원을 얻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18,23). 십자가를 어떤 태도와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둘로 나뉩니다. 교회는 이 구분에 의해서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식, 소유, 권력은 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부끄럽고 무익하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23).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립니다(29). 이렇게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지혜,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30). 이 표현들은 각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가된 의(롬 4:5; 고후 5:21), 죄로부터의 성화(엡 2:10),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구속의 완성(엡 1:14: 벧전 1:18,19)을 가리킵니다.
11.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31). 자기가 따르는 영적 지도자, 자기가 속한 교회, 자기가 가진 신앙, 자기의 배경과 처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참된 구원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의 합당한 고백이고 태도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떠날 때, 교회는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의 집단이 되고, 분열로 갈기갈기 찢기며 성령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랑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