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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좌절과 리더십
2005년 9월부터 2006년 5월까지 드라마 <신돈>이 61부작으로 방영되었다. 고려 말기 상황을 신돈을 중심으로 풀어간 드라마처럼, 14세기 말 고려사에서 신돈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은 대단히 크다.
신돈은 1358년 고려 31대 공민왕과 처음 만났다. 그리고 1365년 공민왕으로부터 모든 정치권력을 위임받아 6년 동안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실패했고,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실패는 곧 고려 멸망의 시작과도 같았다. 실패한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다. 실패한 역사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자성(自省)한다면, 성공한 역사보다 더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의 운명적 만남
신돈은 경상도 영산현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그는 어려서 승려가 되었지만 비천한 신분 탓에 동료 승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산방에 처박혀 지냈다. 그는 연고자가 없는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는 매골승을 하며 힘든 승려생활을 이어갔다. 고독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험한 일을 하면서 그는 대중들의 마음들을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아 화려한 가사를 입고서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를 하는 귀족 승려들과 달리, 출신이 미천한 신돈은 사찰을 찾아온 신도를 신분이나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았다. 그는 왕성한 포교활동을 하면서도, 한겨울과 한여름에도 해진 가사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았다. 마른 몸매에 눈빛이 반짝거리며 부처님 말씀을 화려한 언사로 풀어내는 그를 사람들은 신승(神僧), 문수보살의 후신으로 찬미했다. 신돈이 차츰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신돈의 만나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감동한 공민왕은 그를 자주 불러 불교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자문도 구했다. 신돈은 마침내 개경에 있는 유서 깊은 큰 사찰인 현화사의 주지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자 불교계의 리더였던 보우스님은 신돈을 멀리하라고 공민왕에게 요청했고, 유교계의 수장의 이제현 역시 신돈의 골상이 흉인이라며 그를 멀리하기를 요청했다. 특히 공민왕의 측근이며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정세운이 신돈을 요망한 승려라며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공민왕이 비밀리에 신돈을 피신시킨 적도 있었다. 신돈의 존재가 고려사회에서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351년 몽골(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몽골에서 자신을 수행하던 신하들을 요직에 등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펼쳐나갔다. 1356년에는 친원파의 두목인 기철을 제거하고, 몽골에게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고려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공민왕의 측근인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비롯해,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해왔고, 홍건적을 물리친 명장 정세운이 김용의 농간으로 살해당했으며, 1363년에는 김용이 왕을 살해하려는 흥왕사의 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1364년에는 몽골에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새로운 왕으로 삼고자 했으며, 덕흥군이 1만 군사로 고려를 침략해오기도 했다. 다행히 공민왕이 덕흥군을 물리치고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격변은 공민왕의 개혁에 급제동을 걸었다.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은 성장한 반면 자신을 지지해줄 측근세력들은 몰락해버렸다. 게다가 1365년에는 그가 사랑하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에게 왕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공민왕이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며 의지하던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크게 슬퍼했다. 이렇게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공민왕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인물이 신돈이었다.
1395년 조선에서 종묘를 창건하면서 경내 신당에 봉안했던 그림이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와 건국주역인 신진사대부는 공민왕과 신돈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신돈의 파격적 등용과 행보
1365년 5월 공민왕은 신돈을 사부로 삼아 정치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명문거족들은 서로 가까운 무리들끼리 얽혀져 있어 서로를 감싸주었고, 신진기예들은 처음에는 초연하듯 행동하다가 귀한 신분이 되면 명문거족과 혼인해 초심을 잃어버리며, 유생들은 유약한데다 개인적 친분을 따져 당파를 이루니, 이들 세 부류를 등용할 수 없다면서, 전혀 새로운 인물인 신돈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해 5월에서 12월까지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 일부 귀족들, 그리고 공민왕의 기존의 측근들이 정치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마침내 1365년 12월 신돈을 ‘령도첨의사사사’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임명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관직 경험도 없는 승려 신돈을 재상으로 삼은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은 자신을 대신해 정계를 청소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돈을 등용한 것이었다.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신돈이라면, 국정을 올바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신돈은 처음에는 공민왕의 제의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들의 참언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저를 믿어 주셔야합니다.”라고 다짐을 요구했다. 자신의 세력이 없는 신돈은 왕의 굳건한 믿음마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부처와 하늘에 맹세하겠다.” 라며 약속했다.
왕의 확고한 지지를 약속받은 신돈은 인사권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서,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먼저 형인추정도감을 설치하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조사하여 씻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백성들이 가장 힘겨워 한 것은 권세가들이 권력을 휘둘러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대규모 토지겸병을 한 일이었다. 전국 곳곳에 들어선 권세가들의 대규모 농장으로 인해 백성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고, 국가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 토지와 백성의 사유화로 국가는 세금과 병력을 조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신돈은 1366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최고 책임자인 판사가 되어 본격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권세가들이 빼앗은 땅과 양민을 노비로 만든 일들을 모두 가려내어 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 빼앗은 토지를 되찾은 백성들과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신돈을 성인이라며 칭송했다. 신돈에 비판적인 『고려사』에서 조차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고 적었다. 신돈의 개혁은 공민왕의 많은 개혁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조치로 인해 당장 많은 땅과 노비를 내놓아야할 권세가들은 크게 반발했다.
신돈은 1367년 성균관을 중건, 개축, 보수를 했고, 이색을 추천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도록 힘썼다. 성균관 건설이 비용 문제로 난항을 겪자, 신돈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균관 복원공사를 강행했고, 개혁 성향이 강한 이색과 그의 제자들인 정몽주, 정도전을 후원해 관직으로 진출할 길을 열어주었다. 신돈의 집권 시기에 신진사대부들이 육성되었으니, 조선의 건국세력들은 일정부분 신돈에게 빚이 있는 셈이다. 신돈의 승려였음에도 유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어진 인재의 등용을 강조하며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을 적극 등용했다. 하지만 이들 신진사대부들은 신돈의 개혁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에게 힘이 되지는 못했다. 아직 이들의 힘이 미약했고, 그들 역시 장차 권세가가 될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에게 버림받은 신돈
1369년 신돈은 지방 세력가를 견제하기 위한 사심관 제도의 부활과 충주로 천도할 것 등을 건의했다. 두 가지 모두 신돈이 귀족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이 그의 두 가지 시책을 모두 거절했다. 공민왕은 신돈이 권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신돈과 공민왕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는 신돈이 공민왕의 개인적인 감성을 건드리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순애보를 지닌 인물이었다. 공민왕은 그녀를 위한 영전(影殿)과 무덤 공사 등에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해 국방력이 약해지는 것조차 방치했다. 1368년 6월 왕의 유모가 지금이 농번기고 가뭄이 심하지 영전 신축공사를 중지하라고 건의하자, 공민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내쫓을 정도로 이 공사에 매달렸다. 1370년 6월 노국공주의 영전 공사 중 사고로 26명이 압사하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가 직접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신돈 또한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공민왕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왕륜사 영전을 다시 지었고, 그해 9월에는 영전의 규모가 좁다면서 원 건물을 헐고 다시 짓게 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정치를 맡긴 이후, 오직 공주를 추모하기 위한 토목공사, 대를 잇는 자식을 얻기 위한 불공을 드리는 일, 고통을 잊기 위한 유희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를 추모하는 일을 신돈이 방해하자, 공민왕은 차츰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1370년 7월에는 제조승록사사라는 승려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혜근을 임명하여, 신돈의 불교계 인사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에는 형인추정도감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고 지적하며, 신돈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민왕이 친정을 시작하자, 신돈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다. 다음해 7월 6일 신돈은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11일에 처형되었다.
개성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손꼽힌다. 고려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부부 쌍릉이다.
신돈의 좌절과 리더십의 부재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에는 그를 반역열전에 올리고, 호색 음탕한 요승이며, 늙은 여우의 요정이라는 악평까지 늘어놓았다. 신돈을 악인으로 만들어야 조선이 건국한 정당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신돈에 대한 기록은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남은 기록 모두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신돈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들을 모두 신뢰할 수 없다고 해도, 그가 비판받을 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개혁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신돈은 인사권을 휘두르며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고 했다. 그가 권력을 움켜쥐자, 정치권에서 소외되었던 이름 없던 자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모인 인재들 가운데 진정 인재를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민변정도감에서 재판관으로 소송사건을 처리한 이인임과 이춘부는 개혁의 적임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도리어 개혁 대상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인임은 신돈이 죽은 이후, 고려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매관매직과,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는 등 탐욕을 일삼은 인물이었다. 그가 육성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은 도리어 그를 비판했다. 그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충분한 지시세력이 없이 공민왕의 신뢰만을 믿고 강력하게 빠르게 인사문제와 개혁하려던 것이 무리수였던 셈이다.
신돈의 개혁에 대한 선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는 정치를 너무 몰랐고 무엇보다 공민왕을 몰랐다. 공민왕은 집권 초기에는 개혁 지향적이었지만,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축출한 이후에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시해되고 말았다. 의심이 많아진 공민왕은 신돈이 신뢰할 만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전민변정사업과 인사문제로 불만을 가진 권문세족의 반발을 좌천이나 유배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개혁의지와 재능과 용기를 갖추고 있어도, 사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개혁에 성공할 수가 없다. 신돈이 진정으로 개혁에 성공하려면 반대파들을 설득하고, 그들마저 포용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했겠지만 그에게는 그런 리더십이 부족했다.
신돈은 공민왕의 마음을 얻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중요한 고려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몽골이 쇠망하고, 새롭게 명나라가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개혁이 필요하다며 귀족들을 설득했다면 어떠했을까? 신돈은 승려답게 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능숙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세계에 경험이 부족했다. 그는 반대파를 제압하고자 서둘러 자신의 세력을 모았지만, 급작스런 세 불리기는 그의 힘이 되지 못했다. 백성들에게는 성인으로 칭송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는 없었다. 진정한 리더는 개혁의 대상조차 포용하면서 더 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자이어야만 한다. 그는 고려 말의 혼란스런 시대상황에 맞는 리더가 되지 못했다.
결국 신돈은 고려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개혁은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토지와 노비 문제에 대한 신돈의 개혁은 신진사대부가 주도한 1391년 과전법 시행으로 연결된다. 그가 지원하여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들이 신돈의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마침내 고려를 개혁시키는 것을 넘어서 조선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다.
** 신돈은 반역자로 몰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그림, 무덤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그에 대한 이미지는 드라마 신돈에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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