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흥운동의 확산
그 후에 영국의 웨일즈에서는 부흥운동이 계속 일어났다(1859년, 1904년). 스코틀랜드의 킬싯과 던디의 부흥(1742년,1839년), 북아일랜드의 여러 외각 지역에서의 부흥(1857년,1859년). 그리고 수도 벨파스트의 대각성 운동(1859) 등… 실로 끌 수 없는 성령의 바람이 설교를 통하여 일어났다.
19세기 교회 부흥 전문 역사가인 에드윈 오르(E. Orr)는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교회 부흥이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영국의 술주정꾼들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많은 선술집들이 파산했다.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어 판사들에게 흰 장갑이 주어졌는데, 이는 살인, 폭행, 강간, 강도 같은 골치 아픈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지역들에서 경찰들이 실직했다. 탄광에서는 폐업이 일어났는데, 노사간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입이 거친 광부들이 은혜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여 저질적인 말의 사용을 중단해서, 석탄 트럭을 끄는 말들이 광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A.아일랜드
아일랜드의 부흥의 불길은 1859년 장로교총회가 중심이 되어 얼스터(Alster)의 부흥을 포함하여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을 휩쓸었다.1) 1857년 9월, 훌튼가에서 기도회가 시작되었던 시기에 제임스 맥퀼킨(James McQuilkin)은 켈스(Kells)에서 얼마 멀지 않은 마을 학교에서 교사(校舍)에서 다른 세 명의 아일랜드 청년들과 주 1회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얼스터에서 일어난 부흥의 시작이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이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허락되어진 첫 개종자는 1857년 10월에 생겼다. 1858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모임이 시작되었으며, 부흥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공통된 설교의 주제가 되었다.
1859년 3월 14일, 월요일 제임스 맥퀼킨과 그의 기도 그룹은 아호힐 장로교회(Ahoghhill
Presbyterian Church)에서 커다란 기도회를 조직했다. 엄청난 무리가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빌딩의 베란다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한 평신도가 엄청난 능력을 힘입어서 말씀을 선포했다. 그러자 수백 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죄에 대한 수많은 대중적인 회개운동의 시작일 뿐이었다.
1859년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아일랜드 교회에 10만의 개종자를 이끌어 주었다. 하나님의 성령은 크고 작은 집회들 가운데 강하게 역사하고,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윤리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회개하면서 쓰러지는 현상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죄를 자각하며 회개하면서 여전히 쓰려져 있었으며, 일정 시간 동안 일어설 수 없었다.
1860년대에 이르자 범죄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어떤 때는 얼스터의 판사들에게 재판할 사건이 한 건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어떤 시기의 카운티 안트림(County Antrim)에는 경찰에게 신고 된 범죄가 한 건도 없었다. 그리고 유치장에는 구류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페트릭(Patrick)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소개한 이래로 이보다 더 큰 부흥의 불길이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없었다. 1860년 말 얼스터의 부흥의 효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로 몰려들어와 예배는 가득 메워지고, 양적 성장, 여러 기도 모임들, 가정예배의 활성화, 성경읽기 운동, 주일학교의 성장, 개종자들의 견고한 삶, 베풀고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삶, 악덕의 감소, 범죄의 급감 등”으로 기록되어졌다.
부흥의 불길은 엄청난 속도로 더욱 번져 갔다. 1859년 한 해에도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회심의 역사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무수한 영혼들을 소생케 했다.
웨일즈의 부흥은 영광의 찬양과 웨일즈인들의 독특한 화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도 역시 십 만명(전체 인구의 1/10)에 개종자가 교회에 입교했고, 범죄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에도 부흥의 불길은 비슷하게 찾아왔다. 다시 한 번 기도의 불길은 높이 타올랐고, 다수의 기름부음 받은 전도자들이 설교할 때에 부흥의 불길이 번지면서 수천명의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설교의 황태자로 알려진 침례교 목사인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이미 영국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 교회에서 5년 동안이나 엄청나게 축복된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는 1859년 부흥의 최고의 수위점으로 여겼다.2)
B.스코틀랜드
가)19세기 이전의 스코틀랜드의 부흥
이미 1630년 스코틀랜드의 쇼츠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젊은 목회자였던 존 리빙스턴이 설교를 부탁받았으나 너무나 두려워 달아나고 말았다. 그날 밤 그는 밀밭에 숨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를 찾은 교인들은 야외 강단을 만들어 그에게 설교를 부탁했고, 그리하여 한 집회에 500명가량이 회심했다.
1742년, 스코틀랜드의 캠버스랑에서 큰 부흥이 임했다. 윌리엄 매컬럭 목사는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 사례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에도 방문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다. 캠버스랑에서 거행된 성찬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너무나 확연하게 느꼈으므로, 성만찬을 8월에 다시 거행하기로 합의하였다(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8월에 거행된 성찬식에 2만 여명이 참석했다. 성찬식에 참석한 이들은 불과 몇 천 명이었지만, 각성된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고자 주님을 찾았으며, 또한 회심의 역사가 저들에게 임했다.
이 부흥의 시기에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는 스코틀랜드 캠버스랑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조지 휫필드가 이 부흥기간에 건장한 남자로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 까지 저마다 엎드려서 몸을 흔들며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은 두려운 율법으로 경고할 때 일어난다기 보다는 사려깊은 설교자가 구속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일어난다. …… 귀하신 구주에 대해 전할 때, 모두가 귀를 기울일 것이다.”3)
나)19세기 스코틀랜드의 부흥
①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Mheyne)
비록 강도에 있어서는 19세기 아일랜드나 웨일즈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1839년 스코틀랜드에서도 부흥이 있었다. 1859년 아일랜드와 웨일즈 부흥이 미국의 기도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부흥은 독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부흥의 시기도 1859년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와 웨일즈의 부흥보다 20년이나 앞선 1839년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부흥은 성공적인 목회를 감당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동반된 전형적인 부흥이었다. 킬싯과 던디, 퍼드에 집중된 이 부흥의 주역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Mheyne)과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였다.
맥체인이 사역했던 곳은 던디의 성 베드로교회이다. 맥체인은 23살의 약관에 부임하여 신구약을 균형있게 강해하며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놀라운 부흥을 주셨다.4) 이 놀라운 부흥의 비결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5) 1839년 맥체인이 이스라엘로 성지 여행을 떠나면서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6)에게 그동안 강단을 지켜 줄 것을 요청했다. 번즈의 사역으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맥체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딘 노회에 부흥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939년 8월까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거나 일반적인 움직임은 없었으나 칼싯에서 주의사역이 시작된 후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들 가운데 놀랍게 임했다. …1939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활짝 여셨다. 우리는 가버나움에서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그 이상으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을 경험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경험했던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어느 나라가 부흥을 경험했는지 알 수 없다.”
지역 교회 성도들이 연합으로 참여하는 거대한 성찬식이 거행되었고, 그곳에서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다. 이 부흥은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시작하였지만, 감리교와 독립교회도 동참했다. 1839년 시작된 이 부흥은 맥체인이 세상을 떠나던 184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중심에 성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성 베드로 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영향은 던디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이후 던디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제네바를 거룩한 도성으로 바꾼 것에 비견하여 북부의 제네바라 불렸다. 그리고 이후 맥체인과 번스는1939년 스코틀랜드 부흥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7)
②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
선교사역을 준비하던 번스에게 맥체인의 요청은 스코틀랜드의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도 같았다. 번스는 칼싯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성찬식을 돕기 위해 킬싯에 돌아와 시110:3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 때 회중이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며 죽은 사람들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번스는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3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설교했다. 성령은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하셨다.
8월 8일 던디로 돌아온 번스는 킬싯에서 일어난 부흥이 던디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 칼싯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킬싯에서의 부흥 소식은 이미 던디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져 있었다. 번스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예배가 끝난 후 킬싯에서 일어난 일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하자 100여명이 그 자리에 남았다.
“갑자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듯 통회하기 시작했다. 다음 저녁 교회에서 기도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고 몇몇 사람은 절교하고 울부짖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면서 바닥에 엎드러졌다.”
이 같은 역사는 그 후에도 수 주간 번스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맥체인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영적 각성은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부흥 현상은 인근 성 데이비드 교회와 힐 타운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이 같은 집단적인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