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전 상서]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 챙겨 배낭을 짊어졌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탔고, 다시 내려서 시외버스를 탔다. 도심을 벗어나니 가을이 무르익은 누른 들판이 보였고, 2시간만에 부모님 계신 곳에 도착했다
공원묘지는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하얀 구름 뜬 먼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묘지앞에 서서 두손을 모우고 눈을 감았다. 눈으로 보고 대화를 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가슴으로 읽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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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전 상서♤
저 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잘계셨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살아생전 잘 모시지 못하고, 불효한 언행들 이제서야 용서를 빕니다.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난다면 후회남기지 않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미국 형님 다녀가셨고, 다른 형제들도 잘 지냅니다. 몸이 아픈 동생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아버지 어머니께서 도와주십시오. 저도 몸과 마음이 점차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음달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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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마치고 묘지를 한바퀴 돌며 일부러 길지도 않은 풀을 손으로 뜯어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되돌아서 내려오려다 다시 묘지앞으로 발걸음 돌리기를 두세번 연거푸 그랬다.
작년 12월초 어머니 돌아가시고, 거의 한달에 한번꼴로 묘지를 찾는 편이다. 깊이 마음기댈 언덕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번엔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서 가져간 도시락을 묘지앞에 펼쳐놓고 맛있게 먹었다.
내가 어릴적 상여를 운구할때엔 상여소리꾼이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불교 '회심곡'을 자주 인용했다. 낭낭한 그 소리의 가사가 슬펐고, 어린 나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소리꾼은 음정이 좋고, 그때마다 상황변화에 따른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께서도 몇차례 동네 초상집 상여소리꾼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회심곡에는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타고 칠성님께 명을 빌어... 이세상에 우리가 나왔다'고 적혀있다.
칠성님 애기를 더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체로 우리의 생명이 잉태한 사실을 부인하는 자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은혜에 대하여 자식들은 얼마나 깊이 가슴에 새기고, 되갚으려 노력했을까? 각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동물들은 혈연간의 정표시가 한결 같은데, 인간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경시 되는 것 같다. 누뇌가 발달할수록 감정보다 이성이 더 번뜩인다는 말이 된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상, 아니면 1년상을 통하여 마음속 죄인 노릇을 했다. 그런데 요즘 자식들은 부모가 죽으면 화장해서 정리하고, 남긴 재산 챙기기에 더 몰두한다고 하였다.
고인이나 자식이 남들과의 교류가 없으면 상여멜 사람도 없고, 심지어 부모가 남겨줄 유산이 없다하여 시신인수를 거절하는 경우도 보았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이 서러움이 된다. 아버지께서도 말년에 이사를 하시어 친구가 없었고, 유일하게 사귄 친구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로우셨던지 한달만에 아파트에서 추락사 하셨더란다.
부모 자식간에도 연락없이 사는 사람도 많다. 솔직히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맞는다. 도시엔 무연고자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시골에도 점차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격리되는 사람들이 늘어난단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사는 것 같다.
돌아오는길, 지하철역까지 16km를 걸었다. 남은시간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고재종 시인의 시를 옮겼다.
[분통리의 여름/고재종]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
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