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해 연등날 저녁, 약선의 처가 입궐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 행렬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견룡행수(牽龍行首), 중금도지(中禁都知) 및 장군들로 하여금 그 행렬을 호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타고 가는 덩이라는지, 복식 같은 것이 마치 왕비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다 됐군! 한낱 신하의 계집년으로 저렇게 위세를 부리다니."
"이게 다 상감이 약한 때문이요. 저런 걸 버려두니 신하의 행패를 상감이 자초하는 셈이지."
뜻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듯 거만하고 주제넘은 김약선의 처를 만나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안심의 자존심은 약간 상했다. 그렇지만 영리한 안심은 그런 기분에 좌우될 여자가 아니었다. 김준에게서 밀계를 받자 김약선의 처가 좋아함직한 선물을 장만해 가지고 찾아갔다.
"안심이 너가 웬일이냐?"
김약선의 처는 안심을 보자 거만한 눈초리로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비록 지난날 자기 부친의 첩으로 있던 여자이지만, 세상에 높이 보이는 게 없는 약선의 처에게는 안심쯤 한낱 천한 계집종으로 밖에 안 보였다.
안심은 비위가 거슬리는 것을 꾹 참고 공손히 절까지 한 다음 그 곁으로 다가갔다.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죠." 하고 좌우를 둘러봤다.
"긴히 할 말이라니?"
"조용히 여쭤야 할 일인데요."
안심은 다시 좌우를 둘러본다. 곁에 사람들이 없어야 얘기를 꺼내겠다는 눈치였다. 김약선의 처는 원래 남이 밀고하는 걸 즐겨 듣는 성미였다. 곧 눈짓으로 좌우에서 시중들던 여자들을 물러가게 했다.
"자, 어서 얘기해 봐."
"이건 좀 여쭙기 거북한 일이지만요 들으시고 역정을 내시지는 마세요."
안심은 우선 이렇게 운을 띠었다.
"무슨 일인데 네가 내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단 말이냐?"
"원, 별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게 아니구요. 바로 부사 어른에 관한 일인데요."
부사란 곧 추밀원 부사로 있는 김약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니, 우리 집 양반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야?"
김약선의 처의 눈치는 당장 달라진다. 김약선은 그 처지로 미루어 세도가의 딸인 자기 아내에게 쥐여 지내는 몸이다. 그러니만치 아내에 대한 반발을 오직 여색(女色)으로 풀기라도 하려는 듯 여자라면 닥치는 대로 범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그의 처는 항상 투기에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남편에 관한 일이라는 말을 들으니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여자들에 관한 일이었다.
"그 양반이 또 어떤 계집년하구?"
김약선의 처는 벌써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바르르 떤다.
"아니 너무 역정을 내지 마시래두요."
안심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그것은 김약선의 처의 투기심을 한층 더 부채질하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었다.
"화는 누가 낸다구 그래? 잔소리 말구 어서 자세한 이야기나 좀 해봐."
김약선의 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무릎을 마주 댄다. 안심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상대편의 위세에 눌려 굽실거렸지만 이제 상대편의 마음은 완전히 자기 수중에 잡힌 셈이다.
안심은 일부러 상대편의 조바심을 더하게 하느라고 서서히 말을 꺼낸다.
"부사 어른께선 어쩌자고 그러시는 지요?"
여기서 또 말을 끊는다.
"글쎄, 그 양반이 어느 년하구 놀아났는지 속시원히 말 좀 하라니까."
김약선의 처는 안심의 옷자락까지 움켜잡고 야단이다.
"이건 남이 들으면 정말 큰일날 일이어요."
여기서 또다시 말을 끊었다가 김약선의 처의 투기심이 절정에 달하는 것을 보자, 그 귓전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다름이 아니라, 부사 어른께서 요 며칠 전에 망월루(望月樓) 모란방(牧丹房)에서 여러 계집애들과 한바탕 노셨다는 걸 아시는 지요?"
"모란방에서 금시초문인데… 그래 어떤 계집애들이지?"
"바로 어르신네 댁에서 일보는 사람들의 딸들이라나요. 숫배기 처녀들만 일곱 명을 모아놓고 칠선녀라 부르시면서 흥청거리셨다는군요."
"처녀들만 일곱이나? 음… 이제 내가 늙었다구 젊은년들 하구만 놀아난단 말이지?"
김약선의 처는 치를 떨었다.
"그런데 노셔두 예사롭게 노시지 않구 해괴망측한 놀음을 하시더래요."
"해괴망측한 놀음이라구?"
"글쎄, 일곱 처녀를 한방에 모아 놓구선 모조리 발가벗긴 다음 춤을 추게 하셨대요."
"그래서?"
"그 뒤는 알죠 뭐. 그 분 솜씨를 잘 아시면서…"
이렇게 말하고 안심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김약선의 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 분해. 아이구 분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속이 풀리지?"
발을 동동 구르더니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한다. 그 소매를 안심은 슬며시 잡아당겼다.
"고정하시어요. 섣불리 떠드시면 오히려 되잡히십니다."
"되잡히긴 뭘 되잡혀? 그 일곱 년을 당장에 때려죽이고 남편인지 뭔지 그 작자,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혼을 좀 내줘야지."
"글쎄 참으시래두요. 부사 어른의 놀이가 너무 심하신 걸 보구 곁에 있던 사람이 충고를 했대요. 그랬더니 부사 어른은 이런 말을 하시더래요."
"그래두 입은 째졌다구 무슨 소릴 지껄이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안심은 비로소 김약선의 처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더니 "내 처가 친정의 세도를 믿고 종놈과 밀통을 한 걸 알고 있는데,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이만한 오입쯤 못할 게 뭐냐, 그러시더래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길길이 뛰던 김약선의 처는 그 말에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아니 나중엔 별소릴 다 듣겠네." 하면서도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해졌다.
김약선의 처가 남몰래 종과 관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김준에게서 그 사실을 들은 안심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꺼내어 은근히 김약선의 처를 협박한 것이다.
"그러니 너무 떠들지 말고 잘 생각해서 처리 하도록 해요."
안심은 어느덧 말씨까지 소홀해지며 이렇게 못을 박고는 그 집을 물러 나왔다. 안심이 돌아가자 김약선의 처는 한편으론 분하고 한편으론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사람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 일인데 그걸 어떻게 눈치챘을까? 가만있다간 큰일 나겠는걸. 젊은년들하구 놀아나기 위해서 나를 내대느라고 그 소문을 퍼뜨리기라두 한다면 나는 끝장이야.'
김약선의 처는 곰곰 생각한 끝에 자기 부친인 최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님, 전 이제 세상이 싫어졌어요."
부친 앞에 몸을 던지고 통곡을 했다. 최이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냐?"
"차라리 중이 되어서 산중에 묻혀 살고 싶어요."
"글쎄, 왜 그런 소릴 자꾸 하는 거지?"
김약선의 처는 다시 한차례 통곡을 하고 나서 "하늘같이 믿었던 남편이 제가 인제 나이를 먹었다고 내대니 무슨 살맛이 있겠어요?"
"약선이가 또 바람을 피었다는 거냐?"
"웬만한 바람이면 전 투기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글쎄 허구 많은 계집 중에 아버님댁 사람들의 딸들만 일곱이나 골라다가 모란방에서 가진 추태를 다 부렸다는군요."
"우리 집안 계집애들을?"
최이의 얼굴에는 비로소 노기가 가득해졌다. 최이 역시 색을 좋아하는 처지라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의 처나 딸들은 비록 손은 대지 않더라도 자기 소유물로 아껴 오던 터였다. 마음이 동하면 한송이 한송이 꺾어볼 꽃송이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김약선이 한꺼번에 일곱씩이나 꺾었다고 하니 분통이 터졌다. 뿐만 아니라 김약선은 자기 아들을 젖혀놓고 후사를 삼으려고 기대를 걸던 인물이었다. 분노와 실망이 한데 겹쳐서 그는 치를 떨었다.
"내 그래두 그 놈이 쓸만한 데가 있는 줄 알았더니 아주 형편없는 놈이로군.'
부친이 노하는 것을 보자 딸은 없는 말까지 보태어 그 노기를 돋우었다.
"너무 추태가 심하기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니까 글쎄 이런 소리까지 하더래요. 아버님."
"무슨 소릴?"
"이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 게 있다구 하구 싶은 일을 못하느냐는 거예요. 다 늙은 장인은 멀지 않아 죽어갈 거구, 그렇게 되면 최씨 집안이 누리던 권세를 김씨 집안이 누릴 판인데 어느 놈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겠느냐구 탕탕 큰소리를 치더래요."
"아니, 그 놈이 그런 소리까지? 제 놈이 오늘과 같은 처지가 된 것도 최씨 집안에 은혜를 입은 때문인데 최씨 대신 저의 집안이 권세를 잡아보겠다?"
최이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 보세요. 그러니까 남이라는 건 소용없다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놈에게 내 뒤를 잇게 할 게 아니라, 첩의 자식이구 뭐구 만종이나 만전을 후사로 삼을 걸 그랬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하시면 되지 않아요."
"이미 정해놓은 일을 뒤엎으면 그 놈이 가만히 있겠느냐? 그러지 않아도 엉뚱한 생각을 품은 놈인데."
"말썽을 부리기 전에 없애버리죠, 뭐."
투기심과 자기의 부정한 행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이 경망한 여자는 마침내 남편을 죽이라고 권하게까지 되었다.
"음, 말썽을 부리기 전에 없애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군."
최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김약선을 죽이게 한 다음 김약선과 정을 통했다는 처녀들을 먼 섬으로 귀양 보내고 모란방을 허물어 버렸다.
이 소식을 듣자 김준과 안심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떠냐? 내 계교가."
"내 꾀는 어떻구요?"
"이제 남은 문제는 만전이를 후사로 삼게 하는 일 뿐이야."
만전의 누이동생에 '송서'란 사람의 아내가 된 여인이 있었다. 김준은 안심에게 그 여인을 선동하도록 시켰다.
송서의 처는 곧 최이를 찾아갔다.
온통 눈물을 흘리며 최이의 방에 들어가더니 "아버님! 아버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도 우리 오라버님들이 산중으로 쫓겨 가서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아버님이 만일 세상을 떠나시면 간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라버님들을 괴롭히겠어요? 제발 마음을 돌리시고 오라버님들을 서울로 부르시어요."
그리고는 또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다.
"알겠다. 나도 생각이 있으니 염려 말고 물러가라."
김약선을 죽이고 난 후, 자기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최이였다.
그러므로 딸의 말을 듣자 즉시 두 아들 중에서 만전을 불러 환속시킨 다음 이름도 항(沆)이라고 고치고 후계자를 삼았다.
고종 삼십육년 십일월, 최이가 세상을 떠나자 최항은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김약선의 관직을 대신한 셈이었다. 그리고 모든 실권을 자기 수중에 장악했다. 그러는 한편 자기가 권력을 계승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김준에게 크게 보답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준의 출신이 워낙 천하므로 높은 벼슬을 줄 수 없어 겨우 별장(別將)이란 관직을 주었지만 최항의 으뜸가는 심복으로 그의 세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항은 집권하자 김준 등의 진언을 들어 제법 볼만한 정사를 했다. 대장경(大藏經)을 만들어 후세까지 찬란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남겼으며 몽고의 침입에 끝까지 항거하여 민족의 의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지 십년 만인 고종 사십오년에 세상을 떠나자 본부인에게는 마침 소생이 없었으므로 중으로 있을 때 매부되는 송서의 종과 통해서 낳은 의(宜)를 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