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 거리풍경, 한겨레 그림판, [한겨레], 1992년 12월 19일 자
작품에 대하여 : ‘박재동의 한겨레’를 만들어 낸 걸작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은 [한겨레신문(현 ‘한겨레’)]이 창간된 1988년 5월 15일부터 1996년 6월 21일까지 8년 간 연재 된 1칸 정치만평이다. 1칸만화는 4칸만화와 함께 현대만화의 출발점이자 가장 관습화된 장르로 ‘최초의 만화가’로 불리는 이도영을 비롯해서 김규택, 김용환, 백인수, 박기정, 고우영 등 만화계의 거장들이 ‘신문의 얼굴이자 숨통’ 역할을 하며 만화가 또는 언론인으로 시대와 소통하고 권력과 대립했던 장이다. 이 때문에 신문만평은 ‘만화로 보는 사설’이라 불렸고 만평란 명칭 앞에 신문 명칭을 넣어 대표성을 강조해 왔다. 신문이 창간하거나 전면 쇄신을 할 때면 ‘어떤 스타만화가가 만평란을 담당하느냐?’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이른바 ‘듣도 보도 못한 만화가’에게 만평란을 담당하게 했다.
이미지 목록 한겨레 그림판, 1988년 5월 15일 첫 연재작 | 한겨레 그림판, 1996년 6월 21일 마지막 연재작 |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은 이를 의식이라도 한 듯 ‘독재, 폭력, 비민주, 외세의존’으로 대표되는 ‘골리앗’ 앞에선 ‘다윗’을 창간 만평으로 그려냈다. [한겨레신문]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기도 한 다윗은 박재동의 뱃심처럼 거대 언론사의 만평을 다리 아래에 위치시켰고 [한겨레신문]에 속한 만평이란 한계마저 박차고 나왔다. [한겨레신문]은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 해직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국민주 모금 방식으로 창간됐다.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국민에 바탕을 둔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정립’을 목표로 했다.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은 이를 가장 대중적 방식으로 제시한 게재물이었고 반권력, 민족통일, 친노동 등 [한겨레신문]의 진보적 프레임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한겨레신문] 봤냐?”는 물음 대신 “‘한겨레 그림판’ 봤냐?”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박재동의 일거수 일투족은 곧 뉴스가 되기도 했다. 초기 ‘한겨레 그림판’은 여느 신문만평과 같이 1칸의 중심부에 풍자의 대상을 그리고 여백을 살려 소재와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기존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윗’은 횟수를 더해가면서 스스로 1칸 안의 혁명과 쇄신을 거듭했다. 가로 세로 10cm 남짓 한 1칸 전체를 여백 없이 풍부하게 활용한 ‘한겨레 그림판’은 단선적 비판이나 우스개를 넘어선 감동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형식을 모두 ‘옛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곧 ‘만평 그리기의 새로운 기준’이 됐다.
이미지 목록‘한겨레 그림판’ 스타일을 대표하는 프레임 나누기 사례(1996.05.31) | 박재동의 영향력을 찾을 수 있는 박시백의 ‘한겨레 그림판’(1996.06.04) |
당대의 신문만평에서 볼 수 없었던 색다른 관점과 표현형식을 바탕으로 시대를 꿰뚫는 풍자와 함께 통렬한 웃음과 짠한 감동을 선사한 ‘한겨레 그림판’은 당대의 인기에 힘입어 모음집 성격을 지닌 [환상의 콤비](1989년), [합당블루스](1992년), [제억공화국](1996년)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작가에 대하여 : 정치인 주인공을 버리고 민중을 선택한 손바닥 아티스트 박재동
박재동(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공)
박재동(1952년 울산 출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만화애호가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만화방을 운영했던 부친 덕에 당대 누구보다 많은 만화독서량을 자랑했고 몇 권 남지 않은 그 시절의 걸작 만화책을 아직 소장하고 있어서 60년 대 인기 만화였던 ‘라이파이’ 동호회가 결성됐을 때 회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 영화애호가는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고, 영화를 찍으면서 완성된다고 했는데 제작 접근성이 높은 만화는 보고, 그리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할 수 있을 것이고 박재동은 공식 데뷔이전에 이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한겨레 그림판’으로 일가를 이룬 후에는 자전적 만화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만화! 내 사랑](1994년)을 발표하며 한국만화의 대중적 지형을 넓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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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재동 부모님이 운영했던 만화방 풍경을 재현한 그림 |
1976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9년 휘문고, 중경고 교사를 거쳐 1986년 금성 아트프로덕션에서 일러스트 작업을 했다. ‘행복한 교사 생활’을 했지만 그림에 대한 갈등이 심해 회사생활을 하며 원 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민중미술의 시발점이 됐던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미술을 통한 현실참여와 발언’이라는 지향점을 찾게 됐고 그의 발언은 1988년 [한겨레신문] 입사로 이어지며 ‘한겨레 그림판’을 통해 폭발하게 된다. 전시장에 갇힌 그림 속 발언보다 수 십 만 명이 함께 보고 듣는 발언을 택했던 박재동은 1996년 새로운 발언대를 찾아 [한겨레신문]을 떠난다. 당시 서울무비에 있던 오성윤 등을 영입해 ㈜오돌또기를 설립한 박재동은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하며 ‘움직이는 만화’를 향한 꿈에 도전했다. 그 꿈은 박재동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로 하면서 중단되었으나 2011년 오성윤을 중심으로 한 오돌또기 팀이 제작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이 흥행에 성공하며 절반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사람에 대한 관심과 따스한 시선을 담아낸 손바닥아트
[한겨레신문]을 떠난 박재동은 정치 현실이 변경될 때마다 ‘한겨레 그림판’으로 돌아오라는 대중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박시백과 장봉군으로 이어진 ‘한겨레 그림판’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또 한번 새로워진 신문만화의 유형을 제시하며 2009년 [한겨레 신문]으로 돌아왔다. 그림이 있는 시론으로 볼 수 있는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가 그것으로 권력자의 치부를 드러냈던 그의 펜은 이제 민중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쓰였다. 그 해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 해의 만화가상을 수상했고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한국만화100주년위원장 등을 맡으며 한국만화의 저변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진보 진영의 큰 형 역할도 하고 있다.
명장면 명대사 : 저 태양을 좀 봐. 꼭 … 환풍기 같지?
매번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오면 재등장하는 만평 중 한편이 ‘거리풍경’이다(맨 위 만평). 1992년 12월 그 해 대통령 선거는 3당 합당을 통해 여권 후보가 된 김영삼과 야권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의 양자 대결구도로 진행됐다. 결과는 김영삼의 승리로 끝났고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박재동은 구멍 뚫린 가슴으로 무표정하게 일상으로 돌아 온 시민들의 모습을 그렸고 이 만평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각인됐다. 이후 이 만평은 민주·진보진영의 후보가 석패를 할 때 수많은 블로그나 SNS를 통해 퍼지면서 ‘국민의 절반’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이미지 목록‘한겨레그림판’, 1988년 5월 26일 자 | ‘한겨레그림판’, 1991년 4월 27일 자 |
‘한겨레 그림판’은 때로 뒤틀린 권력과 재벌의 탐욕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진보적 이념을 드러내며 선언적 어조로 반대편에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 소재를 제외하면 다수의 작품에서는 따스한 시선과 감성적 필치를 담아 ‘국민의 절반’을 넘어서는 공감을 이끌어 냈다.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도 유명한 그의 만평은 환경과 여성문제에 집중했고 노동자와 서민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특히 ‘저 태양을 좀 봐. 꼭 … 환풍기 같지?’라는 대사를 남긴 1988년 5월 26일 자 만평은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후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공장 노동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부양가족인 듯 한 동생을 옆에 두고 내 뱉은 이 한마디는 88서울올림픽이 열리는 세계 도시 서울을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