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때 쇠사슬(鐵鎖)을 썼다는 말은 허구일까...??
이 사진이 얻서 뭣하넌 사진인 중 아시겄십닌짜? 덜?
우리 진도에 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한나인 벽파진전첩비럴 실 쩍에 요케 많안 군민덜이 협동이로 울력해가꼬 셨구만이라.
사진 원고는 진중과 진고에서 근무하셨든 선상님이신 쩌그 사진 젤로 왼피짝 앞에 뵈넌 故 김진완 선상님에 아드님이로 읍내서 <김명수 한의원>얼 운영하넌 우리 핵교 64회 김명수 원장이 소장한 흑백사진인데 지가 장난삼어가꼬 어설푸게 색자럴 쪼깐 입헤봤어람짜.
흑백사진은 누리틀 아래 주소로 여그 가시므는 볼 수 있어람짜.
https://cafe.daum.net/jindo100/O7wr/96
건립일이 '단기 4289년(1956년) 8월 29일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글을 짓고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은 글씨를 쓰다.'로 비석에 그리케 적어져 있고 낙성일(落成日)은 1956년 11월 29일잉께 우덜 애기찍에제만 지 생각에는 1950년 중반이라므는 어느 정도 현대식 기계장비가 동원 되았을 거라고 여겼는데 이 사진을 봉께 그란 것이 아녀가꼬 잔 생경시런 느낌도 드넌구만이람짜.
사진에서 보시데끼 건립 당시에 인력을 이용한 거중기를 써가꼬
여러 군민덜이 항꾼에 직접 참여한 가운데 수많안 군민덜이 모도 합심하고 심을 모탠 울력이로 이 비석이 셔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런 사진은 사실적이로 귀중한 사진이고 사료적인 가치도 상당히 높우다고 저는 그케 뵈지넌데람짜.
<<碧波津푸른 바다여 너는 榮光스런 歷史를 가졌도다 民族의 聖雄忠武公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功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獄에서 풀려나와 三道水軍統制使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病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十二隻을 겨우 걷우어 일찍 郡守로 任命되었던 珍島땅 碧波津에 이르니 때는 公이 五十三歲되었던...... >>> -벡파진 비석 글에 서두-
그란데 지 봄상이로 봐가꼬
학계 일부에서덜 쇠사슬 300m면 몇 톤이 나가는데 인력이로 불가능하다는 둥 ‘진도나 해남 지역민들의 야담 설화’로 치부하는 <명량대첩 때 쇠사슬> 이야기도
저케 인력이로 돌레가꼬 저리케 무겁고 크나큰 비석 도팍을 공중이로 떠 올링 거 보므는 부력이 있는 바닷물에서 양쪽은 밧줄로 묶으고 중간 부분만 쇠사슬을 이용해서 저런 거중기로 진도하고 해남 양쪽에서 들어 올린다므는 충분히 가능한 야기가 아니까...???
그케 생각도 들어람짜.
철쇄설이 허구라는 인사들에 주장은
철쇄설이 나온 건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행장인 [현무공 실기(顯武公 實記)]에서 뿐이라고 함시로 쇠사슬이 300m면 몇 톤인데 끌어 올릴 수 없다는 등에 얘기들로 부정적이제만
전라좌수사 때 충무공의 [철쇄방비시설(鐵鎖防備施設)]과 관련된 기록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남아 있지라.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구축한 방비시설 중 하나였던 철쇄방비시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설치한 기록이지라.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종 5년 도원수 유순정(柳順汀)의 장계에도
<<須植大木, 以鐵鎖, 次次聯接, 橫截藏船浦口。 又用葛大索, 懸重石于木, 使木沈水下一尺許, 使賊船拘- 不得踰入, 且不得斫斷, 又於聯木中央, 置鐵鉤...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로 연결하여 배를 감춘 포구를 횡단하고, 또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 밑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리어서 넘어들어오지도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고, 또 연결한 나무 중앙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라고 상세한 설치 방법과 용도가 기록으로 남았고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文稿) 기록도
<<李重煥所記。... 李舜臣住箚海上。打鐵鎖橫亘於石梁上。倭船至梁上。罥於鐵鎖。卽倒覆於梁下。梁上船不見低處。意其踰梁而順流直下。皆倒覆。且水勢近梁益急。船入急流。不暇回旋。五百餘艘一時全沒。隻甲不存。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이순신(李舜臣)은 바닷가에 주둔하며 쇠사슬을 만들어 석량 위에 가로 걸치고 기다렸다. 왜선이 석량 위에 이르면 쇠사슬에 걸려 즉시 석량 아래로 뒤집혔으니, 석량 위의 배에서는 아래가 보이지 않으므로 석량을 넘으려고 물결을 타고 곧장 내려오다가 모두 뒤집어진 것이다. 또 물의 흐름이 석량 근처가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들어가면 돌릴 겨를이 없어 5백여 척이 한순간에 침몰하여 병사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라 적었고
형님이 충무공의 사위인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의 당시 자료인 [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에도
<<舜臣大修戰具。勅厲屬鎭。鑄鐵鎖。橫截海口。創制大艦。如伏龜形。覆大板鏃刀刃外向。藏戈矛大炮其中。命曰龜船...
이순신은 전구(戰具)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속진(屬鎭)들을 신칙 하여 쇠사슬[鐵鎖]를 주조해서 바다 어귀를 가로질러 치고, 큰 군함을 마치 엎드린 거북의 형상처럼 제작하여 대판(大板)을 위에 덮고서... 이를 귀선(龜船)이라 명명하여 선봉(選鋒)으로 삼아...>> 라 기록되었응께
이들 기록덜얼 모도 허구라고만 치부할 수 없넌 역사서에 기록덜이 여럿 있어람짜.
야튼 간에 쩌그 벡파장 비석 공사 현장 사진언 여러 찔로 생각하게 하넌 귀한 사진이여가꼬 찰로 방갑구만이라.
<진초 제59회.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송현인 조병현>
첫댓글 감사합니다. 첫 사진 속에 글씨는 笠石 9 입니다. 선돌=立石= 笠石 으로 笠石은 비석 위 삿갓을 씌우는 비석일 때 씁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1956년 4월에 결혼하셨는데 한참 신혼일 때 모습이네요.
1956년 음력 9월 (1956년 10월 말~11월 초)사진입니다.
아 예 바른 지적 고맙십니다.
비문 확인항께 건립일이 '단기 4,289년(1956년) 8월 29일에 鷺山 李殷相은 글을 짓고 素筌 孫在馨은 글씨를 쓰다.'로 비석에 그리케 적어져 있고
낙성일(落成日)은 1956년 11월 29일로 나옹께 그케 바깠구만이람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