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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離者定會(이자정회)
조용했다.
가마는 소리도 없이 날아 관솔불이 대낮처럼 타오르고 있는 방가장의 안뜰에
내려섰다.
호화롭지는 않다.
하지만 그 어떤 가마보다 사람의 시선을 끌 힘을 가마는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늘을 나는 가마는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가마는 혼자 날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흑의에다 선명한 백포(白布)를 가슴에 한겹 두른 장한 네명이 그 가마를 메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인교자(四人轎子)인 셈이다.
어깨에서 가슴을 두르고 흘러내려 질끈 검은 허리띠로 묶여진 백포는 무릎까지
늘어뜨려져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고, 그 백포에는 묘한 형상의 흰꽃 하나가 새겨져
있음이 보였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낸 다음, 석상처럼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굳어진 듯한 모습.
적막(寂寞).
관솔이 불에 타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릴 뿐이다.
『 흥!』
문득 차가운 코웃음소리가 가마 안에서 울려나왔다.
『 철장 방대원이 일대호한이라 하더니, 이제보니 자라꼬리와 같은 자였던
모양이군?』
순간,
『 으왓핫하하하…』
밤하늘을 울리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앞으로 우뚝 솟아있던 이층누각의 문이 좌우로 열리며 십여명이
나타났다.
가운데 선 우람한 체구에다 오십대 후반 정도의 화복노인.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눈에는 정광(精光)이 어리고 걸음걸음이 당당하여 가히 일대고수의 풍모가
역력하다. 그의 옆으로 선 칠팔명의 사람들의 기태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그것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매복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이 일대를 엄습해왔다.
『 방모가 소림의 속가제자로서 무림에 몸을 담은지 벌써 사십년… 그 세월에
백련교와의 은원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귀하가 이렇게 방모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더구나…』
화복노인은 껄껄 웃으며 가마를 향해 말하다가 갑자기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가마를 노려보았다.
『 당신은 누구요?』
『 당신은 나의 말을 부인할 수 있소?』
대답 대신 가마안에서는 되물음이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전음지술(傳音之術)로 뭔가를 말한 모양이군…」
어둠 속에서 숨어 사태를 지켜보던 왕승고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화복노인의 말대로라면 가마안에 있는 사람이 백련교의 사람인 듯했기
때문이다.
『 좋아! 오늘 방모는 강적을 만난 것 같군』
내뱉듯 말한 화복노인, 철장 방대원은 길게 숨을 들이켜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포권을 해보였다.
『 방모를 도와주러 오신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소이다. 사정이 생겨서
여러분을 더 이상 모실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주십시오. 후일, 방모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찾아뵙고 오늘 일에 대한 사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투는 비장하여 그의 좌우에 있던 칠팔명의 초빙고수들은 굳은 표정이
되었다.
『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간다면…』
그중 한사람이 말끝을 흐렸다.
어조야 명백했다.
『 이 일은 방모 개인의 일인지라, 더 이상 폐를 끼칠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아광(阿匡)! 손님들을 객청으로 모시도록 해라』
방대원이 굳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인이 이렇게 나오는데야 아무리 도움이 되고자
찾아온 사람이라도 어쩔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 그럼…』
몇 사람은 주춤거렸지만 결국 열명 정도의 사람들이 아광이라 불린 삽심대 장한의
인도를 받아 장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뜻밖의 일은 그때 일어났다.
『 흥!』
예의 차가운 코웃음소리.
그리고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이냐!』
방대원이 노해 몸을 날렸다.
그의 막내아들 방소광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흑의인들이 날아들면서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피를 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를 막아』
날카로운 음성.
동시에 가마를 내려놓고 있던 네명의 가마꾼들이 훌훌 날아올라 방대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펑! 퍼엉!
일진 폭음이 터지면서 방대원이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가마를 메고 나타났던 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짓이냐?』
방대원이 노해 두눈을 부릅떴다.
우두둑, 우두둑… 그의 팔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해 사생결단을
할 작정으로 전신공력을 다 끌어올리는 것이다.
『 아무 짓도… 분명한 것은 아무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지. 더구나,
저들의 죽음은 당신이 불러온 것이다』
『 무슨…』
『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당신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말을 잊었던가?』
싸늘한 꾸짖음이 가마안에서 들려왔다.
『 그건…』
『 당신의 능력을 평가하여 하루나 생각할 시간을 주었는데, 그러한 배려는
생각지도 않고 방수(방手)를 데려와? 저들의 죽음은 분수를 모른 당신의 책임이니
아무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가마안의 음성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고, 어떤 여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가 초빙했던 고수들은 피를 뿌리고 있었다. 그들을 덮친
흑의인들은 열명 정도로 숫자는 비슷했지만 무공이 기고(奇高)한데다 묘한
합격지술(合擊之術)을 익히고 있어 일대일이 아니라, 일대십의 상태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의외의 방향으로 돌아가자 방가장의 사람들은 엉거주춤하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방대원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 손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그 광경에 참지 못한 방대원이 고함을 치며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마꾼들에게
덮쳐갔다.
펑! 퍼엉….
일진 폭음이 연속적으로 터지면서 가마꾼 두명이 물러났다.
하지만 방대원도 결국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두명을 물리쳤지만 세명째에
이르러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는 마지막 한명이 남았다.
『 비켜라!』
방대원은 두눈을 부릅뜨고서 이름을 날린 철장을 들어 그를 쳐갔다.
『 물러나라!』
가마안에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순간,
펑! 하는 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마지막 한사람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면서 잇달아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 철장 방대원의 이름은 명불허전이로군…』
가마안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가마는 허공을 가로질러서 가마꾼을 물리친 방대원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비켜!』
방대원이 고함치며 가마를 향해 일장을 휘둘러냈다.
보통 일장(一掌)이라고 하면 손을 휘둘러 쳐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경력이 깃들여 손에 맞게 되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타격을 받게
된다. 거기에 더해 허공을 격하고 타격을 주는 것이 일반적으로 장풍(掌風)이라
불리는, 바로 벽공장세(劈空掌勢)이다.
하지만 방대원의 이 일장은 벽공장세가 아님에도 장세가 발동하자 은은히 주위에
경기가 격탕하고 있음을 나무위에 숨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왕승고는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림사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이로구나」
찰나, 가마안에서 흰빛이 튀어나왔다.
펑!
폭음이 일며 방대원이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전신을 떨다가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앞에서 가마가 경기를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다시 한번 받아보아라!』
철장 방대원은 상대가 가마안에서 나오지도 않고서 손만 내밀어 자신의 일장을
받아냄을 보자 대로하여 전력을 기울여 재차 일격을 뻗어냈다.
팡!
한 소리 폭음.
가마가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방대원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앞에 검은비단으로 된 경장을 한 사람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복면을 해서
드러난 것은 싸늘한 눈뿐이었다.
방대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지체를 하는 사이에 그를 도우러왔던 사람들이 거의 다 쓰러졌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겨우 두 사람, 그나마 명재경각(命在頃刻)이다.
『 놈들을 공격해라!』
방대원이 소리쳤다.
상처입은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 오늘 방가장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볼 참인가? 방가의 가솔 백 열 두 명과
하인들을 포함한 이백 십칠 명 모두가 죽어넘어지는 것을?』
가마 안에서 나온 흑의복면인이 싸늘히 웃었다.
방대원의 전신이 굳어졌다.
자신조차도 방가장 내에 얼마의 인원이 살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대개
이백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일반적이라면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것을 알게되자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상대가 이처럼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도 저 인원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음을 보자 흑의복면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방대원을 보았다.
『 당신의 결심여하에 따라, 오늘 방가대원이 피바다로 변할 것인지 살아남을
것인지 결정이 된다』
『 ……』
방대원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소림의 제자인 이 방모가 백련교의 교도가 된다는
것이?』
『 아핫하하하… 왜 안되는거지? 백련교도가 된다고 하여 소림사의 제자가 무슨
상관이 있나? 본교는 무궁창해(無窮滄海)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하지 못할 일이 없거늘…』
『 으아악!』
그 순간에 마지막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방대원을 도우러왔던 사람들은 모두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을 공격했던
흑의검수들은 하나 남김없이 온전했다.
자신의 머뭇거림으로 인해서 그들이 모두 비명에 가는 것을 보게되자 방대원의
얼굴은 가히 참혹하게 변했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때다.
『 아핫하하…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가지!』
갑자기 흑의복면인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훌쩍 몸을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지시를 받은 듯 가마꾼과 나머지 흑의검수들도 그의 뒤를 따라 삽시간에
그곳을 떠났다. 그들의 퇴각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인지라 얼떨떨한 빛으로
눈을 굴리는 사이에 그들의 모습은 방가장에서 사라져버렸다.
『 대체 이게 무슨…』
방대원은 멍청한 빛으로 서 있었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버님?』
방대원의 맏아들인 방수광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왔다.
원래 오늘 그들은 생사대적을 만난 셈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배첩.
거기에는 방가장이 백련교에 들기를 권하는 정중한 글이 적혀 있었다. 말은
정중하지만 답변의 기회를 하루만 주겠다는 의미는 선택이고말고 일방적인 강요에
다름이 아니었다. 더더구나, 방대원은 소림사의 속가장로에 속하는 사람이고
방가장은 소림사의 중요거점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났던 백련교의 사자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 나도 모르겠구나』
방대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지 모를, 아주 끈적한 기분나쁜 느낌이 그를 덮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심계로군…!」
왕승고는 몸을 날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방가장을 떠난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의복면인이 방가장을 빠져나갈 때, 그를 따라 방가장을 떠나온
것이다.
왕승고가 흑의복면인을 따라 방가장을 떠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어디선가 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련교라면 그도 관련이 있었다.
한번도 아니고 이미 몇번이나….
게다가 이 마당에 방가장에서 비무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결국 흑의복면인의
무서운 심기에 내심 놀란 왕승고는 그가 과연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흑의복면인은 방가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은밀히.
흑의복면인은 방가장을 빠져나가자 목적지가 있는 듯이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났다.
방가장은 넓은 농지를 바라보고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자리했으므로 그곳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방가장이 바라보이는 그 숲속에는 흑의인들이 매복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다른 동정은?』
『 없습니다』
『 좋아…』
수하의 보고에 흑의복면인은 만족한 듯 싸늘히 웃었다.
이경이었던 시각은 금세 삼경으로 변했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흑의복면인은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방향은 과연 왕승고의 예측대로 방가장이었다.
방가장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방을 밝게 만들고 있었던 관솔도 사라지고 죽어넘어졌던 시신들도 이미
다 치워진 상태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사방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눈길이
날카롭다는 것.
하지만 후원으로 스며드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더구나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철장 방대원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청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늘 일은 너무나
그의 생각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 그가 아버님께 한 말이 무엇인지… 소자가 알면 안되겠습니까?』
큰 아들인 방수광이 물었다.
방대원은 아들만 둘을 두었다. 그 큰아들인 철수개천 방수광은 이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방가장의 가업을 다 이어받고 있었다.
『 모르는 것이 좋다』
방대원이 말을 잘랐다.
그때였다.
『 후후… 그런가? 하긴, 자신이 원에 부역하여 오늘날의 부(富)를 쌓았다는 것을
굳이 아들에게까지 알리고 싶진 않겠지…』
말꼬리를 잡는 음성.
『 누구냐?』
방대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소리쳤다.
창을 통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예의 흑의복면인이었다.
『 너는!』
나타난 사람을 알아본 방수원은 노하여 대뜸 손을 휘둘러 천왕탁탑(天王托塔)의
일초를 발휘하여 흑의복면인을 공격해갔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일초였지만 세찬
바람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과연 그가 철장의 비전을 이은 것은 분명한 듯했다.
『 흥! 명월에 감히 반딧불이 밝음을 다투려 한단 말인가?』
흑의복면인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질풍처럼 방수원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유령과 같아서 방수원은 대체 그가 어떻게 자신의 장세를 뚫고서
단 한순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어헝!』
당황한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다급히 전신의 공력을 모조리 모아 다가오는
흑의복면인에게 일장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보다 흑의복면인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딱!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 크윽!』
괴로움이 튀는 소리.
『 멈춰라!』
방대원이 놀라 달려왔다.
『 한걸음만 더 와 보시지?』
흑의복면인이 싸늘히 웃었다.
그는 묘한 손짓으로 방수광의 어깨를 끌어잡고 있는데, 방수원은 몸집도 손도 크지
않은 그의 손아귀에서 마치 문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방금전에 그처럼
맹호와 같이 흑의복면인을 공격했던 그의 오른손은 부러진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일그러진 얼굴, 식은땀이 비오듯했다.
『 악독하구나! 대체 네가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런…』
방대원이 주춤거리며 이를 갈았다.
상대가 악독하기 이를데없는 수단으로 단 일격에 그의 아들의 팔을 부러뜨리고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악독한 수법으로 그 어깨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방수광의 어깨는 산산이 바스러져 영원히 쓸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독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의 아들인
방수원을 단 일초에 제압할 수 있다면 그 무공이 고강함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 무슨 원한이 있을까? 본교는 귀하를 초빙하고 있을 뿐이오, 방대원』
『 이것이 초빙이냐?』
『 오호호호호…』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여자! 정말 그녀란 말인가?」
창밖, 고목나무의 위에 올라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왕승고가 흑의복면인의
웃음소리에 안색이 변해 신음했다. 그는 원래부터 이 흑의복면인이 남자가 아님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직도 사태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쓸데없는 고집으로 일가가 몰살되고 평생을 바쳐 이룩한 기업이 무너지는 것을
봐야만 정신을 차릴건가?』
흑의복면인이 코웃음치며 다그쳤다.
『 내가 젊을 때에 원에 부역했던 것이 흠이 될지언정, 어찌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된단 말이냐!』
방대원이 이를 갈며 흑의복면인을 쏘아보았다.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원제국의 대내위사라는 신분을 자랑하면서
동족을 핍박하며 다녔던 것을 과연 세상이 부역이라고 봐줄까? 게다가 오늘 당신은
방가장을 도우러왔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지? 본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거기에 더해 내가 갑작스럽게 그 자리를 떠났으니 어떤 소문이
강호상에 퍼질까?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도 세상은 그렇게 말하겠지!
방대원은 백련교의 주구가 되었노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신이 설 자리는
없게 되겠지?』
『 역시 그런 생각으로…!』
방대원은 치를 떨었다.
생각같아서는 생사결(生死決)을 하고 싶지만 그의 큰아들이 상대의 손아귀에서
지금도 저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흑의복면인이 갑자기 방수광을 냅다 방대원에게 밀어버리고는 차갑게 물었다.
『 답을 들어볼까?』
『 한가지만 물어보겠소』
방수원을 부축한 방대원이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떼었다.
『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필요한 것이오? 귀하의 무공이나 수단으로
보건데, 나와 같은 사람은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그 질문에는 왕승고 또한 동감이었다.
방수원은 이 지역의 터주대감과 같은 사람이었고, 무공도 고강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포섭을 해야만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본교는 세상을 미륵하에 두기 위해서 세력을 필요로 하지.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은 그뿐…』
『 …』
방대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왕승고는 내심 백련교의 수단에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저들이 저러한 술수로서 세력을 규합한다면 그 세는 금세 대단하게 불어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운무곡을 벗어난 다음, 백련교의 세가 다시 떨치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그들을 막기 위해서 구대문파를 비롯한 무림중의 세력들이 움직이고 있다더니, 그
일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이미 방대원은 그물에 걸려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 아미타불… 실로 악독한 술수로군』
그때 돌연 긴 불호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흑의복면인은 놀라 대청을 뛰어나갔다.
대청의 바깥 뜰에는 흰수염을 드리운 노승 한 사람이 서 염주를 굴리며 나직이
불호를 외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는 십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자리했다.
『 소림사?』
흑의복면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 공우사형(空隅師兄)!』
방대원이 소리쳤다.
공우라 불린 노승은 그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굳은 얼굴로 흑의복면인을
보았다.
『 근래에 들어 악독한 수단으로 백련교의 세력을 늘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노승이 듣기로는 그가 백련교의 교화사자(敎化使者)라고 하더군. 시주가
바로 그 사람이오?』
그가 단숨에 자신의 정체를 밝혀낼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듯 흑의복면인은 흠칫
놀라 그를 보더니 나직이 코웃음쳤다.
『 소림본원에서 응원을 왔단 말이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장내로 흑의인들이 날아들어 소림사의 고수들을
공격해갔다. 그들은 이미 대청주위에 매복하여 흑의복면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과 함께 방대원이 돌연 고함을 치면서 교화사자를 공격해갔다.
그는 이미 그녀에 대하여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사태가 변하자 다짜고짜 손을 쓴
것이다.
『 결국 벌주를 마시고 싶단 말이지?』
흑의복면인, 백련교의 교화사자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빙글 몸을 돌려
단장(單掌)으로 방대원의 장세에 맞서갔다.
연약해보이는 섬섬옥수.
그것이 철장이라 불리는 방대원의 쌍장과 마주친다면 강약의 대조는
명약관화해보였다.
펑!
그러나 장세가 마주치자 신음과 함께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난 것은 뜻밖에도 철장
방대원이었다.
『 물렀거라!』
그가 단 일초를 버티지 못함을 보자 소림사의 공우대사는 대경실색하여 짚고 있던
선장(禪杖)을 휘둘러 교화사자를 공격해갔다.
그가 선장을 휘두른 것은 소림사 칠십이예(七十二藝) 가운데 하나인
복마십팔장(伏魔十八杖)인지라 바람을 가르는 맹렬한 파공음이 윙윙거리며
일어났다.
『 흥!』
교화사자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상대의 병기가 길고
무거워 맨손으로 상대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어찌 된 일인가, 대원사제?』
그녀를 물리치자 공우대사가 물었다.
『 공력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 무슨 수작을 부린겐가? 감히!』
공우대사가 교화사자에게 소리치다가 돌연 노호하면서 선장을 휘둘렀다.
부우웅!
강렬한 기세가 선장을 따라 일어났다.
『 윽!』
나직한 신음이 빠르게 그 뒤를 이었다.
공우대사가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데 근엄한 얼굴이 창백히 변해있었다.
『 비열한… 암습을 한단 말인가?』
『 오홋호호호…!』
교화사자가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 당하는 자가 바보 아닌가?』
말과 함께 그녀는 다시 손을 휘둘렀다.
『 조심하십시오!』
철장 방대원이 소리침과 동시에 공우대사가 고함치면서 선장을 휘둘렀다.
팅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선장에 휩쓸려 바닥에 은빛침이 어지러이 떨어졌다.
『 투골음풍침(透骨陰風針)입니다』
철장 방대원이 소리쳤다.
투골음풍침이란 마치 실과 같은 암기다. 암기 자체가 일반 침보다 더욱 가늘어서
내가 고수가 아니라면 던져낼 수조차 없고 그렇게 가늘기 때문에 방비하기도
어렵다. 이런 밤에 그러한 암기를 쓴다면 정말 상대하기 쉽지 않았고 그 결과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 목을 내놓아라!』
교화사자가 유령과 같이 공우대사에게 덮쳐갔다.
공우대사의 얼굴이 다급함으로 일그러졌다. 투골음풍침을 맞은 곳에서 전신으로
한기가 퍼지기 시작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미타불!』
공우대사는 크게 불호를 외면서 수중의 선장을 휘둘러 그대로 교화사자를
후려쳤다. 그의 반신은 이미 투골음풍침의 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예
자신을 돌보지 않자 실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화사자의 신법은 실로 질풍과 같아서 몸을 번뜩이는 사이에 공우대사의
선장을 피하는 동시에 번갯불같은 일검을 쳐내어 그를 공격해왔다. 그녀의 검세는
놀랍도록 빨라 검을 뽑는 것을 미처 보지도 못한 사이에 이미 검은 공우대사의
면전에 이르러 있었다.
『 감히!』
공우대사가 이를 악물면서 신장타귀(神將打鬼)의 일식을 펼쳐 선장으로 그녀를
쳐갔다. 심장이 검에 꿰뚫릴지언정, 그녀 또한 그의 일격에 맞게되면 무사하지
못할터였다.
『 흥!』
코웃음소리.
가가각….
귀청을 가르는 날카로운 음향.
공우대사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교화사자는 검을 휘둘러 그의 선장을 막아냈는데, 그냥 막은 것이 아니라
그 검이 그의 선장을 타고서 질풍같이 미끄러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 버틴다면 손이 날아갈 판이다.
하지만 상황의 진전은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공우대사가 선장을 놓치고 뒤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뒤를 이으며 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번개처럼 뒤를 따랐다.
가히 위기일발이요, 백척간두.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손에 사정을 두시오!』
동시에 교화사자는 강력한 세력이 자신의 등뒤에서 날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그대로 공우대사를 참한다면 자신도 성할 수 없음을 판단하는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 어떤 자냐!』
교화사자는 이를 갈면서 빙글 몸을 돌려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에 그녀는 수수한 베옷을 입은 자가 자신의 뒤에서 웅장한 위력의 일장을
때려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수중의 검으로 그를 찔러갔다.
검빛이 삼엄하게 일어났다.
교화영롱(巧化玲瓏)!
순간, 마의인(麻衣人)은 긴머리를 등뒤로 출렁이면서 옆으로 물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검세를 피해냈다.
『 암향표(暗香飄)? 종남파냐?』
그 움직임을 본 교화사자는 코웃음치면서 손을 떨었다. 그러자 검화가
폭죽터지듯이 일어나 마의인을 덮치는데, 대체 어디가 검이고 어느 것이 환영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의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찰나, 그는 벼락같이 오른손의 검지를 앞을 향해서 퉁겨냈다.
땅!
날카로운 음향이 터졌다.
『 금강지(金剛指)?』
경호성이 터졌다.
그 놀람에 찬 소리는 교화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깨를 움켜잡고 물러나
있던 공우대사에게서 터져나왔다.
『 금강지라구?』
상대가 믿을 수없게도 자신의 검을 손가락으로 퉁겨내버리고, 그 힘이 또한
가공하여 검신이 부러질 듯 떠는 것을 이기지 못해 공세를 거두고 물러난
교화사자는 놀람에 찬 눈으로 마의인을 바라보았다.
묘한 느낌이 전달되어왔다.
수수한 베옷을 걸친 그의 전신에 어린, 아니 그의 고요히 가라앉은 눈을 본
교화사자는 그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 철수한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날려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치 썰물과 같았다. 흑의인들도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괜찮으십니까?』
마의인이 방대원과 공우대사를 보고 물었다.
『 견딜만 하오, 시주는…』
『 그러시다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마의인은 공우대사에게 고개를 끄떡여보이고는 훌쩍 몸을 날려 그 자리를 떠났다.
『 정말 그것이 금강지였습니까?』
『 맞네. 우리 소림사의 칠십이예중 당대에는 공도사형외에는 아무도 연성하지
못한 금강지야!』
방대원의 물음에 공우대사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투골음풍침에 당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는 결코 이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는 나직이 신음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사형!』
방대원이 소리쳤다.
『 나는 괜찮네. 자네 몸이 어떤지나 돌보게』
공우대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산자락이 길게 어둠을 향해 누워있다.
숲도 있다. 그 숲을 뚫고 달려가는 산길도 존재했다. 그리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산신묘(山神廟)도 하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신묘가 아니라 삼국시대의
관운장을 모신 관제묘(關帝廟)이지만.
방가장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
교화사자는 그 관제묘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방가장을 떠나 단숨에 이곳까지 달려온 그녀는 마치 누구를 기다리듯이 싸늘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면서 서 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언제까지 내 뒤를 따를 작정이냐?』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싸늘한 질타.
그녀의 말과 함께 그 앞에 예의 마의인 베옷을 걸친 왕승고의 모습이 나타났다.
십여 리를 쉬지않고 달려왔을 터인데도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숨도 가쁘지 않고
당황하거나 급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무엇 때문에 본교의 일을 방해하고 내 뒤를 따른 것인가? 본교와 은원이 있나?』
미간을 찡그린채 왕승고를 보고 있던 교화사자가 물었다.
『 은원이라면 조금 있소』
왕승고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곤 침묵.
당연히 뭔가 말을 이을줄 알았던 교화사자는 말이 단절되자 저으기 당황한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형세의 주도권이 은연중에 상대에게 넘어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당신은 누구요?』
말투가 달라졌다.
『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요』
대꾸하던 왕승고가 불쑥 물었다.
『 당신은 원래 백련교도였소?』
그의 물음에 교화사자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 무슨 뜻이지? 날 알고 있단 말인가?』
『 내 기억이 맞다면, 지난날 황산어림에서 한번 본 것 같소.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 황산…』
미혹한 빛이 교화사자의 눈에 떠올랐다.
순간, 왕승고의 신형이 바람처럼 그녀를 덮쳐왔다.
『 감히 암습을!』
싸늘한 외침, 동시에 교화사자에게서 검빛이 크게 일어났다.
하지만 왕승고의 신형은 덮쳐올때보다 더 빠르게 뒤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소매가
검에 베어져 팔뚝이 드러났고 소맷자락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 매서운 검법이군』
왕승고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방금까지 교화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의
한쪽이 찢겨져 들려있었다.
『 역시 당신이었군』
왕승고가 앞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가인(佳人)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그처럼 매몰차고
독하던 교화사자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은 바로
지난날 그가 황산어귀에서 만났던 신비한 여인, 청색경장을 한 그 신비한
여인이었다.
왕승고가 세간에 기재로 불렸던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한번 본 것은 스쳐본
것이라도 쉽게 잊지 않는 기억력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에 황산에서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전해준 무공을 수습할 수 있었고 이 여인의 매서운 기세에서 그녀를
기억해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일거에 자신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기자 놀라 굳어졌던 그녀는
왕승고의 말에 더욱 놀라 눈빛에 경악이 떠올랐다.
『 어떻게 날 알지?』
『 얼굴을 본 적이 있을뿐, 그것이 안다면 아는 것이겠지』
왕승고는 손에 들고 있던 복면을 버리면서 말했다.
『 아직 백련교의 총단이 대홍산경(大洪山境)에 있소?』
『 그걸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실언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왕승고는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 알겠소』
그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림과 함께 그는 소리도 없이 어떤 기척이 자신을 덮쳐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신형이 구름처럼, 이미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옆으로 사오척
미끄러지더니 그녀를 향하고 섰다. 그 순간에 그녀가 그를 향해 다시 손을 쳐드는
것이 보였다.
싸늘한 빛이 그를 향해 쏘아왔다.
『 투골음풍침?』
왕승고는 미간을 슬쩍 찡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 공세를
피해냈다.
교화사자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녀는 왕승고가 아주 필요한만큼만 몸을 움직여 자신이 쏘아낸 투골음풍침을
피해낸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투골음풍침이 발출되는 것은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사 알아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면전에 도달했을 때이니, 이미 때는 늦은
다음인 것이다.
그녀의 놀람은 당연했다.
왕승고가 지난 일년간을 운무곡에서 살면서 눈을 단련하여 그의 눈이 안개를 뚫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을 알 리 없는 까닭이다.
왕승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 당신의 수단은 그때와 다름없이 신랄하군. 그처럼 행사를 악독히 한다면
언제라도 과보(果報)를 받게 될 것이니 조심하시오』
말과 함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달빛이 그의 넓은 등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 ……』
교화사자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않고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생각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
천천히라고는 하지만 왕승고의 신법은 물흐르 듯하여 순식간에 숲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왜 저자를 그대로 보내셨습니까?』
왕승고의 모습이 사라지자 차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그녀의 뒤에는 일신을 검은 옷으로 둘러싼 흑의복면인 하나가 나타나 조용히 서
있었다.
교화사자는 싸늘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채 말했다.
『 그는 나타난 이래, 소림사의 금강지를 보였고, 청성파의 암향표에 이어
점창파의 유운신법에 이르기까지 구대문파의 절기를 잇달아 시전했어. 구대문파의
절기는 제각기 특색이 있어 외인에게는 전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 간단히 볼 일이
아니지. 그를 쫓아!』
『 예』
복면인이 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교화사자는 굳은 얼굴로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일.
대체 저자가 나를 언제 보았다는 것일까.
그의 독특한 기세라면 결코 한번 보면 잊을 리 없을 것이건만…
문득, 교화사자의 눈빛이 굳어졌다.
황산?
그러고보니 잠시 보았던 눈빛인 듯했다. 생김새와는 달리 묘한 기품을 가지고 있던
그 눈.
『 설마 그… 말도 안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볼품없이 생긴 추괴한 자. 더더구나 그녀가 잘못보지 않았다면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였거늘 그가 어찌 그 짧은 시간내에 그런 존재로 변모하여 나타날
수가 있을까.
전설 속의 이야기라면 모를까.
『 방대원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산서일대를 경영함에 차질이 생길텐데… 천하의
정세가 급하게 변하고 있는 판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교화사자는 발을 구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남아 있는 것은 고요한 숲과 흐드러진 달빛뿐.
밤은 계속해서 깊어가고 있었다.
시각은 금세 사경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방가장은 이미 잠들기는 틀린 상황.
사방에 밝혀진 불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고, 방가장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대청
또한 사방에 밝혀진 불로 인해 대낮과 같았다.
방대원과 그 아들들, 그리고 공우대사와 그를 따라온 십여명의 소림사 고수들은
대청 안에 제각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의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공우대사는 운공조식에 여념이 없고, 그 옆에는 또한
방대원이 눈을 감고서 운공조식하고 있었다. 그외에 방대원의 큰아들인 방수광은
부상당한 어깨를 친친 동여매고 있었으며 나머지 소림사의 고수들도 여기저기
부상당한 곳을 치료하는… 그야말로 패잔병들의 모임.
『 아직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는가?』
공우대사가 문득 눈을 뜨고 물었다.
『 예, 사백님』
옆에서 방수광이 말했다.
그때였다.
『 소장주님!』
『 무슨 일이냐?』
밖에서 수하가 부르자 나갔던 방수광의 얼굴이 굳어져서 돌아왔다.
『 무슨 일이냐?』
운기조식하고 있던 방대원이 눈을 뜨고 물었다.
『 좀전에 나타났던 그… 대협이 약방문(藥方文)을 전달하고 갔답니다』
『 약방문?』
『 예, 여기 적힌 약을 쓰면 사백님과 아버님이 도움을 보실 수 있을거라고…』
방수광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 말도 안돼! 당장 쫓아가서 찾도록 해라!』
방대원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 너희들도 가보도록 해라』
공우대사의 말에 소림사의 고수들도 일제히 몸을 날려 대청을 벗어났다.
『 뜻밖이로군요. 그가 돌아오지 않다니…』
『 꼭 돌아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겠나? 하지만 그를 꼭 찾아야만 하네. 반드시』
공우대사는 강조했다.
황산의 참극 이래, 그 일은 강호상의 일대의안(一代疑案)이 되었다. 귀왕혈이
저지른 일이라고 소문은 났지만 증거가 없었고 그 일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 * * 『 언제?』
구대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만금전장 제남총호의 관사(管事)
진일휴의 얼굴을 보았다.
『 방금 개봉지부에서 날아온 비합전서(飛합傳書)를 받았습니다』
진일휴가 손에 든 서신을 바쳤다.
그것을 본 구대부인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 십만냥이라고…』
진일휴를 보내놓고서 구대부인은 미간을 찡그린 채 방안을 서성였다.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백일간의 기도 끝에 그 기도의 영험이 있어서인지 사실상 포기했던 승고가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돌아오지를 않고 있었다.
더구나, 개봉에서 십만냥을 찾아가다니….
『 행로로 보아 제남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구나!』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구대부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사람을 그쪽 방면으로 풀어 왕승고를 찾도록 조치하는 것이 지금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요동(遼東)에서 온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다.
* * * 왕승고의 눈앞에는 황하의 누런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가장을 떠나온지 벌써 사흘.
길을 재촉하여 이제 낙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자신의 움직임을 알리지 않은 채, 만금전장의 개봉지점에 들러 십만냥의 은자를
빌렸다.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일에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어머니를
찾을 때가 아니었다. 귀왕혈을 찾아가는 것을 어머니가 용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토고원을 지나오면서 흙과 뒤섞여 흘러오면서 언제나 탁한 빛으로 으르릉거리는
황하는 강변 일대 사람들에게는 젖줄인 동시에 천적이었다.
황하가 없다면 살 수가 없겠지만, 또한 매년 범람하는 황하로 인해 수만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대범람때마다 물길이 바뀌면서 하안(河岸)을 덮치니, 수백
수천의 인명이 매년 그로 인해서 죽어가는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진 물줄기가 바로
황하였다.
낙양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황하를 건널 필요는 없다.
황하를 따라 가다보면 곧 낙양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강변을 따라 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금년에도 변함없이 범람한 황하로 인해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참상은
책에서 보던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참혹했다.
유리걸식(遊離乞食)이란 말이 실감나고 자신의 자식을 팔고 심지어는 잡아먹기조차
한다는 말이 먼나라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금년은 예년에 비해 낫다는 촌로의 말은 더 할말이 없게 하기에 족했다.
낙양(洛陽).
낙수의 북쪽에 있다하여 낙양이라 불리는 이곳은 동주(東周)이래 9개의 나라가
도읍을 한 그야말로 유서깊은 곳이다.
현도관(玄都觀)은 낙양의 외곽에 있었다.
생각보다 제법 큰 규모였고 현도관의 널따란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리고 있었다. 신도라면 엄청난 숫자이겠지만 거의 걸인과 같은 행색을
보자면 그들이 신도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 줄을 서세요! 줄을!』
앞쪽에서 도사 한사람이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 끼여들지 말아!』
『 이게 정말…』
사람들의 대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앞에는 십여 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손에 손에 바가지와
그릇을 들고서 도사들이 가마솥에서 떠주는 음식을 받아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 한쪽에서 싸움이 벌어져 소란하기 그지 없었다.
그 자리에 선 왕승고의 행색은 배급을 더 받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별로 크게 나은 것이 없었다. 산에서의 수련 이후, 겉치장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 관주님을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왕승고가 배급이 거의 끝난 것을 보고 도사 한
사람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 배급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됩니다. 관주님은 구휼 때문에 바빠서 만날 수가
없으니 줄을 서면 됩니다. 누구나 다 주니까요』
사람좋게 생긴 도사가 설명을 해주었다.
쓴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떠올랐다.
『 배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현도관의 관주이신 현령진인께서 좋은 일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불원천리 찾아왔습니다』
왕승고의 말에 도사는 묘한 눈길로 왕승고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네가?
그런 눈길.
왕승고가 현도관의 관주인 현령진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시진이나
지나 해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다.
배급현장에서 현령진인은 바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 내일 일 때문에 성문이 닫히기 전에 관아에 들어가봐야 하니 간단하게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량수불…』
『 좋은 일에 보태주십시오』
왕승고는 긴말없이 봉투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가벼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현령진인은 의아한 빛으로 왕승고가
내민 봉투를 열어보고는 안색이 크게 달라졌다.
그속에는 만냥짜리 은표(銀票)가 다섯장이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 한냥에
은자 다섯냥인 시절이다. 오만냥이라면 금 일만냥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 시, 시주! 저, 저분 시주를 잡아라!』
현령진인이 안색이 변해서 소리치자 그 어조가 이상함을 본 도사들이 왕승고를
잡아족칠 듯이 달려들었다.
『 맙소사! 저런 멍청한…』
그 광경에 현령진인이 입을 딱 벌렸다.
현도관.
이곳이 낙양성에서 성가를 얻고 신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결코 사욕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다.
축재에 열을 올리지 않고 시주받은 돈을 아낌없이 풀어 이재민을 구휼하고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 돕기를 내자식 돌보듯하니 평판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솥을 걸고 굶주리는 이재민을 구휼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열흘이 넘었다.
하지만 금년에는 시주가 전같지 않아 내심 곤란을 겪고 있었던 참에 왕승고와 같은
재신이 나타난 것이니 대접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왕승고가 현령진인의 권에 의하여 현도관에 묵게 된 것도 이제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왕승고는 돈만 낸 것이 아니라 조금도 쉬지 않고 이재민
구휼을 도와 도사들과도 상당히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일이 끝났을 때.
『 떠나시려구요?』
현령진인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 떠난다기보다는 찾아볼 곳이 있어서입니다. 저는 원래 중화인이 아니라
백제인입니다』
『 백제?』
『 그렇습니다. 고려땅에 옛날에 있었던 동이족이지요. 조금 더 도와드렸으면
좋겠지만 제가 불원천리 이곳에 온 것은 찾을 곳이 있어서였으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왕승고의 말에 현령진인은 정색을 했다.
『 그곳에서 이곳까지 왔다면 필시 까닭이 있을터인데 말씀해주실 수 없겠소?
노도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니…』
『 감사합니다』
왕승고는 치하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 흠… 그러니까, 그때 이곳에 묻힌 백제왕의 무덤을 찾는다는거로군요?』
『 그렇습니다』
『 왕릉이라면 아무리 볼모로 잡혀왔다고 하더라도 작지는 않을터이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 찾기는 쉽지 않을터… 그렇군! 양노인(梁老人)을 찾아 물어보면 아마
단서를 얻을 수 있을겁니다』
『 그 분이 뉘신데…』
『 하하하, 그분이야말로 살아계신 전설이지요』
양노인이 살고 있는 곳은 현도관에서 삼십리쯤 떨어진 양가구(梁家口)였다.
양씨들이 모여 이루어졌다는 이 촌락은 황하의 범람을 면해 그나마 사람사는
모양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는 편이었다.
왕승고는 현령진인의 제자인 진성도인(眞性道人)을 따라 양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왜 살아있는 전설인지는 만나보니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본인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실감이 났다. 얼굴뿐 아니라 전신이 아예 주름살로
뒤덮여 있어서 고목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빛만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 백제왕의 무덤?』
『 그렇습니다! 들으신 것이 있으세요?』
진성도인이 소리를 질렀다.
『 음, 백제라구… 백제?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것 같기도 하구먼』
양노인은 입을 우물거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양노인은 문득 중얼거렸다.
『 맞아. 그때 할아버님이 말씀하셨던 그곳인갑네.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서 머리를 동북쪽으로 향했다는 이방인 왕… 맞아, 맞아 그런갑네』
『 그곳이 어딘지 아세요?』
진성도인이 다시 고함을 쳤다.
정신이 그런대로 또렷하다고 하지만 귀가 제대로 안들려 이렇듯 소리를 쳐야 하는
것이다.
『 응? 거기? 그건 양소이(梁少二)가 알걸?』
몇번 소리를 지른 다음에야 양노인이 한 말이었다.
양소이를 찾아보니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 대체 저 노인은 나이가 얼마나 된걸까?』
진성도인의 말에 양소이, 지금은 양이노라고 불리는 그는 이빨빠진 입으로
흐물거리며 웃었다.
『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분이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소, 그려…』
일은 뜻밖에도 쉽게 풀리는 듯 했다.
왕승고가 현도관을 찾은 것은 귀왕혈의 총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난날
앙천사독이 죽으면서 한 말이 그것이었으므로.
절차가 필요했었다.
망산(邙山)은 낙양의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북망산(北邙山)이라고 불린다. 북망산이 죽음의 대명사가 된 까닭은
동한(東漢)이래, 성탕(成湯), 한의 광무제(光武帝), 당명황(唐明皇) 등의 수많은
제왕장상(帝王將相)들의 능묘와 두보 등 명사의 무덤이 거기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둘 무덤이 늘어나자, 일반인들도 주변에 묘를 쓰기 시작하니 이른바
북망산 남록(南麓)을 뒤덮은 공동묘지는 그렇게 생겨났다. 하지만 실제로 망산의
경치는 그렇게 무덤이 즐비한 곳만이 아니다.
묘가 많다는 것은 곧 이곳의 풍수(風水)가 그만큼 뛰어남을 의미한다. 그것은
망산의 경치가 좋다는 의미임은 당연할 것이다.
왕승고는 양소이와 진성도인, 마을 장정 하나와 함께 북망산 자락에서 산자락을
가득 메우다시피 길게 늘어선 무덤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숲이 무덤을 가리고 풀이 우거져 거대한 능묘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수백년전의 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듯 했다.
『 저쪽이외다』
양소이, 현재는 양노인으로 불리는 그는 투박한 손을 들어 동북쪽을 가리켰다.
푸른 숲을 넘머 굼실굼실한 언덕들의 모습이 보였다.
『 겉보기로는 산등성이 같지만 고대의 무덤들이오. 누구건지 모르지만, 아마
저중에 하나 일건데…』
양노인의 말은 확실치 않았다.
『 우리 현도관 부근이군 그래!』
진성도인이 탄성을 질렀다.
과연 그쪽은 현도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현도관 또한 북망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양노인이 안내한 곳에는 수백기의 무덤들이 늘어서 있었다.
올망졸망… 산자락을 뒤덮은 무덤들 가운데 능선을 그리며 자리한 묘라기보다 동산
같은 무덤들이 같이 하는.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으므로 무덤으로 도배를 한 일대는 어딘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숲이 우거지고 무덤이 늘어서 있어서일까.
『 저기 있는 무덤들이 바로 중원에 왔다가 죽은 오랑캐 왕들의 무덤이라오』
양노인이 능선을 이룬 큰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랑캐 왕?」
왕승고가 어딘지 생경한 양노인의 말에 내심 미간을 찡그릴 때, 눈치빠른
진성도인이 말을 거들었다.
『 무량수불… 신경쓰지 마십시오. 양노시주야 늘상 하는 말이라 아무런 뜻없이
한것이니까요』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
스스로를 중화(中華)라 높이는 자들, 그들외에는 사방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을
다 오랑캐라 일러 동이(東夷)에,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 하여
업신여기던 그들.
「힘이다」
왕승고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오랑캐라 일컫던 몽고가 중국을 무너뜨리고 거대한 원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지배하던 동이가 쇠퇴한 것도 힘이 다해서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 여기 어디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양노인이 중얼거렸다.
그의 앞쪽으로 십여 개의 무덤이 보인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어서 과연
무덤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들. 몇 개의 석물(石物) 또한 제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반쯤 깨어져 나간 비석이 있다.
「…鎭國公 幽州… 司徒 奎…」
비석이 있다면 알아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나마 그런 형상을 갖추고 있는 비석은 몇 개 없었다.
『 이곳이 확실합니까?』
왕승고가 다짐하듯 물었다.
『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부근인건 맞아요』
양노인이 머리를 끄떡였다.
사실이건 아니건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미 기록도 뒤져본 다음이다.
소정방(蘇定方)에 의해 태자융 등과 대신 88명, 1만2천명에 달하는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온 의자왕은 병사하여 낙양의 북쪽, 북망산에 묻혔다. 현(縣)의
기록도 확인을 한 다음이었다.
우선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무덤을 파보는 것.
『 무덤을요?』
『 돈은 필요하신대로 드리겠습니다』
왕승고의 말에 양노인이 눈이 둥그래서 그를 보았다.
『 뭐, 연고가 없는 무덤이니까 상관은 없을 것 같군요. 이분 시주께서는 도굴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연고를 찾겠다는 거니까요』
옆에서 진성도인이 거들었다.
그렇게 해서 양가구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기로 했다. 그들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일거리를 잡은 셈이었으니까.
내일부터 일을 하기로 하고 왕승고와 진성도인이 현도관으로 돌아온 것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 이곳에서 발굴을 보시면 되겠군요. 묘하게도 바로 저 능선 너머이니…』
진성도인의 말에 왕승고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현도관은 규모는 실로 작지 않았다.
전원(前院)과 중원(中院), 후원(後院)을 합하면 상당한 규모라 할 수 있었다.
시장바닥처럼 사람들이 몰려드는 수재민 구휼은 전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중원과 후원은 수도원의 면모를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중원은 참배자들을 받지만, 후원은 도인들 외에는 접근할 수가 없어 수도에만
전념케 되어 있다.
왕승고가 묵고 있는 곳도 중원이었다.
『 찾으셨습니까?』
왕승고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관주인 현령진인이 그를 찾아왔다.
『 그렇게 되어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왕승고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현도관에서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 무량수불…, 무슨 말씀을, 얼마든지 묵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돕도록 하지요』
사람좋게 웃어보이고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고 있는 왕승고의 눈빛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과연 이곳이 귀왕혈과 같은 살인마들의 집단과 관계가 있을까.
한마디로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죽기전, 그것도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남긴 앙천사독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확인을 해볼 일만 남은
셈이다.
왕승고는 지난 며칠간 현도관에 머물면서 현도관의 내부 사정을 알아둔 터였다.
이제는 움직일 때가 되었다.
* * * 구대부인의 앞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정규(丁珪).
신력대도(神力大刀)라는 별호를 가진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남로총탐과 함께
왕승고를 보호하기 위해서 황산으로 갔다가 길이 엇갈려 그를 보호하지 못했었다.
만금전장을 기반으로 하는 그녀의 세력, 상계(商界)의 힘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일들을 위해서 그녀는 따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호위대(護衛隊)라 불리는 그 힘은 다섯갈래로
나뉜다. 중앙, 곧 그녀를 따르며 지키는 힘과, 그녀가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리는 동서남북의 사로총탐(四路總探)이 그것이다.
따로 오로순행조(五路巡行組)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장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금전장이라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들이 모르는 또 다른 얼굴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세상에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 낙양 방면?』
구대부인이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개봉에 나타나셨을 때의 옷차림 등을 추적해본 결과, 처음 경사에
나타나셨을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행로로 본다면 주공께서는
지금쯤 낙양에 계셔야 할 듯합니다』
남로총탐이 말했다.
『 정말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무예수련자처럼 각지의 고수들과
무공을 겨루면서 북상을 했다고?』
『 그렇습니다』
남로총탐이 고개를 숙이자 구대부인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들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구대부인은 곤혹스러웠다.
왕승고에게 생긴 일은 기실 너무도 굴곡이 심하여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만금전장의 모든 힘을 경주하여 왕승고의 종적을 찾아내는 것은 성공했다.
이제 찾을 일만 남은 셈이다.
『찾아내도록.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할테니까 지금 즉시
낙양으로 가도록해라』
『명심봉행!』
정규와 남로총탐 유승룡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떠나고 난 다음, 구대부인은 한동안 깊게 의자에 묻혀 있었다.
생각 같으면 한달음에 낙양으로 같이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천하의 정세는 점점
급박해가고 있어 자신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승고의
움직임에는 무엇인가 뜻이 있을 듯 했다. 뒤를 쫓기보다 일단은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한참을 그렇게 골몰하고 있던 구대부인의 미간이 문득 찡그려졌다.
『설마…?』
그녀의 뇌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누가 청부를 한 것인지는 그들을 쫓으면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숨을
쉬는 한은, 귀왕혈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두고 보지 않겠습니다-
『맙소사!』
구대부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밤이 되었다.
그처럼 북적거렸던 전원의 소란도 이제는 잠잠하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시작하겠지만….
저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고 난 다음, 왕승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중원에 위치한 객사.
그 끝방에 자리한 왕승고는 이곳에 묵은 지난 이틀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만에 하나 이곳이 정말 귀왕혈과 관계가 있다면, 정말 이곳이 귀왕혈의 총단이라면
외인인 자신이 이곳에 묵고 있는 이상 감시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깥 출입이라고는 어젯밤 달구경을 하는양, 주변을 조금 거닌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후원 일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를 정돈한 왕승고는 창문을 열고 소리도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마침 달이 구름 속에 숨어 일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소리도 없이 왕승고의 신형이 어둠을 가르며 담장을 넘어 후원으로 들어갔다.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옥황전(玉皇殿). 바로 옥황대제를 모신 곳이다.
대부분의 도교가 상청궁(上淸宮)이나 태청궁(太淸宮) 등을 정전으로 한 것에 비해
생각한다면, 이 현도관이 원대에 만들어져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승고는 담장 밑에 몸을 숨긴채 옥황전을 바라보다가 사람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옥황전의 뒤로 돌아갔다. 후원은 망산의 숲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어
대단히 넓었다.
잠시 옥황궁을 바라보고 있던 왕승고는 옥황궁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정전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 흔적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반시진가량을 돌아다녀도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을 잡거나, 건물 안을 조사해볼 수밖에 없겠다」
내심 중얼거리던 왕승고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림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후원으로 날아들더니 빨려들 듯이 옥황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신법이 아니었다.
왕승고의 신형도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옥황전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이 있었다.
조금 높긴 했지만 경공을 시전하여 솟아올라 창턱을 가볍게 짚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간단했다. 쉽게 말하면 한손으로 창문에 매달려 있는 형상.
누런 대황초.
팔뚝만한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검은복면을 한 사람 하나가 옥황전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걸친 것도 검은 야행의(夜行衣). 등에는 검을 한자루 메고
복면속의 눈길이 날카롭다.
그 눈은 무엇인가 쫓기는 듯 불안한 빛으로 주위를 쓸고 있었다.
『 무슨 일인가?』
낮은 음성이 들렸다.
「현령진인!」
왕승고가 나직이 신음했다.
복면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현령상인이라 높임받는 현도관의
관주인 현령진인이었다. 그는 복면인을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잘
아는듯한 몸짓.
『 쫓기고 있소!』
복면인의 말에 현령진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 그렇다고 이리 온단 말인가!』
『 흥! 당신이 나를 문책하겠단 말인가?』
『 이곳은…』
불끈하여 말을 하던 현령진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낮게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
『 어서 저리가시오! 누가 왔소!』
현령진인의 말에 복면인이 훌쩍 몸을 날려서 옥황상제상의 뒤로 날아 들어갔다.
영교(靈巧)한 신법이라 번쩍 하는 사이에 모습이 사라질 정도.
「이곳에 감시자가 있었단 말인가?」
왕승고는 내심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창턱에 손을 걸고 있는 곳은 노송과 잣나무가 어우러진 곳이라 묘하게 눈에
잘 띄지 않은 형세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감시자의 눈에 띄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주위에 눈을 돌리는 사이에 옥황전 앞으로 서너명의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장검을 빗겨든 삼엄한 기세.
그들은 옥황전의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보자 두명이 주위를 경계하고 앞선 청.백의
두 사람이 옥황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무슨 일이시오? 시주들은 뉘신데 이 야밤에 본관으로 검을 들고서 난입한
것이외까?』
옥황상제의 신상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던 현령진인이 노기에 찬 표정으로 꾸짖자,
옥황전의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일순 흠칫하는 빛이었으나 옥황전의 안을
살피는 눈길은 여전했다.
청의인이 현령진인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 우리는 귀왕혈의 살수를 추격하고 있는 구파연합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사에서부터 귀왕혈의 오대천왕중 하나인 냉혼사왜(冷魂死娃)를 추적해왔습니다』
『 귀왕혈? 그것이 무엇이오?』
현령진인이 되물었다.
그렇게 나오자 청의인은 일순 말문이 막히는 듯 했다.
『 누구를 왜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신성한 도량(道場)이오! 이런 곳에
그것도 야밤에 검을 빗겨들고 난입을 하다니, 당신들은 법도 없단 말이오?』
현령진인은 더욱 노기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때였다.
『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군!』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천천히 옥황전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황색무복에 얼음조각 같은 얼굴.
서른이나 되었을까. 한손에는 검을 들고있는 그의 전신에는 나이답지 않은 묘한
기운이 서릿발처럼 어려있었다.
『 자대협(紫大俠)…』
그가 나타나자 앞서 들어왔던 두 사람이 그에게 포권을 하면서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켰다.
「냉면검신 자의후!」
암중에 그를 본 왕승고의 눈에 빛이 일어났다.
지난날 그를 구해주었던 바로 그 냉면검신 자의후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일년여의 시간이 지났어도 그의 기태는 여전했다. 냉오(冷傲)한 모습.
『 무량수불… 무슨 말씀이시오?』
현령진인이 미간을 굳히며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슈팟!
밤하늘을 달리는 번갯불 같은 검광이 자의후의 손에서 뻗어나와 현령진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너무도 창졸간의 일인지라 어떻게 피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 어헉?!』
다급한 외침. 급격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서릿발 같은 검빛이 흘렀다.
검.
서늘한 검기를 흘려내는 자의후의 검은 금방이라도 현령진인의 목을 꿰뚫을 듯이
그의 목젖에 겨누어져 있었다.
너무 창졸간의 일인지라 피할 수도 없고 피할 능력도 없는지라 그대로 당한 그의
눈은 노한 빛으로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자의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짓이오?』
『 어디 있소? 냉혼사왜』
자의후가 싸늘히 물었다.
그의 검끝이 진동하자 현령진인 목젖의 살갗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렀다.
『 자대협!』
주춤 현령진인이 물러나는 것을 보자 앞서 들어온 청의인이 만류했다. 구대문파가
무단으로 그것도 남의 도관에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말이 퍼진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 부인한다면 목이 날아간다. 무공을 모른다는 말은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 ……』
『 무공을 모른다면 이렇게 고스란히 당할 리가 없지. 태연히 서서. 그리고 무공이
약하다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일텐데, 피할 수 없음을 보자 그대로 서서 자신의
목에 검이 들어오는데도 그 검끝을 보았다. 그런 정력(定力)을 가진 사람이 무공을
모른다고? 호오, 도력(道力)이 높으신가?』
싸늘히 웃으며 자의후가 검을 들자 피가 흐르고 고통스러운 빛이 현령진인의
얼굴에 스쳐갔다. 주춤, 현령진인이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자의후가 말한 것은 얼핏 듣기에는 쉬운 듯 하지만 기실은 비할 바없이
세심한 마음씀이 없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의 마음씀은 실로 세심하기 이를데 없구나. 그저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암중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왕승고는 내심 고개를 끄떡였다.
『 빈도가 무공을 지니고 있든 없든 그게 당신들이 이곳에 난입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소?』
자의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 무공을 지닌 사람이 귀왕혈을 모른다고?』
『 빈도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하오?』
일순, 자의후의 말문이 막혔다.
『 빈도는 황하의 이재민을 구휼하기에 필생의 힘을 쏟고 있소. 일신에 비록
약간의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무림중의 일에 상관치 않은지 이미 오래. 대체 무슨
일로 이런 짓을 한단 말이오? 만약 여기 누가 숨어 있다면 찾아보시오. 그럼 되지
않겠소?』
그의 어조는 당당했다.
자의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청, 백의 두 사람이 바람처럼 옥황전으로
흩어졌다.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검을 거둔 자의후가 수색을 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기는 마찬가지.
「어디로 간걸까?」
그 광경에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히 아까 복면인이 옥황상제상의 뒤로 숨지 않았던가.
『 이제 만족하시오?』
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누르며 현령진인이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 죄송…』
청의인, 화산파의 후기지수중 손꼽힌다는 일지검(一指劍)이 말을 하려는데
자의후가 손을 들어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싸늘한 빛으로 잠시 현령진인을
쏘아보다가 문득 다시 몸을 날려 옥황상제상의 뒤로 날아갔다.
그가 신감(神龕)안에 안치된 신상의 뒤를 주의깊게 살피는 것을 보자 현령진인의
얼굴에 짙게 노기가 드리웠다.
『 보자보자 했더니 이젠 상제까지 욕을 보이니 빈도가 더 이상 참지 못한다 하여
뭐라 할 수 없으리라! 물러나지 못할까!』
그가 노호를 터뜨리면서 몸을 날렸다.
『 잠시만 손을!』
화산의 일지검과 영롱검(玲瓏劍)이 동시에 소리치면서 날아올랐다.
파파팟!
세찬 경기의 부딪힘 소리.
펑!
동시에 옥황상제상의 뒤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 무슨 짓을 하는게냐!』
느닷없이 들려온 폭음에 놀랐던 현령진인은 자의후가 옥황상제상의 뒤에서 공력을
돋우어 옥황상제상을 후려치는 것을 보자 천둥처럼 노해서 그를 덮쳐갔다.
원래 그 폭음은 자의후가 옥황상제상을 치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일지검과 영롱검은 일시지간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해 주춤하다가 그를 놓쳤다.
『 물러가!』
냉랭한 음성.
자의후는 현령진인이 그를 향해 덮쳐오는 것을 보자 손을 떨쳤다. 번갯불 같은
검광이 덮쳐오는 현령진인에게로 쏘아갔다.
허공에 뜬 상태다.
거기에 날아오는 사람에게 뻗어나간 쾌검(快劍)!
속도에 속도를 더한 것과 같았다.
현령진인은 대경실색하여 허공에서 몸을 차돌리면서 질풍과 같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자의후의 검을 향해 연달아 삼장을 쏟아냈다.
스파파-팟!
장세가 크게 일어나면서 한 순간에 세 번의 격돌이 허공에 뜬 현령진인과
자의후간에 일어났다. 검이 뛰놀고 장세가 파도처럼 변화하는 찰나지간.
「그의 무공이 저처럼 높은 것을 내가 몰라봤었구나…」
그 광경을 보면서 왕승고는 내심 현령진인에 대해서 감탄했다.
원래 자의후는 적당의 종적을 찾지 못하자 일단은 그대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문득 전해진 전음지성(傳音之聲).
누가 옥황상제상의 뒤에 숨었다는…
그것이 그가 옥황상제상을 다시 살펴보게된 이유였고, 그 전음지술을 펼친 사람은
왕승고였다.
왕승고가 누군지 자의후는 알 리 없다.
하지만 이 마당에 누가 장난을 할 리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그는 세심하게 옥황상제상의 뒤를 살피자, 과연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상의 등쪽이 이상하리만큼 깨끗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부지런한 자들이
모인 곳이라 할지라도 깨끗하다면 전체가 같아야 한다.
그런데, 달랐다.
등쪽만 유달리 깨끗했다.
그리고 그는 그 신상의 등 아래 바닥에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었다.
신상에는 비밀통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신상을 치게 된 이유였다.
그의 일장에는 거의 천근의 힘이 있는지라 제아무리 신상이 튼튼하다 할지라도
파탄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등쪽이 약간 우그러들면서 통로의 틈새가 조금
벌어진 것이다.
쾅!
그가 다시 손을 들어 옥황상제의 신상을 쳤고, 그러자 신상은 금방이라도 단위에서
굴러떨어질 듯이 흔들거렸다.
그것을 보자 현령진인은 대로하여 그를 덮쳐가면서 고함쳤다.
『 현도관의 제자들은 목숨을 다하여 악도들을 처단하라! 상제를 수호하라아!』
그는 이미 자의후의 검세가 무서운 것을 맛보았으므로 수중에 들고 있던 불진에다
공력을 주입하였다. 그러자 은사불진(銀絲拂塵)의 가닥가닥이 모조리 철사와 같이
빳빳하게 일어나 자의후를 덮쳐갔다.
『 바보 같으니, 이런 짓이 스스로의 정체를 폭로함을 모르는 모양이군!』
자의후가 코웃음치자, 그의 말에 현령진인은 흠칫했다.
순간, 자의후는 무서운 기세로 일검을 찔렀다.
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불진이 이발하듯이 잘려 허공으로 뿌려졌다.
『 윽!』
현령진인이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자의후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않고
계속해서 그를 따라가면서 공격해갔다. 그 속도의 빠름은 과연 놀라울 정도라 그의
별호에 검신이란 소리가 왜 붙었는가를 능변(能辯)하고 있었다.
쾅! 펑, 퍼펑!
그 순간에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문짝이 떨어지고 창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옥황전 안으로 사람들이 날아들었다.
도복(道服)을 입은 도사.
그들이 하는 일은 복을 빌고 제를 올리며 도(道)를 닦는 일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렇지 않았다. 창문을 부수면서 나타난 도사들은 수중의 검으로
질풍처럼 자의후와 그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 결코 약자가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의후를 향해 좌우에서 날아든 검은 셋.
그대로 현령진인을 공격한다면 그를 일패도지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도 온전하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
찰나.
『 흥!』
자의후의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졌다.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신형은
휘청하는 사이에 좌우에서 달려드는 검을 스쳐보내면서 허리를 틀었다. 손에 들린
검이 반원을 그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여 마치 버들이 휘청이는 것 같다.
일순간 뒤로 물러난듯한 자의후가 있던 자리를 검이 스치고 지나는 순간에
자의후의 검이 달무리와 같은 검기를 뿌리며 그 자리를 휩쓸었다.
쨍! 쨍그렁!
으악!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뒤를 이었다.
피보라가 피어났다.
달려들던 도사 셋중 하나가 검을 놓치면서 쓰러졌다. 주춤 물러나는 도사 둘의
눈에 깃들인 것은 경악(驚愕).
그틈에 현령진인은 절반은 잘려나간 수중의 불진을 세차게 휘둘렀다. 일진 광풍이
일어나면서 옥황전의 내부가 일시에 암흑천지로 화했다.
옥황전을 밝히고 있던 촛불을 모조리 꺼버린 것이다.
날카로운 웃음소리.
검과 검이 부딪는 소리.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어둠 속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찾아든 침묵.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탁탁!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다시
옥황전의 안에 불빛이 살아났다.
자의후가 옥황전의 가운데 검을 빗겨들고 우뚝 서 있는데, 그의 좌우에는 예의
일지검과 영롱검이 각기 검을 뽑아들고서 눈을 빛낸다. 불을 켠 것은 영롱검인 듯
했다.
그들의 좌우에는 도사 차림을 한 세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현령진인의 모습은 없었다. 더구나 방금 옥황전 안으로 날아들었던
도사들은 모두 일곱명이나 되었다.
『 어디로 간거지?』
일지검과 영롱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교토삼굴(狡토三窟)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여우굴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지!』
자의후는 냉소를 치곤 천천히 진기를 한입 들이마셨다. 다음 순간, 그는 나직한
기합과 함께 옥황상제의 신상을 향해 일장을 쏟아냈다.
쾅!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신상이 부서져 퉁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통로. 아래로 뚫린 통로에는 사다리가 걸려 있었다.
『 정말 비밀통로가 있군!』
일지검과 영롱검이 신음했다.
『 신호를 보내 추적대를 이곳으로 부르시오』
말과 함께 자의후가 훌쩍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자, 자대협!』
그가 혼자 통로로 들어가 버리자 일지검등이 당황해 소리쳤다.
『 표식을 남길테니 사람들이 당도하면 뒤를 따르시오!』
은은히 들려오는 자의후의 말소리.
이미 앞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도대체 겁나는게 없군……』
일지검이 고개를 흔들었다.
『 강호출도이후, 불패라는 신화는 거저 이루어진게 아니지. 그에게는 자격이
있으니까. 자, 어서 나가서 신호를 보내야지!』
두 사람이 옥황전의 바깥으로 나가자 그 자리에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의후가 사라진 통로를 잠시 보다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 있는 기둥으로 가 촛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옆에 있는 제단의 뒷벽이 갈라지면서 한 사람이 들어갈만한 문을
드러냈다.
왕승고는 망설임없이 그 문으로 몸을 날렸다.
문은 다시 소리도 없이 닫혔다.
내부는 정말 어두웠다.
아니, 칠흑처럼 캄캄했다.
만약 그가 운무곡에서 생활하면서 남과 다른 눈을 갖게 되지 않았다면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무가(武家)에서 이야기하는 허실생동(虛實生同)이나 천시류(天視類)의 신공은
아니지만 실상 안개속을 뚫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은 그에 못지 않는
능력인지라 옥황전이 어둠에 묻히게 되어도 모든 상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현령진인등이 자의후가 들어간 비밀통로가 아니라 이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들어 온 것이다.
왕승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눈이 밝다고 해도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비밀통로는 이삼장 가량 너비였다가 급격하게 밑으로 기울어졌다. 계단이 있었다.
뜻밖에도 계단의 수는 놀랍게도 많았다. 열개, 스무개가 될 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백개가 넘어가자 경악을 금치 못할 수밖에.
그렇게 칠흑같은 어둠의 계단을 한참이나 짚어 내려갔을 때 한줄기 빛이 나타났다.
계단의 끝이 보였다.
아주 희미한 빛이 통로의 끝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제 열 서너개 정도 남은 계단의 끝은 사방 일장 가량의 석실. 거기에 이어진
통로에서 희미한 불빛이 스며나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다.
왕승고가 디딘 계단이 덜컹! 소리와 함께 뒤집어졌다.
『 앗?』
부지중에 튀어나오는 경악의 외침.
동시에 발을 디딜 곳이 사라져버렸다.
십여개에 이르던 계단이 모조리 밑으로 꺼져 내린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함정.
뿐만 아니었다.
계단이 뒤집어짐과 함께 천장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창날! 장정 두어 사람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할 통로.
거기에 발 아래는 함정이고 천장에서는 창이 쏟아져 내려오니 이거야말로 죽음의
함정이 아닐 수 없었다.
찰나지간, 왕승고의 신형이 앞으로 훌쩍 날면서 뒤집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산에서 들고 온 목검.
따따-땅!
묵직한 음향과 함께 쏟아져내리던 창날이 목검에 그대로 퉁겨져나갔다. 하지만
그로 인해 허공에 뜬 신형이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
막 함정 속으로 몸이 추락하는 순간에 왕승고는 발로 벽을 차면서 그 반동으로
몸을 날려 함정을 날아넘어 통로의 끝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막 거기에 내려서려던 왕승고는 얼핏 시야에 들어오는 바닥을 보고는 안색이
돌변했다.
촘촘하게 박힌 바늘방석.
바늘 하나의 길이가 한치반이고 너비가 일촌에 이르는, 사실상 단검과 같은 창날이
거기 깔려 있었던 것이다. 끝이 녹광으로 음산히 번뜩임은 거기 독이 칠해져
있음을 의미한다.
순간, 왕승고는 수중의 목검으로 바닥을 찍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신룡어운(神龍御雲)의 신법으로 한덩이 구름과 같이 그곳을 벗어나 통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사람의 방심을 이용하여 함정을 설계한 자의 능력은 간단치 않았다.
누구라도 지겹게 내려오던 암흑의 계단이 끝나고 불빛이 보인다면 경계심을 풀
것이기 때문이다. 함정은 바로 그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설계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계단의 끝인 석실이 십여장이나 되게 넓었다면 정말 간단치 않은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너무도 찰나간에 벌어진 위기상황.
정신이 번쩍 난 왕승고는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에 바닥에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목검으로 바닥을 짚고서 신형을 허공에 띄운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통로가 앞으로 쭉 뻗어 있는 모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비는 장정 서넛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제법 넓었다.
빛의 발원은 벽에 걸린 등잔이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왕승고는 별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바닥에 내려섰다.
그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자들이다」
지하에 이렇게 거대한 통로를 만들고 함정을 설치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과 돈이 투자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통로에 자리한 이끼나 모양으로 볼 때에 이 지하통로는 어제 오늘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던 것이다.
더더구나 통로는 흙벽을 뚫은 것도 아니었다. 청석을 잘라 만들어 견고하기 이를데
없었다.
통로의 길이는 여덟 장 정도.
그 끝에는 사방 서너 장 정도의 너비를 가진 석실이 하나있고 거기서 통로는 세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가 그 자리에 들어선 순간.
스팟!
소리도 없이 좌우에서 습격이 이루어졌다.
흑의에 복면.
손에 든 길지 않은, 약간은 휘어진 검.
바로 귀왕혈 살수들의 모습이다.
『 제대로 찾아왔군!』
이미 숨결을 감지하고 있던 왕승고의 입에서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붕!
목검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땅! 따당!
『 큭!』
단 일합으로 상황이 끝이 났다.
그를 습격한 것은 복면인 둘.
하지만 그들이 왕승고를 공격했던 검은 왕승고가 휘두른 목검에 어이없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퉁겨져
나가떨어졌다.
귀왕혈에 대해서는 사정을 두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였다.
검은 자위조차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뜬 그 착했던 부용이의 참혹한 마지막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다.
『 귀왕은 어디 있나?』
왕승고가 목검을 쓰러진 복면인의 목에다 겨누고 물었다.
『 ……』
왕승고를 쳐다보던 복면인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신에 일어나는 경련.
『 이럴 수가?』
왕승고가 그의 복면을 벗기고는 신음했다.
그의 칠공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독혈(毒血).
짐작컨대 입안에 숨기고 있던 독을 깨문 모양이다. 적을 죽이지 못하고 상대의
수중에 떨어지면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이 살수의 업(業). 그런 면에서 과연
이자들은 귀왕혈다웠다.
눈앞에 나타난 세 갈래의 통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문득 은은히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운데! 소리에 귀를 기울인 왕승고는 주저없이 가운데 있는 통로로 몸을 날렸다.
통로의 형태는 여일했다.
그리고 벽에 등잔이 걸려있는 모양도 같았다.
하지만 너무 같아서 과연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미 두 번의 습격이 통로를 달리면서 있었다.
쉬쉭! 왕승고가 통로에 들어 십여 장을 달렸을 즈음, 그를 향해 암기가 벌떼처럼
날아들었다.
비황석(飛蝗石)이나 수리검(袖裏劒) 따위의 큰 암기가 아니라 독질려(毒▦藜)나
독침(毒針)류의 방비하기 힘든 암기였다. 방비하기 힘든 암기를 쓴다는 것은
상대가 고수라는 의미.
왕승고는 목검으로 검풍(劒風)을 일으켜 암기를 쳐냈다. 그리고 신형을 벽에
붙이며 질풍과 같이 앞으로 전진했다.
눈앞에 통로의 끝이 나타났다.
쇠창살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쇠창살문 뒤에는 세명의 흑의인들이 놀란 빛으로 왕승고를 보고 있었다.
『 웬놈이냐?』
흑의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 귀왕을 만나러 왔다.』
쇠창살에 가로막힌 왕승고가 말했다.
얼른 보아도 굵기가 한주먹은 되어보인다.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관문이 아니었다.
『 구대문파냐?』
미처 대답을 하기 전 덜컹! 하는 음향이 뒤에서 들려왔다.
쇠창살이 떨어져 퇴로를 가로막은 소리였다.
그때, 왕승고의 목검이 날아 쇠창살을 쳤다.
땅! 쇳조각이 날았다.
『 세상에!』
경호성이 터지면서 왕승고를 향해 암기가 날아왔다.
손을 떨치자 검풍이 다시 일면서 암기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놀람에 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튀어나간 암기가 암기를 쏘아낸 자들에게 다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그틈을 타서 왕승고의 목검이 다시 쇠창살을 쳤다.
땅!
그러자 쇠창살문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며 활짝 열어제쳐졌다. 쇠창살이 끊어져
나간 것이 아니고 문을 잇고 있는 이음새를 왕승고가 검력(劒力)으로 끊어 버렸기
때문에 문이 절로 열린 것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그처럼 간단한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왕승고가 바람처럼 안으로 짓쳐 들어가자 주춤, 놀랐던 흑의인들이 고함을 치면서
공격해왔다. 귀두도(鬼頭刀)에 귀왕혈 특유의 귀왕검(鬼王劒)이 어우러진 공격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왕승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의 목검이 장강대하와 같은 검세를 쏟아내자 그들 모두는 신음과 함께 무기를
놓치고 나뒹굴고 말았다.
『 귀왕은 어디 있지?』
왕승고가 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에게 다시 물었다.
목을 움켜쥐면서 진력을 가해 전신의 기력을 빼버린 상태로 설사 입안에 독약을
물고 있다고 할지라도 깨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왕승고를 쏘아볼 뿐이었다.
첫마디에 대답을 들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고문을 가한다던지
할 필요도, 여가도 없었다. 그 순간에 뒤에서 덮쳐오는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왕승고는 몸을 돌리면서 멱살을 쥐고 있던 흑의인을 그대로 뒤로 쳐냈다.
『 으아악!』. 비명.
그리고 피가 피어났다.
몸을 돌린 왕승고의 앞에는 두 사람의 흑의인이 황당한 빛으로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전신이 절반쯤 만신창이가 된 예의 흑의인이 피바다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곤 손에 든 검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숨을 끊은 흑의인이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 잔인한 놈이로군. 누구냐?』
무게가 틀린 것이 통로를 경비하는 자들 수준이 아닌 고수가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제 상대의 중심부에 가까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승고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에 그자와 옆에 선 자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질풍처럼 그를 덮쳐왔다. 원래 그와 그자들간의 거리는 칠팔 척에
불과했었다. 더구나 그들은 살수로서 상대의 빈틈을 노림이 일신 재간의
본령(本領)이라, 원래부터 왕승고의 허점을 노리고 말을 시킨 것이어서 이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 흥!』
왕승고의 입에서 냉소가 터짐과 함께 그의 목검이 앞으로 무찔러갔다.
그의 목검이 상대와 부딪히는 순간, 땅땅!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검이
튀어나갔다.
왕승고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지하통로에 들어온 이래, 그의 일검을 받아내는 자들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들은 왕승고의 무기가 목검인 것을 보자 그가 감히 자신의 검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정면으로 맞설뿐 아니라 자신들의 검을
퉁겨내 하마터면 검을 놓칠뻔 하게되자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어찌 왕승고의 수중에 들린 침향목검이 수백년이나 압력을 받으면서 굳어져
쇳덩이와 같음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의 일신에 서린 내력(內力)이 잇단 간난환고(艱難患苦)를 겪으면서 이미
젊은층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있음을……
『 너희들을 처리하면 귀왕이 나타나겠군!』
왕승고는 냉소하면서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 순간, 통로를 밝히고 있던 불이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사방이 칠흑같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휙휙휙-
불이 꺼지자마자 벽으로 몸을 붙인 왕승고. 그가 서있던 곳으로 암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세차다.
한데 섬뜩한 느낌이 등으로 파고듦은 왜인가?
왕승고는 빙글 몸을 돌리면서 벽을 향해 일장을 쏟아냈다.
팡!
『 으악!』
비명이 터졌다.
돌조각이 날아가면서 왈칵 일어나는 피비린내.
왕승고의 뒤쪽 벽에 붙어 있던 흑의인 하나가 피 곤죽이 되어 왕승고의 발밑으로
나뒹굴었다.
왕승고는 등을 누른채 미간을 찡그렸다. 고통이 스며들었다. 어이없게도 상대는
벽에 잠복해있었다가 벽에 기대는 그의 등에다 단도를 박아넣은 것이다. 등을 타고
선혈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그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단도는 그의 배를 뚫고 나왔을런지도 몰랐다.
『 흐흐흐흐…… 질긴 놈이로군! 하지만 이젠 네놈도 끝이다. 그 단도에는
황소라도 즉사시킬 수 있는 단혼산(斷魂散)이 묻어 있으니까』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대가 불을 끈 것은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불이
꺼지면 벽에다 등을 붙일 것이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암기까지 날린
상대였다.
왕승고는 상대의 위치를 가늠한 다음에 바닥을 박찼다.
목검이 어둠을 갈랐고, 놀란 상대의 외침이 뒤를 이었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그의 비명이었다.
뒤이어 다시 다른 한명에게서도 비명이 터졌다.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각파의 무공이 도도하게 펼쳐지는 그의 검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 어, 어떻게? 독이……』
『 어, 어떻게? 독이……』
50대의 흑의인은 눈을 부릅뜬채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슴을 부여잡은채
거꾸러졌다.
그를 쓰러뜨린 왕승고는 암암리에 선채로 운기조식하였다. 중독된 증상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등, 거의 옆구리에 가까운 곳에 난 상처에서는 통증이
느껴질 뿐 중독의 징후는 없었다.
목우충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왕승고의 체내에 있던 독기는 해소되었다. 그것은 이제 그를 중독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강한 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왕승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앞쪽에서 싸움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얼마전에도 들렸던 소리다. 여기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자의후외에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 으악!』 비명(悲鳴).
쨍! 쨍그렁……
검이 날고 피가 튀었다.
이미 수많은 주검이 그의 발 아래 누었다.
자의후는 악령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가히 검신과도 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광이 어둠을 뚫고 빛줄기와도 같이 뻗어났고, 그때마다 거기에 부딪힌 검들이
토막으로 부러져나갔다.
마침내 그를 덮치던 자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자의후는 천천히 검을 흔들었다.
아주 미묘한 손짓.
검끝을 타고 선혈이 흩뿌려졌다.
그의 앞에 있는 자들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오름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의
숫자는 열 둘 정도. 그 앞에 쓰러진 서른이나 되는 숫자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다.
이미 다섯군데나 되는 상처를 입고 있었고 그중 두어곳은 상당히 깊어 선혈이 그의
옷을 혈의(血衣)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라면, 이 지하통로가 아니었다면 이런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지하대전의 모습이 보였다.
너비는 사방 십장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규모.
중앙에 귀왕전(鬼王殿)이라는 편액이 선명했다.
마침내 그는 귀왕혈의 본거지, 그것도 중심부에 도달해있는 것이다.
『 몰살 당하고 싶지 않다면 귀왕을 나오게 해라』
자의후가 냉전(冷電)과 같은 시선으로 흑의인들의 뒤를 쏘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흑의인들의 뒤에는 그에 쫓겨서 달아난 현령진인과 냉혼사왜가 귀왕전이라는
편액의 아래에 서 있었다. 그 뒤는 늘어진 휘장으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 당신은 구파와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 귀왕혈과
적대시하는 것이지?』
냉혼사왜가 싸늘히 소리쳤다.
『 네가 나에게 그것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자의후가 코웃음을 쳤다.
『 흥! 곧 죽을 주제에 큰소리는……』
『 너희들이 쓰는 그따위 독에 쓰러질 나라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냉소하면서 자의후는 검을 들어 냉혼사왜를 겨누었다. 검기가 엄습함을 느낀
냉혼사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였다.
『 과연 냉면검신…… 세간의 소문이 과장이라고 했더니 결코 과장이 아니로군』
갑자기 음산한, 듣기에 묘한 여운이 남는 음성이 웅웅거리면서 들려왔다.
휘장에 가리워진 악마상. 말소리는 휘장 뒤, 기괴한 모습으로 자리한 제단 위에
모셔진 악마상에게서 흘러나왔다.
어둠에 잠긴 제단의 높이는 일 장여…….
『 내 앞에서 귀신놀음으로 겁을 줄 셈인가?』
자의후가 냉소를 터뜨렸다.
『 으흐흐흐…… 일개인의 힘이 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한손으로 두손을 이길
수는 없다. 네가 기다리는 구파고수들은 오지 않아. 통로는 이미 폐쇄해
버렸으니까. 으흐흐흐…… 혹 모르겠군. 너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을런지는……』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동시에, 쿵쿵! 소리가 나면서 자의후가 들어왔던 통로에 석문이 떨어져 내리며
퇴로가 차단되었다.
그것과 함께 뭉클거리면서 제단 앞에 놓여진 커다란 향로에서 기괴한 분홍빛
향연(香煙)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부골소혼향(腐骨消魂香)이다. 들어본 적 있나?』
자의후의 안색이 굳어졌다.
『 제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숨을 쉬지않고는 견딜 수 없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이겠지. 일단 한모금이라도 들여마시면 냉면검신 자의후의 신화는
끝이 나게 된다』
그 순간이다.
『 귀-왕-!』. 자의후의 입에서 천둥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눈부신 검광에 휩싸이면서 앞으로 벼락과 같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쨍! 쨍쨍! 쨍그렁……
『 으악!』
『 으아아아……』
검광, 도풍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자의후 앞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그를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 검이 부서지고 도가 박살이 났다.
『 신검합일(身劍合一)!』
경악한 외침과 함께 현령진인과 냉혼사왜가 한꺼번에 날아 그를 덮쳐갔다.
쨍! 째앵……
날카로운 음향이 터지면서 허공에서 불똥과 같은 검광이 대장간과 같이 튕겨
흩어지는 가운데 마침내 자의후의 신형이 땅으로 내려섰다.
그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냉혼사왜가 부르짖었다.
『 공격해! 중독되었다!』
냉혼사왜를 비롯, 현령진인과 도사 복장을 한 자 몇, 그리고 흑의인들이 노도와
같이 땅을 박찼다.
자의후의 눈빛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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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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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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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드립니다
즐독요
감사
고맙습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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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