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채의 맛이란 일월산의 산채가 천하일품
나의 식도락 / 조지훈
-산채의 맛 일월산의 산채가 천하일품
-식도락은 먹는 것보다 그 풍취에~
-은둔에의 추억과 羈旅기려의 정서~
나의 식성이 수수해서 못 먹는 음식이라곤 없다. 따라서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없으니 식도락이랄 것이 없다.어려서는 가정의
훈련으로 미식을 삼가했고, 커서는 술을 배워서 몹시 신경질이던 성격이 대범해지는 바람에 식성도 이 성격을 따라서 도무지 까다
롭지 않게 되고 말았다.덕분에 깊은 산촌의 험한 밥도 주인이 놀랄 만큼 먹을 수 있었고 유치장 밥이나 군대 밥도 애초에 불편이
없었다. 파냉국 풋고추에 꽁보리밥이나 시래깃국,된장찌개에 꽁조밥도 이따금 입맛을 돋군다. 그리고 어는 지방 어느 나라의 음식
도 음식이 맞지 않아 못 견디는 밥은 없어서 여행에는 큰 다행이었다.
20대~해방 직전 5년간은 심한 소화불량증으로 고생하느라고 서너 끼니쯤 굶는 것은 예사가 되어 산해진미를 봐도 도무지 구미가
돌지 않았으니 식도락은커녕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신경성 위胃아토니"라는 이 야릇한 병도 하루 저녁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
려 호식하는 날에는 씻은듯이 없어지고 며칠동안 소강상태가 계속되곤 하였다. 그래서 어버이께선 나에게 '기분이스트'라는 별명
까지 주셨다. 옛날 무전 여행할 땐 솔잎과 날콩으로 몇 끼니를 때울 수도 있었고, 소화불량병이 깨끗이 없어진 지금에도 두세끼
굶는 것쯤은 능히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못 먹는 음식이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으면서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음식과 달게 먹는 음식은 따로 맀다.
나의 식성은 고기보다는 생선을, 생선보다는 나물을 더 즐긴다. 이 말은 곧 내가 담박한 음식을 좋아한다는 말이 된다.
돼지고기는 그 느끼한 맛 때문에, 염소기는 노린 맛 때문에, 닭고기는 너무 약낙한 맛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돼지고기는 양념장
에 볶은 것 한 접시 정도, 닭고기는 다리나 모이집(똥꺠) 구운 것 하나쯤은 감식한다. 그러니 고기는 쇠고기 편이다. 너비아니보다
는 곱창구이, 간천엽보다는 육회, 편육보다는 마나가 좋다. 고깃국도 무, 배추에 굵은 파를 넣고 얼큰하게 끓인 국이면 한 대접은
혀를 치면서 먹는데,이것도 세 끼만 거듭 먹으면 맛이 없다. 이상한 것은 내장 곰이다. 갖은 내장에 기름치와 정육을 넣어 끓인
곰은 일주일쯤 계속해 먹어도 싫증나지 않는 것이다. 설렁탕, 해장국이 또한 그렇다. 산돼지 고기 맛이 쇠고기 다음은 간다.
노루고기, 토기고기는 별 맛이 없다. 송치(胎牛), 애저(兒猪)는 맛은 달아도 차마 쟁그라워 못 먹는다.
생선도 마찬가지다.고등어는 기름기가 많아 싫고, 잉어는 너무 달아서 좋아하지 않는다. 방어는 찜이나 구워서 한 토막, 비웃은
굽거나 된장에 넣어서 한 마리 - 그러나 요즈음 것은 비싸기만 하지 맛이 없다. 그러니 자연히 동태,가자미,조기,민어, 홍어,대구
같은 슴슴한 것을 좋아하며,굽거나 지지거나 국 끓이거나 이런 것은 다 잘 먹는다. 생선보다는 민물고기를 더 좋아하는데, 이 것도
서울 근교에서 잡은 것은 맛이 없고 흙냄새가 나기 일쑤다. 수석이 맑은 산곡의 석천에서 잡은 놈이라야 맛이 달고도 맑다. 붕어,
피라미,모래무지,쏘가리,메기,뱀장어,미꾸라지가 좋다.조기,전복,새우,게-이건 영덕, 울진 쪽의 '데게'가 제일, 서해 것은 맛이
없다- 가 또한 일미다. 김과 미역도 그렇다.
마른반찬으로는 육포,어란,낙지,명태,건대구,전복,홍합을 다 좋아한다. 그 중에도 마른 전복 큰 놈 두세 개를 깨끗이 씻어 물에
담가 하룻밤 재운 뒤에 채를 썰어 우려낸 물에다 도로 넣고 간장과 초를 쳐서 실고추,실백을 띄워 먹는 '전복채'는 풍미가 상 줄
만하다.
고기 없이는 몇 달은 지낼 수 있어도 나물 없이는 한 끼를 못 먹는다. 이른봄에 얼음을 뚫고 솟는 강미나리라든가,달래,물쑥,두릅,
도라지,고비,고사리는 끼니마다 놓아도 주는 대로 다 먹는다. 애호박 뽁음 - 이건 첫가을 송이를 넣어 볶은 끝물의 호박이 더 좋다
- 오이나 파의 장아찌 또는 냉국은 풋고추, 마늘과 함께 온 여름 내내 식탁을 떠나지 못한다. 어려서 산촌에서 자랐고 젊어서는
절간생활에 맛을 들인적도 있어 산나물 맛을 잊지 못한다. 나에게 식도락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산채를 구해다 내가 작성한
메뉴와 요리법에 의해서 만들어 먹는 일이다.실상 산채 식돡이란 도시생활에서는 돈이 더 많이 드는 경우가 있다. 철에 이른
소채를 사 먹는 것도 어떤 때는 고기 값보다 비싸니 산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산채의 맛이란 일월산의 산채가 천하일품
이른 봄부터 회나무,가죽나무,등속이 잎으로부터 밥취,머구취 따위 취나물 등 산채의 가짓수는 손을 꼽기 어려울만큼 많다.
이것들을 삶아서 참기름에 무쳐 먹는 맛, 아니면 말려 뒀다가 겨울에 국 끓여 먹는 맛은 그 향취가 천하일품이다.여러 곳 산채를
먹어 봤지만 향기로는 내 고향 日月山일월산의 산채가 제일이었다. 일월산은 한약재 산지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산채가 모두
약초다. 그 중에도 여름 한철의 당귓잎,챗물(냉국)은 인단 맛이 난다.
또 '금죽'이란 산채를 말려서 쇠고기를 다져 넣고 끓인 국은 정말 향기롭다.이 나물은 어떻게 향기가 지독한지 물에 담가서 우려
내야 비로소 알맞은 향기가 있지 그냥 끓여서는 써서 먹을 수 없을 정도다. 이것도 점점 얻어먹기가 힘들어 간다. 葦滄위창, 春谷
춘곡 두 노인이 이 나물 자시기를 원하므로 한번 가져다 드렸더니 그 선미를 감탄해 마지않으셨다. 속담에 외가가 낮아도 못 먹는
다는 씀바귀는 열이 많은 채질,봄타는 사람의 입맛을 당긴다.잘 먹는 고수(香菜향채)는 처음 먹으면 꼭 빈대 씹은 듯한 것이,맛을
들이면 어찌 그렇게 고수한지,배추에 고수를 곁들여 참기름으로 흠뻑 무친 생절이는 입맛 없는 봄철 반찬으로 일등품이었다.중국
요리에도 드는 것으로 큰 시장에 가면 살 수 있다.
식도랏은 먹는 것보다 그 풍취에~
삼월 삼진날은 제비가 오는 철이다.우리 풍속에 이 날이면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사방 문을 열어 놓고 대청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開春宴개춘연 봄맞이 잔치를 연다. 친한 벗 또는 이웃을 청해다가 간단히 차리는 까닭 없는 잔치다. 내가 한 번 이 개춘연 메뉴
를 작성한 적이 있다. 그것은 모두 소채,산채,야채,해채로서 나물과 貝類패류만으로 된 것이었다. 무,배추,시금치,콩나물,숙주나물,
도라지,두릅,고사리,냉이,씀바귀,달래,물쑥,미나리,생미역,다시마,조개,전복,해삼,게 따위를 단미 또는 두세 가지를 썪어서 만든 것
으로 미나리는 '江上春강상춘',생미역과 달래무침은 '山海菜산해채', 이런 식으로 접시마다 이름을 붙이고 진달래,개나리,버들개지
도 곁들여 운치를 돋구었다.
좋은 가양주에 가야금 한 가락 춤 한 마당까지 있으면 흥이 이에서 더함이 없었을 것이다.취옹의 뜻이 술에 있지 않다더니 나의
식도락은 먹는 맛에만 있지 않고 풍취에 있다.
이름난 향토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식도락과 강산 구경을 겸해서 별미가 있다.영광굴비 서울에 앉아서도 먹을 수 있지만,
순창고추장을 말만 들었다. 평양 냉면,전주 비빔밥은 제 바닥이라 그 맛이 헛된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성 소주,철원 약주, 김포 특주란 것도 술로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았다.찾아다니며 마신 술로는 김천 과하주,선산 약주,
문경 湖山春호산춘, 안동 소주, 경주 法酒법주가 제 이름 값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 남북을 종횡하여 못 가본 명산,대천의 나물맛,고깃맛,술맛을 볼 것이며 숨은 벗, 이름 없는 미인들은 만날 것인가.
은둔에의 추억과 羈旅기여의 정서
나의 식도락의 밑바닥에는 은둔에의 추억과 羈旅기여의 정서가 깃들여 있다. 못 먹는 것이 없고 또 별달리 치우치게 좋아하는
음식이 없듯이 경치도 그런 것이다. 아무렇게 지나다가 주막에 들여서 한잔 기울이는 술맛에 돌연 '이 것이 아니다'를 발견하는
수가 있다.
이십 년 전 일이다. 경주에 갔다가 玉山書院옥산서원에 들렸더니 거기서 젊은 초면의 벗들과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그
주막집의 안주가 가관이었다. 부엌에서 과메기(비웃 말린 것)두세 마리를 빼내 오더니 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간장에 찍어 먹
으라는 것이다. 북어 찢듯이 찢어서...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안주를 집으려는데 구더기가 몇 마리 거기서 굼실굼실 기어
나오지 않는가. 젖가락으로 집어서 마당에 팽개치고는 한 조각 뜯어서 집어 넣었다. 그 맛이 별미였다. 이것도 식도락이라 할 수
있을까.그러나 텁텁한 막걸리 맛의 운치로는 제대로 된 자연의 묘경이었다. 하하.
참고문헌:청록파시인 조지훈 수필'식도락'